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드 앤 매드 (161)화 (162/319)

“……공식적으로는?”

뭔가 되게 오묘한 말인데. 

그럼 비공식적으론 멸종되지 않았단 소린가? 

어딘가 애매한 람의 말에 대해 생각하고 있을 때쯤, 남자가 문득 입을 열었다.

“이봐.”

“……네?”

저를 부르는 소리에 그녀는 화덕 안의 불꽃에 고정되어 있던 고개를 들며 대답했다. 

람이 돌연 제 옆을 손가락질했다. 

이예주는 그 행위가 뭘 말하는지 전혀 알아채지 못해서 그저 그 손과 얼굴을 멀뚱멀뚱 번갈아 바라볼 뿐이었다. 

남자의 눈살이 불쾌함으로 일그러졌다. 

제가 무의식중에 뭐 또 잘못한 게 있나? 

“왜요?”

이예주는 해맑기 짝이 없는 얼굴로 되물었다. 

남자의 미간에 잡힌 주름은 한층 더 깊어졌다.

“이쪽으로 와.”

“……예?”

“이쪽으로 오라고.”

그 말과 함께 남자가 박력 넘치게 제 옆 침상 위를 팡팡 내리쳤다. 

그쪽으로……? 당신 옆으로……? 

이예주는 순간 제가 제대로 이해한 것이 맞는지 헷갈려 두 손가락으로 저를 한 번 가리켰다가 남자가 내리친 자리를 가리켰다. 

“옆으로……요?”

그가 무뚝뚝하게 고개를 한 번 까딱였다. 

그녀는 짧은 순간 오만 가지 갈등이 일었다. 

제 옆으로 오라니, 저 더러운 성질 돋우기 전에 가긴 가야 하는데. 

그런데 가면 또 어떤 경악스러운 짓거리를 제게 행할지 두려워 도저히 엉덩이를 뗄 수 없었다.

“저, 저기…… 저 아무 잘못 안 했는데요?”

“…….”

“제 말은 그러니까…… 또 어, 엉덩이 맞을 정도의 잘못까진…… 아니, 그 정도로 잘못했긴 했지만요. 그래도 개고생을 하고 나서 나름 많은 반성을…….”

“스읍.”

남자가 혀를 차며 그녀의 주절거림을 차갑게 내리 끊었다.

“한 번 말할 때 재깍재깍 들어 처먹었으면 좋겠다고 했을 텐데. 대체 넌 얼마나 더 커야 그 망아지 같은 버릇을 고칠 수 있지?”

“그건…….”

이미 다 커서 못 고친다고 우물쭈물 대답하려던 이예주는, 순간 번뜩이는 시뻘건 눈 때문에 가까스로 망아지 같은 주둥이를 다물 수 있었다.

“이리로 기어 와. 당장.”

남자가 잇새로 짓씹듯 말을 하고 나서야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로봇처럼 화덕 옆을 척척척 걸어가 그의 옆자리에 살포시 앉았다. 

“와, 왔는데요…….”

이예주는 이를 달달달 떨며 바짝 긴장했다. 이제 얼마나 큰 수치가 자신을 덮칠 것인가. 

아직 맞은 것도 아닌데 벌써부터 볼기짝이 따끔거려 그녀는 규칙적인 간격으로 몸을 움찔거렸다. 

남자의 무릎 위에서 어린애처럼 엉덩이를 내줄 제 꼴을 생각하니 눈앞이 까매지는 것 같았다. 

지, 지금이라도 다시 반대쪽으로 도망갈까, 예주야. 

방금 전까지 제가 앉아 있던 반대편을 바라보며 애절한 표정을 지어 보이던 이예주는 금세 좌절했다. 

예전에 팔족 땅에서도 기민하게 위험을 알아채고 몸을 물리려 했지만, 제 옆의 미친놈이 어떻게 했던가. 

번개보다 더 빠른 속도로 제 목을 낚아채어 표본실 개구리처럼 꿈쩍도 못하게 내리눌렀다. 그러고는……. 

으으! 생각하기도 끔찍한 그때의 기억에 그녀는 진저리를 쳤다. 

관자놀이에 와 닿는 남자의 시뻘건 시선이 부담스러울 정도로 따갑게 느껴졌다. 

이미 도망가기엔 너무 늦었다. 

그녀는 정신없이 눈알을 굴리며 부디 두 대 이상은 때리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고 짜내도 몰래 도망가 조롱이를 위험에 처하게 했다는 죄목 외에 또 잘못한 게 없단 말이야. 

꼴사납게 볼기를 두들겨 맞을 생각에 창백한 얼굴로 떨고 있는 이예주의 머리맡으로 사형선고 같은 남자의 명이 떨어졌다. 

“벗어.”

그러나 다행인지 불행인지 무릎 위로 엎드리라는 말이나 엎드려뻗치라는 말, 몸뚱이를 엎어라와 같은 말은 아니었다.

남자의 집요한 시선을 애써 무시로 일관하던 이예주는 일순 들려오는 목소리에 멍청한 얼굴로 그를 돌아보았다.

“……예, 예?”

