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드 앤 매드 (163)화 (164/319)

히익. 

어디선가 숨을 들이마시는 날카로운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잠시 정적이 내려앉았던 검은 파편의 주위가 금방 비명으로 혼란스러워졌다.

‘인간 여자가 검은 파편을 좋아한다고 했어!’

‘검은 파편을 좋아한대!’

‘좋아해! 좋아해! 인간 여자는 검은 파편을 좋아해!’

‘맞아! 검은 파편을!’

검은 안개들이 흥분하여 저마다 되는 대로 지껄였다. 

아까보다 훨씬 시끄러운 주절거림이었지만 이번의 검은 파편은 웬일인지 그들을 저지하지 않았다. 

그때 방방 날뛰던 검은 안개들이 돌연 또 다른 호기심을 가졌다.

‘그치만 인간 여자를 가지 못하게 어떻게 붙잡아 둘 건데?’

‘맞아. 인간 여자에겐 힘이 있는데 어떻게?’

‘과거로 가려 하는데 어떻게?’

‘어떻게?’

‘응? 응? 어떻게? 어떻게 붙잡아?’

궁금해 죽겠다는 듯 검은 안개들이 한꺼번에 연거푸 질문을 퍼부었다. 

람은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여전히 붙잡고 있는 인간 여자의 머리카락을 마지막까지 놓지 않은 채 희미한 달빛 아래 드러난 그녀의 말간 얼굴을 눈에 담았다. 

주위가 이렇게 수런거리는데도 이예주는 여전히 고른 숨을 내뿜으며 잠들어 있었다. 

“인간 계집이니.”

어여쁜 것. 람은 웃었다. 지독하게 탐욕스럽고 음험한 웃음이었다. 

“인간들이 쓰는 방법으로 붙잡아 놓아야겠지.”

검은 파편의 시뻘건 눈동자에 언뜻 비친 욕심이 이예주를 내려다보는 그 순간, 용암처럼 팔팔 들끓었다.

*       *       *

꿈 하나 꾸지 않은 죽음 같은 잠이었다. 

이예주는 한숨처럼 깊은 날숨을 내쉬며 스르륵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멍하니 정면을 바라보았다. 

악몽 속을 헤매다 알람 소리에 퍼뜩 놀라 깨는 것이 아닌, 이렇게 오랜만에 깊은 숙면을 취하고 자연스레 눈을 뜨는 것이 얼마만이더라. 

제 눈에 보이는 건 익숙한 원룸 천장이 아닌 낯선 나무판자였지만, 이제 별로 놀랍지도 않았다. 

언제부터인지 이예주의 몸은 낯선 곳에서 자고 일어나는 것에 최적화되었다. 

집, 학교, 도서관, 가끔 가다 편의점을 오가는 것이 모든 동선의 전부였던 제가 이제는 완전히 처음 보는 장소, 주인이 누군지조차 잘 모르는 공간에서 자고 일어나는 것이 당연해졌다. 

그만큼 이 1000년 후라는 세계에 익숙해지고 있다는 말일 테지. 

익숙해진다라. 

점점 과거의 생활과는 거리가 멀어지는 것 같은 어감에 이예주는 우울해졌다.

“후…….”

오랜만의 숙면으로 인해 몸은 개운해졌지만 반면에 착잡한 머리는 잠에서 깨어날수록 무거워져 갔다. 

오른쪽 손을 들어 이마 위를 아프지 않게 툭 치던 그녀는 문득 드는 이상한 느낌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눈앞에 손을 쫙 펴 보였다. 

평소와 달리 유난히 팔이 가벼운 느낌이었다. 

원래 이렇게 오른쪽 손이 깃털처럼 휙휙 들렸던가. 어디 손가락이라도 떨어져 나갔나? 

무심결에 실없는 생각을 하며 제 손가락 개수를 세던 이예주는 순간 이상한 느낌의 원인을 발견하고 멈칫했다.

