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드 앤 매드 (162)화 (163/319)

다른 기척이 있을까 산장 주변을 휘적거리던 람이 다시 산장 안으로 되돌아왔을 적에, 인간 여자는 나가기 전 몸을 꼬고 발광하던 그 상태 그대로 잔뜩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그것 좀 놀렸다고 아직도 발작 중인 건가. 

입술 끝을 끌어 올려 픽 웃음을 터뜨린 람은 그녀가 누워 있는 침상 가까이 다가갔을 때에야 고롱고롱, 규칙적으로 숨을 고르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퍽이나 피곤했는지 이예주는 구부정하게 구부린 자세도 피지 않고 졸도하듯 잠든 상태였다. 

깊은 수면 속을 헤매고 있는지 람이 다가와 그 얼굴을 가까이 들여다보는데도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꺽일 듯 목을 옆으로 처박은 채 엎드려 자는 꼴이 여간 불편해 보였다. 

쯧, 람이 짧게 혀를 차며 손을 뻗어 엎드려 있는 그녀의 몸을 휙 뒤집어 바로 했다. 

성의 없이 대충 옷을 잡아끄는 손길 같았지만, 이예주의 몸뚱이는 본인이 뒤집기를 할 때보다 더욱 빠르고 신속하게 뒤집혔다. 

자세가 편해지니 잠을 자기가 더 수월해졌는지 색색 내뿜던 숨소리가 한층 더 깊어졌다. 

누워 있는 인간 여자 옆에 털썩 걸터앉은 람이, 잠든 그녀의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잠잘 땐 조용하군.”

깨어 있을 때는 그리도 쉬지 않고 조잘거리더니, 잘 때만큼은 굳게도 입을 다물고 있는 인간 여자의 모습이 그는 어쩐지 조금 신기했다.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는 한 쌍의 시뻘건 눈동자가 까만 어둠 속에서 형형히 빛을 냈다. 

그때였다. 침상의 머리가 있는 벽의 둥근 창 안으로, 구름에 몸을 숨기고 있던 달이 매끈하고 허연 몸뚱이를 내보였다. 

곧 산장 안으로 빛이 쏟아져 들어와 인간 여자의 얼굴을 슬쩍 비췄다. 

부드럽게 얼굴을 쓸어내리는 은은하고 아스라한 달빛에 이글이글 타오르는 것만 같던 핏빛 눈동자가 슬며시 가려졌다. 

그리 밝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눈앞이 환해지는 것이 싫었는지 인간 여자가 눈살을 찌푸리며 끙끙 앓는 소리를 내었다. 

람은 문득 손을 들어 옴팡지게도 찌푸려진 이예주의 이마 정중앙을 꾸욱 눌렀다. 

제 얼굴을 괴롭히는 줄도 모르고 그저 그의 커다란 손에 의해 환한 시야가 어두워지자 그녀의 찌푸려진 미간은 거짓말처럼 사르르 풀려 원상태로 돌아왔다. 

그 모습이 참으로 어이없어 남자는 허, 하고 헛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생각과는 다르게 그의 손은 여자의 이마에서 얼굴을 쓸어내리듯 천천히 내려왔다. 

고롱 고로롱, 코를 골아 대느라 진동하는 코 위에 손이 멈추자 남자는 괜한 심술이 들었다. 

태평하기도 하지. 애석하다는 듯 속삭이며 남자가 엄지와 검지로 여자의 코를 집어 숨을 막았다. 

그러다 또다시 미간이 찌푸려지는 것을 보고 선심 쓰는 것처럼 집었던 코를 튕기듯이 놓았다. 

“으응…….”

자신을 무던히도 괴롭히는 손길에 이예주가 칭얼거리며 고개를 반대로 돌리려 들었다. 

그러나 어디 그것을 눈 뜨고 가만히 보고만 있을쏘냐. 

그는 돌아가는 고개를 다시 잡아채어 아예 완전히 제 쪽으로 두었다. 

