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드 앤 매드 (157)화 (158/319)

그러고 보니 그 용병 대장 놈은 어떻게 됐을까. 죽었겠지?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계속해서 생각이 이어질 때쯤, 바쁘게 돌아가는 머리 회선을 강제로 중단하듯 남자가 말했다.

“시간 됐다.”

“네? 시간이요? 무슨 시간…….”

뜬금없는 시간 타령에 이예주가 어벙한 얼굴로 되묻는 사이, 남자가 여전히 제 가슴에 기대고 있는 그녀의 얼굴을 두 손으로 잡아뗀 후 억지로 고개를 돌렸다. 

두둑, 예기치 못한 운동으로 목이 꺾이는 듯한 무서운 소리와 함께 이예주의 얼굴이 정면으로 돌아갔다. 

바로 좀 전까지 그들의 앞은 그저 어둠이 내려앉아 으스스하기만 하던 무성한 풀숲이었다. 

그러나 이예주의 시선이 닿는 그 순간, 바로 앞에 있는 풀 줄기의 꼭대기에 팟 하고 동그란 불빛이 들어왔다. 

“어.”

이예주가 시야를 밝히는 불빛에 멈칫함과 동시에 팟, 팟 하고 여기저기에 불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보이지 않는 누군가가 불을 옆으로 옮겨 붙이듯 수백, 수천 개의 불들이 동시에 ‘화아악―’ 빛을 밝혔다. 

그저 빽빽하게만 자라 있는 잡초 더미라고 생각했던 그녀를 비웃는 것처럼, 주먹보다 조금 작은 하얀 꽃봉오리들이 제각기 강렬한 빛을 뿜어 대며 존재를 과시했다. 

세상에 둘도 없을 아름다운 들판이 나타났다. 

이예주는 화등잔만 하게 커진 눈으로 주춤주춤 람의 품에서 벗어나 그 앞으로 다가갔다.

“……뤼미에르.”

제 앞으로 펼쳐진 숨 막히는 장관을 넋을 잃고 바라보던 그녀가 탄성을 토하는 것처럼 그것의 이름을 작게 속삭였다. 

지하에서 보았던, 희미하게 탄광 불을 밝히던 그것과는 차원이 다른 밝기였다. 

이예주의 눈앞은 백야(白夜, 밤에 어두워지지 않는 현상 또는 그런 밤)였다. 

뤼미에르는 전등보다 환한 빛을 꽃봉오리 안에 담뿍 머금은 채, 온몸을 불살라 빛을 발하고 있었다. 

별 하나 보이지 않는 까만 밤하늘을 대신하듯, 백야의 하늘과도 같은 들판은 온통 꽃으로 이뤄진 별천지였다. 

어딜 봐도 눈부신 빛을 흩뿌리는 하얀 별, 별, 별뿐이었다. 

아름다운 그 광경을 담고 있는 이예주의 까만 눈동자 또한 별빛으로 점점이 수놓아졌다.

“……뤼미에르라. 웃기지도 않은 이름이군.”

그때, 가슴 벅찰 만큼 경이로운 뤼미에르 들판을 바라보고 서 있던 이예주의 곁으로 람이 홀연히 다가섰다. 

그녀는 천천히 그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어둠 때문에 잘 보이지 않던 그의 잘난 외모가 이제는 대낮에 마주 선 것처럼 훤히 보였다.

“그럼…… 이 꽃 이름이 뭔데요?”

이예주가 남자의 자태에 홀린 듯이 물었다. 

남자가 무심하다고 느껴질 만치 담백하게 대꾸했다. 

“없다.”

“그렇지만…… 이건 당신이, 평생 빛을 보지 못하도록 저주를 내린 공주를 살리기 위한 유일한 꽃이라 그러던데요? 빛을 담는 꽃이라 그래서 이름도 뤼미에르라고…….”

뤼미에르는 고대 인간 언어로 빛이래요. 고대어라니. 

이예주가 닭살이 돋은 팔을 슥슥 쓰다듬으며 덧붙였다. 

뤼미에르에 대한 이예주의 설명에 남자가 “저주.” 하고 음산하게 중얼거리다가 조소했다.

