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벅저벅, 이예주가 엎어져 있는 곳으로 다가오는 소리도 잇따랐다.
사르락, 사르락. 남자가 제게 걸어오기 위해 풀숲을 헤치는 소리 또한 명확하게 들렸다.
순식간에 다가온 그는 이예주의 머리맡에 쭈그려 앉아 아래로 숙여져 있는 동그란 뒤통수에 한 손을 툭 얹었다.
“자빠져 잘 자다가 갑자기 일어나서 헤매는 꼴은 어린것들의 특징인가? 그레이의 어린 아들도 그러더군.”
남자가 중얼거렸다.
그 순간, 남자가 머리 위에 얹어 놓은 손을 타고 머릿속으로 시원한 기운이 파도처럼 밀려 들어왔다.
박하사탕을 으그적 으그적 씹어 삼킬 때처럼 알싸한 감각이 순식간에 물에 잠긴 듯 탁하던 머릿속을 맑게 했다.
현기증이 사라지면서 숲 한가운데에 우뚝 서서 심호흡을 할 때만큼 청량한 기분이 들었다.
이예주는 남자의 묵직한 손을 머리 위에 그대로 얹은 채 몽롱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지옥 같은 악몽 속에서도 온전히 자신만을 내려 보던 시뻘건 눈동자가 바로 눈앞에 있었다.
“정신 놓은 얼굴.”
“…….”
“흉하다.”
남자가 그녀의 머리 위를 꾹 눌러 덮었던 손을 떼고 이마 정중앙을 톡 건드리며 놀렸다.
하지만 그 행위는 이예주에게 기폭제나 다름없었다.
얼이 나간 사람처럼 람을 바라보던 이예주는 일순 벼락처럼 남자에게 달려들었다.
남자가 미처 저지할 새도 없었다.
그녀의 거침없는 손길이 남자의 장포를 열어젖혔다.
“뭐 하는 거지?”
제 품속을 파고들어 찢듯이 옷을 잡아 벗기는 인간 계집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남자가 무뚝뚝한 얼굴로 물었다.
하지만 이예주는 여전히 허옇게 질린 얼굴로 남자의 속살을 파헤치기에 여념이 없었다.
기어이 인간 여자가 남자의 검은색 내의를 잡아끌어 올려 대기 중에 살결을 노출시켰다.
다닥다닥 근육이 솟은 탄탄한 복근이 눈앞에 드러났다.
그럼에도 이예주는 거기에 만족하지 않고 손으로 빨래판같이 우둘투둘한 그의 아랫배를 더듬거렸다.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성추행을 한다고 오해를 살 만큼 농밀한 손짓에 남자가 결국 으르렁하고 거친 신음을 토해 내며 두 손을 잡아챘다.
“발칙한 것. 이런 짓은 어디서 배워 온 거지?”
“…….”
“수컷을 홀리는 이런 요망한 짓을 감히 누구에게 배워 온 거야. 응?”
남자가 여전히 이예주의 두 손을 낚아채 옴짝달싹도 못하게 하고 그녀를 채근했다.
인간 여자를 바라보는 람의 얼굴이 아주 조금, 보통 사람이라면 전혀 눈치채지 못할 만큼 미세하게 붉어져 있었다.
이예주는 미친 사람처럼 여전힌 남자의 딱딱한 배 한복판을 훑다가 문득 울먹울먹 거리며 말했다.
“지, 지혈해야 하는데…….”
“……뭐?”
“지혈…… 지혈해야 안 죽는데…….”
인간 여자의 황당한 말에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던 남자가 곧 와작 얼굴을 구겼다.
그사이를 틈타 인간 여자가 잡힌 손을 빼내려고 꿈지럭거렸다.
그녀는 다시 남자의 상체에 달라붙으려 들었다.
“지혈?”
좋지 않은 기세를 담은 시뻘건 눈으로 남자가 재차 물었다.
