소설리스트

레드 앤 매드 (167)화 (168/319)

이예주를 끌고 산장으로 들어간 남자는 부엌 찬장을 제멋대로 마구 들쑤셨다. 

그러더니 먼지가 뽀얗게 쌓인 채 구석에 놓여 있던 가죽 가방에 이것저것 담기 시작했다. 

“이, 이렇게 막 뒤져도 돼요?”

주인이 누군지도 모를 산장에 마음대로 들어온 것도 꺼림칙한데, 제 집인 양 행동하는 람 때문에 되레 하는 일 없이 그의 뒤꽁무니만 졸졸 따라다니던 이예주가 걱정이 되었다.

그는 물음에 답하는 대신 이것저것 쓸어 담은 커다란 갈색 가죽 가방을 그녀에게 확 떠넘겼다.

“윽!”

얼떨결에 남자에게 가방을 건네받은 이예주는 생각보다 묵직한 무게에 눈살을 찌푸리며 몇 발자국 물러났다.

“이걸 왜 나한테…….”

“들고 따라와.”

“이, 이걸요? 이렇게 무거운데 이걸 어떻게 들고…….”

남자에게 가방을 건네받은 그대로 어정쩡하게 선 채 그녀는 울상을 지었다. 

그러나 씨알도 먹히지 않아 남자는 엄한 표정을 짓고 혀를 찼다.

“아무리 어린 것이어도 제 밥벌이는 할 줄 알아야지.”

“아니, 제 밥벌이를 하는데 왜 짐꾼처럼…….”

“스읍, 배고프다고 꽥꽥 괴성을 지르던 건 너가 아닌가? 들기 싫으면 관둬. 굳이 나갈 필요 없겠군.”

왜 짐꾼처럼 나만 이렇게 짐을 잔뜩 들어야 하느냐고 칭얼대던 이예주는 정말 나가지 않을 태세로 뒤로 도는 남자를 보고 화들짝 놀라 외쳤다. 

“아니요! 들어요! 든다고요!” 

눈물을 머금고 무거운 가방을 끌어안았다. 이 남자는 너무 날 잘 다룬단 말이야. 배가 고파 눈이 돌아가기 직전이었기에 그녀는 기꺼이 람의 짐꾼을 자처했다. 

울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별수 없었다. 밥을 제공해 줄 사람이 빌어먹을 남자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아, 조롱이가 있었더라면 근처의 과일이라도 따다 줄 텐데. 

드문드문 느낄 수 있는 조롱이의 빈자리에 이예주는 울적한 얼굴로 남자가 던지다시피 떠맡긴 가죽 가방을 어깨 위에 둘러멨다.

“……씨잉, 그리고 내가 언제 배고프다고 꽥꽥 괴성을 질렀다고.”

“꾸물거리지 말고 빨리 오도록.”

“꾸물거리는 게 아니라 무거워서…… 아, 아니에요. 빨리 가면 되잖아요…….”

구시렁거리며 한마디도 지지 않고 덧붙이려던 이예주는 차갑게 번뜩이는 남자의 시뻘건 눈동자에 눌려 결국 찍소리도 못하고 허겁지겁 그의 뒤를 따랐다. 

산장 밖으로 나온 람은 이예주의 사정 따윈 봐주지 않고 산장 뒤로 휙휙 빠르게 걸어갔다. 

그녀는 서운함에 입술을 삐죽였다. 

참 매정하기도 하지. 

분명 어제까지만 해도 나름 연애하는 것처럼 간질간질했던 것 같은데, 왜 하루 만에 다시 주인과 노예 구도로 분위기가 되돌아간 것 같지.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그러나 이예주는 끝내 그것이 제 위장 탓이란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       *       *

산장 뒤쪽에 이렇게 울창한 숲이 우거져 있을 줄은 상상도 못했다. 

산의 중턱이라고 했으니 사방이 숲인 것은 당연했지만. 

그러고 보니 산장과 뤼미에르 꽃밭 인근은 산치고 평탄하고 광활했다. 

