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드 앤 매드 (158)화 (159/319)

“그게 뭐지?”

이예주가 이리 와서 보라고 외쳐도 남자는 조금 떨어진 뒤에 서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별로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오란다고 들어 먹을 놈이 아니란 것을 이미 뼛속까지 각인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뭐긴 뭐예요! 우리 엄마가 지어 준 내 이름이지! 이건 제가 살던 나라에서 이름 지을 때 자주 쓰던 ‘한자’라는 엄청 오래된 문자예요.”

남자가 가까이 와서 이름 부수를 보는 것도 아니었지만, 이예주는 굳이 친절함을 발휘하여 설명해 주었다.

“인간들이 소유욕 때문에 아무 이유 없이 이름을 짓는 건 아니에요. 물론 그러는 사람이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이렇게 자식들에게 멋진 이름을 지어 주려고 고심하기도 한단 말이에요. 저 사는 곳엔 작명소도 있었어요. 이름이 얼마나 중요한 건데.”

“그래서. 네 이름은 무엇이지?”

“아니, 무슨! 아직도 내 이름 하나 몰랐단 말이에요?!”

이 망할 인간아! 방금 전에 설명했잖아! 

이예주는 도끼눈을 뜨고 고개를 뒤로 돌려 망할 남자를 바라보고 씩씩댔다. 

돌아본 남자의 얼굴이 정말 모르겠다는 듯 어리둥절해 보이기만 해서, 더욱 천불이 났다. 

자신에게 손톱만큼의 관심이 있었다면, 조롱이가 골백번도 더 부른 ‘예주 누나!’ 소리를 조금도 기억 못할 리 없었다.

“이예주! 이예주! 미리 예! 예쁠 주! 미래에서 본 예쁜 아이라는 뜻이에요!”

그녀는 나뭇가지로 글씨를 쓴 땅 위를 콱콱 내리찍으며 거세게 외쳤다. 

이리 와서 좀 보라는 신호였지만, 남자는 팔짱을 낀 비딱한 자세로 조금도 움직이지 않은 채 그녀를 거만하게 내다보고만 있었다.

“그게 인간, 네 이름인가.”

“그렇다고요!”

“그렇군.”

하. 이런 물 없이 고구마 5개 까먹은 것만큼 답답한 자식아……. 

이예주는 절로 터지는 한탄을 삼켰다. 

불러 줄 것도 아니면서 그럼 물어보긴 왜 물어본대! 

그녀가 ‘흥!’ 하고 일부러 크게 콧소리를 내며 다시 등을 돌렸다. 

새침한 그 행동과는 다르게, 제 이름을 내려 보는 그녀의 얼굴은 울적하기만 했다. 

빌어먹을. 이름이 있으면 뭐 하나. 어차피 불러 주길 바라는 단 한 사람은 여전히 저를 다른 ‘인간’들과 다를 바 없이 취급하는데.

“……치, 당신은 당신 이름이 마음에 안 들어서 부르는 인간조차 죽여 대는지 모르지만, 나한테 이름은…… 아!”

람에 대해 잔뜩 서린 불만을 참지 못하고 구시렁거리던 이예주의 뇌리에 별안간 꽤 괜찮은 생각이 번뜩 스쳐 지나갔다.

“이름! 이름이 마음에 안 들면 이름 지은 인간들을 죽일 게 아니라, 다시 직접 지으면 되잖아요?”

지금껏 만나 왔던 신인류나 인간들은 하나같이 람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꺼려 했다. 

것도 모자라 그녀가 그것을 부르는 것 또한 저어했다. 

정작 람은 그다지 싫어하는 눈치는 아니었는데, 다들 그러니 왠지 혼자만 부르기도 좀 민망했다. 

이예주는 아주 오래전, 남자가 제 이름이랍시고 무뚝뚝하게 외자 하나를 던져 준 때를 떠올렸다. 

