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다리족!”
이예주가 경악을 하며 꽥 비명을 질렀다.
이젠 그냥 시간족이란 소리만 들어도 경기를 일으킬 것 같은데, 다리족이라니.
다리족이 어떤 이들이었던가. 팔족 족장의 뺨을 후려칠 가히 짐승 같은 놈들이었다.
주먹만 한 눈깔 하나를 돌려쓰는 트롤 같은 거인 삼형제와, 그녀의 눈을 노린 노망난 노친네가 자신을 잡아먹으려고 침을 질질 흘리던.
놈들이 국자로 퍼서 제게 던진 그 펄펄 끓는 물이 귀밑머리를 스치고 지나갈 때의 그 쫄깃함이란.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면 그 망할 물을 두 번 피하지는 못할 것이다.
―눈, 눈을 내놔! 눈!
혈관이 잔뜩 솟은 채 기이한 빛으로 번들거리며 자신에게 달려들었던 노인의 목소리가 언뜻 귓가에 메아리쳤다.
그녀의 낯빛이 순식간에 해쓱해졌다.
“거기…… 꼬, 꼭 가야 돼요?”
이예주가 한 손을 뻗어 남자의 옷자락을 소심하게 부여잡았다.
뭐? 남자가 미처 못 들을 말이라도 들은 양 눈썹을 휙 치켜 올렸다.
“거기 다리족이 산다는 산 정상이요. 아, 안 가면…… 안 가면 안 돼요?”
“과거로 돌아가면 후회나 하지 말라고 노래를 부를 때는 언제고. 왜 이제 와서 딴소리지?”
“그거야……!”
그땐 네놈 곁에 붙어 있지 않으면 순삭당한다는 걸 몰랐던 멍청한 때고!
억울함에 무어라 톡 쏘아붙이려던 이예주는 우울한 얼굴로 다시 입을 닫았다.
지금은 죽으나 사나 람 곁에 붙어 있는 것이 답이란 걸 수많은 개고생을 통해 깊이깊이 깨달았다.
더불어 먼저 좋아하는 사람이니, 철저한 약자일 수밖에 없다는 깨달음도. 비단 깨달음이 없었더라도 이예주는 남자를 만난 후 언제나 을이었지만.
“흐, 흐윽…… 다리족은 너무 무서운데요.”
다리족은 물론, 이예주에게 안 무서운 시간족이란 없었다.
다리족이고 팔족이고 눈족이고 간에 하나같이 끔찍하고 역겹고 무섭기 짝이 없었다.
“진짜 꼭 가야 돼요? 아, 안 가면 안 되는 거예요?”
이예주는 우는 소리를 늘어놓으며 남자에게 슬금슬금 다가가 달라붙었다.
“가고 싶지 않으면.”
남자는 그녀를 시뻘건 동공으로 흘깃 바라보다가 이내 담담하게 읊조렸다.
“굳이 데려가지 않겠다.”
“정말요?”
“뭐, 어차피 사흘간은 꼼짝없이 이 안에 갇혀 있어야 할 테니 천천히 생각해 보도록 하지.”
생각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다고 이야기하려고 했지만, 그러면 왜냐고 되물을 것 같았다.
그래서 이예주는 그저 남자의 팔에 머리를 슬쩍 기대며 침묵했다.
달라붙지 말라고 차갑게 뿌리칠 것만 같은 남자는 놀랍게도 머리를 기대는 그녀를 밀어내지 않았다.
이예주는 어쩐지 남자와 처음 여행을 시작할 때의 기억이 지금의 모습과 겹치는 것을 느꼈다.
까마귀가 무서워 황급히 남자의 팔을 부여잡고 ‘밤눈이 어두워요.’ 따위를 변명이랍시고 내뱉던 자신에게 그때의 그는 무려 2번이나 떨어지라고 내쳤다.
하지만 절대 떨어질 생각을 않는 그녀 때문에 결국은 한숨을 내쉬며 짐짝 취급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시시때때로 시뻘건 눈을 빛내며 자신을 죽일 듯 쳐다보던 미친놈에게 어떻게 그런 간 큰 짓을 했는지 모르겠다.