“후, 겉옷 벗으라고 했다.”

또다시 두 번 말을 반복하게 만든 제 앞의 인간 여자 때문에 람은 화를 참으며 깊이 심호흡을 했다. 

이예주는 그런 남자의 얼굴을 마냥 바라보기만 하다가, 곧 그가 한 말을 이해하고 입을 떡 벌렸다. 

그녀의 낯빛이 순식간에 새하얗게 질렸다가 곧바로 새빨간 복숭앗빛으로 물들었다. 

거, 겉옷을……. 

이예주는 새된 비명을 지르며 천천히 두 팔을 엑스 자로 모아 제 가슴과 어깨를 끌어안았다.

“……버, 버, 벌써요?”

“…….”

“아, 아직 키, 키스 한 번밖에 안 했는데…… 아, 아니, 한 번은 아니지만 그, 그래도 맨정신으론…….”

“…….”

“너, 너무 진도가 빠른 것 같은데요…… 어머, 어떡해.”

저 스스로 느낄 만큼 볼에서 터질 것 같은 열기가 쏟아져 나왔다. 

이예주는 가슴 앞을 가리고 있던 팔을 풀고 두 손으로 제 볼을 감싸 안았다. 

무, 물론 자신은 성인이고, 또 이 남자도 성인이고. 성인과 성인이 만나면 그…… 그 이렇고 저렇고 하는 건 알겠는데. 

그, 그래도 원래 다 이렇게 팍팍 진도를 빼서 연애 하루 만에 만리장성을 쌓는 건가? 

람의 눈을 피해 산만하게 다른 곳을 바라보며 그녀는 현대의 연인들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현대를 생각해 보았자 뭔가를 떠올릴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이예주는 초등학교 짝꿍 이후로 이성과 손도 닿아 본 적 없었고, 주위에 연애하는 흔한 친구 한 명조차 없던 불쌍한 인생이었기 때문이다.

“벗기 싫을 만큼 그 옷이 좋은 건가? 그럼 벗지 말고 목의 단추만 좀 풀지.”

그러나 심각하기 그지없는 이예주와는 다르게, 미적거리는 그녀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눈썹을 꿈틀거리던 남자가 방금 전보다 더더욱 대경실색할 소리를 지껄였다.

“그, 그건…….”

눈앞이 다 어지러운 기분이다. 이예주는 헉 하고 숨을 멈췄다가 이어 후, 후, 가뿐 호흡을 내쉬었다. 

나 이러다가 심장마비로 죽을 거야. 

아니면 코피가 터져 죽던지.

“……그, 그건 더 야시시 한데요?”

왠지 코가 아릿아릿하고 뒷골이 당기는 느낌이다. 

그녀는 한참을 버벅거리다가 간신히 속삭이듯 중얼거렸다. 

다, 단추를 뭐? 단추만 풀고 뭐? 그게 뭔지 별로 상상하고 싶지 않아도, 머릿속에서 자동으로 야시꾸리한 상상의 꾸러미들이 날개 돋친 듯 펼쳐졌다. 

옷을 입고. 옷을 입고…… 아아악! 이예주는 팔목부터 등골까지 소름이 쫘악 끼치는 기분이 들어 벌게진 얼굴을 두 손에 푹 파묻었다. 

망할. 불금에도 친구 하나 없어 집구석에 처박혀서 새벽 내내 주구장창 영화 채널만 돌려 본 것이 문제야. 

망할, 성인 매체! 망할 미디어! 

또 하나의 이예주가 침대 위를 방방 구르고 베개를 주먹으로 내려치고 난리를 치던 그때였다.

“무슨 소릴 하는지 모르겠군. 야시시? 허.”

기가 차다는 헛웃음이 들려왔다. 

듣는 사람조차 알 수 있을 만큼 어이없음이 가득 찬 목소리였다. 

응? 저한테 말도 안 되는 것을 대뜸 요구한 주제에 꼭 한심하다는 듯한 남자의 어조에 이상함을 느낀 이예주가 두 손에 파묻었던 고개를 슬쩍 들었다. 

그리고 그녀는 어이가 없다 못해 가출까지 해 버린 것 같아 보이는 얼굴을 바로 목도할 수 있었다. 

혼자서 상상을 하다가 난리까지 부리던 저와는 너무나도 대조될 정도로 근엄하고 말끔한 얼굴이었다. 

너무나 담백해서 꼭 성직자를 마주하는 듯한.

“정말이지, 네 멍청함을 어디서부터 뜯어 고쳐야 하는지 모르겠다.”

“…….”

“네 목을 치료하기 위해 단추를 풀란 말이 왜 그렇게 연결되는 거지?”

남자가 말했다. 

이예주는 마치 ‘치료’라는 마음을 태어나서 처음 들어 본 신생아처럼 얼빠진 얼굴로 그 말을 따라 물었다.

“치……료……?”

“그래, 치료.”

치료란 무엇인가. 치료란 병이나 상처 따위를 낫게 하는 행위다. 치료. 치료. 시발, 치료. 