“……어?”

오른쪽 손목이 뽀얀 살결을 공기 중에 노출했다. 

“수갑이…… 수갑이 없어.”

그렇다. 으레 신체 일부 중 하나처럼 제 몸에 꼭 붙어서 강철 주먹으로의 진화를 도왔던 검은색 수갑이 사라져 있었다.

언제 풀어 놓은 거지? 나름 잠귀가 밝다고 자신하던 자신인데 정말 몰랐다. 

누가 수갑을 풀기 위해 몸을 건드리는 느낌도 없었고, 쩔그럭거리며 신경을 거슬리게 하던 사슬 소리도 하나 듣지 못했다. 

이예주는 심각한 얼굴로 제 손목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풀어 달라고 난리를 칠 때는 듣는 체도 하지 않더니, 잠자는 사이 대체 왜 풀어 놓은 걸까. 

아니면 혹시 깨어나면 다시 채워 놓는다는 것을 깜빡했던 걸까? 

하지만 그녀를 개처럼 묶어 두던 남자는 그런 것을 까먹기에는 너무나도 철두철미한 성격인데……. 

아니, 그것보단 람은? 람은 어디 있지? 

이예주는 불현듯 누워 있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휙휙 고개를 돌리며 주위를 정신없이 둘러보았다. 

잘 때는 몰랐는데 잠이 완전히 깨자 꽤 추웠다. 얼굴에 와 닿는 산장 안 공기가 새벽녘처럼 서늘하기만 했다. 

실내인데 왜 이렇게 코끝이 시린지 모르겠다고 하는 순간, 간밤에 람이 켜 둔 화덕 불이 어느덧 꺼진 채 타고 남은 재 가루만 남은 것이 보였다. 

이예주는 제 위에 덮여진 모포를 걷어 젖히고 침상 위에서 내려와 신발을 찾아 신었다.

“……람?”

그녀는 다시 한 번 산장을 쭈욱 둘러보며 람을 찾았다. 

아무리 산장을 뒤지듯 살펴봐도 그는 보이지 않았다. 

저를 묶어 둔 수갑까지 풀어 두고 이 남자는 대체 어디로 간 거야? 이 기회를 틈타 도망가면 어쩌려고. 

“확 도망가 버려?”

휑하니 가볍기만 한 제 오른쪽 손을 내려다보며 그녀가 중얼거렸다. 

그러나 패기 넘치는 그 중얼거림과는 다르게 이예주는 더럭 겁이 났다. 

혹시 두, 두고 간 건가? 자기 대신 감시할 조롱이도 없고. 

사고만 칠 뿐 딱히 쓸모없는 인간 계집인 자신은 이제 필요 없으니 수갑도 풀어 주고, 그냥 살려만 둔 채 가 버린 건가?

“……흐윽.”

밤사이 람이 자신을 두고 갔다는 데까지 생각이 미치자 눈물이 핑 돌았다. 

이예주는 금방이라도 울듯이 얼굴을 흐린 채 입술을 삐쭉이다가, 돌연 몸을 휙 틀어 문 쪽으로 허겁지겁 달려갔다. 

쾅! 나무로 엮여진 문을 몸뚱이로 처박다시피 해 열어젖힌 그녀는 산장 밖으로 뛰쳐나왔다. 

정신 나간 사람처럼 초점 잃은 눈동자로 숲을 샅샅이 살폈지만 그녀가 찾는 남자는 보이지 않았다. 

온통 어둠으로 휩싸여 있는 나무, 풀, 숲뿐이었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았다. 

버리고 간 거야. 내가 좋아한다고 고백해서. 자신을 좋아하는 최초의 인간이 결국은 증오하는 인간 계집이라서. 

이예주는 멀리서도 한 번에 알아볼 만큼 처참한 얼굴로 제 아랫입술을 찢어져라 꽉 깨물었다. 