“누가 그런 되먹지도 않은 소릴 지껄이고 다니는 거지?”

“그, 그러게요…….”

이예주는 괜히 무슨 소리를 들을까 무서워 그게 제드라는 것은 굳이 밝히지 않았다.

“너희 인간들처럼 이름을 굳이 붙이자면.”

음. 람이 침음을 내며 잠시 고민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명명했다.

“이건 지랄 발광 꽃이다.”

“컥! 뭐, 뭐라고요?”

“지랄 발광 꽃이라고.”

아니, 어떤 명명법을 사용하면 뤼미에르라는 아기자기한 이름에서 저딴 식으로 바뀔 수 있지? 

역시 이 남자는 미쳐도 보통 미친 것이 아님이 틀림없었다. 

이예주가 별 해괴망측한 것을 다 보겠다는 표정으로 람을 바라보자, 그 역시 눈살을 찌푸렸다.

“왜 그런 표정으로 바라보지?”

“그걸 말이라고…… 아니, 됐어요. 그보다 왜 이름이 그렇게 흉측하게 바뀌는 건데요?”

이예주는 진심으로 심각하게 남자의 정신 상태를 염려하며 물었다. 

하지만 남자는 그녀를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눈썹을 휘익 위로 쳐들었다.

“말 그대로. 이것의 성정이 그만큼 방종하기 때문이지.”

“…….”

“이것은 원래 어둡고 습한 곳에서만 개화하는 습성을 가진 개체다. 한데 내가 동물들과 어떠한 거래를 한다는 것을 어찌 알았는지 용을 쓰고 나를 찾아와 저와도 계약을 하자더군.”

“이 식물이 계약을 하자고 했다고요?”

“…….”

“꼬, 꽃이랑 말도 할 줄 알아요?”

이예주가 뤼미에르를 손가락질하며 되묻자 남자가 심드렁한 태도로 고개를 한 번 까딱였다. 

그녀는 다시 질문했다.

“계약은 그럼, 무슨 계약인데요?”

“자신들도 다른 식물처럼 햇빛을 볼 수 있게끔 바꿔 달라더군.”

“햇빛?”

“그래. 그러나 이것들은 강한 빛에 노출되면 개화는커녕 시들어 죽어 버리고 만다.”

“……그게 뭐야.”

강짜를 부리는 거잖아? 

이예주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자 남자가 그에 격하게 공감하듯 이번에는 좀 더 성의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도 쫓아다니면서 질질 짜 대기에 불쌍히 여겨 결국 조건 없이 조금 바꿔 주었지.”

“어떻게요?”

“씨앗에 태양빛을 담아 주었다. 그 빛은 개화 직전 꽃봉오리 상태에서 발하게끔 되어 있지. 네가 가리키고 있는 바로 그것처럼 말이다.”

이예주가 손가락질하고 있는 방향을 가리키며 남자가 말을 마쳤다. 

말도 안 돼. 어떻게 그런……. 

이예주는 헤벌쭉 입을 열고 판타지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꽃과 대화하는 남자를 상상하다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정말 빛을 담은 것이 맞잖아?”

제드 놈이 꿈꾸는 것 같은 표정으로 말해 주었던 뤼미에르에 관한 전설이 완전 헛소리에 기반을 둔 것은 아니었나 보다. 

그런 생각을 할 즈음이었다. 

쏴아아― 한 차례 바람이 들판 위를 휩쓸고 지나갔다. 

마치 그녀의 혼잣말에 대답하듯 둥그런 빛을 단 꽃줄기들이 바람에 산들산들 양옆으로 흔들렸다. 

이예주는 그 찬란함에 다시 한 번 시선을 빼앗겼다. 

그러나 옆에 우뚝 서 있는 남자는 이 장관에도 아무런 감흥도 일지 않는지 오히려 피곤하다는 듯 읊조렸다.

“그런데 소원을 들어주고 나니 이번에는 또 다른 것을 요구하며 귀찮게 하더군.”

“……다른 거요?”

“막상 빛을 가지게 되니 꽃을 꺾어 가는 인간들이 급증하게 된 것이지. 지금은 인간들의 손으로부터 개화하는 것을 방해받지 않게 해 달라고 시끄럽게 빽빽거리고 있다. 지랄 발광 하듯이.”