여전히 붉은 기가 다 가시지 않은 얼굴로 멍하니 치료를 되새김질할 때쯤, 남자가 불쑥 팔을 뻗어 겉옷에 가려진 그녀의 목을 가리켰다.

“목을 다쳤지 않아.”

그다음으로 가리킨 곳은 허공에 우뚝 멈춰 있는 이예주의 오른쪽 손등이었다. 

까지고 찢어져 피딱지가 진 그 너덜너덜한 상흔에 남자가 미간을 와작 구겼다.

“여기, 손등도 다 까졌고.”

“…….”

“대체 무슨 짓거릴 하며 돌아 다녔는지 모르겠군.”

무슨 짓거리를 하긴. 강철 주먹이랍시고 네놈이 준 사슬을 둘둘 말고 선빵을 마구 휘두르고 다녔다. 

하지만 이예주는 과거의 저를 남자에게 설명할 정신은 없었다. 

여전히 치료의 충격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치료…….”

엄마, 이 새낀 날 수치사로 죽일 것이 분명해요. 그렇지 않다면, 그렇지 않다면 나한테 이런 모욕감과 민망함을 폭탄처럼……. 

차차 붉은 기운이 빠지던 이예주의 피부색이 시퍼렇게 질렸다가 곧이어 흙빛이 되었다. 

초 단위로 휙휙 바뀌는 인간 여자의 낯빛을 신기한 것을 보는듯한 눈으로 바라보던 남자가, 아이에게 장난은 그만 치라는 듯 타이르는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치료를 해야 하니 이리 더 가까이 와.”

“아악! 치료! 치료! 치료!”

이예주가 불현듯 두 손으로 제 머리를 쥐어뜯으며 발작하듯 소리 질렀다.

“미친! 미친! 나 치료 안 해!”

“뭐?”

“치료 안 한다고요! 안 해! 안 해! 흐흐흐으…….”

무조건 안 한다고 외치던 이예주는 끝내 귀신같이 음울하게 흐느꼈다. 

쪽팔려. 너무 쪽팔려서 죽을 것 같았다. 

그런 줄도 모르고, 뭐? 키스 한 번밖에 안 했느니, 진도가 빠르느니, 뭐?! 아악! 죽어야 해, 죽어야 해!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몸을 우겨 넣어 숨고 싶었다. 

인간 여자가 느닷없이 못생긴 홍당무만큼 시뻘게진 얼굴로 씩씩 소리치다가 후드를 끌어다 뒤집어쓰고 앞으로 벌렁 엎어져 통곡하기 시작했다. 

람은 황당함을 금치 못하는 심정으로 허탈하게 뇌까렸다.

“하, 너희 인간은 굳이 베풀어 주겠다는 도움을 이런 식으로 거절하는 것이 관례인가?”

“으흐으…… 나한테 대체 왜 이래…….”

이러면 꼭 욕구불만에 미쳐서 몸이 달은 여자 같잖아. 그런 거 아닌데. 그런 거 아닌데에! 

이예주는 방금 전의 자신이 너무 창피해 죽을 것 같아서 주먹으로 침상을 한 번 쾅 내리찍기까지 했다. 

그 미친 사람 같은 작태에 남자가 어쩔 수 없이 먼저 굽히고 들어가 그녀를 살살 달래었다.

“이봐, 이예주. 알겠다. 알겠으니, 어리광은 그만 피우고 일어나지.”

“아 몰라, 몰라! 나 이제 당신 도움 절대 안 받을 거니까! 나한테 이제 말 걸지 마요!”

“아플까 두려운 것인가? 통증은 순간이다. 힘을 받으면…….”

“됐어요! 그리고 조롱이가 당신 힘 더 이상 받지 말라고 했단 말이에요! 으어엉!”

괜스레 조롱이까지 핑계 삼으며 이예주는 람의 힘을 거부했다. 

이따위 상처, 지가 알아서 낫겠지!

저 혼자 착각하고 오해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이 모든 망할 쪽팔림이 남자로 인해 파생된 것만 같았다. 

부끄럽다. 부끄러워서 고개를 들 수가 없다. 

남자는 침상 위에서 온몸을 배배 꼬며 난리 블루스를 치는 이예주를 바라보다가 한참 후에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받기 싫음 됐다. 저만 손해지.”

그러고선 아무런 관계도 없는 것처럼 휙 일어나 자리를 떠 버렸다. 

끼이익, 탁. 

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와 함께 산장이 적막에 휩싸였다. 

쪽팔려 죽을 것 같은 자신을 위해 자리를 떠 준 것인지, 아니면 지고하고 위대하신 다른 뜻이 있어서 그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오히려 그 매정한 태도가 이예주를 더욱 약 오르게 만들었다. 

아악! 어으! 이런 빌어먹을! 

남자도 나갔겠다, 이예주는 갓 잡아 올린 활어처럼 몸을 펄떡펄떡 거렸다. 

그리고 머리를 쥐어뜯으며 자괴감에 휩싸였다. 

“으…… 흐흐으으…….”

좋아하는 거 취소야. 

내가 다시 네놈을, 네놈을 남자로 본다면, 그땐 이예주가 아니라 이병신이다. 이 병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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