2017년도에 살 땐 생각이나 해 봤을까? 제가 이렇게 외간 남자를 마음에 담고, 또 좋다고 대범하게 달라붙는 짓을 할 줄.
게다가 람이 이런 제 행동을 너그러이 넘겨주는 것 또한.
그만큼 자신은 남자와 가까워졌다.
이토록 가까워졌는데, 참 이상도 하지.
여전히 이예주는 남자에게 문을 넘어 장소를 이동할 뿐만 아니라, 미래로 이동한다는 능력의 실체에 대한 이야기를 꺼낼 수 없었다.
적대감 서린 눈빛을 받을 때는 그렇게 서운했는데, 막상 남자와 가까워진 것을 직접 확인한 후에도 모든 것을 밝힐 수 없어 마음이 심란했다.
눈부시게 빛나는 뤼미에르의 꽃 숲을 바라보는 이예주의 입새로 얕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람이 입에 계약의 대가를 올렸을 때부터 몸에 힘이 빠지기 시작했음을 그녀는 이제 부정할 수 없었다.
눈치라곤 쌈 싸 먹은 자신조차 기민하게 알아차릴 정도로 남자와 자신의 감정은 현저하게 차이 났다.
이 사람은 그저 나를 집 잃은 어린 인간이라고 생각하고 있어.
그러니까 이성으로 좋아하는 마음을 깨달은 저와는 달리, 아무런 힘도 없고 그저 도망을 잘 칠 뿐인 자신을 동정하고 있는 것이다.
이미 거짓말을 쳐 놓은 것도 문제였지만, 미래로 가는 꽤 근사한 능력이 있다고 말한들 람이 믿어는 줄까?
뤼미에르 꽃을 바라보던 이예주가 울적한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언제부터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는지 모를 남자의 시뻘건 눈동자를 곧장 정면으로 마주할 수 있었다.
그의 한쪽 눈썹이 슬쩍 위로 솟구쳤다. 방금 전과는 달리 그새 우울하게 변한 그녀의 표정이 의아한 것 같았다.
이 남자는 이제 내 표정을 읽고 신경 써 줄 줄도 아는구나.
남자의 변화에 지끈, 심장이 울었다.
이예주는 우울함을 애써 숨기며 어색하게 웃었다.
그러고는 동정이든 뭐든 이렇게 자신을 혐오스럽다는 눈으로 바라보지 않는 것만으로도, 차갑게 선을 그으며 자신을 밀어내지 않는 것만으로도 괜찮다고 여러 번 되뇌었다.
그래. 그래도 곁에 있을 수 있으니 괜찮다고.
* * *
본의 아니게 꽃 감옥에 갇힌 상태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산장의 목침에서 뒹굴었다.
심심하면 산장 밖으로 나가 꽃밭을 거닐다가, 또다시 산장 안으로 돌아와 자빠져 잤더니 사흘의 수감 생활 중 하루가 순식간에 지나가 버렸다.
현대 문명이 망해 버린 1000년 후 세상으로 와서 처음 겪다시피 하는 평화에 이예주는 좀처럼 맥을 추리지 못했다.
원룸에 혼자 있을 땐 틈만 나면 하는 짓이 침대 위에서 뒹굴뒹굴하기였는데, 이 미친 세계에서는 그게 얼마나 복에 겨운 행위였는지 매 순간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아무것도 안 하고 그저 산장 안에 처박혀 있는데도 그녀는 행복해서 죽을 것만 같았다.
밖에 있던 남자가 잠시 산장에 들려 건조대 위의 빨래처럼 2층 침대 위에 축 늘어져 있는 이예주를 한심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가 날이 밝았다고 툭 내뱉고 다시 휙 나가 버리지 않았다면, 이예주는 오늘이 이틀째라는 사실도 전혀 알지 못했을 것이다.
뤼미에르의 뿌리가 천장까지 가려 버린 탓에 들판과 산장 근처는 계속 밤이 이어졌다.
사방이 어둠에 잠겨 있어 시간을 가늠할 수 없었다.