인간 여자가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따위 것을 왜 해야 하지?”
람이 좀체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까만 눈썹을 꿈틀거리며 되물었다.
이예주는 여전히 꿈속을 걷고 있는 듯한 정신 나간 얼굴로 답했다.
“카, 칼에 찔렸잖아요. 칼에…… 카, 칼에 찔리면 죽어요.”
“후…….”
결국 남자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기껏 머릿속에 힘을 불어넣어 주어도 이 맹한 것은 여전히 정신 차리지 못하고 악몽 속을 헤매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계속해서 자신의 배를 만지려고 꾸무럭거리는 꼴을 보자니 한숨밖에 나오지 않았다.
그는 어쩔 수 없이 특단의 조치를 취하기 위해 잡고 있던 인간 여자의 손목을 놓았다.
그것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양, 억압되어 있던 손목이 풀리자마자 계집이 득달같이 드러난 아랫배로 손을 뻗었다.
그녀가 다시 더듬거리기 전에, 람은 잡고 있던 것을 놓은 손으로 인간 여자의 뒤통수를 잡아 그대로 훅 끌어당겼다.
쿵!
이예주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채 짐작도 하기 전에 속절없이 끌려가 그대로 남자의 딱딱한 복판에 이마를 처박았다.
“억―!”
미친, 무슨 돌덩이야!
머리에 엄습하는 고통에 이예주가 저도 모르게 욕설을 내뱉었다.
흐리멍덩했던 정신이 번쩍 깨어나는 것 같았다.
“자. 자세히 보거라.”
제 배에 이예주의 머리를 집어넣을 기세로 뒤통수를 꾹 누르며 남자가 읊조렸다.
단단하기 그지없는 그의 뱃가죽에서 이마를 떼어 내기 위해 그녀가 고개를 쳐들었다.
하지만 얼마 못 가 뒤통수를 잡아 누르는 억센 힘에 또 한 번 쿵 하고 돌 같은 복근에 머리를 처박혔다.
“악! 이것 좀 놔요!”
“어허, 자세히 보래도.”
이 상태로 처박혀 있을 거면 계속 눈 감고 있던지. 남자가 버둥거리는 이예주의 정수리 위로 나직하게 덧붙였다.
그의 가슴팍에 손을 얹고 끙끙 밀어내던 그녀가 그 말을 알아듣고 꾹 감고 있던 두 눈을 슬며시 떴다.
헉. 아니, 이게 뭐야?
이예주는 코앞에 위치한 남자의 뽀얀 살결에 사레들리듯 컥 하고 격하게 숨을 들이마셨다.
이게 뭐야? 태어난 이래 아빠 등짝도 한 번 못 본 자신이 외간 남자의 맨살에 얼굴을 처박고 있었다.
외간 남자의, 외간 남자의…….
머리에 위잉, 위잉 하고 빨간 경고등이 들어왔다.
그러나 제 꼴이 얼마나 남세스러운지 알고 있으면서도 이예주의 눈은 남자의 탄력 있고 훌륭한 복부에서 못 박힌 채 떨어질 줄을 몰랐다.
꼭 화보 속에 나올 법한 초콜릿 복근을 그렇게 벌건 눈으로 살살 훔쳐보고 있을 때였다.
“어……?”
이예주의 입에서 아리송한 탄성이 짤막하게 흘러나왔다.
남자의 복근은 흠 잡을 데 없이 완벽했다. 되레 그 완벽한 복근 어딘가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 만큼.
어딘가 이상한 것이……. 자신도 모르게 드는 위화감에 그녀는 다시 한 번 남자의 뱃가죽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방금 전 나쁜 짓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우스울 만큼 이번에는 대놓고 샅샅이 훑어보았다.
한참을 보고 또 보고 나서야 이예주는 뭐가 잘못된 건지 깨달을 수 있었다.
“상처가…… 상처가 없어.”