깊은 수면에 빠져 있어도 저를 건드는 것은 귀신같이 안 인간 여자가 입술을 삐쭉삐쭉 거렸다. 

달빛에 묻혀 잠시 가라앉았던 그의 두 동공이 일순 차갑게 번득였다. 

제 쪽으로 고개를 돌리느라 드러난, 달빛에 훤히 비춰진 인간 여자의 목. 쥐면 한 줌도 되지 않을 얄팍한 목덜미 위로 검붉고 푸르스름한 피멍들이 손자국을 따라 그악스럽게도 찍혀 있는 것이 그의 시선에 포착되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만든 그 버러지 같은 것의 머리통을 산 채로 뽑았음에도 불구하고, 인간 여자의 상흔을 다시 마주하니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머리통에 요망한 생각만 가득 담은 주제에.”

삐죽거리기를 멈춘 입가를 길고 모양 좋은 손가락으로 톡톡 건드리며 그가 중얼거렸다. 

이렇게 입 다물고 있거나 아까처럼 조신하게 좋아한다고 속살거리면 나름 곱게 여겨 어여쁘다 해 줄 텐데.

조금 놀려 먹었다고 뒤집어지는 것을 보면, 어린 것이 어찌 이리 성정이 거칠고 드센지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면서 감히 내 힘을 거부하겠다고?”

황조롱이가 더 이상 힘을 받지 말라 했다며 떼를 쓰던 인간 여자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러자 놀랍게도 람은 급속도로 기분이 더러워짐을 느낄 수 있었다. 황조롱이, 이것을. 

뿌드득, 섬뜩하게 이를 갈던 남자가 분노의 화살을 돌렸다. 

그는 여전히 깊은 잠에 빠져 있는 이예주의 턱을 번뜩 잡아챘다.

“입 벌려.”

굳게 입을 닫아 문 채 자고 있었지만, 람의 우악스러운 손길에 그녀의 입술은 조가비 열리듯 힘없이 열릴 수밖에 없었다. 

람은 제 손아귀에 턱이 움켜잡혀 다른 반항 없이 입을 벌리는 모습이 꽤 마음에 드는 듯 잠시 그 모습을 빤히 내려다봤다. 

그러고 이내 들짐승들이나 낼 법한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내며 불쑥 고개를 내렸다.

어린 것의 입속은 작달막하기 그지없어서 혀만 살짝 담그는데도 안이 금방 그득 찼다. 

따스하고 촉촉하고 말캉이는 점막이 혀끝에 닿을 때면, 코가 아릴 만큼 숨 쉬기 힘든 단내가 훅 풍겨 온다. 

람은 단내에 취해 정신없이 인간 여자의 입안을 헤집고 빨고 핥았다. 

산장에 들어오기 전에도 그러했다. 툭툭 가슴팍을 치는 느낌에 정신을 차리고 보면, 인간 계집이 숨이 딸려 벌게진 낯으로 저를 마구 밀어 대고 있는 것이다. 

어린 것이니 조심히, 섬세하게 다뤄 줘야 돼. 그렇게 생각했고 또 그렇게 하려 했다. 

하지만 훅 풍기는 달큼한 냄새에 람은 어느덧 정신을 잃고 잠에 빠진 인간 여자의 목구멍 깊숙이 혀를 집어 처넣었다.

“……으…… 우움…….”

전장 위의 폭군처럼 인간 여자의 입안에서 날뛰던 그의 이성이 돌아온 것은 이예주의 껄떡이는 신음 소리 때문이었다. 

탁하게 흐려져 있던 람의 붉은 눈에 천천히 초점이 돌아왔다. 

그는 잠시 망각했던 원래의 목적을 어렵사리 다시 상기했다. 

무엇 때문에 자는 것의 입까지 억지로 열어 깊숙이 혀를 처넣고 있는 것인가. 

람은 그것을 다시 떠올리자마자 이예주의 입속으로 후욱 숨을 불어넣었다. 