람은 뭐가 그렇게 바쁜지 쉴 새 없이 수천 송이의 뤼미에르 꽃 사이를 헤집고 다녔다.
그가 바꿔 놓은 가시 장벽들을 확인하고 다니는 것 같았다.
우둘투둘한 가시 벽으로 막혀 있었지만 들판은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광활했다.
이예주는 그 끝이 어딘지 별로 알아보고 싶지도, 또 볼 엄두도 나지 않았다.
그러나 남자는 체력이 넘쳐 나는지 벌써 몇 바퀴째 들판을 돌고 있었다.
그런 람에 비해서 이예주는 대체로 한가했다. 너무 한가하고 할 짓이 없어 괜히 산장을 들쑤실 정도였다.
산장은 소름 끼칠 만큼 텅텅 비어 있었다.
그녀는 쓰라린 윗배를 부여잡으며 신음했다.
“으으, 배고파.”
그리고 분노했다.
그냥 가만히 있었으면 소중한 열량을 소비하지 않을 수 있었을 텐데.
괜히 헛된 희망만 품고 움직여서 기운만 왕창 빼고 건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흐으.
일그러진 얼굴로 나와서 람을 찾아보니, 사흘간의 옥 생활을 하게 만든 장본인은 그녀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고 있었다.
자고로 진짜 감옥에 수감된 죄수도 밥은 먹여 주건만, 몇 번이나 자신을 스쳐 지나가는 남자의 얼굴은 지극히 무심했다.
설마. 사흘 굶는다고 안 죽는다는 이유 하나로 정말 사흘간 쫄쫄 굶길 생각은 아니겠지.
덜컥 드는 무서운 생각에, 그녀는 서둘러 도리질을 쳤다. 설마 그렇게까지…….
바쁜 남자를 아련하게 바라보며 이예주는 최대한 참으려고 노력했다.
정말이었다. 진짜로 참으려고 했다.
하지만 꺼멓게 죽은 자신과는 달리 멀쩡하기만 한 남자의 얼굴을 보니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저기요.”
뤼미에르 숲이 시작되는 경계에 쭈그려 앉아 있던 이예주는, 자신을 바삐 스쳐 지나가는 남자를 애처롭게 붙잡았다.
그렇게 뜨겁게 바라보아도 시선 하나 주지 않던 분께서 드디어 그녀를 돌아봐 주셨다.
그런데…….
하루하고 반나절을 같이 굶었는데, 왜! 어째서 이 남잔 이렇게 멀쩡한 거지?!
“혹시…… 저 몰래 혼자 뭐 먹고 왔어요?”
남자가 그 말을 듣고 무슨 헛소리냐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순간, 이예주가 좀비처럼 괴성을 지르며 제 배를 움켜쥐었다.
“허윽, 저 죽을 것 같아요.”
희멀건 인간 여자의 얼굴에 철옹성 같은 그의 시뻘건 눈에도 한순간 걱정이란 것이 깃들었다.
람은 이것이 왜 또 난리를 치는 건지 전혀 짐작할 수 없었다.
아침나절 내내 빈둥거리다가 오후 느지막이 나와서 하는 소리가 죽을 것 같다니.
몸에 있는 상처도 모두 치료해 주었건만, 대체 뭐가 문제인 것인가.
문제점을 파악하기 위해 신중히 생각하던 람은 이예주가 숨넘어갈 지경이 되어서야 입을 열었다.
“왜지.”
“배고파서 죽을 것 같아요.”
하지만 곧바로 들려오는 대답에 그는 걱정스러운 얼굴을 집어치웠다.
“흐, 흐흑. 산장에 아무것도 없어요. 소름 끼치게 아―무것도요. 진짜 사흘간 쫄쫄 굶어야 하는 거 아니죠? 그렇죠?”
그녀는 애가 타는 심정으로 남자에게 대답을 구했다.
인간들이 기가 막혀서 말이 막힌다는 심정이 바로 이런 것일까.
