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드 앤 매드 (159)화 (160/319)

영원 같은 시간이었다. 

이예주는 여전히 쭈그려 앉은 자세로 거꾸러질 듯 목을 쳐들고 람의 얼굴만을 바라보았다. 

남자의 얼굴이 평소와 같이 무표정하기 그지없었다. 

그 입에서 도저히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다정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고는 믿기지 않았다.

환청을 들었나? 남자가 이름을 불러 주길 너무너무 고대하고 소원해서. 역시 환청을 들은 거겠지? 

하지만 환청이라기엔, 가슴이 왜 이렇게……. 

이예주는 문득 뻑적지근하게 아파 오는 제 가슴을 부여잡았다. 

그 바람에 ‘쩔컥―’ 하고 사슬이 우는 소릴 내었다. 

제때 호흡을 하지 못해서 이런 걸까. 아니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 어떤 병이라도 걸린 건가. 

가슴이, 심장이 너무 쿵쾅쿵쾅 뛰어서 아팠다. 

얄팍한 제 판막을 찢고 좁다란 갈비뼈 사이를 부순 뒤 뛰쳐나올 것처럼 아팠다. 

이예주는 제가 환청을 들었다고 여겼다. 

아니, 그렇게 여기기로 했다. 

그러나 그런 생각으로 넘기려던 그녀의 속임수 따윈 가뿐히 간파한 듯, 남자가 다시 이예주의 심장을 무자비하게 짓밟았다.

“이리 와, 이예주.”

람이 한 번 더 명령했다. 이예주란 말에 무슨 마법이나 주술을 걸어 놓은 것일까. 

그녀는 뱀의 똬리에 사로잡힌 개구리처럼 옴짝달싹도 못했다.

이 미친 세계로 ‘문’을 넘어온 뒤, 처음으로 온전히 불린 제 이름이었다. 

조롱이 또한 매번 인간 여자라는 말을 대신 하는 듯한 호칭으로서만 ‘예주 누나, 예주 누나.’ 하고 불렀을 뿐이지, 이렇게 성까지 붙여 온전히 불린 것은 지금 이 순간이 처음이라고 단언할 수 있었다. 

그것도 절대로 불러 줄 리 없을 것만 같던 남자에게서. 

숨이, 숨이 쉬어지지 않는다. 심장은 터질 것 같은데 숨이……. 

이예주는 갑자기 왈칵 겁이 났다. 

이, 이렇게 영영 숨을 못 내쉬다 죽어 버리면 어떡하지? 이렇게 숨을 못 쉬다간…….

여전히 자신의 얼굴을 멍청하게 바라보기만 할 뿐, 올 생각을 하지 않는 인간 여자가 답답했던 것일까. 

남자가 후 하고 짧은 한숨을 내쉬더니 뚜벅뚜벅 걸어오기 시작했다. 

람이, 이예주에게로. 

“이리 오래도. 왜 말을 안 들어.”

남자는 순식간에 그녀 앞에 다가와 우뚝 멈춰 섰다. 

꽤 멀리 떨어진 곳에서 낙서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몇 걸음 걷지도 않고 눈 깜빡할 새에 다가와 버렸다.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 있었나. 아직 마음의 준비도 안 했는데. 

이예주의 머릿속에 수십, 수백 가지의 생각들이 미친 듯이 들고 일어나는 동안, 남자가 천천히 그녀의 앞에 같이 쭈그려 앉았다. 

“이예주.”

물꼬라도 트인 듯 남자가 또다시 이름을 불렀다. 

그리고 반응하지 않는 그녀의 이마 정중앙을 검지로 아프지 않게 툭 건드렸다. 

정신 차리라는 의미의 가벼운 접촉이었지만, 이예주에게는 어마어마한 충격으로 되돌아왔다. 

허윽. 그녀는 여태껏 참아 왔던 숨을 격하게 토해 냈다. 

그 바람에 넘어질듯 휘청이는 이예주의 팔을 남자가 가까스로 잡아챘다. 

그녀는 저를 잡은 남자의 팔을 덩달아 덥석 잡으며 무언가를 쥐어짜듯 힘겹게 말을 뱉었다.

