람은 곧바로 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가시에 찔려 죽는 것보다 더 소름 끼치는 죽음에 절규했다.
“으허어! 난 굶어 죽기 싫어! 먹고 죽은 귀신이 때깔도 좋다고 했단 말이에요!”
“허.”
이 와중에 굶어 죽을 걱정을 하다니. 머리통에 대체 뭐가 들어 있는지 알 수 없는 인간 계집의 비명에 람이 짧게 헛웃음을 지었다.
그런 그와는 달리 이예주는 굶어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진실로 벌벌 떨었다.
허옇게 질린 그 한심한 얼굴에 람은 고개를 절레절레 휘저으며 차갑게 일갈했다.
“사흘 후가 개화 시기다. 인간은 사흘 안 먹는다고 죽지 않으니 굶어 죽을 리는 없겠군.”
이예주는 그 말에 안도했다.
굶어 죽을 리는 없겠구나. 이 미친 1000년 후까지 끌려와서 그렇게 죽는다니. 죽는 것도 정말 싫었지만, 굶어 죽는 것만큼 비참한 죽음은 또 없으리라.
그녀는 방금 전보다 혈색이 도는 얼굴을 하고 한숨 돌렸다.
그리고 아까부터 궁금했던 계약에 관한 질문을 했다.
“……그럼 얘네들이 당신한테 뭘 주기로 했는데요?”
남자가 무슨 소리냐는 듯 눈썹을 치켜들었다. 이예주는 다시 설명했다.
“그 계약 조건이요. 이렇게 흉측하게…… 아무튼 이렇게 바꿔 줬으니까, 당신도 뭘 받지 않았어요?”
“글쎄. 조건을 걸었다고 할 수 있는 건지 모르겠군.”
남자가 무뚝뚝하게 고개를 끄덕이다 덧붙였다.
“개화 시기가 아니라 그저 가시 장벽으로 막혀 있을 때도 마음대로 들어올 수 있도록 했지.”
“당신이요?”
“내가 이것의 주인인데 감히 이것들이 내 앞을 가로막는다고?”
시뻘건 눈을 섬뜩하게 빛내며 그가 스산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만약 그러한 일이 생긴다면.”
“…….”
“모두 불살라서 뿌리 한 조각 남기지 않고 소멸시킬 것이다.”
남이 했으면 우스갯소리로 치부했을 테지만, 이 인간은 정말 그러고도 남을 미친놈임이 분명했다.
등골이 오싹했다. 온몸에 소름이 오소소 돋는 느낌에 이예주는 어색하게 웃었다
“그, 그럼 누구…….”
“너.”
가시 장벽을 바라보며 이글이글 타오르던 남자의 벌건 눈동자가 휙 자신을 향했을 때, 이예주는 애써 미소 짓던 얼굴 근육 그대로 얼음처럼 뚝 굳었다.
그녀가 웃는 것을 멈추자, 이번에는 람이 붉은 입꼬리를 위로 끌어당기며 살며시 웃었다.
남자를 만난 이래 처음 보는.
“꽃을 좋아한다고 하였지 않아.”
심장이 쥐어짜일 만큼 예쁜 웃음이었다.
올라간 채 멈춰 있던 이예주의 입꼬리가 서서히 내려왔다.
헉 하고 입에서 가뿐 신음이 터져 나왔다. 왼쪽 가슴께가 뻐근하게 아파 왔다.
머리가 원치 않음에도 제멋대로 회전하여 남자에게 꽃을 좋아한다고 지껄였던 기억을 찾아내기 시작했다.
언제지, 언제였더라. 남자에게 꽃을 좋아한다고 했던 적이…….
아. 그때였다. 그래, 그때.
지나가던 제드에게 뤼미에르 꽃다발을 받고 좋아하던 그때.
이깟 꽃이 좋으냐고 묻던 그에게 분노 반, 오기 반으로 꽃 싫어하는 사람도 있냐고 벌컥 화를 냈던 과거의 자신이 떠올랐다.
사실 이예주는 아무 생각이 없었다.