“…….”

“그래서 지랄 발광 꽃이지. 다음에도 지랄 발광 하지 못하도록 이번에는 조건을 받아 정식으로 계약을 맺어야겠군.”

남자가 계약 얘기를 꺼내는 그 순간, 이예주는 판타지 영화보다 더한 상황을 마주할 수 있었다. 

바람에 휩쓸려 이쪽저쪽으로 한들한들 흔들리던 이파리들이 꼭 람의 말을 알아들은 것처럼 움직임을 뚝 멈췄기 때문이다. 

사부작사부작, 서로 몸을 비비고 부딪치며 수런거리던 소리들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들판 위로 적막이 가라앉았다. 

허 참, 이예주는 그 괴기스러운 행태에 기가 막힌다는 듯 웃었다.

“그래도 꽃인데 어떻게 그런 험한 이름을…….”

곱고 아리따운 꽃의 자태에 그런 몹쓸 말을 이름이랍시고 붙인 남자를 정말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그녀가 무심결에 들판에서 고개를 돌리던 찰나였다. 

문득 별 하나 없는 밤하늘이 반짝하더니 무언가가 서서히 산맥 저편으로 떨어졌다.

“어! 별똥별!”

이예주가 아이처럼 제자리에서 깡총 뛰며 람의 옷자락을 부여잡고 흔들었다.

“람! 저거 봐요! 별똥별이에요!”

그렇게 외치는 와중에도 반짝하고 또 하나의 운석이 뒤따라 떨어졌다. 하나도 모자라 쌍 별똥별! 이예주는 신이 난 얼굴로 소리쳤다.

“헐! 저 별똥별 처음 봐요! 아! 이럴 때가 아니지. 소원 빌어야 돼요, 소원.”

그녀는 람의 옷자락을 잡았던 것을 털어 버렸다. 

그러고는 그가 황당한 얼굴로 저를 돌아보건 말건 재빨리 두 손을 모으고 눈을 꾹 감았다. 

때마침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그녀의 앞머리를 부드럽게 쓸어 올렸다. 

그런 인간 여자의 옆면을 신기한 물체 보듯 바라보던 람은 무망중 또 한 번 지끈하고 가슴이 울리는 것을 느꼈다. 

바람결에 태양빛을 머금은 꽃들이 산들거릴 때마다 눈을 감은 인간 여자의 얼굴이 살랑 밝아졌다가 그을음 졌다. 

람은 게슴츠레 눈을 치켜뜨고 인간의 낯빛이 빛을 받아 말갛게 드러날 때마다 시뻘건 동공을 번뜩였다. 

남자가 알 수 없는 시선으로 저를 뚫어져라 바라보는 줄도 모르고 이예주는 간절하게 소원을 빌고 또 빌었다. 

기실 별로 시덥지 않은 것들뿐이었다. 이 미친 세상에서 죽지만 않게 해 달라는 것 따위의. 

제발 무사히 집으로 돌아가게 해 주세요. 

눈살까지 심각하게 찌푸리며 이예주는 별똥별님에게 간절히 빌었다. 

제발 집으로만 가게 해 주세요. 제발 누군가의 희생 없이 과거로 가는 ‘문’이 열리게 해 주세요. 과거로 돌아가서 제발 무사히 제 명만 채우고 죽게 해 주세요. 

아니, 사실은. 

사실은, 집에 가는 것이 정 불가능하다면. 

……제발. 제발 제 옆에 있는 이 사람이 다치지 않게 해 주세요. 그건 내가 너무 아프니까. 너무 아파서, 다시는 겪고 싶지 않으니까…….

“별똥별? 네가 붙인 이름인가. 해괴하기 짝이 없군.”

하지만 이예주가 미처 간과한 것이 있었다. 진지하게 기도를 하든 말든 훼방을 놓는 미친놈이 옆에 있다는 사실을. 

이예주는 비웃듯이 픽 바람 빠진 소리를 내는 남자 때문에 험악한 소리가 튀어나오는 것을 가까스로 인내하며 소원이나 마저 빌려고 노력했다. 

