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드 앤 매드 (160)화 (161/319)

“……좋아해요.”

그녀는 거의 울기 일보직전의 벌건 얼굴로 제 감정을 털어놓았다. 

붉어진 얼굴, 붉어진 눈시울이 파들파들 떨렸다. 

남자는 놀란 듯 전에 볼 수 없었던 경직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얼굴을 보자니 이예주는 정말 울고만 싶었다. 

아. 나는 이미 이 남자를 좋아하고 있었구나. 

언제부턴가. 이 남자의 시뻘건 눈을 볼 때면 가슴이 아리고, 이 남자가 하는 말에 바람에 휩쓸리는 종잇장처럼 이리저리 정신없이 흔들리면서도 이 남자의 입술에서 눈을 떼지 못하게 된 것이.

이예주는 울음을 참기 위해 미간을 삐쭉거리다가, 입을 꾹 가리고 있던 한 손을 들어 그의 볼에 가져다 대었다. 타인의 손이 볼에 닿자 남자가 동공을 크게 떴다. 

평소라면 언감생심 꿈도 꿀 수 없는 짓이었다. 

하지만 흠칫할지언정 그는 그녀가 막무가내로 가져다 댄 손길을 피하지 않았다. 

동쪽 대륙에서 끊임없이 생각하고 또 생각해 왔던 문제였다. 

왜 자꾸 당신에게 달라붙는 붉은 개가 정말이지 싫은 걸까. 

왜 자꾸 새빨간 눈으로 보는 당신이 미울까. 

왜 자꾸 이름을 불러 주지 않은 당신이 서운할까.

누군가에게 마음 줄 수 있는 태평한 상황이 아니란 것을 알면서도. 왜 자꾸 당신만 보면. 당신만 보면 가슴이, 심장이…….

“당신이…… 다른 신인류들을 부를 때처럼 내 이름을 불러 줬으면 좋겠고…….”

“…….”

“나를 볼 때 이 눈이…….”

그의 볼을 감싼 이예주의 엄지가 부드럽게 남자의 눈초리를 매만졌다. 

그녀가 눈물이 그렁그렁하게 매달린 두 눈으로 남자의 붉은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 빨간 눈이, 나를 볼 때도 검게 변했으면 좋겠고…….”

“…….”

“당신이…… 당신이, 나를 볼 때 웃어 줬으면 좋겠어.”

그뿐만이 아니었다. 당신을 보면 자꾸 예쁘게 보이고 싶고, 내숭도 좀 떨어 보고 싶고, 애교도 부려 보고 싶고, 스킨십 하고 싶고, 안고 싶고…… 키스하고 싶어. 

자신도 전혀 알지 못하는 사이 이렇게나 눈덩이처럼 커진 감정을 주체할 수 없어 이예주는 어찌해야 하는지 도통 감을 잡을 수 없었다. 

남자는 그런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을 뿐,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 또한 딱히 어떠한 대답이나 반응을 바란 것은 아니었다. 

정상적인 이성 관계처럼 어떤 감정을 되돌려 받고 싶어 고백을 했다기보단, 자각했을 때는 제 주둥이가 벌써 움직여서 모든 일을 그르치고 난 후였기 때문이다. 

그냥 헛소리라고 치부하고 무시해도 좋으니 이예주는 그저 자신을 역겹고 혐오스러운 것 보듯 보지만 말아 줬으면 좋겠다고 빌었다.

“……좋아한다고.”

한참 후에 남자가 입을 열었을 때, 혹여나 무슨 칼날 같은 말들이 자신에게 쏟아질까 두려워 이예주는 잔뜩 목을 움츠렸다.

“그럼…….”

“…….”

“넌 인간들 중 최초로 날 좋아하는 인간이 되겠군.”

하지만 놀랍게도 남자의 입에서 튀어나온 것은 그녀를 한순간에 어벙한 표정으로 만들 황당한 소리, 그뿐이었다. 

“예?”

이예주는 멍청하게 되물었다. 더 없나? 자신에게 뭐 더 할 말이 없나? 

목을 움츠리고 있던 그녀는 남자의 말에 입을 떡 벌린 채 그를 살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알 수 없는 표정을 짓고만 있을 뿐, 그녀가 내뱉은 말에는 별다른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미친…… 이예주는 제 앞의 미친놈을 좋아한다고 깨달았을 때보다 더 큰 혼돈 속으로 빠져들었다. 

사람이 좋아한다고 했는데. 아니지, 그냥 보통 사람도 아닌, 무려 인간인 자신이 좋아한다고 했는데. 뭐? 

최초로 저를 좋아하는 인간이 되었다고? 이런 미친놈이…….

남자의 경악스러운 말에 이예주가 혼비백산한 얼굴로 그를 물끄러미 바라볼 때였다.

“냄새가 나.”

“어, 어흐!”

남자가 느닷없이 고개를 모로 숙였다. 것도 모자라 안 그래도 박치기할 듯 가까운 거리에 위치한 얼굴을 마구 들이대는 것이 아닌가. 