탄탄한 남자의 복부 그 어디에도 칼에 찔린 자국이나 흉이 없었던 것이다.
아무리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보아도 상처가 없었다.
이예주는 기어이 남자에게 잡혀 있던 나머지 한 손도 미끄러트리듯 빼내고는 다시 남자의 단단한 근육을 더듬거렸다.
그 손짓이 매우 조심스럽고 섬세했다.
살살 매만져 보고 손톱 끝으로 남자의 촉각에 기별도 가지 않을 만큼 아주 살짝 찔러 보아도, 어디 하나 손에 걸리는 것 없이 매끈했다.
이예주는 천천히 남자의 배를 쓰다듬던 손을 내렸다.
그와 동시에 뒤통수를 강하게 내리누르던 남자의 손도 느슨해졌다.
“이제 다 보았겠지.”
이윽고 낮은 목소리가 머리 위로 느릿하게 떨어졌다.
이예주는 어느새 정신 나간 상태로 돌아와 멍한 얼굴로 고개를 들어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섬뜩할 만큼 시뻘건 눈동자가 변함없이 자신을 내려 보고 있었다.
“분명 칼에…… 칼에 찔렸었는데…….”
“…….”
“꿈…… 꿈을 꿨나?”
꿈인가? 분명 남자가 칼에 찔렸었는데.
남자의 동공만큼 새빨간 피가 날카로운 칼날을 타고 뚝뚝 떨어지던 것이 이렇게 생생한데.
그게 정말 꿈이란 말인가?
하지만 이예주의 꿈 타령은 얼마 가지 못했다.
남자가 차게 냉소 지으며 “꿈은 무슨.” 하고 가감 없이 현실을 깨우쳐 주었기 때문이다.
“인간들이 만든 조잡한 것으론 안 죽는다.”
그 말에도 멍청하게 남자를 바라보기만 하자 그가 “실망이라도 한 눈치군.” 하고 못된 소리를 지껄였다.
그러나 그것이 역효과를 불러일으킬 줄 미리 알았더라면 람은 절대로 그런 소리를 입 밖에 꺼내지 않았을 것이다.
유체 이탈이라도 한 듯 초점이 나가 있던 인간 여자의 두 눈동자가 서서히 젖어 들기 시작했다.
시뻘건 눈동자가 당황으로 물들기도 전에 자박자박 젖어 들던 인간 여자의 눈가에서 왈칵 물 덩이가 샘솟았다.
“왜 또…….”
질질 짜려는 거야.
남자는 타박하는 듯한 그 말을 내뱉지 못했다.
인간 여자가 삽시간에 아이처럼 울상을 하고 와락 달려들어 그의 허리춤을 잡고 매달렸기 때문이다.
“……죽지 마요, 죽지 마. 나 두고 죽지 마요. 죽지 마요.”
다시는 놓치지 않을 것처럼 이예주는 온 힘을 다해 람의 허리를 껴안았다.
남자의 빨간 동공이 전에 없이 커지는 것도 모르고 그녀는 미친 듯이 애원했다.
“너무, 너무 무서웠어요. 흐, 흐윽, 흐흑…… 다, 당신마저 나 때문에 죽을까 봐…… 너무, 너무…….”
비에 젖어 바들바들 떠는 강아지처럼 두 눈에서 구슬 같은 눈물방울들을 뚝뚝 쏟아 내며 애처롭게 자신을 올려다보는 인간 여자를 보자니, 람은 별안간 가슴께가 지끈 울렸다.
전에 겪어 보지 못한 감각이었다.
람은 그것이 대관절 무슨 감각인지, 어떠한 것에 기초하여 느끼게 된 것인지 되돌아보고 싶었다.
하지만 흐끅 흐끅 숨 넘어갈듯 울어 젖히기 시작하는 인간 여자 때문에 그럴 새조차 없었다.