“……이, 있잖아요.”

람과 눈도 제대로 못 마주치는 이예주의 표정이 매우 불안해 보이면서도 또 무언가를 애타게 호소하듯 절박했다.

그녀는 제가 말을 꺼내 놓고도 어쩔 줄 몰라 혀를 꽉 깨물었다. 

묻고 싶은 것이 있었다. 

묻고 싶었지만, 그렇다고 람의 앞에서 진짜로 물을 생각은 없었다. 

참고 있던 숨을 한꺼번에 몰아 내쉬느라 정신이 없는 사이, 제 입이 멋대로 움직인 것이 분명했다. 

그렇지 않다면 미치지 않고서야 자신이, 그에게. 

이마 위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람의 시선이 따갑게 느껴졌다. 

그 따가움을 참을 수 없어 이예주가 흘끗 그를 훔쳐보다 되레 가슴만 덜컥 내려앉았다. 

말할 준비가 되길 기다려 주는 것처럼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시뻘건 동공은 그들 사이를 스쳐 지나가는 강한 바람에도 흔들림 하나 일으키지 않았다. 

자신과는 완전히 대비되는 그 모습에 이예주는 다시 참을 수 없는 감정에 휘말렸다.

“……왜.”

가까스로 비명과도 같은 새된 목소리가 입 사이에서 튀어나왔다.

“왜 이렇게…….”

“…….”

“왜 이렇게 늦게 왔어요?”

남자의 시뻘건 눈동자와 마주한 그녀의 눈이 바람 앞의 등불처럼 흔들렸다. 

람에게 이런 질문을 할 주제도 못 되면서 기어이 물은 자신의 이기적인 면모에 이예주는 헛구역질이 치밀어 올랐다. 

모두 자신이 자초한 일인데. 자신이 사막에서 동쪽 대륙으로 넘어와, 가만히 방구석에 처박혀 있으란 말도 무시하고 조롱이를 구슬려 밖으로 나간 탓인데. 

그것을 잘 아는데도 그녀는 그가 원망스러웠다. 

아니다. 사실 원망스러운 게 아닐지도. 

사실 이예주는 죽을 만큼 무서웠다. 

탄광 속을 헤쳐 나가는 내내 거짓말처럼 남자가 나타나길 기다리면서도, 또 한편으론 나타나지 않는 그가 두려웠다. 

정말로 제멋대로인 자신에게 질려 버린 걸까 봐. 

그래서 이제 더 이상 찾지 않는 걸까. 

이제 붉은 개가 있으니 자신 따윈 죽든 말든 상관없이 버리려는 건가. 

이제 네가 도망가든 말든 신경 쓰지 않을 거란 말이 나오면 어쩌지. 

이제 각자 다른 길을 걷자고 하면 나는 어쩌지. 

그 생각을 하며 칼에 찔린 남자와 대면했을 때는 정말이지, 자신을 죽이고 싶은 파괴욕까지 들었다. 

납치당한 후 족장의 저택에서 깨어나던 그때 이미 자신은 돌이킬 수 없게 되었는데. 

이미, 이미 이 시뻘건 미친놈을.

“도망가면 동쪽 대륙을 다 때려 부순다고 했으면서…….”

귀에 대고 속삭이는 것처럼 이예주의 목소리가 작디작았다.

“내가…… 내가 도망갔는데…….”

“…….”

“왜…… 이렇게 늦게 왔어요?”

이예주는 이것이 말도 안 되는 투정이라는 것을 잘 알았다. 

잘 아는데도 묻고 싶었다. 

이를 악물고 탄광에서 탈출을 하면서, 얼마나 셀 수 없이 남자의 얼굴을 그렸던가. 

매번 기회만 생기면 미련 없이 과거로 가 버릴 것이라 타령하던 자신은 위험에 처하자마자 잃어버린 엄마 찾듯 정신없이 람을 찾았다. 

그 정도로 치졸하고 졸렬한 인간이었다, 자신은. 

그녀는 정처 없이 흔들리는 눈으로 남자의 굳게 닫힌 입매를 바라보았다. 

