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드 앤 매드 (151)화 (152/319)

“제, 제, 제드!”

설마하니 제 아들이 직접 나서서 죄인 계집을 막아 설 줄은 상상도 못했던 족장의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부릅뜨였다. 

그런 제 아버지의 반응에 벌벌 떨면서도 제드는 이예주의 앞에서 비키지 않았다.

“아, 아부지! 레, 레이디는 아무 잘못 없어요! 저, 정말이에요!”

“이, 이런 머, 멍청한! 내, 내 설마, 설마 했지만, 이, 이런 쓸모없는 놈 같으니! 이, 이……!”

족장이 못생긴 홍당무처럼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뒷목을 잡았다. 

“어떻게 할까요, 족장님?”

옆에서 이예주를 잡으려고 주춤주춤했던 복면 부하 중 하나가 족장에게 물었다. 

족장은 차마 제 아들을 잡아 두드려 팰 수는 없는지 씩씩거리며 숨을 고르다가 명령을 내렸다.

“큼큼, 내, 내 아들은 아무런 잘못이 없으니, 포, 포박하지 말게! 자, 잘못은 다 저 시, 신인류들의 첩자 질을 한 계집과 포, 폭동을 일으킨 시, 신인류들이 저지른 게야! 이, 이 시각 이후 도, 동쪽 대륙의 주인이자 마, 마을의 아버지와도 같은 보, 본 족장은 같은 인간임에도 이, 인간들을 우롱한 저, 저 죄인 계집을 포박하고 포, 폭동을 일으켜 아, 아무런 죄도 없는 민간인들을 인질로 붙잡은 저, 저 폭도들을 소, 소탕하는 계엄령을 선포하는 바이다!”

족장 놈이 선포한 계엄령에 인간 무리도 신인류들도 크게 술렁거렸다. 

그 중심에 서 있던 이예주는 “하…….” 하고 지친 한숨을 내쉬었다. 

그냥 자신은 쉬고 싶을 뿐인데. 이쪽도 자신을 적시하고 저쪽도 자신을 적시하고, 개나 소나 자신을 죄인이라 불렀다. 

제가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잘못한 게 있다고 해도, 또 그게 얼마나 잘못된 일이라고. 

이예주는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저를 잡으러 다가오는 손길이 있건 말건 신경 쓰지 않고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때, 휘익― 그녀의 머리 옆을 스치고 가마 위에 우뚝 서 있는 족장의 머리통을 향해 날아오는 물체가 있었다. 

퍼억! 족장이 이예주의 뒤쪽에서 던져진 돌에 맞고 쓰러졌다.

“아악!”

이마 정중앙에 맞은 탓에 육중한 몸이 가마 위에서 떨어질듯 기우뚱거렸다. 

그러나 투실투실한 덩치에 비해 생각보다 재빠른 반사 신경으로 족장 놈은 떨어지지 않고 간신히 제자리에 안착했다. 

놈의 이마 한가운데에서 주르륵 한 줄기 피가 흘렀다. 

“웬 물기가…….” 하고 제 이마를 더듬던 족장 놈이 손에 묻어나는 벌건 핏자국을 보고 눈깔을 허옇게 뒤집었다.

“누, 누구냐! 어, 어떤 발칙한 놈이……! 아악!”

퍽― 

커다란 돌덩이가 다시 한 번 날아든다 싶더니 족장이 다시 한 번 두 손으로 머리를 부여잡고 자리에 주저앉았다.

이예주는 소리가 나는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한 신인류가 무리에서 뛰쳐나왔다. 

그는 이예주와 제드를 훅 앞질러 선 채 날이 시퍼렇게 서 있는 살기등등한 식칼 끝으로 족장을 가리켰다.

“이런 쳐 죽일 놈!”

“뭐, 뭐, 뭐야!”

“우리 자식들을 납치해 가둬 놓고 우리가 폭도들이라니! 우린 네놈이 저지른 만행들을 고스란히 돌려주는 것뿐이야!”

“맞소! 맞소!”