마주 대고 있는 그의 입과 인간 여자의 입 틈새로, 시꺼먼 덩어리 같은 빛이 살짝 새어 나왔다. 

그 뭉쳐진 덩어리는 인간 여자의 입을 한가득 점령하고 있는 그의 혀를 타고 꾸물꾸물 기어가 그녀의 식도 속으로 꿀꺽 넘어갔다. 

그 후에도 람은 혀를 통해 새까만 덩어리를 인간 여자의 몸으로 여러 번 불어 넘겼다. 

실은 꼭 입을 통해 힘을 불어넣지 않아도 되었다. 

손만 대어도 가벼운 상처들쯤이야 쉽게 없앨 수 있는 것이 검은 파편, 그의 힘이었다. 

그러나 그는 굳이 목구멍을 통해 힘을 불어넣는 것을 선택했다. 

검붉게 부어올라 있었던 목덜미의 멍 자국이 서서히 옅어져 완전히 사라지고, 피딱지가 다닥다닥 붙어 있던 찢어진 손등 위로 새살이 솟아올라 흠 하나 남기지 않고 상처를 모조리 덮은 후에도. 

이예주의 한구석도 빠지지 않은 온몸이 제 힘으로 가득 차오를 때까지 계속. 계속, 지속해서.

한참을 그렇게 검은 덩어리들을 억지로 삼키게 하던 남자가 이윽고 깊이 파묻었던 제 혀를 거두면서 집어삼키고 있던 그녀의 입술을 놓아주었다. 

마주대고 있던 입과 입이 질척하게 떨어지면서, 그들 사이에 은색의 실이 추욱 늘어졌다. 

이예주가 깨어난 상태에서 본 다면 기겁을 하고 괴성을 지를 만한 장면이었다. 그러나 람의 머릿속엔 그것이 더럽다는 생각 따윈 들지 않았다. 

오히려 그 짓을 통해 말끔해진 인간 여자의 목덜미, 그리고 그 몸뚱이에서 담뿍 넘치는 제 힘이 너무나도 만족스러웠다. 

그는 이예주를 만난 이래 가장 활짝, 이를 드러내고 아주 활짝 웃었다.

“이것을 갖고 싶다.”

시뻘건 눈동자가 알 수 없는 광기로 번들거렸다. 남자가 짓씹듯이 내뱉었다. 

흡사 누군가에게 오만한 명령을 내릴 때와 같았다. 

남자에게 벗어난 후 간신히 숨통이 트인 인간 여자는 다시 깊숙한 잠에 빠져드느라 대답할 리 없는데도.

“이것을 가질 것이야.”

검은 파편은 방금 전보다 더 강한 힘을 실어 읊조렸다. 

그때, 마치 그의 말에 답하는 것처럼 매우 작은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그 목소리들은 너무 작고 웅얼거리듯 속삭여서 처음에는 그저 바람이 웅웅 대는 소리 같았다. 

그러나 자세히 귀를 기울이면 기울일수록 그 목소리들은 점점 명확해지고 구체화되어, 종국에는 바람결이 귀밑머리를 스칠 때쯤 간신히 알아들을 정도가 되었다.

‘이 인간은 네 힘을 거부했어.’

작은 목소리 중 하나가 검은 파편에게 명확히 말을 걸었다. 

그 뒤를 따르는 것은 순조로웠다. 

‘맞아, 맞아.’

‘인간 여자는 네 힘을 싫어해.’

‘왜 힘을 불어넣어 줬어?’

‘왜 불어넣어 준 거야?’

‘왜?’

수많은 속삭임들이 검은 파편의 귓가로 쏟아졌다. 

정신이 없을 만한데도 검은 파편의 얼굴은 동요 하나 일지 않았다.

“이것이 아무데도 도망갈 수 없도록 하기 위해서다.”

검은 파편이 대답했다. 

‘하지만 네 몸체 위에서 네 힘을 가져 봤자 숨을 곳만 늘어날 뿐이야.’