예상치 못한 질문이었던 듯 남자의 입술은 한동안 떨어질 줄 몰랐다. 

“……널.”

이윽고 닫혀 있던 남자의 입술이 열렸을 때, 그녀는 어떠한 질타가 쏟아질지 무서워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찾았다.”

“…….”

“동쪽 대륙을 쥐 잡듯이 뒤져서 찾았지. 개미 새끼까지 풀어 네 흔적을 뒤쫓았다.”

감겼던 이예주의 눈이 다시 번쩍 뜨였다. 

지금 이 남자가 뭐라고. 

그녀는 놀라서 튀어나올 것처럼 커다래진 눈으로 그토록 바라보기 꺼려 했던 남자의 눈과 정면으로 마주쳤다. 

남자의 시뻘건 눈은 여전히 일렁임 하나 없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네 기척과 조금이라도 비슷하면 어디든 미친놈처럼 달려갔다. 아무리 멀리 있는 곳이어도. 달려가서 네가 있는지 확인했지. 하지만 인간 놈들이 대체 무슨 수를 썼는지 아무리 찾고 또 찾아도 네 기척이 느껴지지 않더군. 네 기척은커녕 널 찾는 나를 우롱하듯 동쪽 대륙에는 온통 내 힘, 내가 심어 놓은 힘의 흔적뿐이었다.”

“…….”

“그러고 나니, 네가 다시 그 빌어먹을 능력을 써서 도망갔다는 결론이 나오더군. 아마 그때 나는 네가 도망을 쳤다고 믿고 싶지 않았던 걸지도.”

남자가 한쪽 입술을 끌어 올려 자조적으로 웃었다. 

그 모습이 너무나도 처연해서 이예주는 다시 쿵 하고 가슴이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그럴 리가 없다고, 내가 왜 도망을 가겠느냐고. 

그녀는 고개를 저어 부정하고 싶었지만, 남자가 틈을 주지 않고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사슬에 묶여 있는 주제에 잘도 줄행랑을 쳤다고 생각하니까 미친 듯이 화가 치밀어 올랐지. 동쪽 대륙을 다 때려 부숴서 먼지 한 톨 남기지 않으려 했지만, 그조차 할 수 없었다. 그리하면 네 뒤를 쫓을 작은 흔적조차 사라질까 봐.”

“…….”

“그래서 더욱 너를 찾았다. 찾아서…….”

남자가 불쑥 손을 뻗어 이예주의 한쪽 어깨를 와락 움켜쥐었다. 

악 소리가 절로 나올 만큼 거센 악력이었다.

“내 손으로 목을 꺾어 죽여 버리고 싶었지.”

헉, 그녀는 소리가 들릴 만큼 커다랗게 숨을 집어삼켰다. 

도망간 줄로만 알았다는 남자에게서 당연히 좋은 소리가 나올 리 없다는 건 짐작했지만, 이렇게 무시무시한 말을 지껄일 줄은 정말 몰랐다. 

이예주는 지금이라도 어색하게 웃으면서 ‘장난이죠?’ 하고 물을까 고민했다. 

하지만 그런 농담으로 분위기를 완화시키기엔 자신을 내려다보는 남자의 두 동공이 진지함으로 범벅된 채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남자는 정말로 자신을 죽이려고 마음먹었던 것이다. 

섬뜩한 기분에 이예주가 마른침을 모아 삼켰다.

“……조, 좀 아픈데요…….”

그녀가 잡힌 팔을 살짝 뒤틀며 소심하게 고통을 호소하자 그때까지 팔을 부러뜨릴 듯이 꽉 쥐고 있던 손에서 힘이 조금 빠졌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완전히 풀어 줄 생각 따윈 처음부터 없었다는 듯, 남자의 커다란 손은 여전히 그녀의 팔을 억세게 옥죄었다. 

남자가 알 수 없는 감정으로 번들거리는 눈을 하고 이예주에게 짓씹듯 내뱉었다.

“그런데 참 어처구니없지. 분명 찾자마자 죽여 버리리라 생각했었는데…….”

“…….”