신인류 한 명을 기점으로 뒤에 있던 신인류들이 이를 부득부득 갈며 와르르 앞서 나와 족장이 저지른 죄악들을 쏟아 냈다. 

수많은 신인류들의 살기에 족장이 겁을 집어먹고 주춤거리다가, 이내 고개를 쳐들고 악을 썼다.

“보, 본 족장이 데, 데리고 간 것은 기, 길을 잃은 아이들이거나 부, 부모가 없는 아이들이었다! 저, 절대로 보, 보호자가 있는 신인류들은 데리고 오면 안 된다고 요, 용병대장에게 명했는데…….”

“거짓말 치지 마라, 이 나쁜 놈! 여기 네놈의 저택에서 도망 나온 아이들이 있는데 그런 개소리를 지껄여?! 네놈이 선대 족장을 대신해서 족장 노릇을 한 뒤부터 마을 돌아가는 꼴이 엉망이야! 네놈이 마을 안에 망할 시간족을 끌어들인 이후로 뭐 하나 제대로 돌아가는 것이 없다고!”

“그, 그, 그런……!”

정곡을 찌르는 신인류들의 말이 찔리긴 찔렸는지 족장이 찔끔한 표정으로 눈알을 뒤룩뒤룩 굴렸다. 

신인류들의 말이 모두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내, 내가 한 일은 모, 모두 서, 선대 족장님의 뜻에 따라 행한 일이다!”

한참 동안 머리를 쥐어짜고 짜낸 족장이 드디어 힘겹게 정당성을 주장할 변명거리를 찾았다.

“그, 그래! 나는 우, 우리 마을의 발전을 위해 끄, 끝까지 마을 걱정만 하고 돌아가신 내, 내 아버지의 유언을 바, 받잡은 것뿐이야! 서, 선대 족장이 말씀하시길 거, 검은 안개를 이용해 마, 마을의 경제 발전을 돕고, 시, 시간족도 우, 우리와 같은 인간이니……!”

“거, 거짓말! 거, 거짓말은 그만 해요!”

족장이 선대 족장을 들먹이며 합리화를 하던 그 순간, 제드가 제 아버지와 드잡이라도 할 기세로 크게 외쳤다. 

그 소리가 꼭 비명을 지르는 듯해서 무감각한 표정으로 양측 사이에 껴 있던 이예주마저 화들짝 놀라 그를 돌아볼 정도였다. 

피는 못 속인다더니, 제드는 제 아비만큼 시뻘게진 얼굴로 잔뜩 흥분하여 족장을 노려봤다.

“제, 제드 너……!”

족장이 당황과 분노로 눈을 크게 홉떴다. 

그러나 금방이라도 뒤로 쓰러질듯 이마에 힘줄이 울긋불긋 선 제 아비를 보면서도 제드는 비명 지르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하, 할아버지 좀 그, 그만 욕보여요, 아부지! 하, 할아버지는 우, 우리 마을이 거, 검은 파편과 계약한 중간 지대이니 시, 시간족과 엮이면 저, 절대로 안 된다고 하셨잖아요!”

“제, 제드 네 이놈! 네가 뭘 안다고! 뭐, 뭐를 안다고 지껄여! 이, 이건 다 네 할아버지가 주, 죽기 전에 아버지에게 맡기신 지고한 뜻……!”

“아버지가 죽였잖아요!”

제드가 말을 더듬는 것도 잊고 숨넘어갈 듯 헐떡이며 소리쳤다.

“할아버지는 아, 아버지가 죽였어! 엊그저께 더 이상 일을 벌이지 말라는 할아버지를 베개로 짓눌러 죽인 거 다 봤어요!”

“흐, 흐, 헉!”

“하, 할아버지도 모자라서 레, 레이디까지 죽이려고! 히, 히흑! 아, 안 죽인다고 약속했으면서! 처, 천사 같은 레이디까지 주, 죽이려고 드니까…… 저, 절대 아무한테도 말 안 하려구 했는데, 아, 아버지가 자꾸 야, 약속을 어기니까…….”