산이란 보통 깎아지는 듯한 절벽과 급격한 경사로로 이뤄지는 게 아니던가? 

경사로는 맞지만 거의 평평한 땅을 걷는 것과 같은 완만한 길 위를 람을 따라 걸으며 그녀는 내심 안도했다. 

뱃가죽이 등가죽에 들러붙을 지경인데 밥 먹으러 등산까지 해야 했으면 꼴사납게 울어 버렸을지도 모른다. 

햇볕 한 줌 새지 않는 가시 장벽에 꽁꽁 둘러싸여 있었지만, 숲길은 생각만큼 어둡지 않았다. 

군데군데 피어 있는 뤼미에르 꽃들 덕분이었다. 

꽃은 그렇게 많은 수가 아님에도 숲을 쏘다니기에 아무런 지장이 없을 만큼 하나같이 밝은 빛을 내뿜었다. 

인간들의 손에 그악스럽게 줄기가 꺾인 채 억지로 지하 탄광굴을 밝힐 때와는 차원이 다른 밝기였다. 

산장 앞 들판으로 가면 수천 송이의 뤼미에르를 볼 수 있지만, 이예주는 어쩐지 이렇게 은은하게 숲길을 밝히는 쪽이 더 마음에 들었다. 

왠지 더 희귀하고 희소성 있는 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뤼미에르 덕분에 이예주는 무거운 가방을 들고 걷는 고단한 산행에도 불구하고 숲 여기저기를 팔자 좋게 구경했다. 

구경할 것이라곤 별것 없었다. 

이름 모를 풀과 나무, 가끔 윙윙거리며 지나가는 쪼그만 날벌레뿐이었다. 

하지만 오랜만에 만끽하는 평화라서 그런가. 북쪽 대륙 동물의 숲에서는 그렇게 질색하던 것들이 마냥 새롭고 재밌게 느껴졌다. 

이것저것 시선을 사로잡는 것들 때문에 걸음이 점차 느려졌지만, 앞서 가는 남자와의 거리는 일정하게 유지되고 있다는 사실을 그녀는 조금도 눈치채지 못했다. 

밥을 구하기 위해 이렇게 밖으로 나와야 하는 것과, 또 밥 달라고 징징거린 제게 밥을 주려고 하는 람. 

그저 이 상황이 너무 우습고 한가로워서 이예주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한량처럼 천천히 걸어갔다. 

“비실비실 예주 돼지~ 밥 달라고 꿀꿀꿀. 엄마, 아니 람이 돼지…….”

람이 돼지 할 때 이예주는 최대한 목소리를 죽였다. 

혹시나 듣고 시뻘건 눈을 부라릴 남자가 두렵기 때문은 절대 아니었다.

“……오냐, 오오냐~ 알았다고 꿀꿀…… 푸흐.”

동쪽 대륙 마을에서 만난 마담 페니처럼 돼지 귀와 돼지 코를 하고 있는 람의 모습이 떠올라서 이예주는 어깨를 들썩이며 키득거렸다. 

그녀의 머릿속에서 돼지 코를 한 람이 돼지가 그녀에게 말한다. 

꿀꿀, 아무리 어린 것이어도 제 밥벌이는 할 줄 알아야지, 꿀꿀…….

“꾸물거리지 말고 걸으라 한 지 10분도 지나지 않았을 텐데.”

“꿀꾸르악!” 

이예주는 느닷없이 머릿속이 아닌, 바로 머리 위에서 들려오는 현실적인 목소리에 비명을 질렀다. 

고개를 들자 그녀가 따라오든 말든 앞장서서 휙휙 걸어가는 줄로만 알았던 남자가 소리 소문 없이 다가와 바로 앞에 떡하니 서 있었다. 

그 한심하다는 눈빛에,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이예주의 얼굴이 파리하게 질렸다. 

“그리고 어딜 봐서 네가 비실비실하지? 넌 지금도 충분히 튼실하다. 굳이 비유하자면 토실토실에 가깝지. 사흘 정도는 거뜬히 굶어도 될 만큼.”

원래 가사는 비실비실이 아닌 토실토실이었다. 