또 뭐 있더라. 뤼미에르 꽃 몇 송이 꺾어 갈 테니 제발 돌아가면 부자가 되게 해 주세요. 어, 또 제발…….

“별똥별이라니. 저건 별도 되지 못하는 것이다. 그저 거대한 에너지와 에너지끼리 충돌하여 발생한 소용돌이에서 튕겨져 나온 에너지의 작은 파편일 뿐이기 때문이지.”

“…….”

“이미 저렇게 힘을 흩뿌리며 지고 있으니, 곧 소멸되겠군. 아니면 저런 식으로 계속해서 떨어지다가 근처에 있는 더 강한 에너지에게 흡수되는 것이 저런 것들의 섭리…….”

“아, 좀!”

이예주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번쩍 눈을 치뜨고 남자를 노려보았다. 

“제발 남 소원 비는데 초 치는 소리 좀 그만할 수 없어요?!”

“네가 별똥별이라 이름 붙인 것은 힘이 약해 소원 빌 주체도 되지 못하는 것인데.”

“별똥별, 별똥별, 별똥별! 그거 내가 이름 안 붙였어요! 내가 붙인 거 아니거든요!”

“뭐. 되도 않는 것에도 이것저것 이름을 붙이고 소유욕을 드러내는 행각은 욕심 많은 인간들의 특징이니. 설령 네가 붙인 게 아닐지언정, 새삼 놀랍지도 않군.”

남자는 그녀의 발악에도 그저 어깨를 으쓱이며 산뜻하게 대답했다. 

네가 붙였건 안 붙였건 내 알 바 아니라는 심사가 그 태도에 그대로 묻어나왔다. 

으으! 그 얄미운 몸짓에 그녀가 부득부득 이를 갈다가 이내 몸에 힘을 풀고 허탈한 목소리로 뇌까렸다.

“당신이 뭔가 잘못 알아도 한참 잘못 알고 있는 것 같은데요. 모든 인간들이 아무 것에나 의미 없는 이름을 붙이는 것은 아니에요!”

이예주는 고개를 쑤욱 빼내고는 무언가를 찾듯 땅바닥을 두리번두리번 거렸다. 

곧 원하는 것을 찾아 반색을 하고 그것을 주웠다. 

부러져 있는 작은 나뭇가지였다. 

“자, 봐요!”

이예주는 네 머릿속에 박힌 그 고정관념을 깨 주겠다며 호언장담하고 자리에 쭈그려 앉았다. 

그리고 주워 든 나뭇가지로 풀이 나 있지 않은 맨땅 위에 죽죽 줄을 그었다.

“아. 잘 안 보이네.”

어둠 때문에 제가 그어 놓은 자국이 잘 보이질 않았다. 

씨이, 불만에 가득 찬 신음을 내뱉은 그녀는 쭈그려 앉은 상태로 굼벵이 기듯 굼슬 굼슬 움직여 뤼미에르 꽃 숲이 있는 곳까지 조금 더 다가갔다. 

그러다가도 “이 씨! 안 보여!” 하고 한 번 더 움직여 이번에는 완전히 빛나는 꽃 바로 밑까지 기어갔다. 

그 우습지도 않은 꼴을 어이없이 바라보며 람은 팔짱을 꼈다. 

이번엔 또 무슨 귀여운 짓거릴 보여 주려나, 이젠 기대 서린 심정마저 다 들 정도였다.

이예주는 나뭇가지를 주먹으로 움켜쥐고 땅 위에 낙서질을 했다. 

뤼미에르들이 그런 인간 여자를 옹호하듯 부는 바람에 몸을 맡기는 척하며 은근슬쩍 그녀가 대서특필하고 있는 땅 위를 밝게 비춰 주었다. 

한동안 열심히 무언가를 쓰던 그녀는 얼마 후 제가 쓴 글씨에 굉장히 만족해하며 해맑게 웃었다

“자, 이거 봐요! 미리 예! 예쁠 주!”

땅 위에는 커다랗게 ‘李豫姝’라는 한자어가 적혀 있었다. 

이예주, 바로 제 이름이었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