빛이 나는 것이 아니었다면 그깟 꽃 따위야.
도시에서 살 때는 볼일도 별로 없었고, 어쩌다 본 꽃은 캠퍼스 길에 심어져 있는 벚꽃이나 개나리꽃이 다였다.
그마저도 돌같이 보며 경보로 지나치던 것이 바로 자신이었다.
이예주는 가시 장벽 안쪽에서 환히 빛을 내뿜는 수천 송이의 뤼미에르 꽃들을 한 번, 시뻘건 눈동자로 저를 바라보는 람을 한 번 바라보았다.
어느덧 남자의 얼굴에 희미하게 떠올랐던 미소는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사라져 있었지만, 그녀는 떨리는 가슴을 주체할 수 없었다.
수전증 걸린 것처럼 손까지 덜덜 흔들리는 것 같았다.
풋풋한 소녀처럼 수줍은 얼굴로 짝사랑하는 남자에게 꽃이 좋다고 고백한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익을 대로 익은 선 자리처럼 서로의 기호를 알아 가기 위해 예의상 주고받은 말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저 신인류의 적대 속에서 자신을 방치하는 남자가, 그나마 말이 통하는 같은 인간을 만나 이야기하는 것조차 방해하는 남자가, 선물받은 꽃을 멋대로 꾸기던 남자가 너무 미워서.
그래서 반항심을 가득 담고 얘기했던 그것을 기억하다니.
미운 얼굴로 미운 말만 내뱉던 자신이었는데 그걸.
이예주의 얼굴이 자고 일어나서 곁에 남자가 없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같이 왈칵 흐려졌다.
이건 신종 암살법인가? 나한테, 나한테 진짜 왜 이래. 나를 죽이려고, 심장을 터뜨려서 죽이려고.
“나…….”
구멍이 꽈악 막히는 기분에 그녀는 잠시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가 말문을 열었다.
“나 때문에 여기까지 온 거예요?”
나 때문이라니. 나 때문에 굳이 여기까지 온 거라니.
생각만으로도 소름이 쫙 끼치는 말이었다. 이예주는 거기까진 제 과대망상일 뿐이라고 애써 자신을 추슬렀다.
하지만 자신에게로 향해 있는 남자의 눈이 커지는 것을 보고 내쉬던 숨을 멈췄다.
“꽃을 좋아하는 게 아니었나?”
남자가 말했다.
이예주의 반응을 어떻게 해석한 건지 그는 설핏 미간을 구기며 별로 좋지 않은 기색을 내비췄다.
“그 인간 놈에게서 받았을 때는 좋다고 잘도 웃어 젖히더니.”
“…….”
“꽃, 싫어하던 것인가?”
“…….”
“대답.”
그가 대답을 강요하자 이예주는 정말로 울고 싶었다.
자꾸 이러면, 자꾸 이러면 나한테 희박한 가능성이 존재할지도 모른다고 자꾸 기대하게 되잖아요. 난 진짜 아무 기대도 없었는데. 정말인데.
대답이 늦어지자 남자의 눈동자에서 시뻘건 안광이 번쩍 쏟아져 나왔다.
그의 동공이 그녀의 얼굴에 잠시 머물렀다가 살랑살랑 몸을 흔들고 있는 뤼미에르 꽃들에게로 움직였다.
흡사 눈빛으로 꽃을 태워 죽일 듯 노려보는 시선이다.
더 입을 다물고 있다간 정말로 그런 경악스러운 일어날까 두려워 이예주는 황급히 입을 열었다.
“아니요.”
고개까지 휙휙 내저으며 남자의 물음에 대답하자 다행히도 남자의 눈이 다시 자신에게로 돌아왔다.
그의 얼굴은 여전히 무뚝뚝했다. 하지만 그 얼굴, 그 시선에 인간을 향한 끔찍하고 무시무시한 증오와 혐오가 담기지 않았다는 것을 이제는 그녀 또한 알 수 있었다.
이예주는 이번에야말로 수줍은 소녀처럼 고백할 시간이라는 걸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조, 좋아해요.”