이예주는 괴상한 소리를 내지르며 목이 꺾어져라 뒤로 물러섰다. 

금방이라도 뒤로 자빠질 것 같은 위태로움이 들었다. 

물론 여전히 남자에게 와락 팔이 잡혀 있는 탓에 뒤로 자빠지지도, 그렇다고 남자의 부담스러운 시선에서 멀찍이 떨어질 수도 없었다. 

넘어질까 두려워 등 뒤를 힐끗힐끗 곁눈질하며 그녀가 절박하게 외쳤다.

“내, 냄새는 무슨 냄새가 난다고……!”

“이래서 이상하다는 것이다.”

남자가 눈을 게슴츠레 뜨고 당황스러움이 그득 찬 그녀의 얼굴을 샅샅이 훑어보았다.

“이렇게 진창에서 뒹굴다 나온 꼴인데, 어째서 단내가 나는 거지?”

“어…….”

“요망한 것.”

이거 언젠가 겪었던 것 같은데. 묘한 기시감에 이예주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단내는 또 무슨 단내. 냄새가 난다면 구린내와 땀에 전 쉰내가 나겠지 단내는 무슨……. 

게다가 요망한 것이라니. 그것은 제가 붉은 개를 부를 때나 쓰던 표현이 아닌가? 

황당함에 이예주가 나는 요망하지 않다 주장하려던 순간이었다.

“내가 물은 감정에 대해서는 생각해 봤나?”

그녀가 채 입을 열기도 전에 남자가 조급하게 재촉했다. 

또다시 시작된 감정 타령에 이예주의 미간이 빠직 찌푸려졌다. 

아니, 네놈도 모르는 감정을 내가 무슨 수로 알아내리오! 

별 감정 타령에 휩쓸리다가, 괜히 좋아한다는 제 감정만 깨달아서 저만 심란하고 어지러워 죽겠구만. 

“대답.”

그러나 난감하기 짝이 없는 표정에도 막무가내로 묻는 남자 때문에 그녀는 울컥해서 소리쳤다.

“……모, 몰라요, 진짜! 내가 당신 감정을 어떻게 알아요!”

“흠.”

“아니, 그, 그게 아니라…… 아직, 아직은 다 파악하지 못했어요……. 다시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깊은 숨을 내쉬며 시뻘건 눈을 번뜩이는 남자 때문에 이예주는 허겁지겁 작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그녀는 정말인지 너무 억울하고 복잡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죽이고 싶었다면서! 

죽이고 싶다가 갑자기 낯빛 바꾸고 냄새 타령하는 감정 따윈 머리털 나고 생판 듣도 보도 못했다. 

빌어먹을! 방년 23세 모태 솔로가 처음으로 이성에게 한 고백이 왜 이딴 식으로 흘러가는 거야……. 

이예주는 흐끅 흐끅 훌쩍거렸다. 

그때, 여전히 닦달하듯 내려다보던 시뻘건 눈을 가진 미친놈이 터질 것처럼 상기된 그녀를 보며 명령하길.

“그럼 알아낼 때까지.”

우악스럽게 팔뚝을 붙들고 있던 남자의 손이 구렁이 담 넘어가듯 스르륵 팔을 타고 올라오더니, 이내 반대쪽 손과 함께 이예주의 양 볼을 와득 잡았다. 

양 볼이 남자의 두 손아귀에 짓눌려 붕어처럼 입이 툭 튀어나왔다. 

남자의 얼굴이 점점 다가오기 시작했다. 

가슴에서 펑펑 불꽃이 터졌다. ‘어, 어. 이것 좀 위험한데.’ 하는 생각이 드는 순간이었다.

“내 곁에 있어.”

닿을 듯 말 듯 닿은 입술 앞에서 남자가 뭐라 속살거렸다. 

입술이 근지러워. 내 곁에 있으라고 했나? 그가 말한 뜻을 다시 떠올리려던 이예주의 시도는 얼마 가지 못했다. 

부드럽고 물렁한 것이 도장 찍듯 꾹 누른다 싶더니 이예주의 입술, 내쉬는 숨 하나까지 남자의 입속으로 삼켜졌다. 

그녀의 시야가 허옇게 물들었다. 

아랫입술이 질척하게 빨렸다. 

툭툭 열어 달라는 듯 앞니를 두드리는 느낌에 아무 생각 없이 멍하니 이를 슬쩍 열었다. 

그러자 입안으로 몰캉한 것이 왈칵 밀려 들어왔다. 

츄윱, 츕. 사탕을 물고 쭙쭙 빠는 것만 같은 색스러운 소리에 번뜩 정신이 들었다. 

그녀의 눈앞에 보이는 것은 감겨져 있는 눈, 그 끝에 달린 고운 속눈썹이었다. 

여자보다 더 길고 가는 속눈썹이 촘촘하게 박혀 있는 모습이 너무 곱고 예뻐서 이예주는 한참 동안 눈을 부릅뜨고 그것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푸딩을 한 움큼 베어 물고 있는 것처럼 입속을 왕창 점령하고 있는 것이 그녀의 혀를 거세게 휘어 감고 제 집으로 질질 끌고 갈 때쯤 다소 민망한 생각을 했다. 

