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드 앤 매드 (164)화 (165/319)

“왜 또 질질 짜려고.”

남자의 붉은 눈동자에 어느덧 흐려진 이예주의 얼굴이 거울처럼 투영됐다. 

그저 조금 찡그렸을 뿐인데 시도 때도 없이 우는 애 취급이다. 

그녀는 잠시 동안 남자의 얼굴을 물끄러미 올려다보다가, 슬며시 그의 가슴팍에 머리를 기대며 우울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왜…… 왜 이렇게 다정하냐고. 

당신이 이렇게 다정하니까 무섭다고. 좋아한다고 인정한 지 이제 하루가 됐는데, 언제 다시 돌변해서 자신에게 등을 돌릴까 봐 무섭다고. 

언젠가 다시 자신을 증오하고 미워할까 봐.

“……조롱이가 없으니까 무서워요.”

하지만 실제로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머릿속에 둥둥 떠다니는 것들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말이었다. 

자신도 자각하지 못하는 사이 무심결에 내뱉고 나서야 이예주는 실로 그들 주변에 조롱이가 없음을 절감했다. 

일어나자마자 텅 빈 산장 안을 보고 왜 그렇게 가슴이 허전하고 무서웠는지. 

람이 없어도 언제나 그녀의 곁에 찰싹 붙어 조잘거리던 조롱이가 있고 없고의 차이가 이렇게 클 줄은 미처 몰랐다.

“……아직도 탄광에 있는 것만 같고, 누가 잡으러 올 것만 같아요.”

“…….”

“어디 가지 말고 옆에 있어 줘요. 옆에만요.”

끝말은 거의 들리지 않을 만큼 뭉개지는 발음으로 웅얼거리며 이예주가 남자의 품속에 푹 파고들었다. 

그녀의 목소리 저편에 깊게 깔린 음울함을 곧바로 눈치챘는지 남자가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 덕에 이마 위의 잔머리가 다시 한 번 살랑거렸다.

“어린 것이라 그런지 날이 갈수록 어리광만 느는군.”

툭. 이예주의 산발한 뒤통수 위로 남자의 묵직한 손이 올라왔다.

“아무데도 안 가. 이동하고 싶어도 사흘간은 꼼짝없이 이곳에 처박혀 있어야 된다.”

“왜요?”

“네가 자는 사이 지랄 발광하는 것들과 계약을 끝냈으니까.”

“지랄 발광하는 것들……?”

이예주는 얼빠진 얼굴로 람이 한 말을 되뇌며 과연 그에게 감히 지랄 발광 해 댈 수 있는 생물체가 뭐가 있을까 고민했다. 

여기엔 남자가 지랄 발광 꽃이라는 어처구니없는 이름을 붙여 준 것은 풀 냄새가 지독한 이 뤼미에르 꽃밖에 없는데. 

그러고 보니 람만 보고 무작정 달려온 탓에 뤼미에르 꽃이 여전히 잔뜩 빛을 내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다. 

태양이 뜨면 자연히 빛도 사그라짐이 마땅한데. 

그러다 이예주는 문득 그들의 주변이 아직도 어두컴컴하다는 것을 깨닫고 람의 품에 박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물론 들판 한가운데에 있는 그들의 주변은 빛나는 뤼미에르들 덕분에 대낮처럼 환했다. 

그러나 그녀가 이상하다고 생각한 것은 비단 뤼미에르 꽃들이 아직도 빛을 잃지 않았다는 것뿐만이 아니었다.

“왜 아직도 하늘이…….”

꽤 긴 시간 동안 깊은 잠에 빠져 있다 일어난 것이 분명한데도 하늘이 여전히 새까맸다. 

아직도 한밤중인 것처럼. 오랜만의 숙면에 몸이 다 개운할 지경인데, 고작 몇 시간밖에 안 지난 건가? 

그녀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나 얼마 안 잔 거예요?”

“그럴 리가. 해가 중천에 뜬 후에도 침까지 줄줄 흘리며 잘도 자더군.”

“그럴 리가요.”

이예주는 남자의 말을 부정하며 정색했다. 

농담하지 말라고 덧붙이고 싶었지만, 남자의 미간이 마치 그 장면을 떠올리듯 미미하게 찌푸려져 있어서 차마 농담 소리를 꺼낼 수 없었다.

