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험.”
머리 위로 익숙한 음성이 쏟아졌다.
“……할 뻔했잖아.”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그 낮은 음성과 함께 이예주의 심장도 덜컥 내려앉았다.
“손목을 자르지 않는 이상 절대로 풀 수 없는 사슬에 묶어 놓았는데도 아무 소용이 없군.”
“…….”
“대체 널 어떻게 해야 할까.”
남자가 땅바닥에 아무렇게나 늘어진 사슬을 발로 툭 건드리며 물었다.
쩔컥하는 소리에 이예주는 멍하니 고개를 들었다.
시뻘건 눈동자가 오롯이 자신의 얼굴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녀는 무어라 말을 꺼내기 위해 입을 빠끔 열다가 문득 제 손을 적시는 뜨뜻한 감촉에 고개를 내렸다.
그는 언제나처럼 검은색 옷을 입었기 때문에 바로 눈치채기 힘들었다.
제 손이 닿은 남자의 허리 근처에서, 시뻘건 물이 줄줄 흘러나와 바닥까지 뚝뚝 떨어지고 있다는 것을.
검은색 장포를 뚫고 뾰족한 칼 머리가 고개를 쑤욱 내밀고 있었다.
칼끝을 타고 생명이 흘러나오듯 남자의 피가 줄줄 흘러 그녀의 손을 적셨다.
“으…… 으흐…….”
이예주는 앓는 소리를 내며 다시 고개를 들어 남자를 바라보았다.
어느덧 눈앞이 뿌옇게 흐려져 남자의 얼굴이 잘 보이질 않았다.
눈시울이 후끈하더니 이내 볼을 타고 뜨거운 물 두덩이가 후두둑 떨어지기 시작했다.
제 얼굴을 보며 갑자기 눈물을 뚝뚝 떨어트리는 그녀 때문에 남자의 눈이 놀란 듯이 조금 커졌다.
“왜 우는 거지?”
남자가 불쑥 손을 올려 그녀의 양 볼을 감싸 떨어지는 눈물을 손가락으로 훔쳤다. 왜 우느냐고.
그 목소리가 너무 다정해서. 꼭 우는 자신을 걱정하는 것만 같아서, 이예주의 얼굴이 참을 수 없을 만큼 왈칵 일그러졌다.
“……피가, 흐으…… 피가 나는데요.”
“피? 아.”
마치 전혀 잊고 있었던 듯 시뻘건 눈동자가 잠시 의아함을 띠었다.
그는 이예주가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고 무뚝뚝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 때문에 우는 것인가.”
“으, 으으…….”
“별거 아니다.”
정말 별거 아닌 것처럼 대수롭지 않은 얼굴이었다.
하지만 이예주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다.
배가 칼로 뚫렸는데. 이렇게 피가 쏟아지는 어떻게, 어떻게 별거 아닌 일이라고. 어떻게…….
“그러니 뚝. 뚝 그쳐.”
남자가 다정한 손길로 눈물을 닦아 주며 이예주를 달랬다.
무심하기 그지없는 그의 목소리에 그녀의 울음은 더 격렬해져 숨도 못 쉴 지경에 이르렀다.
조롱이가 죽은 후조차 한 방울도 나오지 않던 눈물이었다.
그런데, 왜. 왜 이 망할 놈을 만나자마자 바보처럼 질질 짜는 것일까.
지하 탄광에서 개고생을 할 때, 기실 그녀는 미치도록 남자가 원망스러웠다.
내색하지 않아도 남자가 혹시나 자신을 구하러 와 줄까 기대했고, 오지 않는 그 때문에 더 이를 악물고 버텨야 했다.
남자를 만나면 왜 조롱이를 살려 주지 않았느냐고. 왜 와서 나쁜 족장 놈들을 모조리 죽이지 않느냐고. 왜, 왜 자신을 구하러 오지 않았느냐고, 나를 왜 이렇게 무서운 곳 한가운데 홀로 내팽개쳐 둔 거냐고 원망을 쏟아 낼 참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그녀의 책임을 모두 전가받을 나쁜 놈이.
이제야 간신히 만난 그 나쁜 놈이 배때기가 뚫린 채 하는 말이…….
“괜찮다. 괜찮으니까, 울지 마.”
이것도 다 내 잘못인가? 나 때문에, 내가 정말 마녀고 괴물이어서 조롱이도 모자라 이 남자까지 죽게 만드는 것인가.
나 때문에. 내가 멍청하기 때문에.
“……안 괜찮아.”
“……뭐?”
“하나도 안 괜찮아…… 하나도, 하나도…….”
이예주는 와락 남자의 장포를 움켜쥐었다.
당신까지 나 때문에 죽으면 어떡하지? 조롱이처럼 당신도 나 때문에 죽으면, 그러면 어떡하지?
그럼 정말 더 이상 못 버틸 것 같은데. 지금도 충분히 한계라서 이제 정말 죽을 것 같은데. 어떡하지? 싫은데. 정말 싫은데, 어떡하지?
아이처럼 남자의 품에 매달리며 꼴사나운 줄도 모르고 이예주는 바들바들 떨었다.