‘검은 파편, 네 몸 곳곳에 네 힘이 잔뜩 도사리고 있는데, 힘을 불어넣어 봤자 무슨 소용이니?’

‘맞아. 숨을 곳만 늘어나.’

‘소용없어.’

한 줌 남은 검은 안개들이 검은 파편의 대답에 왕왕대었다. 

검은 파편은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말하는 것은 이것이 제 능력을 써서 도망가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힘을 불어넣은 것은 내게 종속하게 해 그것을 미리 방지하기 위함이지.”

‘하지만 인간 여자는 갈 곳이 있는걸?’

‘맞아, 맞아. 이 인간 여자는 과거로 돌아가고 싶어 해.’

‘과거로 돌아가서 제 어미를 살리려고도 하지.’

과거 얘기에 검은 안개들이 순식간에 흥분하여 시끄럽게 떠들어 대었다.

‘인간 여자는 과거로 갈 방법을 찾고 있어.’

‘그리고 과거로 갈 힘도 있어.’

‘맞아, 맞아. 과거로 가려 해.’

검은 안개들이 이예주에 대해 검은 파편에게 속속들이 고자질했다. 

“내게 감정을 알려 주기로 했다.”

검은 파편은 고개를 저었다. 

그는 확신했다. 

인간 여자가 제게 감정을 가르쳐 줄 수 있다는 것을. 

이 계집만이, 끝도 없는 지옥 길을 걷고 있는 자신을 구원해 줄 수 있는 것을. 

황조롱이를 살린 것처럼 제 힘, 제 온 능력을 불살라 자신을 구해 줄 것이다.

‘감정을?’

‘감정을 알려 줘?’

‘네게 감정을? 감정을?’

검은 안개들이 재차 묻자 고개를 가로로 내젓기만 했던 검은 파편이 이번에는 세로로 끄덕였다.

“그래. 이것을 죽이려다가 마음이 바뀐 이유, 또 이것을 가지고 싶은 감정에 대해서.”

‘…….’

“그것을 알면 인간들을 향한 이 증오와 갈증이 조금은 사그라질지도.”

한 줌 남은 검은 안개들은 검은 파편의 말에 잠시 침묵했다. 

그 침묵이 인간 여자가 검은 파편에게 감정을 가리켜 준다는 것이 믿기지 않아서인 건지, 아니면 또다시 시끄럽게 종알댈 거리를 찾기 위한 전초전인지는 알 수 없었다. 

‘아니야! 널 속이는 거야.’

그러나 곧 하나의 목소리를 시작으로 침묵의 이유가 후자임이 들통났다.

‘인간들은 거짓말을 잘해.’

‘널 버리고 과거로 갈 거야.’

‘시간처럼 널 버릴 거야.’

‘널 버리고 돌아갈 거야.’

‘널 버리고.’

제 주위를 정신 사납게 돌아 대는 검은 안개들 때문에 기분이 나빠진 검은 파편은 시뻘건 눈동자를 번쩍 빛내며 힘을 쾅 방출했다.

“그만.”

검은 안개들의 웅성거림이 뚝 그쳤다. 

검은 파편은 손을 뻗어 인간 여자의 머리채를 보란 듯이 와득 움켜쥐었다.

“나를 좋아한다고 했다.”

그래, 나를 좋아한다고 했지. 

나를 좋아한다고. 

내게 웃어 달라고 애절한 얼굴로 애원했다. 

제 눈과 마주치기 무서워 둘 데 없이 흔들리던 여자의 동공, 파르르 떨리던 눈꺼풀, 벌어진 사이로 단내를 풀풀 풍기던 입새까지. 

검은 파편은 그때의 인간 여자를 단 하나도 놓치지 않고 눈에 아로새겼다. 

인간 여자의 머리채를 가득 움켜쥔 그의 손에 와락 힘이 들어갔다.

“그러니 아무데도 못 가. 나를 좋아한다고 했으니까, 이건 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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