남자의 시선을 차마 마주 보지 못해 살짝 고개를 숙인 이예주가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웅얼웅얼 거렸다.
제가 내뱉은 좋아한다는 말이 과연 꽃에게 하는 말인지, 아니면 눈앞의 이에게 하는 말인지 저조차 알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
잠시 망설이던 이예주는 이내 용기를 내어 고개를 들었다.
“너무 예뻐서 죽을 것 같아요.”
그리고 활짝 웃는 얼굴을 남자에게 되돌려 주었다.
현대에 살 때도 이렇게 웃어 본 적이 있을까, 의문이 들 정도로 그녀는 기쁨에 겨운 미소를 지었다.
“데려와 줘서 정말 고마워요. 정말로요.”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던 람의 표정이 조금 묘해졌다.
무표정한 것은 변함없는데, 어딘가 모르게 만족스러운 기색인 것 같기도 했다.
말 한 마디 없이 물끄러미 이예주를 바라보기만 하던 람은 그녀가 부끄러움에 몸을 배배 꼬기 바로 직전에서야 적선하듯 한 마디를 던져 주었다.
“그거 다행이군.”
그의 대답에 이예주가 다시 한 번 볼을 발그레 붉혔다.
온몸이 다 간질간질한 이상한 기분에 그녀가 어쩔 줄 몰라 할 때였다.
“곧바로 산의 정상으로 가면 될 걸 굳이 들려 헛짓거리를 한 셈이 될 뻔했잖아.”
“…….”
“어린 것들에게 반짝이는 것을 보여 주면 세상모르고 좋아할 것이라고 듣긴 했다만.”
하지만 뒤이어 덧붙여진 딱딱하기 그지없는 말에 헤벌쭉 벌어진 그녀의 얼굴이 와작 구겨진 것은 순식간이었다.
이전부터 대체 이 미친놈에게 몹쓸 조언을 해 주는 새끼가 누굴까, 심각하게 궁금해질 지경이었다.
“……그런데.”
이예주는 황급히 말을 돌렸다.
더 꽃에 대해 이야기했다간, 꽃 선물을 받았다는 사실까지 부정당할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여기가 대체 어디예요? 분명 우린 동쪽 대륙이었잖아요.”
“이 세계에서 가장 높은 산의 중턱이다.”
“이 세계에서 가장 높은 산……?”
뭔 놈의 산 이름이 이렇게 길고 거창하지.
남자의 말을 멍청하게 따라 중얼거리며 이예주는 높은 산에 대해 떠올렸다. 이 세계에서 가장 높은 산이라면 에베레스트 산인데.
그러나 과거의 그 에베레스트가 아직까지 존재할지도 의문이었다.
있다 해도 1000년 전과 같은 산이라 볼 수 있을지 미지수였다.
그녀는 정말 산 이름이 ‘이 세계에서 가장 높은 산’씩이나 되냐고 람에게 되물으려고 했다. 그가 뜬금없는 소리를 던지지만 않았더라면.
“네 과거의 흔적을 찾기 위해 온 것이지.”
고요하던 호수에 파문이 일 듯, 그것은 너무나도 갑작스럽고 충격적인 말이었다.
“과, 과거의 흔적이요?”
이예주는 눈알이 또르르 굴러 나올 만큼 두 눈을 커다랗게 치켜떴다.
남자가 무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계약의 대가 말이다.”
“계약의 대가……?”
“내게 감정을 알려 주는 대신 네게 과거의 흔적을 찾아 주기로 했지.”
그런 것 따윈 염병할 지하 굴에서 개고생을 하며 까맣게 잊어버린 지 오래였다.
이예주는 계약과 대가를 운운하는 남자를 처음 본 타인처럼 낯선 눈으로 쳐다보았다.
남자는 어느덧 순식간에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 그녀에게 딱딱하게 계약 조항에 대해서 읊고 있었다.
새삼 꿈에서 깨어나는 기분이 들었다. 자신은 아직도 수런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지 못했는데.
