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작은 돛단배가 둥둥 떠 있는 항구에서 다시 만난 주인은 인간 여자를 품에 안고 있었다.
인간 여자는 정신을 잃은 채 추욱 늘어져 있었다.
주인님이 그런 그녀를 놓칠세라 두 팔로 단단히 끌어안았다.
그 모습을 본 붉은 개의 눈초리가 단번에 하늘로 치솟았다.
그녀는 무시무시한 살기를 뿜어냈다.
하지만 그것을 눈치채고 쭈뼛거리는 것은 나비뿐이었다.
“주인! 황조롱이가 아직까지 살아 있수다! 황조롱이가 말이오! 아직까지……! 어라? 인간 여자가 아닌가?”
산만 한 등치만큼 눈치라고는 쥐뿔도 없는 대왕 바퀴벌레는 나비가 아무리 눈알이 빠져라 눈짓을 해도 전혀 알아듣지 못했다.
그도 모자라 이예주가 봤다면 괴성을 지르며 혼절했을 더듬이를 아무렇지 않게 들이대며 말했다.
“주인! 이 인간 여자, 어디 아픈 거요? 얼굴이 창백하네? 감히 주인님의 품에 있는데 맥도 못 추리고 말이야. 많이 아픈가 보오.”
람은 바퀴벌레의 물음에 대답 않고 그의 등 위에 있는 황조롱이를 내려다보았다.
그 모습을 본 바퀴벌레가 조잘조잘 황조롱이를 찾으며 겪은 기이한 빛에 대해 줄줄 떠들어 댔다.
바퀴벌레의 말처럼 작은 생채기 하나 나지 않은 황조롱이의 본신을 본 람은 한동안 침묵했다.
잠시 사색에 빠진 듯 일자로 굳게 입을 다물고 있던 그는 한참이 지난 후에서야 마침내 무거운 입을 열었다.
“황조롱이는 죽지 않았다.”
“…….”
“다만 기력이 크게 쇠했기 때문에 당분간 정신을 차리긴 힘들겠군.”
“그, 그럼 황조롱이는 언제쯤 깨어나로라? 어떻게 치료해야…….”
“치료는 없다.”
“예에?!”
치료는 없다는 말에 세 마리의 신인류들이 모두 대경실색하여 주인님을 돌아보았다.
“그럼 엘로는 어떻게 해요, 주인님?”
“그저 자연히 깨어나길 기다리는 수밖에.”
붉은 개가 울먹이며 물었지만, 들려오는 답 역시 시원치 않았다.
그럼 죽은 거나 마찬가지이지 않로라…….
나비도 덩달아 울먹이며 작게 혼잣말했다.
람은 유일하게 담담한 표정인 대왕 바퀴벌레에게 명령했다.
“바퀴벌레, 너는 이대로 황조롱이를 데리고 북쪽 대륙 동물의 숲에 있는 까마귀 둥지에 가서 황조롱이를 돌보라는 명령을 전하도록.”
“주, 주인! 북쪽 대륙까지 가란 말이우? 곧 짝짓기 철이라 어서 서쪽으로 돌아가야 하는……!”
나 말고 이 도둑고양이나 붉은 개를 시키라고 생떼를 부리려던 바퀴벌레는 곧바로 번뜩이는 시뻘건 안광에 조용히 입을 다물고 더듬이를 수그렸다.
“나머지는 남아서 앞으로 급격히 변할 동쪽 대륙을 수습해라.”
마저 말을 마친 람은 인간 여자를 데리고 뒤로 돌았다.
그대로 걸음을 옮기려던 그의 앞길을 누군가가 다급하게 뛰어가 막아섰다. 형형하게 빛나는 눈으로 졸도한 이예주를 노려보던 붉은 개였다.
“주인님! 왜 그 여자를 데리고 가시는 거예요?”
붉은 개가 붉게 상기된 얼굴로 소리쳤다.
“그 여자는 인간이잖아요! 게다가 황조롱이를 죽게 만들었어요!”
“황조롱이는 죽지 않았다.”