“그럼 내가 하루를 잤단 말이에요? 밤부터 다시 밤까지?”

“아니. 밖은 지금 대낮이다.”

“네? 그럼 여긴 뭐…….”

남자의 품에서 고개만 쑥 빼 들고 주변을 쭈욱 훑던 그녀는 다시 한 번 미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뤼미에르 숲이 끝나는 먼 숲까지 시원하게 뻥 뚫려 있던 들판이, 참 이상할 정도로 좁아 보였기 때문이다. 

사방으로 탁 트여 시원했던 풀숲은 요상하게도 바람 한 점 불지 않았다. 

고개를 쳐들고 위를 올려다보았지만 높이 떠 있어야 할 까만 밤하늘마저 가까웠다. 

꼭 주변이 통째로 거대한 돔에 휩싸여 있는 것처럼. 

쉽게 원인을 찾지 못하고 계속해서 두리번거리던 그때, 뤼미에르가 끝나는 경계에 이상한 것이 삐쭉 튀어나와 있는 것이 이예주의 눈에 포착되었다. 

“헐. 저게 뭐야?”

그녀가 입을 떡 벌렸다. 저렇게 커다란 것을 지금껏 알아보지 못한 사실이 어이없을 정도로 거대하고 흉측했다.

“가시 넝쿨이다.”

람이 그것도 모르냐는 듯 핀잔주는 어조로 시큰둥하게 답해 주었다. 

이예주도 눈이 있었기 때문에 그것이 가시라는 것은 알았다. 

그러나 람이 말하는 것처럼 그저 시큰둥하게 ‘가시넝쿨이구나. 그렇구나.’ 하고 넘기기엔 그것은 너무 컸다. 

거의 사람 몸통 반만 한 거대한 가시들이 서로 얽히고설켜 빽빽하게 장벽을 이루었다. 

이쪽을 봐도, 저쪽을 봐도 온통 가시투성이 벽뿐이었다. 뤼미에르가 나 있는 들판 전체도 모자라 산장이 있는 숲까지 모조리 싹. 

그것들은 저들끼리 엮인 채 돔 형태의 천장을 이루어 하늘과 주변을 모두 뒤덮고 있었다.

“자, 잠깐 놔 봐요. 잠깐…….”

이예주는 그 기막힌 광경을 넋을 잃고 바라보다가, 남자의 품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버둥거렸다. 

방금 전까지 숨도 못 쉴 만큼 꽉 끌어안고 있던 것에 비해 남자는 너무 쉽게 풀어 준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순순히 그녀를 놓아주었다. 

사슬을 풀어 준 것도, 그리고 품에 안고 있던 인간 계집을 풀어 준 것도 도망칠 수 있는 아주 작은 틈조차 남기지 않은 채 사방을 가시넝쿨로 막아 버렸기 때문이다. 

물론 멍청하고 어리석은 인간 여자는 가시넝쿨에 정신이 팔려 그런 사실 따윈 조금도 눈치채지 못하겠지만. 

놓아주자마자 막혀 있는 가시 장벽으로 달려가는 이예주를 여유롭게 뒤따라가며 람이 슬쩍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가까이서 본 가시는 생각보다 더욱 크고 흉흉했다. 

색은 또 어찌나 시꺼먼지, 왜 진작 발견하지 못했는지 알 만했다.

뤼미에르 빛을 반사시키는 가시 끝이 서슬 퍼렇게 빛이 났다. 

가시가 아닌 사람 몸통만 한 거대한 못들이 삐쭉빼쭉 박혀 있다고 말해도 믿을 정도였다. 

물론 그 못의 머리 부분이 아닌 날카로운 나사 부분이 바깥으로 향한 상태였지만. 

이런 거대한 가시를 달고 있는 식물이 있다는 소리는 듣도 보도 못했다. 

물론 이 미친 세상에 와서 보고 듣는 모든 것이 다 태어나서 처음 보는 것들이었지만, 가끔 이런 건 정도가 너무 심했다. 

이예주는 손을 들어 조심스럽게 가시 끝을 쓰다듬어 보았다. 

손에 닿는 딱딱하고 차가운 감촉에 머리끝이 다 쭈뼛 섰다. 