잠시 제자리에 우두커니 서서 울음을 참던 그녀는 이내 무작정 어두운 산길을 달리기 시작했다. 

오랜 시간을 푹 자고 일어났음에도 산장을 둘러싼 숲은 진득한 어둠이 내려앉은 상태였다. 

평소라면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단번에 알아챘을 테지만, 그녀는 람이 자신을 버리고 떠나가 버렸을 것이 두려워 어디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챌 겨를도 없었다. 

어두운 시야 때문에 미처 피하지 못한 날카로운 나뭇가지와 억센 나뭇잎, 풀잎들이 얼굴을 따갑게 스치고 지나갔다. 

그러나 이예주는 개의치 않고 그저 미친 듯이 달렸다. 

아직, 아직 해가 뜨지 않았으니까 멀리 가진 못했을 거야. 

아직 붙잡을 수 있을 거란 생각이 그녀의 머릿속을 지배했다.

“헉, 헉…….” 

옆구리가 금세 뻐근하게 결려 왔다. 

그래도 뛰는 두 다리를 멈출 수는 없었다.

마침내 멀리 떨어진 곳에서 희미한 빛이 숲 안으로 새어 나오는 것이 보였다. 

뤼미에르 들판에서 흘러나오는 빛이란 걸 이예주는 바로 알아차렸다.

빨리. 그가 완전히 버리고 가기 전에 조금 더, 조금 더 빨리. 그녀는 넘어질 듯 휘청거리는 상체를 무시하고 다시 한 번 발에 박차를 가했다. 

이윽고 빛이 흘러나오는 숲의 끝으로 힘껏 몸을 날렸다. 

여전히 산들산들 움직이고 있는 뤼미에르 꽃에서부터 눈부신 빛이 쏟아져 나와 눈을 강타했다. 

갑작스레 확 밝아진 시야에 그녀는 오만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리려다, 우뚝 움직임을 멈췄다. 

영원히 풀어 주지 않을 것만 같던 수갑까지 풀어 준 채 자신을 내버리고 간 줄 알았던 남자가 환히 빛나는 수많은 뤼미에르 꽃들 사이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하아, 하…….” 

잠에서 깨자마자 행한 거친 운동의 여파 때문인지 달리기를 멈춘 후에도 그녀는 오랫동안 거친 숨을 몰아 내쉬었다. 

꽤 먼 거리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런 그녀를 어떻게 알아챘는지, 남자가 거짓말처럼 이예주를 향해 흘끗 몸을 돌렸다. 

힘겹게 헐떡이는 그녀가 의아한 듯 남자가 한쪽 눈썹을 위로 휘익 쳐들었다.

“오래도 자는군.”

“…….”

“이제 일어나서 기어 나오는…….”

평소와 같이 산발을 하고 일어난 인간 여자의 흉한 몰골을 여지없이 조롱하려던 람은, 그 순간 황소처럼 흉흉한 기세로 달려오기 시작하는 그녀 때문에 하던 말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타닥, 타다다닥. 한달음에 달려온 이예주는 가속도 붙은 몸을 멈출 새 없이 남자의 가슴팍에 쿵 처박았다. 

윽, 거센 충격으로 인해 남자가 몇 걸음 물러나며 짧은 신음소리를 내었다. 

하지만 이예주는 떨어지기는커녕 오히려 손을 뻗어 남자의 허리춤을 절대로 놓치지 않겠다는 듯 꽉 끌어안았다. 

“흐, 흐으…… 도, 도망간 줄 알았잖아요.”

남자의 품에 정신없이 파고들며 이예주는 울먹거렸다. 

이렇게 제 손에 만져지는 남자의 실체를 보니 왈칵 울음이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

“자고 일어나니까 당신은 없고 사, 사슬은 다 풀려 있고…….”

“…….”

“버리고. 버리고 간 줄 알고 내가 얼마나, 얼마나 무서웠는데. 씨이…….”