“그래도 거의 죽을 위기에 처했어요! 다 이 여자 때문이에요! 이 계집이 마을 인간들과 다를 바 없는 이기적인 인간 계집년이라……!”
“그만.”
머리칼이 구불구불 춤을 출 만큼 격렬하게 외치던 붉은 개의 목소리는 서늘한 주인의 기세에 뚝 멈췄다.
“비켜.”
“주, 주인님……!”
언제나 다정했던 주인이 처음 보는 낯선 타인을 보듯이 자신을 바라보았다.
붉은 개는 자신이 잘못 들은 거라 여기고 다시 한 번 주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나 여전했다.
냉정한 그 얼굴이 자신을 귀찮은 물건 보듯 흘깃 내려다보고 있었다.
황조롱이를 죽음까지 이르게 했던 인간 계집은 더없이 소중하다는 듯 품에 고이 안고 있으면서……!
그 인간 계집을 품에 안고 어떻게, 어떻게……!
“흐, 흐윽! 시, 싫어요! 가시더라도 그 인간 여자는 마을에 놓고 가세요! 그러지 않으시면 절대 비키지 않을 거예요!”
“지금 비키지 않으면 소멸이다.”
허억! 주인의 입에서 ‘소멸’이라는 단어까지 오르자, 이미 와들와들 떨고 있던 나비와 눈치라곤 쥐뿔도 없던 대왕 바퀴벌레마저 숨넘어가는 소리를 냈다.
주인이 분노했다.
그 선명한 노기에 당사자도 아닌 그들마저 오금이 저릴진대, 그 분노를 고스란히 맞은 붉은 개는 과연 어떠할지 짐작도 되지 않았다.
붉은 개는 찢어질 만큼 눈을 크게 뜨고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주인의 분노보다 그의 얼음장 같은 언어에 더 충격을 먹은 것 같았다.
그러나 주인은 변했다. 그는 더 이상 두려움에 푹 젖은 채 발발 떨고 있는 붉은 개를 다정한 목소리로 쓰다듬어 주지 않았다.
“네 본분이 뭔지 잊지 마라, 붉은 개. 제 주제도 모르고 기어오르는 것들까지 수족으로 부릴 생각은 없으니.”
그 말을 끝으로 람이 붉은 개의 옆을 슥 지나쳤다.
인간 여자를 품에 안은 주인이 완전히 점이 되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붉은 개는 자리에 못 박힌 채 부들부들 몸을 떨었다.
“이, 이럴 순 없어…….”
투둑 투둑, 하얀 볼을 타고 옥구슬 같은 눈물이 떨어졌다.
이미 찢어져 피가 나는데도 붉은 개는 끊임없이 아랫입술을 짓씹으며 중얼거렸다.
“주인님이 이, 이러실 리 없어. 주, 주인님이 나한테…….”
“…….”
“이, 이게 다 그 인간 계집 때문이야! 그 인간 계집만 아니었어도! 그년이 주인님 옆에 붙어 있지만 않았어도……!”
“인간 여자 탓이 아니야.”
눈물을 뚝뚝 흘리며 인간 여자에 대한 분을 참지 못하고 퍼들퍼들 떨어 대던 붉은 개를 차갑게 일깨운 것은 대왕 바퀴벌레였다.
람의 앞에서 너스레를 떨던 바퀴벌레는 없었다.
냉정하고 이성적인 어조로 대왕 바퀴벌레가 붉은 개에게 현실을 말했다.
“물론 인간 여자의 영향이 없다고 볼 순 없겠지. 하지만 주인님은 변했어. 그건 인간들뿐만 아니라 신인류들의 탓도 있어.”
“집어치워! 우린 주인님께서 친히 선택해 준 새로운 인류야! 주인님께서 변하실 리 없어! 주인님께서! 주인님께서 우리에게……!”
“붉은 개 너도 변했는데 주인님이라고 왜 계속 정체되어 계시겠어? 인간을 사랑하던 네가 지금은 그 누구보다도 가장 인간을 증오하게 된 것처럼 주인님께서도 가장 우선시하는 순위가 바뀌신 것뿐이야.”