이 가시는 칼과 같은 흉기였다. 흉기가 한두 개도 아니고 온 벽에 아주 빽빽하게 얽혀 있는 상태인 것이다. 

누군가 이 가시 벽을 구경한답시고 그녀처럼 가까이 다가갔다가, 원한 관계인 사람이 그것을 보고 뒤에서 확 밀면 속절없이 가시에 뚫려 죽을……. 

이예주가 끔찍한 생각에 몸서리를 치고 있을 즈음이었다. 

“찔려서 아프다고 또 질질 짤 거면 애초에 건들지 말았으면 좋겠군.”

저벅저벅, 발자국 소리와 함께 뒤늦게 뒤따라온 남자가 함부로 만지지 말라고 타박했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그래도 혹시 남자가 자신을 밀어 죽일까 무서워 이예주는 화닥닥 가시 벽에서 물러섰다.

“이, 이게, 이게 뭐예요?”

“가시넝쿨이라고 방금 말했을 텐데.”

“그니까요!”

누가 이게 가시인지 궁금해서 물어봤겠냐! 

그녀는 답답함을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나는 이게 뭔지 묻는 거예요! 어젠 분명 없었는데 이 식물이 왜 하루아침에…….”

“어제도 있었다.” 

“예? 어제도 있었다고요?”

“그래. 본래는 흙 속에 있어야 하니까 볼 수 없었지만.”

흙 속에 있어? 

아직도 그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 수 없어 계속 아리송한 표정을 짓고 있는 이예주에게 남자가 선심 쓴다는 듯 드디어 비밀을 토로했다.

“지랄 발광 꽃의 뿌리다. 계약을 하면서 흙 밖으로 드러나도 죽지 않도록 조금 바꿔 주었지.”

“뤼미에르 꽃이랑 계약을 했어요?”

그녀는 놀라 눈을 휘둥그레 뜨며 반문했다. 

그 와중에도 굳이 ‘지랄 발광’이라는 망측스러운 이름을 정정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저 숭한 것을 이름이라고 자꾸 불러 댄단 말이야, 이 남자. 

람은 그녀의 정정을 딱히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신경을 썼다면 저딴 것을 이름이랍시고 명명하지도 않았겠지만. 

이예주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가시 장벽들을 다시 돌아보았다. 

이게 뿌리라고? 꽃의 뿌리는 보통 얇고 연약한 잔뿌리가 대다수이지 않나. 

어쩜 이렇게 나무뿌리보다 더 굵직하고 무식하게 바꿔 버릴 수가 있지? 

평소에도 알 수 없었지만, 이예주는 정말이지 남자의 머릿속에 무엇이 담겨 있는 건지 아주 조금도 알 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꽃인데. 태양빛도 담고 있고, 모양도 아기자기하고, 비록 인간들이 지은 거지만 나름 낭만적인 전설도 존재하는 예쁜 꽃.

“혹시…….”

이예주는 잠깐 망설이다가 물었다.

“혹시 이 꽃이 당신한테 무슨 나쁜 짓 했어요?”

“꽃봉오리 상태일 때 인간들에게 꺾이지 않도록 해 달라고 하도 시끄럽게 굴어 어쩔 수 없더군.”

그것을 묻는 것이 아니라, 말 못하는 꽃이 대체 남자에게 무슨 짓을 했기에 이렇게 보복 심리가 가득 담겨 있는 것처럼 보이는 변화를 주었는지에 대해 묻는 것이었다. 

완전히 딴소리에 가까운 람의 대답에 이예주는 머릿속이 한층 더 복잡해지는 것을 느꼈다. 

설마 시끄럽다는 이유 하나로 꽃을 이렇게 무자비하게 바꿔 버린 것은 아니겠지. 

그리고 주변은 시끄럽긴커녕 바람 소리 하나 들리지 않아 오싹할 정도인데. 

“조용하기만 한데…….”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던 그녀는 잊고 있었던 남자의 재주를 깨닫고 아차 싶어 혀를 깨물었다. 

맞다, 이 미친놈은 꽃이랑 얘기도 할 수 있다고 했지.

“꽃이 이렇게 바꿔 달래요? 갑자기 뿌리를 이렇게 가시로 바꾼 건 왜 그런 거예요?”