먼지가 쌓여 케케묵은 그 오래전을 용케 기억해 내고 무릎을 탁 쳤다.

“람, 람. 입에 착착 달라붙으니 예쁘기만 한데 아예 바꾸긴 아깝고. 뜻이 뭐, 고대어로 인간들이 섬기는 신의 아이? 신의 파편? 뭐 그런 것이었나? 하긴, 사실 저도 무교라서 그런 식으로 이름 짓는 거 별로예요.”

이예주가 그 마음 충분히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사색에 잠겼다.

“음…… 람이란 이름 말고 그 뜻을 바꾸면 어때요? 우리나라에서는 음보단 뜻이 더 중요해요. 아, 그렇다고 음이 안 중요한 건 아니고요. 람이 아닌 람순이, 람돌이 이러면 곤란하니까…….”

그녀는 람이 듣든 말든 제멋대로 중얼중얼하며 제 이름을 쓴 옆의 공간으로 조금 옮겨 앉았다. 

이번에는 제 이름이 아닌 람의 이름을 쓰기 위해서였다. 

이예주는 들고 있는 나뭇가지로 바닥을 그으며 한글로 ‘람’이라 적었다가 곧바로 그 위에 찍찍 두 줄을 긋고 고민에 빠졌다.

“흠. 람…… 뜻을 가진 한자가 뭐있지…….”

이예주의 굳어 있는 뇌를 풀가동하여 람이 들어가는 한자를 떠올렸다. 

하지만 뇌수가 코로 흘러나올 만큼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도 ‘쪽빛 람(藍)’ 하나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나 떠올린 한자가 단 하나뿐이라는 것보다 더욱 통탄스러운 일은 그 간신히 짜낸 한자어마저도 어떻게 쓰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온통 검은색으로 뒤덮인 남자의 전신에 또 다른 색이라곤 홍일점과 같은 시뻘건 눈깔뿐인데 거기다 대고 무슨 쪽빛 같은 소리를 논하리오. 

이예주는 속으로 제 머리를 쿵쿵 쥐어박는 상상을 하며 돌머리라고 저 자신을 욕하는 것을 끝으로 깔끔히 한자를 포기했다. 

남은 것은 유일무이하게 아는 제2외국어, 영어뿐이었다. 

이예주는 람이라 쓰고 두 줄로 직직 그은 바로 그 옆에 커다랗게 ‘RAM’을 적었다. 

이제 이걸 풀어서 뭔가 그럴싸한 뜻을 입혀야 하는데…… 

문제는 방년 23세 이예주가 창의력이라곤 쥐뿔도 없는 평범하디 평범한 대학생이란 점에 있었다. 

“음, 어…… R. R…… Red…….”

첫 자인 R은 쉬웠다. 남자에게서 지긋지긋하게 보아 왔던 그 시뻘건 눈동자만 생각해도 ‘레드’란 답이 바로 도출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다음이 문제였다. 

그녀는 Apple, Ant, Add와 같은 유치원생도 알 법한 지극히 1차원적인 단어를 생각 없이 끄적이다가 이내 “아, 몰라!” 하고 그냥 막 지르기로 결심했다.

“Red About Me! 이거 어때요!”

제가 캠퍼스 길을 오가며 자주 듣던 ‘Mad about you’라는 팝송 제목을 접목시킨 것이다. 

뜻은 나에 대한 빨간색. 

“아냐, 아냐! 이런 미친 뜻이 아니야!”

이예주가 창백한 얼굴로 자신의 돌대가리를 부정하며 나뭇가지를 부러뜨릴 듯이 쥐어 잡고 흙바닥에 써놓은 ‘Red About Me’ 위를 북북 긁었다. 

그런 제 모습을 람이 뒤에서 귀신 보듯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조금도 알지 못하는 눈치였다. 

람은 점점 정신을 내려놓고 더욱더 심도 있게 흙장난을 하는 인간 여자를 지금이라도 말려야 하는 건지 고민했다. 