여전히 냉정함을 유지하는 바퀴벌레 때문에 붉은 개는 더 이상 화낼 기운도 나지 않았다.
대신 다소 신경질적이던 그녀의 예쁘장한 얼굴이 울상으로 왈칵 일그러졌다.
“흐흑, 그럼 이제 어떡해? 나는…… 나는 아직도 주인님이 너무 좋은데. 주인님이, 주인님만은 절대로 변하지 않고 계속 그대로였으면 좋겠는데…….”
어느덧 항구 주위에는 붉은 개의 머리카락만큼이나 불그스름한 해질녘 노을이 자욱이 내려앉아 있었다.
바다 저편 너무 수평선으로 야금야금 사라지는 찬란한 태양을 바라보며 바퀴벌레는 담담히 중얼거렸다.
“어쩔 수 없지, 뭐. 주인님은 지금까지도 그래 오셨고, 또 앞으로도 계속 변하실 테니까. 언제나 그래 왔듯 우린 그저 지켜보고 그에 맞춰 적응하는 수밖에.”
그 말을 끝으로 작은 황조롱이를 태운 바퀴벌레가 이윽고 검은 날개를 쫘악 펼쳤다.
힘차게 날갯짓을 한 번 하자 바퀴벌레의 거대한 몸은 가볍게 허공으로 ‘부웅―’ 날아올랐다.
휘이잉― 커다란 파도와 함께 거센 바닷바람이 항구로 몰아쳤다.
하지만 따가운 바람과 정면으로 맞서도 바퀴벌레의 커다란 몸은 끄떡없었다.
바퀴벌레는 거대해진 제 몸체가 마음에 들었다.
인간의 발톱만 한 크기에 불과했던 제 몸집이 수백 년에 걸쳐 이렇게 당당히 돌풍을 마주할 수 있을 만큼 커진 것처럼.
변화의 바람은 언제나 두려우면서도 한편으론 가슴이 두근거리는 오묘한 감각을 몰고 온다.
* * *
악몽을 꿨다.
너무 끔찍해서 생각하는 것도, 입에 담는 것도 진저리가 나는 그런 악몽이었다.
조롱이가 죽었다.
죽음으로 향하는 길 위에 위태롭게 서 있던 조롱이가 자신을 바라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조롱아, 이러지 마!
이예주는 소리쳤다.
조롱아, 제발 내게 이러지 마―!
목청이 터지도록, 기도가 찢어져라 그에게 다시 돌아오라 소리쳤지만 조롱이는 웃기만 할 뿐, 돌아오지 않았다.
쾅! 이윽고 조롱이의 옆 벽이 폭발했다. 어마어마한 잔재와 검붉은 혀를 날름거리는 화염이 아가리를 쩍 벌리고 조롱이를 집어삼켰다.
아아아아악― 이예주가 비명을 질렀다.
그 순간 TV 채널 넘겨지듯 눈앞이 탁 전환되었다.
듣는 사람조차 치를 떨 만큼 괴로운 비명을 지르던 이예주는 어느덧 익숙하고도 낯선, 시뻘건 눈을 가진 남자를 코앞에서 멍하니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를 움켜쥐려다 공중에 우뚝 멈춘 자신의 손이 온통 핏물에 젖어 파들파들 떨렸다.
흐. 흐으…… 그녀는 신음 소리를 내며 찬찬히 남자의 허리께를 바라보았다.
남자가 칼에 찔려 피를 흘리고 있었다.
그냥 찔린 것도 아니고, 등 뒤부터 관통한 칼의 끝머리가 남자의 뱃가죽을 뚫은 채 이예주를 향해 고개를 삐쭉 내밀고 있었다.
그 사이로 그의 눈동자 색과 같은 물들이 뚝, 뚝 떨어졌다.
그녀는 다시 허겁지겁 남자의 얼굴을 돌아보았다.
마치 칼에 찔린 틈으로 생명이 빠져나가는 것처럼 남자의 동공에서 시뻘건 색이 아래로 조금씩 사라지고 그 자리를 심연 같은 검은색이 메워 나갔다.