제드가 입을 삐쭉삐쭉하더니 결국 눈물을 질질 짜내기 시작했다. 

현 족장이 선대 족장을 죽였다는 어마어마한 폭로에 모든 좌중이 술렁거렸다. 

수군거리는 것은 비단 신인류뿐이 아니었다. 

족장이 폭도들을 잡기 위해 친히 끌고 온 부하들도 확연히 당황한 채 서로를 바라보며 움찔거렸다. 

선대 족장님을 죽였다니. 

아무리 족장 자리가 탐나기로서니 제 아버지까지 죽이고 오른 자리라니.

“아, 아니야! 저, 저 말도 안 되는 거짓을 믿는 것이냐!”

동요하는 인간들의 반응에 족장이 찢어지는 고함을 지르며 허옇게 들뜬 얼굴을 좌우로 흔들었다. 

놈은 이예주에게 죄를 뒤집어씌워 이목을 돌리려 들었다.

“아, 안 되겠다. 아, 아들이고 뭐고 저, 저 병신 같은 놈도 같이 포박해! 어, 어서! 어서 저 죄, 죄인 계집년부터……!”

“살인자!”

그러나 신인류들이 더 빨랐다.

“선대 족장을 살해하고 족장 노릇을 한 저 썩을 놈을 쳐 죽이자!”

“원래 우리 땅이었던 동쪽 대륙을 되찾자!” 

“와아아! 쳐 죽이자! 쳐 죽이자!”

와아아아―! 

족장이 채 부하들에게 명령을 다 내리기도 전에 신인류들이 들고 있는 무기를 휘두르며 놈에게 먼저 달려들었다. 

퍽, 퍽. 

그저 가만히 서 있기만 하던 이예주는 자꾸만 저를 세게 치고 가는 신인류들 떼거리에 몸 둘 데 없이 흔들리며 자리를 잡지 못했다. 

퍽! 으악! 푸욱! 죽여! 죽여! 

신인류와 인간들이 순식간에 한 덩어리로 뒤엉키면서 주위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미친.”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된 이예주는 그 난장판 한가운데에서 정신을 좀체 차리지 못했다. 

망할, 이게 다 뭐야?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거야? 

신인류들과 인간들이 날카로운 무기로 서로를 찌르고 베었다. 

이예주와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곳에서 피와 살이 튀었다. 

그녀는 멍하니 현실성 없는 그 꼴을 바라보며 혼란스러운 표정을 금치 못했다. 

주위는 완전히 개판이었다. 그래, 개판. 

왜 하필 끔찍했던 지하 700미터 탄광에서 간신히 기어 나오자마자 이런 개싸움에 휘말리게 된 걸까.

왜 하필…….

“저, 저 계집부터 잡아! 저, 저 계집부터! 거, 검은 파편과 한패인 계집이야!”

가마에서 용케 뛰어내린 족장이 흉흉한 얼굴로 이예주에게 가리키며 미친 듯이 소리쳤다. 

그러나 그의 부하 중 그 말을 알아듣고 그녀를 잡으러 오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왜냐하면 득달같이 달려드는 신인류들을 상대하기도 벅찼기 때문이다.

보다 못한 족장이 두툼한 배때기 옆에 꽂아 둔 칼을 뽑아 들고 이예주에게로 다가왔다. 

그러나 얼마 못 가 허리를 부여잡고 늘어지는 방해꾼 하나 때문에 증거이자 증인인 계집을 속히 처단할 수 없었다.

“아, 아부지! 안 돼요! 안 된다구요!”

“제, 제드! 네 이놈! 비, 비켜! 비, 비키라고!”

“시, 싫어요! 레, 레이디는! 레이디는…….”

제드가 필사적으로 제 아비의 허리를 부여잡고 끙끙대다가 이예주를 애타는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사이 그녀가 어서 도망을 갔으면 했다. 

하지만 이예주는 안타깝게도 신인류에게 휩쓸린 나머지 제드와는 꽤 멀리 떨어진 곳에서 등을 돌린 채 서 있었다. 