원래 노래 가사를 정확히 지적하는 남자 때문에 이예주는 넋 나간 표정을 지었다.

“이, 이 노래 알아요?”

“노래였나?”

“네. 동요인데…….”

“별 해괴망측한 것을 다 노래랍시고 부르는군.” 

안 들리게끔 작게 불렀는데 어떻게 다 들은 거지. 역시 청력도 귀신같은 놈. 

제가 해괴망측하게 개사한 것은 맞기에 이예주가 우물쭈물하며 할 말을 찾지 못하던 그때였다. 

불현듯 남자가 가방을 들지 않고 놀고 있는 손목을 잡았다. 

그러더니 그녀가 미처 마음의 준비를 하기도 전에 무작정 끌고 가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어, 어!”

“따로 길이 나 있는 곳이 아니기 때문에 떨어지면 길 잃기 십상이다. 딱 붙어서 걷도록.”

간신히 넘어지지 않고 균형을 잡은 이예주가 저도 모르게 버럭 소리쳤다. 

“조, 조금 천천히 가요! 이것도 좀 놓고! 곁에서 걸으면 되잖아요!”

“느려 터진 네 속도에 맞춰 걷다간, 날이 가도록 목적지 근처에도 도착하지 못하겠군.”

“무거운데 어떻게 빨리 걸어요!”

억울함이 그득 찬 얼굴로 이예주가 호소했지만 이어진 강자의 횡포 앞에 그녀는 다시 고분고분 꼬리를 내릴 수밖에 없었다.

“스읍, 밥 달라고 꿀꿀거렸잖아. 밥 먹기 싫은가?”

“아, 아니요…….”

먹을 거 가지고 협박하는 놈이 세상에서 가장 치사하고 졸렬한 놈이건만. 

하지만 더럽고 치사해도 여기서 배고파 죽을 것은 자신뿐이었기에 이예주는 속으론 쌍욕을 퍼부을지언정 겉으론 순종적인 태도를 취했다. 

“그럼 마저 꿀꿀거리면서 걷지.”

남자가 그녀를 잡아끌며 다시 한 번 ‘꿀꿀’을 입에 올렸다. 

이예주는 시뻘게진 얼굴로 씩씩거렸다. 

이 망할 놈아! 그만 농락해!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욕설이 입안에서 메아리처럼 뱅뱅 맴돌았다. 

그 얄미운 뒤통수를 뚫어져라 노려보는 그녀를 아는지 모르는지 남자는 여전히 이예주의 손목을 움켜쥔 채 빠르게 걸었다. 

이도저도 못하고 그저 질질 끌려가기만 하던 그때, 문득 그가 우뚝 멈춰 서서 그녀를 돌아보았다.

“왜, 왜요?”

서, 설마 그 귀신같은 청력으로 제 욕하는 것까지 들은 건가? 분명 속으로만 조용히 욕했는데……. 

지레 찔린 이예주가 시선을 마주치지 못하고 눈을 내리깔았다. 

그런 그녀에게 남자가 딱딱한 목소리로 명령했다.

“마저 하라고 했을 텐데.”

“뭐, 뭘요?”

“꿀꿀대는 것 말이다.”

“꿀꿀……?”

이 남자가 대체 무슨 농담을 이렇게 살벌하게 한담. 

이예주는 최대한 밝게 웃어넘기려고 애썼다. 

“하하. 농담도 참…….”

“부르던 거 계속 부르라고, 돼지처럼.”

남자가 시뻘건 눈을 번뜩 부라렸다. 이, 이 미친놈, 진심이야……. 

이예주는 더 이상의 모욕을 참을 수 없었다. 

한 차례 부들부들 몸을 떨던 그녀는 마침내 입을 열고는. 

“꿀꿀, 꿀꿀. 꿀꿀, 꿀꿀…….”

“옳지, 잘한다.”

남자가 칭찬했다. 분명 칭찬을 들은 것이 맞는데, 기분이 더러웠다.