사슬에 묶인 몸뚱이도 모자라 키스할 때조차 질질 끌려가기만 하는구나, 이예주. 

그녀는 남자에게 잡힌 뺨을 뜨끈뜨끈하게 붉히며 한탄했다. 

그러나 그 한탄을 구체화하여 항의하는 대신, 게걸스럽게 저를 탐하는 남자에게 순순히 입과 혀를 내주고는 잠에 빠지듯 스르륵 눈을 감았다. 

그들 주위로 환한 태양 빛을 품고 있는 꽃송이들이 바람이 불지 않는데도 흔들렸다. 

마치 입맞춤을 하듯 서로의 잎과 잎을 스치게 하고 비벼 사부작사부작하는 소리를 내며. 

그렇게 밤이 깊어졌다.

*       *       *

람의 손에 이끌려 뤼미에르 들판 정반대편의 길로 걷다 보니, 주위는 금방 어둠에 휩싸였다. 

뤼미에르 들판만 바라보고 서 있어서 잘 몰랐는데, 들판 바로 뒤는 마치 북쪽 대륙을 연상케 하는 울창한 숲이었다. 

작은 숲이건 큰 숲이건, 희미한 달빛에 의존해서 걷는 숲길은 으스스하기 그지없었다. 

이예주는 괜히 겁이 나서 람의 팔에 매달리듯 그에게 바짝 몸을 붙이고 걸었다. 람은 그런 그녀를 잠깐 내려다보았지만, 딱히 별말 않고 다시 길을 걸었다. 

이예주는 어둠 속에서도 느껴지는 그의 시선에 조금 부끄러워졌다. 

방금 전까지 입술 부딪치고 할 거 다 해 놓고 부끄러워하다니 우스운 일이었지만, 아무튼 좀 그랬다. 

그들은 얼마 안 가 어둠으로 침잠된 나무 사이에 애매하게 세워져 있는 한 건물 앞에 도착했다.

“……여기가 어디예요?”

람은 답하지 않았다. 그저 건물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이예주는 무뚝뚝하기 짝이 없는 남자의 태도에 서운함을 느끼다가도, “밖에서 날 새고 싶은 것이 아니면 빨리 따라와.” 하는 남자의 말에 후닥닥 그를 따라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응? 산장?”

건물 안은 달빛이 정면으로 쏟아져 들어오고 있어서 오히려 건물 밖보다 더 밝게 느껴졌다.

뿌옇게 보이는 주변 광경은 실로 간단했다. 

나무로 이뤄진 침상 여러 개와 한가운데에는 불을 지피는 것 같은 화덕이 있었다. 

그리고 벽에는 대충 밥을 해 먹을 수 있는 식기구와 기타 잡다한 것들이 구석에 깔끔하게 정돈돼 있었다. 

아무도 없는 빈 산장임에도 불구하고 먼지가 쌓이지 않은 걸로 보아 누군가 정기적으로 관리하는 곳 같았다. 

람은 꼭 자주 와 본 사람처럼 문 옆에 걸려 있던 무언가를 낚아챈 후 산장 안을 이리저리 헤집고 다녔다.

치직, 그가 손에 든 것으로 어떤 짓을 하는 것과 동시에 곳곳에 놓여 있던 등불에 불이 들어왔다. 

마지막으로 그는 정중앙에 놓여 있는 화덕에 어렵지 않게 불을 붙였다. 

산장 안이 금세 환해졌다. 

“그거 부싯돌이에요?” 

이예주가 놀랍다는 듯 남자의 손에 들린 것을 가리키며 물었다. 

남자는 대답 없이 부싯돌을 원래 자리에 걸어 놓고는 화덕 앞 목침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서늘했던 산장 안은 얼마 안 가 후끈해졌다. 

이예주는 여전히 문 앞에 멀뚱히 선 채 신기한 눈으로 부싯돌과 오래된 산장 내부를 구경했다.

“앉지.”

보다 못한 남자가 앉기를 강요하지 않았다면 언제까지고 그렇게 서서 구경만 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근데 여기 이렇게 막 들어와도 되는 거예요?”

그녀는 걸음을 옮겨 남자의 맞은편에 있는 침상 위에 주저앉으며 물었다. 

앉으라는 대로 앉았는데, 람은 뭐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설핏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더니 이내 무뚝뚝하게 답했다.

“어린 붉은 개들을 양육하던 곳이다.”

“붉은 개요?”

“그래.”

“그렇지만…….”

예상치 못한 남자의 대답에 이예주는 크게 뜬 눈동자를 연신 굴리며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그렇지만 붉은 개는 마을에 있는 그 요망한 년…… 아니, 아니.”

실언을 할 뻔한 제 혓바닥 끝을 와득 깨물며 그녀는 황급히 말을 정정했다.

“아무튼 마을에 있는 붉은 개 빼고 모두…… 멸종되었다면서요?”

“그렇지.”

남자가 명쾌하게 인정하며 덧붙였다.

“인간들에게 공식적으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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