하지만 지금 와서 말린다고 과연 저 고집불통이 하던 짓을 관둘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사이 이예주는 남의 이름을 가지고 또 다른 몹쓸 짓을 저지르고 있었다.

“어…… 레드, 레드, 레드…… 으…… 레드 앤 머취?”

힘 줘 긁은 탓에 흙더미가 오솔 오솔 일어난 그 자리 밑에 새로이 ‘Red and Much’가 적혔다. 

그리고 그것을 내려다보던 이예주는 “빨간색 그리고 많이? ……하.” 하고 구들장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미래에서 이렇게 창의력이 부족하여 골머리를 싸맬 줄 알았더라면, 어렸을 때 엄마가 틀어 준 방귀대장 뿡뿡이라도 열심히 챙겨 볼 걸. 

그녀는 당시에 세일러 문 따라 할 생각은 했어도, 창의력 키울 생각은 못한 제 과거를 땅을 치고 후회했다. 아오. 

Red. Red. Red…… 너무 레드에만 초점을 맞춰서 이렇게 말이 안 되는 건가? 

드디어 관점의 전환을 할 줄 알게 된 이예주 어린이는 마지막 이니셜 ‘M’으로 눈을 돌렸다.

“M, M…… M…….”

톡톡, 들고 있던 막대기 끝으로 땅을 두드리는 속도에 맞춰 주기적으로 M을 부르짖던 그녀는 불현듯 위에 제가 적어 둔 ‘Mad about you’라는 팝송 제목을 발견하고 “대박!” 하고 유레카를 외쳤다. 

“Red And Mad!”

이예주가 눈을 회까닥 뒤집고 부적을 써 내리는 신내림 받은 무당처럼 땅바닥에 미친 듯이 ‘Red And Mad’를 휘갈겨 썼다. 

어쩜. 어쩜 이렇게 저 미친놈에게 딱 맞는 단어를 코앞에 두고 헤맬 수가 있지? 

이건 자신이 평소에 남자를 욕할 때 속으로 노래를 부르던 바로 그 말이었다!

“람! 이거 봐요! 레드 앤 매드!”

이예주가 기쁨과 환희에 가득 찬 얼굴로 뒤돌아서 람을 불렀다.

“이거예요! 당신한테 정말 딱 맞는 이름이라고요!”

“그게 무슨 뜻인데.”

람은 인간 여자가 부러진 나뭇가지를 쥐고 어떻게 놀든 간에 조금도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저를 돌아보는 그 얼굴이, 그리고 태양빛을 심어 준 하얀 꽃 빛에 반사되어 반짝반짝 빛나는 그 눈이 너무나 곱게 웃고 있어서. 

망종 같던 인간 여자가 그 순간, 참으로 이상하게도 너무나 곱게만 보여서. 

조금만, 아주 조금만 장단에 맞춰 주기로 했다. 

그러자 인간 여자가 그 별거 아닌 것에도 뛸 듯이 기뻐하며 외치길.

“그거야 당연히! 이 시뻘겋고 미친……!”

‘미친놈이지, 이 미친놈아!’ 하고 신나게 외치려던 이예주는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번쩍 정신을 차리고 헙 하고 입을 다물었다. 

미쳤어, 미쳤어. 여기서 벼락 맞고 인생과 작별 인사 하고 싶니, 이예주?! 아니 될 소리지. 

저 남자 손에 죽는 것은 절대 아니 될 말이었다. 

여전히 저를 바라보며 형형히 빛나는 시뻘건 눈동자 때문에 오싹 소름이 돋는 것을 체감하며 이예주는 어색하게 웃었다. 

“아하하…… 어, 그러니까…… 그…… 이 ‘Red’가 빨간색이라는 뜻인데요. 제가 살던 시대에 쓰던 말이에요. 그리고 ‘And’는 ‘그리고, 함께’ 같은 뜻이고요. 어…… 그리고 마지막에 ‘Mad’는…….”