남자의 허리를 끌어안은 팔에 조금 더 힘을 주며 마구 칭얼거렸다. 

남자는 그녀의 억지와도 같은 어리광에 한참이나 대답이 없었다. 

그의 시뻘건 시선이 닿는 정수리가 따끔거렸다. 

그럼에도 이예주는 남자를 한가득 끌어안은 팔과 그의 품에 파고든 얼굴을 떼지 않았다. 

남자가 결국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멍청한 소리.”

“…….”

“아직 계약의 대가도 받지 않았는데 두고 가긴 어딜.”

남자의 숨소리 때문에 까치집을 지은 채 공중에 붕 떠 있던 잔머리들이 살랑살랑 이마 근처를 간질였다. 

그 별것 아닌 접촉에도 이예주는 불안으로 인해 힘이 바짝 들어가 있던 턱 근육이 탁 풀리는 것 같았다. 

얼마나 갖은 상상을 머리에 담고 여기까지 뛰어왔던가. 

이곳에 온 후부턴 잠에서 깨어날 때 혼자 있던 적이 별로 없었다. 

2017년 과거에서 살 땐 몇 년 내내 기상도, 식사도, 취침도 모두 혼자 해결했다. 

때문에 그녀는 여태껏 조롱이와 람, 못해도 둘 중 한 명과는 꼭 붙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 내심 불편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언제부터 이렇게 타인의 온기에 익숙해진 걸까. 

아무도 없는 빈 공간에 홀로 덩그러니 있다는 사실을 깨닫자 다른 생각을 할 수도 없을 만큼 두려움이 몰려왔다. 

목이 콱 메었다. 다시 혼자 남겨진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사슬을 그렇게 좋아하는 줄은 몰랐군.”

그때, 이예주의 울적한 상념을 깨고 남자가 여상한 목소리로 뇌까렸다.

“원한다면 다시 채워 줄 용의가…….”

“아니!”

그녀는 번뜩 눈을 치뜨며 허겁지겁 고개를 가로저었다.

“사슬은 말이 헛나온 거예요! 정말요!”

좋아하긴 개뿔, 자신의 이빨이 강철로 되어 있다면 애초에 이빨로 와득와득 씹어 끊었을 것이다. 

사슬이란 자극 덕에 찬물 맞은 것처럼 정신이 번쩍 깨서 그런가. 

그녀는 일어나자마자 꼴사납게 뛰쳐나와 무섭다고 징징거린 제 꼴이 조금, 아니 아주 많이 민망해졌다. 

이예주가 넝쿨처럼 람의 등 뒤로 손을 둘러 허리를 꽉 껴안았던 것을 완전히 풀고 몸을 떼려던 때였다. 

이번엔 그녀의 허리 위로 넝쿨 줄기 같은 단단한 팔이 파고들었다. 

이예주는 몸을 채 떼기 전에 다시 남자의 품에 와락 안겼다.

“어…….”

등 뒤로 느껴지는 두 팔이 숨 쉬기 버거울 만큼 강하게 몸을 옥죄었다. 

남자가 마주 껴안은 탓이었다. 

답답함에 반사적으로 몸을 움찔거렸지만, 한 치의 반항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 허리를 휘감은 손에 힘이 꽉 들어갔다. 

이예주는 멍하니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시뻘겋게 타오르는 적색 눈동자가 그녀를 향해 빛나고 있었다. 

변함없이 피처럼 붉은, 인간을 향한 남자의 시뻘건 적의. 

인간을 바라볼 때마다 남자의 동공 색이 변하는 이유를 이제는 어렴풋이 알 것 같음에도 이예주는 심장 근처가 따끔거렸다. 

처음에 자신을 죽이려던 무시무시한 미친놈은 생각도 나지 않을 만큼 남자는 다정해졌다. 

그 분노에 찬 시뻘건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면서, 하는 행동은 이렇게 사람 가슴 터뜨릴 정도로 다정하니 참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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