곳곳에서 끔찍한 비명이 들리고 피가 튀겼다. 

이예주는 벗어날 생각도 않고 그 진창 속에 멍청히 서 있었다. 

자칫 신인류와 인간의 싸움에 휩쓸려 목숨이 위태로울 만큼 위험이 바로 옆에서 도사리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때, 그 아수라장을 뚫고 이예주에게 무시무시한 살기를 내뿜으며 빠르게 다가오는 인간이 있었다. 

대체 그 엄청난 폭발에서 어떻게 살아 기어 나온 걸까. 

절반이 불에 타 역겹기 그지없는 몰골임에도 불구하고 남자의 발걸음은 놀랍도록 명백하게 이예주를 향해 고정되어 있었다.

놈의 손에 보기만 해도 오싹할 만큼 날이 잘 벼려진 칼이 들려 있었다. 

그것을 발견한 제드의 동공이 일순 커다랗게 확장되었다. 

“레, 레이디! 레, 레이디, 피해요! 레이디!”

그러나 제드가 아무리 목이 터져라 이예주를 불러도, 그 목소리는 그녀에게 닿기 전에 고함과 비명 소리에 묻혀 아스라이 사라졌다. 

레이디! 위험해요! 레이디!

“……응?”

이 혼돈과 난장판 속에서 문득 누군가 저를 부르는 것 같다는 기분이 들어 이예주는 흠칫 고개를 들다가 그대로 굳었다.

“어…….”

언제부터였을까. 누가 짐승이고 누가 사람인지 구분할 수 없을 만큼 엉망진창이 된 광장 위로 그것이 있었다. 

환하게 내리쬐는 태양 빛에 가려져서 언제부터 열려 있었는지 알 수 없는 그것이. 

무심결에 고개를 든 그녀의 앞에 ‘문’이 열려 있었다. 

이예주는 초점 없이 멍한 눈으로 그것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왜 또 문이…….”

지금 자신이 있는 이 개싸움 판에서 피하라는 의미에서 열린 걸까. 

아니면 정말로 이대로 있다간 위험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인 것일까. 

사실 어느 쪽이어도 별로 상관없었다. 

어쨌거나 ‘문’은 열렸고, 저는 피곤에 찌들어 당장 졸도해도 이상할 게 하나 없는 몸이었으니. 

이예주는 가만히 문을 바라보았다. 

그 안에 어떤 영상이 나타났다. 

그녀가 넘어갈 미래에 대한 유일한 실마리였다. 

“아…….”

그러나 아쉽게도 문 앞을 자꾸만 가리며 나뒹구는 인간과 신인류들 때문에 그 영상이 정확히 무엇인지 잘 보이지 않았다. 

빽빽한 사람들의 틈 사이로 희미하게 흘러나오는 빛을 따라, 이예주는 저도 모르게 한 발자국 한 발자국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딱히 ‘문’을 넘을 생각을 하고 다가가는 것은 아니었다. 

그냥, 그냥 그 안에 비춰진 영상이 어떤 것인지나 한 번 확인했으면. 

문 안에 뭐가 있는지, 뭐가 들었는지만……. 어쩌면…… 정말 어쩌면…….

앞에 뒤엉켜 서로를 무참히 폭행하는 두 인영을 지나쳐 몇 발자국만 더 걸으면 바로 문이었다. 

그만큼 그녀의 몸이 문에 가까워진 바로 그때였다. 

누군가의 악력이 손목을 와락 움켜쥐고, 그녀의 몸을 거센 힘으로 휙 돌렸다.

“어어……!”

균형 감각이 순식간에 흐트러졌다. 

몸이 넘어질 듯 무너져 내리며 아찔한 감각이 온몸을 덮쳤다. 시야가 뒤집혔다. 

넘어졌다고 생각했을 때, 이예주의 몸은 반 바퀴를 돌고 누군가의 품으로 안전히 안착한 후였다. 

푸욱― 

무언가 날카로운 것이 부드럽고 물컹한 것을 쑤석거리는 섬뜩한 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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