남자가 그녀의 이상을 눈치챈 듯 그녀를 떨어뜨리려 했지만, 이예주는 끊임없이 눈물을 뚝뚝 흘리며 고개를 뒤흔들 뿐 그를 놓을 생각 따윈 전혀 없었다.
“당신까지…… 당신까지 보내기 싫어…….”
“…….”
“싫어. 싫다구…… 싫…….”
절대로 남자를 놓지 않겠다고 했지만 가는 실처럼 아슬아슬하게 붙어 있던 이예주의 이성은 남자가 칼에 찔렸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부터 급속도로 붕괴돼 버렸다.
우르르. 뇌가, 눈앞이 무너진다. 싫다고, 죽어도, 죽어도 보내지 않겠다고 이야기를 하려던 이예주는 갑자기 시야가 까맣게 물드는 것을 느꼈다.
툭, 그의 옷자락을 움켜쥔 손에서 힘이 풀렸다.
다시 잡으려고 손을 뻗었지만, 모두 허사였다.
손끝 하나 움직일 수 없을 만큼 정신이 아래로 쑤욱 빠졌다.
그리고 그다음은 형광등이 뚝 꺼지듯 암전, 암전이었다.
* * *
끈 떨어진 인형처럼 예고 없이 천천히 허물어지는 인간 여자의 몸을 남자가 가뿐히 받아 냈다.
그의 품에서 축 늘어진 인간 여자의 얼굴이 시체의 그것처럼 새하얗기 그지없었다.
무슨 짓거리를 하며 쏘다녔는지 굳이 묻지 않아도 산발을 한 몰골을 보자면 대충 감이 올 정도였다.
쯧, 인간 여자의 볼에 난 작은 생채기를 지그시 바라보며 그가 짧게 혀를 찼다.
그러게 친히 묶어 두었을 때 가만히 방에 처박혀 있었으면 좀 좋았을까.
괜히 짓궂은 마음이 불쑥 들어 생채기 옆을 손으로 꾹꾹 누르던 람은 또 상처가 난 부분은 없는지 다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뱀처럼 탐욕스럽게 번들거리는 람의 시뻘건 동공이 인간 여자의 창백한 얼굴을 샅샅이 훑었다.
다행히 볼에 난 생채기를 제외하곤 딱히 상처랄 게 없이 맨둥맨둥한 피부를 자랑하는, 별 볼 일 없는 그 얼굴 그대로였다.
더 이상 다친 곳은 없는 건가. 무심코 눈길을 거두던 람은 문득 제 시선을 훅 잡아끄는 어떠한 것에 딱딱하게 낯을 굳히고 다시 그녀를 바라보았다.
투명할 정도로 파리한 인간 여자의 얼굴과는 극히 대비되는 검붉은 멍이었다.
왜 볼에 난 생채기보다 먼저 발견하지 못했나 의문이 들 정도로 선명한 손자국이 하얀 목덜미를 넝마주이처럼 만들어 놓았다.
순간 그의 눈에서 오싹한 안광이 번쩍 쏟아져 나왔다.
람이 누군가를 찾듯 품에 안은 인간 계집에게서 눈을 떼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와아악! 크윽! 꺽!
서로 찌르고 쑤시고 죽이는 행위가 반복되고 있는 주변은 완전히 아수라장이었다.
“그만.”
람이 나직하게 읊조렸다.
그러나 신인류가 아니면 모두 적이고, 인간이 아니면 모두 살생해야 한다는 광기에 물든 장 내의 구성원들에게 그 소리가 들릴 리 만무했다.
남자의 미간이 설핏 일그러졌다.
그가 한 손으로 인간 여자의 허리를 꽉 끌어안아 제게 기대게 한 후, 나머지 한 손을 허공에 슬쩍 들었다.
말로 해서 안 듣는 것들을 다룰 방법은 죽음뿐일지니.
“멈춰.”
람의 다시 한 번 읊조렸다.
그와 동시에 콰쾅―! 수십 개의 날벼락이 내리쳤다.
그것은 사진을 찍을 때 플래시가 번쩍하고 사람들을 한 번 비추는 것과 비슷한 광경이었다.
드넓은 광장이 아주 잠시 섬광으로 점멸된 직후, 상황은 이미 끝이 났다.
어디선가 후끈후끈하고 고슬고슬한 탄내가 연기를 타고 사람들의 콧속으로 솔솔 불어왔다.
“허, 허억! 이, 이게……!”
빛에 빼앗겼던 시각이 돌아온 사람들은 제 앞에 펼쳐진 무시무시한 광경에 입을 떡 벌릴 수밖에 없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저와 엎치락뒤치락하며 뒹굴고 있던 신인류가 또는 인간이, 시꺼멓게 탄 목탄처럼 딱딱하게 경직된 모습으로 바닥에 엎어져 고약한 탄내를 폴폴 풍겼다.
마른하늘에 날벼락을 맞고 쓰러진 자들 사이에는 딱히 이렇다 규정할 수 있는 규칙이 아무것도 없었다.