“…….”

“머, 멋있단 소리예요! 그러니까 당신 눈동자가 빨간색이니까. 빨갛고 그리고 멋있는…….”

멋있다는 오글거리는 소리를 해도 남자는 표정 하나 바뀌지 않았다. 

머쓱함과 양심의 가책이 교차하는 순간이었다. 

이예주는 남자를 바라보느라 뒤로 돌려 앉았던 몸을 조용히 바로 하며 다시 뤼미에르 빛에 밝혀진 글씨를 내려다보았다. 

Red and Mad

별다를 것 없이 흙바닥에 직직 써 놓은 글인데, 유독 그 글자에서만 번쩍번쩍 빛이 났다. 

전율이 일어나 몸이 다 떨릴 지경이었다. 

만족감에 이예주는 한 번 더 몸을 부르르 떨며 작게 속삭였다.

“어떻게 이렇게 귀신같이 딱 들어맞을 수가 있지? 진짜 완전 마음에 들어. 쏙 들어.”

그녀는 제가 창조해 낸 람의 또 다른 이름이 써 있는 자리를 신생아 다루듯 조심조심 어루만지며 “레드 앤 매드, 레드 앤 매드” 하고 몇 번 더 반복해서 불렀다. 

그러고선 꼭 글씨와 사랑에 빠진 소녀처럼 저도 모르게 푸흐흐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람은 제가 쓴 글씨를 보고 환히 웃는 인간 여자의 모습을 뒤에서 신기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단어 하나로 고뇌하고 화내고 울고 웃고. 인간 여자의 감정이 도저히 따라갈 수 없을 만큼 시시각각, 그리고 빠르게 변화했다. 

이름 하나가 대체 뭐라고 저리 기뻐할까. 

람은 이해할 수 없는 그 감정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시 한 번 물었다.

“네 이름이 뭐라고 했지?”

여전히 ‘Red and Mad’를 매만지며 헤실헤실 웃음을 터뜨리던 이예주가 와그작 얼굴을 구기고 소리쳤다.

“아, 진짜! 아까 말했잖아요! 불러 줄 것도 아니면서 그만 물어봐요!”

“…….”

“히히…… 시뻘겋고 미친…… 아니, 아니! 멋진. 시뻘겋고 멋진! 거참, 누가 지었는지 참 잘 지었네!”

다시 남자의 애칭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이예주가 다시 눈 녹듯 표정을 풀었다. 

그리하여 이예주가 완전히 마음을 편히 내려놓고 방심하던 바로 그때였다. 

그녀의 귀에 믿을 수 없는 환청이 들려온 것은.

“이예주.”

처음에는 그저 지나가는 똥개 부르듯 낮은 저음으로 ‘인간’ 하고 평소와 같이 부른 줄로만 알았다. 

다시 한 번 정확한 발음으로 불리지 않았더라면 그냥 어디서 환청이 들리는가 보다, 하고 무시하고 넘어갔을 것이다. 

“이예주.”

툭, 토로로록. 쥐고 있던 나뭇가지가 손에서 떨어져 뤼미에르 풀숲 저편으로 굴러갔다. 

그러나 그녀는 멀어지는 나뭇가지의 행방을 쫓지 않았다. 

그녀의 고개는 기름칠하지 않은 고철 로봇처럼 삐그덕 거리며 천천히 뒤를 향해 돌아가고 있었기에.

“……지금…… 뭐라고…….”

이예주는 말을 다 잇지 못했다. 

그러자 남자가 흘긋 제 앞을 턱짓하며 명령했다.

“예주야.”

남자가 이예주의 이름을 불렀다. 

숨을 쉴 수 없었다. 온몸을 구타당하듯 폭력적인 감정이 전신을 강타했고.

“이리 와.”

눈앞이 아찔하면서 아슬아슬하게 붙어 있던 이예주의 심장이 까마득한 절벽 아래로 뚝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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