“네 그 하수구에서 구르다 나온 듯한 꼴을 보니까 모가지를 꺾어 버리겠다는 생각이 온데간데없이 싹 사라지더란 말이야.”

“하, 하수구…….”

이예주가 충격받은 얼굴로 하수구를 웅얼거렸다. 

그러나 그녀가 받은 충격 따윈 아랑곳하지 않고 남자가 계속해서 제 감정만을 밀어붙였다.

“게다가 네가 우는 모습을 보니, 여기가.”

남자가 이예주를 잡지 않은 다른 한 손으로 제 왼쪽 가슴 옆을 툭툭 쳤다. 

“조금 이상해지더군.”

남 이야기를 하듯 무심한 어투와는 다르게, 그는 여전히 살기 어린 시뻘건 동공으로 이예주를 응시했다. 

그녀는 남자가 내뿜는 살기에 숨도 크게 내쉴 수 없었다. 

아니, 살기인가? 남자의 눈에 담긴 것이 정말 살기가 맞는 건가? 

자신을 바라보며 형형히 빛나고 있는데, 그 눈빛이 등골이 오싹할 만큼 증오와 분노가 담긴 살긴가? 

아리송했다. 그녀가 확신할 수 있는 건 그의 눈을 마주하고 있는 동안 등골이 오싹하다거나, 자신을 향한 이유 모를 증오 때문에 간담이 서늘할 만큼 두렵고 억울하다는 생각 따윈 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예주는 어지러움과 혼란스러움이 마구 뒤섞인 얼굴을 숨길 수 없었다. 

그렇게 제 감정도 못 추스르는 그녀를 잡고 남자가 불현듯 물었다.

“……이 감정이 뭐지?”

“……예? 뭐, 뭐가요?”

“네가 내게 감정을 가르쳐 주기로 했잖아.”

“…….”

“이 감정을 뭐라고 하지, 이예주.”

람이 얼굴을 들이밀며 재차 물었다. 코가 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다. 

뒤로 몸을 물리고 싶어도 남자의 손아귀에 팔뚝을 잡혀 있는 탓에 그럴 수도 없었다. 

그의 시뻘건 눈동자가 뤼미에르 꽃 빛을 받아 홀릴 듯이 빛났다. 

바로 코앞에 남자의 눈, 남자의 오똑한 코. 남자의 붉은 입술. 입술. 입술이 이예주를 희롱하듯 어른거렸다. 

천천히 시선을 옮기던 그녀의 얼굴이 순식간에 타오를 듯 벌겋게 달아올랐다. 

미친. 미친! 이름은 왜 자꾸 부르고 그래! 사람 살 떨리게 왜 자꾸! 

“이 감정은 대체 뭘까, 예주야.”

남자가 곰곰이 생각하는 듯하더니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쿵, 쿵, 쿵, 쿵. 왼쪽 가슴팍 안에서 심장이 또다시 튀어 나가겠다고 아프도록 경련을 일으켰다. 

다시 이름이 불렸다. 

꼭 그녀에게 답을 재촉하는 것 같았다. 

몰라. 너도 모르는 네 감정을 내가 어떻게 알아! 나도 몰라, 모른다구! 이예주는 터질 것처럼 상기된 얼굴로 울먹거렸다.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이군.”

“…….”

“기껏 달래 놓았더니 왜 또 그런 얼굴을 하는 거지?”

남자가 정말로 모르겠다는 얼굴을 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환장하겠네. 정말 눈에 뭐가 씌었나. 왜 이 미친놈이 자꾸 귀엽게 보이는…… 

그 생각과 동시에 이예주는 뒤통수에 벼락이 내리치는 것과 같은 통렬한 깨달음을 얻었다. 

아! 그녀가 탄성을 내지르다가 황급히 남자에게 잡히지 않은 한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그렇지 않으면 꼴사납게 엉엉 울면서 비명을 지를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어떡해…….”

“…….”

“나 어떡해.”

이예주는 울음기가 가득 담긴 목소리로 우물거렸다.

“나…… 나, 당신 좋아하나 봐요.”

“……뭐?”

뜬금없는 말에 람의 동공이 천천히 확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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