인간만 맞아 죽은 것도 아니었고, 신인류만 맞아 죽은 것도 아니었다. 완전한 무작위였다.
한 발자국만 더 움직였으면, 혹은 한 발자국만 더 뒤에 있었다면, 지금 숯덩이가 되어 누워 있는 것은 바로 자신이 되었을지도 모르리라.
광장 안의 모든 신인류들과 인간들의 머리에 그 생각이 떠오를 때쯤, 장내가 찬물이라도 끼얹은 것처럼 조용해졌다.
“이제 좀 조용해졌군.”
그 살 떨리는 광경 속에서 한 남자만이 유유히 들었던 손을 도로 내려놓으며 말했다.
개미 새끼 한 마리 나다니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만큼 고요한 가운데 그 목소리는 유독 크게 느껴졌다.
시뻘건 눈동자가 느릿하게 좌우로 움직이며 주위를 살폈다.
남자와 눈이 마주치는 살아 있는 것들은 그것이 신인류가 됐건 인간이 됐건 간에 하나같이 헉 하고 숨을 멈추며 주춤거렸다.
“거, 검은 파편……!”
남자와 스치듯 눈이 마주친 인간 한 명이 마치 귀신이라도 본 듯한 얼굴로 외쳤다.
주, 주인님이야……! 주인님! 검은 파편, 검은 파편…….
그것이 시발점이 된 듯 이곳저곳에서 기함하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모두의 경외심 어린 이목이 까맣게 타들어 간 시체들 한가운데에 우뚝 서 있는 람에게로 온전히 쏟아졌을 때였다.
이때가 기회라고 생각한 듯 제드를 억센 힘으로 떨쳐 낸 족장이 주제도 모르고 검은 파편의 앞으로 헐레벌떡 뛰쳐나갔다.
제드가 미처 다시 잡을 틈도 없을 만큼 재빠른 몸짓이었다.
“크, 크큼. 자, 자네가 거, 검은 파편, 람인가?”
부름을 받은 람이 그를 돌아보았다.
소문으로만 들어왔던 그 시뻘건 눈동자가 자신에게로 향하자 흠칫 몸을 떤 족장은 이내 용기를 그러모아 검은 파편에게 탕탕 소리쳤다.
“나, 나는 도, 동쪽 대륙의 주인이자 자, 자네와 다, 다음 계약을 맺을 이 마을의 족장…….”
“이것을 이렇게 만든 이가 누구지?”
남자가 말더듬이의 말을 끊고 물었다.
그가 꼭 소중한 것을 다루는 양 인간 여자의 목덜미를 애틋하게 쓰다듬었다.
그러나 그 조심스러운 손길과는 다르게, 족장을 바라보는 시선은 무섭도록 차가웠다.
여자를 쓰다듬는 남자의 손을 따라 눈동자를 스륵 돌리던 족장은 남자의 손가락 사이사이로 벌겋고 퍼렇게 변색된 피멍들을 발견하곤 아차 싶어 혀를 깨물었다.
망했다. 족장이 사색이 된 얼굴로 생각했다.
필히 오랜만의 사냥에 신이 난 용병 대장 놈이 저지른 짓이렷다.
“네가 한 짓인가?”
족장의 변한 낯빛을 기민하게 알아차린 남자가 지나가며 인사를 하듯 평온하게 물었다.
“흐, 흐헉!”
하지만 족장은 그 안일한 목소리에도 급히 숨을 들이마시며 제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남자의 시뻘건 동공이 알 수 없는 살기로 번뜩이고 있었다.
여기서 말 한 마디 잘못했다간 그대로 벼락 맞아 죽을 것이다.
“아, 아니오! 내, 내가 그런 것이 아니오! 저, 절대로 내가 그런 것이 아니라…….”
손과 고개 모두를 필사적으로 내저으며 행위를 부정하던 족장이 황급히 주위를 탐색했다.
그는 람의 뒤를 보고 옳다구나, 얍삽한 눈을 빛냈다.
“저, 저놈이요! 모, 모두 다 저놈이 그랬소! 저, 저놈이 그 여자의 목도 조르고 카, 칼로 찌르려고도 했소! 저, 저놈 혼자 도, 독단으로 말이요!”
족장이 검은 파편의 뒤를 향해 손가락질하며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그의 손가락을 따라 광장 안 모든 이들의 시선이 우르르 그쪽으로 쏠렸다.
자꾸만 추욱 늘어지며 그의 품에서 흘러 나가려는 이예주의 허리를 꽉 고쳐 안으며 람이 천천히 뒤를 돌았다.
“흐, 흐으!”
람의 피로 물든 손을 수전증 걸린 사람처럼 파들파들 떨며 우두커니 서 있던 남자가 보였다.
그는 모든 사람들의 시선, 그중에서도 특히 검은 파편의 시선이 자신에게로 쏟아지자 미친 듯이 고개를 내저으며 뒷걸음질 쳤다.
“요, 용병대장이야!”
인간들이 아닌 신인류들의 무리가 먼저 그를 알아보고 소리쳤다.
같은 인간 동료조차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그의 몰골은 처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