이예주가 다시 묻자, 남자가 묘한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뭘 그런 걸 다 물어보냐는 듯 심드렁해 보였다.

“이 세계에서 가장 높은 산의 깊숙한 늪지대에서 서식함에도, 동쪽 대륙 인간들이 기어이 찾아와 개화 전의 꽃봉오리를 모두 꺾어 가서 멸종 직전이었으니까. 저들도 씨를 퍼뜨려 번식하려면 이런 변화 따윈 감수해야겠지.”

남자의 설명을 들은 이예주는 동쪽 대륙 마을 족장의 저택을 떠올렸다. 

그 빌어먹을 탄광굴 안에는 빛을 잃고 시들어 가는 뤼미에르 꽃봉오리가 수백, 수천 개나 꽂혀 있었다. 

검은 안개 때문에 불을 켤 수 없어 등불 대신 사용되었던 꽃들. 

제드는 꽃의 수명이 길어 봤자 삼사 일밖에 안 된다고 그랬다. 

신인류들을 가둬 두고 잔인하게 살육하기 위한 도살장을 밝히기 위해 동쪽 대륙 인간들은 얼마나 많은 꽃들을 꺾어 왔던 것일까. 

“이것은 1년 중 딱 사흘간, 해가 지기 전 약 3시간가량만 개화하고 바로 진다. 세 번이란 그 얼마 안 되는 기회 동안 꽃을 피우면서 봉오리 끝에 있는 자방(子房)을 터뜨리는데, 인간들은 번식을 위한 최소한의 꽃봉오리조차 남기지 않고 모조리 꺾어 가더군.”

남자가 이어 뤼미에르에 대한 설명을 덧붙였다. 아무런 감정도 담기지 않은 무미건조한 목소리였지만 이예주는 괜한 죄책감이 들어 고개를 숙였다. 

“늪지대가 아닌, 이 들판을 아예 통째로 이것들의 서식지로 만들어 놨으니 이젠 누구도 함부로 꺾어 갈 수 없을 것이다.”

우울한 얼굴을 하고 있는 이예주의 머리 바로 위에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들자, 방금 전까진 조금 떨어져 서 있던 남자가 어느 틈에 바짝 다가와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기분 탓일까. 자신을 내려다보는 시뻘건 눈동자에 더는 질책과 살기, 증오가 담겨져 있지 않았다. 

오히려 네 탓이 아니라는 듯 꼭 위로를 해 주는 것만 같아서 가슴이 미친 듯이 설렜다. 

남자에게 쿵쾅쿵쾅 뛰는 심장 소리를 들킬까 무서워 이예주의 얼굴이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다행히 들키진 않은 건지 람은 가시 장벽 쪽으로 무심하게 시선을 돌렸다.

“뿌리가 넝쿨로 엮여 뜨거운 태양 빛까지 가리게 되었으니 꽃이 시들 일도 없을 테고, 또 어리석은 인간이 개화 시기에 꽃을 꺾기 위해 자칫 잘못 들어왔다간 다음 개화 시기까지 1년간 갇힐 테니 더 이상 멸종될 일은 없겠지.”

“헉! 그럼 혹시 모르고 들어와 버리면 어떡해요?”

다음 개화 시기까지 갇혀 버린다는 말에 이예주는 더럭 겁먹은 표정을 지었다. 

“굶어 죽던가. 아니면 억지로 나가려고 가시넝쿨에 몸을 쑤셔 넣다가…….”

람이 겁먹은 이예주를 흘끗 곁눈질하며 말끝을 흐리다가 이내 담담하게 읊조렸다. 

“바늘 꽂는 솜뭉치처럼 온몸에 구멍이 뚫려 죽던가.”

“아악!”

아까 전에 잠시 상상했던 끔찍한 일을 무표정한 얼굴로 잘도 지껄이는 남자 때문에 이예주는 새된 비명을 질렀다. 

바늘 꽂는 솜뭉치라니! 비유를 해도 왜 그런 역겨운 걸로 하냔 말이야! 

자꾸만 떠오르는 혐오스러운 상상에 이예주는 애써 가시 쪽을 바라보지 않도록 노력했다.

“그, 그럼 우린 어떻게 나가요? 우리도 여기 1년간 갇힌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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