옳지, 옳지. 다시 뒤돌아 걷기 시작하는 남자의 뒤통수에다 대고 닥치라고 받아치고 싶었지만, 그녀는 여전히 꿀꿀거리고 있었기에 그리할 수 없었다. 

잡힌 손목이 아릿하게 아파 왔다. 커다란 손이 억세게도 제 손목을 움켜쥐고 있었다. 

그 꼴이 꼭 남자가 묶어 놓았던 수갑 같았다. 

수갑이 풀렸으니 이제 자유라고 생각한 지 하루도 지나지 않았는데 여전히 자신은 묶여 있다. 

음산한 얼굴로 남자에게 잡힌 제 손목을 바라보며, 이예주는 힘겹게 입을 열었다.

“꿀꿀꿀꿀, 꿀꿀꿀꿀 꿀…….”

인적이라곤 그들뿐인 적막한 숲속, 그녀의 우울한 꿀꿀거림이 외로이 울려 퍼졌다. 

영원할 것만 같았던 울창한 나무 숲길은 서서히 끝이 났다. 

어디선가 물비린내가 진하게 난다 싶더니, 숲길이 끝나자마자 그들의 앞에 나타난 것은 잔잔한 바다였다. 

뜬금없이 나타난 산속의 바다에 이예주가 멍한 표정을 짓고 중얼거렸다.

“웬 산에 바다가…….”

“호수.”

그러나 채 말이 끝나기도 전에 옆에 서 있던 람이 그녀의 말을 정정해 주었다. 

호수라는 말에 이예주의 눈동자가 커다래졌다. 

그들의 앞에 펼쳐져 있는 것은 끝도 보이지 않을 만큼 거대하고 광활한 물 더미였기 때문이다. 

얼마나 거대한지 발치 근처 뭍으로 얕은 파도까지 철썩철썩 몰아쳤다.

“허, 호수가 왜 이렇게 커요? 파도도 치는데요?”

“다리족 놈들이 무슨 짓거리를 하고 있는지 정상 위의 만년설이 매년 녹아내리더니 다른 곳보다 낮은 지형 전체가 물에 잠겨 버리더군.”

“이건 호수가 아니라 강이나 바다 같은데…….”

얼마나 많은 눈이 쌓여 있기에 눈이 녹아 이렇게 넓고 거대한 호수를 이룬 걸까? 

이 세계에서 가장 높은 산이라더니 역시 격이 다르긴 다른가 보다고 생각할 즈음 불쑥 람이 말을 걸었다.

“너는 어류와 육류 중에 어느 것을 더 좋아하지?”

“네? 어류랑 육류요?”

현대에 살 때면 그저 기호를 묻는 별거 아닌 질문이었겠지만, ‘썸남’의 질문인 만큼 이예주는 신중하게 고민했다. 

어류든 육류든 고기인 것은 마찬 가지였기에 둘 중 뭐가 낫다고 단정 지을 수가 없었다. 

그래도 남자의 물음이 고기반찬을 해 준다는 소리 같아서 그녀의 입가가 헤벌쭉 벌어졌다. 

생선을 딱히 싫어하는 건 아니지만, 이왕이면 육류가 좋았다. 

고슬고슬한 쌀밥에 구운 삼겹살 한 점, 크으!

“음. 굳이 고르자면 육류?”

쩝쩝, 입맛을 다시며 이예주가 선택했다. 

그러자 람이 기다렸다는 듯 그녀를 농락했다.

“안됐군. 뭍에 나다니는 것들이라곤 산에서 내려온 인간들이 깡그리 잡아먹었기 때문에 이곳은 들짐승들이 사라진 지 벌써 몇 해째인데.”

“헉. 그, 그럼 어떡해요?”

“어쩌긴. 그냥 물고기를 낚을 수밖에.”

“뭐라고요?! 그럴 거면 뭐 좋아하는지는 왜 물어봤어요!”

어이없음에 이예주는 힘겹게 들고 있던 가죽 가방을 풀밭에 패대기치듯 내려놓으며 소리쳤다. 

그 충격으로 인해 닫힌 가방 틈으로 나무 막대기 같은 것이 삐쭉 튀어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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