안 돼.
울음을 가득 머금은 채 이예주는 도리질을 쳤다.
죽으면 안 돼. 아직 당신한테 하고 싶은 말이 많은데.
그러나 그의 배를 뚫은 날카로운 칼날을 타고 끝도 없이 피가 흘러나왔다.
남자가 죽어 가고 있다.
자신은 그런 남자를 살리기 위해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뼛속까지 파고드는 무기력함에 이예주는 절망했다.
대체 왜. 대체 왜 나한테만 이런 일이 생기는 거지?
제가 칼에 찔렸어야 했다. 제가 미리 죽었으면 조롱이도, 람도 이런 위험한 일에 처할 리 없었을 것이다.
모두 나 때문이다. 모두 나 때문에…….
남자의 눈에서 시뻘건 빛이 점점 꺼졌다.
그녀가 미친 듯이 피가 흐르는 곳을 손으로 막고 더 이상 생명이 빠지는 것을 방지하려 해도 소용없었다.
싫어. 비릿한 피 냄새에 눈앞이 아득해졌다.
바늘로 심장 근처를 쑤시는 듯한 통증이 이예주의 전신을 덮쳤다.
싫어, 싫다구. 싫어. 싫어……
완전한 어둠으로 시야가 뒤덮이고―
“헉!”
이예주는 불현듯 눈을 번쩍 뜨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깊은 심해에서 수면 위로 한 번에 휙 끌어올려진 듯 코와 귀가 멍멍했다.
자신이 죽음 같은 악몽을 헤매다가 의식을 차리고 잠에서 깨어났다는 사실을 알아챌 수 있었던 것은, 거친 움직임으로 인해 아래쪽에서 ‘쩔그럭!’ 하고 시끄럽게 귀를 울리는 쇳소리 때문이었다.
이예주는 얼빠진 얼굴로 길게 사슬이 늘어져 있는 제 오른손을 올려다보았다.
두꺼운 철 수갑이 여전히 손목을 감싼 채 검은색 대리석처럼 흉측하게 변한 제 흉터를 가리고 있었다.
꿈인가? 조롱이가 죽고 그 남자가 죽어 가던 것이 그저 모두 악몽인가?
정신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이예주는 혼란스러운 얼굴로 상체를 완전히 일으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녀는 푹신한 풀로 덮인 땅 위에 앉아 있었다.
주위에는 진득한 땅거미가 내려앉아 있었다. 해 끝머리가 아직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어둡지만 주위가 어딘지 분간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런데도 그녀는 도통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생판 처음 보는 광활한 들판이었다.
족히 종아리까지 올 만한 크기의 무성한 풀들이 빽빽하게 자라 있었는데, 이예주의 몸은 바로 들판이 시작되는 경계 안쪽에 뉘여 있었다.
풀숲이야 그녀가 동물의 숲인지, 망할 놈의 숲인지에서 지겹도록 봤지만 이곳이 그곳과 같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여기가 어디…….”
다시 한 번 흐릿한 시선으로 앞을 스윽 둘러보던 이예주의 눈에 문득 어두운 시야 속에서도 번뜩이고 있는 두 개의 시뻘건 눈동자가 보였다.
이곳에서 유일하게 빛을 내는 지표였다.
멀지 않은 곳이었다. 아직 혼몽함 속에서 덜 깬 탓에 여전히 앉은 채로 그것을 바라보던 그녀는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하지만 당장에라도 풀숲으로 달려가려던 이예주는 몇 걸음 떼 보지도 못했다.
순간 눈앞이 핑 돌아 균형을 잡지 못하고 그대로 제자리에 철퍼덕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어…….”
왜 이러지. 격렬한 현기증이 머릿속을 덮쳐 온 세상을 핑핑 돌게 만들었다.
멀미가 나듯 눈앞이 노랬다. 네 발로 걸어 다니는 짐승처럼 앞으로 엎어진 채 헉헉 숨을 고를 때였다.
“쯧.”
환청처럼 그 남자의 혀 차는 소리가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