하. 그는 한숨을 쉬며 결국 이예주 뒷머리를 부드럽게 감싸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
인간 여자가 꼼지락거리며 자꾸만 그의 가슴팍을 파고들었다.
한 손으로 쥐어도 질질 딸려 올 만큼 작은 몸이 경련하듯 간헐적으로 떨렸다.
아직 어려서 그런지 피를 보고 많이 놀란 것 같았다.
“괜찮아.”
“으으, 흐으…….”
“그러니 울지 마라, 인간.”
람이 인간 여자의 등 뒤로 두른 손을 들어 조심스럽게 그녀의 등을 토닥였다.
어디까지가 우는 아이를 달래는 정도인지 알 수 없어 최대한 힘 조절을 하느라 인간 여자의 등을 쓸어내리는 손짓은 어설프기 짝이 없었다.
수많은 흐름을 지나오는 동안에도 그가 친히 달래 주어야 할 어린 계집애는 존재 하지 않았다.
바퀴벌레의 말만을 듣고서 그대로 따라 하기가 그에게는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남자는 어색한 손길을 이예주의 등에서 거둬들이지 않았다.
이유 따윈 없었다. 그저 이 인간 계집이 우는 게 싫을 뿐이다.
그러고 보니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적, 이무기의 여의주를 빼앗았을 때도 그러했지.
그때도 이 계집이 빽빽 우는 것이 싫어 검은 파편의 조각까지 쥐여 주지 않았던가.
그렇군. 잠시 지난날을 회상하던 람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며 인정했다.
그는 제 품에 쏙 안겨 있는 이 계집의 얼굴에서 눈물 콧물이 쏟아지는 것이 싫었다.
싫다는 것은 증오와는 또 다른 감정이었다.
이예주는 꽤 오랜 시간 동안 람의 토닥임을 받은 후에야 간신히 울음을 그쳤다.
추위를 타는 것처럼 파르르 떨던 몸도 조금 나아졌다.
얼마나 물기를 짜 댄 건지 얼굴에 닿는 람의 옷자락이 축축하고 끈적했다.
스리슬쩍 눈동자를 굴려 남자의 장포를 보자니 유독 제가 얼굴을 처박았던 곳만 다른 곳에 비해 색이 더 검고 진했다.
드라마 속 여주인공도 아니고 곱게 눈물만 흘리진 않았을 테니 자신이 얼굴을 묻은 자리는 필히 갖은 체액으로 뒤덮였을 것이다.
제정신이 든 그녀는 저 때문에 옷을 버린 람에게 조금 미안해졌다.
차마 얼굴을 들 수 없어 여전히 고개를 푹 수그린 채 이예주는 작은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있잖아요…….”
“…….”
“……미안해요.”
그녀가 어렵사리 남자에게 사과했다.
남자는 바로 답하지 않고 한동안 침묵했다.
“뭐가 말이지?”
한참 후 남자가 물었다.
그러니까……
이예주는 말을 하려고 입을 열었다가 닫고, 다시 열었다가 도로 닫는 짓을 반복하며 말하기를 망설였다.
앞이 깜깜했다.
말을 해도 어떤 식으로 말해야 할지, 과연 제 말을 듣고 남자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상상도 가지 않았다.
이예주는 아랫입술을 질근질근 깨물었다.
이리 눈물 날 만큼 다정하게 대해 주는 것으로 보아 어쩌면 남자는 모르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대로 남자가 먼저 말을 꺼내기 전까지 말하지 않으면 이 평화가 깨지지 않을지도 모르는데, 그냥 이대로.
그러나 그녀는 두 눈을 질끈 감고 입을 열었다.
사실을 알고 남자가 자신의 목을 조른다고 해도 겸허히 받아들여야 했다.
“조롱이가.”
고작 이름 한 마디 꺼냈을 뿐인데, 이예주는 벌써부터 숨이 턱 막히는 것을 느꼈다.
또다시 눈가가 후끈해지면서 눈물이 핑 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