뒤통수를 얻어맞은 사람처럼 이예주는 혼몽하고 탁한 눈동자로 멍청하게 중얼거렸다.
“그, 그치만…… 그걸 찾는다고 과거로 돌아갈 수는 없는데…….”
그녀는 문득 지하 700미터의 탄광에서 겪었던 조롱이의 죽음을 떠올렸다.
붉은 화마가 조롱이를 뒤덮기 직전에 과거로 돌아가는 ‘문’이 열렸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그것이 정말로 과거로 돌아가는 ‘문’이었는지 확신할 수 없다.
그저 그 안에서 날아가고 있던 조롱이의 영상에 기시감을 느꼈을 뿐, 결론적으로 조롱이는 죽지 않았으니.
그게 과연 미래를 나타내는 건지, 과거를 나타내는 건지 알 방법 또한 없었다.
엄마는 이예주에게 과거로 돌아갈 수 있는 힘이 있다고 했다.
그러나 그녀가 무수히 많은 ‘문’을 넘으면서 과거로 돌아갔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때 본 문 안의 조롱이도 결국 미래를 보여 준 걸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니 그 폭발 속에서 조롱이가 대체 어떻게 살아남은 거지?
람이 죽어 가는 조롱이를 구해서 치료해 준 걸까?
꼬리에 꼬리를 물듯 생각에 생각을 더하고 있을 때였다.
“맞아. 과거로 돌아갈 수 있는 방법 따윈 없다.”
‘문’에만 초점을 둔 그녀와는 달리, 람은 어떠한 근거에 입각한 사실이라는 듯 과거로 갈 수 있다는 희망의 싹 자체를 잘라 냈다.
단호하기가 아주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 그러면요?”
“그래도 계약은 했으니 별수 없지. 사흘 후 개화 시기에 이것의 뿌리가 땅속으로 들어가면, 이 세계에서 가장 높은 산의 정상에 사는 인간들에게까지 데려다주마.”
“산 정상이요? 거, 거기엔 누가 사는데요?”
“인간들 중 문명을 가장 발달시킨 놈들이 살고 있지. 발달이란 말을 쓰기도 우습군. 그저 과거 인간들이 구축해 놓은 것을 다시 가져다 쓰고 있는 것뿐이니.”
그렇다면 이예주가 살던 시대와 가장 가까운 인간들이 살고 있다는 소린가?
남자에게서 흘러나오는 말들을 들으며 그녀는 연신 아리송한 표정을 지울 수 없었다.
그러나 하나 확실한 건, 지금의 자신은 말이 통하는 인간들을 만나면 뭔가 답이 나올지도 모른다고 믿었던 이전과는 달라졌다는 것이다.
이예주는 과거의 흔적을 찾게 해 준다는 남자의 말이 썩 달갑지 않았다.
그렇게 한다 해서 단서가 나올지 모르겠는 데다 이젠 뭘 해도 이 남자 옆에서 떨어지기가 싫었다.
지금까지 이 남자에게서 떨어져 스스로 뭔가를 해 보려고 시도하면 그 결과가 모두 처참하게 돌아왔다.
죽기 직전에 목숨만 간신히 구한다거나. 게다가 자신의 욕심으로 인해 조롱이가 죽을 뻔하기까지 했다.
조롱이의 생각을 하자 이예주의 얼굴이 금방 흙빛으로 변했다.
이 남자와 떨어진다는 것이 두렵게만 느껴졌다.
“산 정상에 혹시…… 막 이상한 시간족들 사는 거 아니죠?”
혹시나 싶어 묻는 그녀에게 남자가 놀란 얼굴로 되물었다.
“어떻게 알았지? 본디 이 세계에서 가장 높은 산은 용암을 피해 올라간 갖은 인간들이 뭉쳐 살았다. 하지만 시간족이 아닌 평범한 인간들은 신인류와의 전쟁을 통해 산 아래 동쪽 대륙으로 내려갔지. 산에 남은 것이라곤 내게 잡혀 죽을까 두려워 벌벌 떨고 있는 다리족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