람은 제 앞의 대책 없고 생각 없는 인간 계집 때문에 나날이 새로운 감정을 깨닫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게 참 신기하면서도 또 어이가 없어서 그는 이예주의 애처로운 눈길을 칼같이 무시했다.
“없으면 굶어야지.”
“크아악!”
매정한 남자의 대답에 그녀는 비탄에 빠져 절규했다.
“배고파! 배고파아악! 사흘간 굶어도 안 죽는다 그래서 어제 저녁부터 참으려고 했는데! 흐흑, 저는 죽어요!”
쿠루루루 쾅쾅! 이예주의 배에서 천둥이 쳤다. 애교 삼아 꼬르륵 울 단계는 이미 지난 지 오래였다.
쿠룽 쿠룽쿵쿵! 다시 한 번 그녀의 위가 노성을 토해 냈다.
남자의 귀까지 들린 건지 놈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이, 이거 봐요. 저, 저는 죽는다고요…….”
민망함에 붉게 달아오르는 얼굴을 고스란히 내보여 주며, 이예주는 힘없이 중얼거렸다.
누군들 이렇게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 밥 달라고 괴성을 지르고 싶으리오. 하지만 본능은 이성을 짓누르기 마련이다.
남자는 여전히 눈 하나 까딱 않았다. 그래서 어쩌란 말이냐.
입 밖에 내지 않아도 들리는 듯한 남자의 말에 그녀는 울상을 지었다.
더럽고 치사했지만 살기 위해선 어쩔 수 없었다.
“살려 주세요.”
“…….”
“다른 방법으로 죽여도 좋으니까 굶어 죽이지만 마요오!”
그녀는 비굴하게 애원했다.
나를 굶어 죽이려 들려는 거야. 굶어 죽는 게 얼마나 비참하고 슬픈 일인데! 23년을 살면서 다이어트 한 번 하지 않은 자신인데!
심지어 대학교에서 같이 먹을 사람이 없어 외로울 때도 밥때가 되면 원룸까지 미친 듯이 뛰어가서 허겁지겁 밥을 먹고 아슬아슬하게 강의 시간에 맞춰서 돌아왔었다!
이예주는 훌쩍훌쩍 흐느꼈다. 그런 그녀의 머리맡에서 남자가 후,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꼭 가난한 집에서 고기 사 달라고 떼를 쓰는 아이를 둔 제 부모같이 느껴져서 이예주는 더 크게 훌쩍였다.
이제 어쩌나. 이곳엔 아무리 둘러봐도 망할 꽃과 풀밖에 없는데. 뤼미에르라도 뽑아서 씹어 먹어야 하나.
그녀가 아련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며 되도 않는 생각을 할 때였다.
“이리 와.”
그때까지 골 아프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방치하던 남자가 돌연 그녀를 어디론가 끌고 가기 시작했다.
뤼미에르 숲과 반대편인 산장 쪽이었다.
“어, 어디 가는데요?”
설마 밥 달라는 소리를 하러 나오지도 못하도록 산장 안에 꽁꽁 묶어 두고 굶겨 죽이려고?
배가 고파 헛된 상상을 떠올리며 벌벌 떠는 이예주를 어떻게 알아챈 건지, 남자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무뚝뚝하게 답했다.
“죽을 것 같다며.”
“네, 네! 그쵸!”
“계약의 대가도 받지 않은 것을 죽일 수야 없지.”
“그, 그럼 밥 줄 거예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눈을 반짝이며 되묻는 인간 여자 때문에 람은 가던 걸음을 우뚝 멈춰 서고 그녀를 돌아보았다.
한심함을 가득 담고 잠시 물끄러미 이예주를 응시하던 남자는 이내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며 다시 뒤로 돌아 걷기 시작했다.
이예주는 남자의 눈빛이 조금은 수치스러웠다. 하지만 곧바로 몰려오는 수치심을 부정했다.
밥 달라는 게 뭐가 어때서. 배고프면 그럴 수도 있지.
람에게 손목이 잡힌 채 질질 끌려가며 그녀는 당당함과 부끄러움이라는 오묘한 감정 사이를 오가며 다른 한 손으로 주린 배를 부여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