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예주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때도 그저 침묵했다.
제가 말 못하는 병신, 머저리라 가만히 있었던 게 아니었다.
그 아이의 질문에 복도를 거닐던 모든 아이들이 멈춰 서 이예주를 돌아봤고, 심지어 교실 안에 있던 아이들까지 우르르 쏟아져 나와 그녀를 구경했다.
그중엔 분명 그녀의 어머니가 1학년 때 돌아가셨다는 것을 아는 아이들도 섞여 있었다.
하지만 아무도 이예주를 옹호해 주지 않았다.
그 애들 사이에서 그녀는 이미 괴물, 마녀, 무당의 딸로 기정사실화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입이 없어서 말을 못한 것이 아니라, 말해 봤자 믿어 줄 이 하나 없어서 침묵했다.
이예주는 사슬이 달린 오른손으로 이마를 매만졌다.
그레이가 말한 주인 놈이 달아 준 쇠사슬이 허공에서 시끄러운 소리를 냈지만, 그 소리를 들으면서도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그녀의 얼굴에 피곤함이 역력히 드러났다.
“대답하시죠. 당신은 주인님을 배신하고 인간의 편에 선 것입니까?”
그레이가 다시 한 번 물었다.
여전히 이예주는 입 다물고 있기를 고수했다.
그 순간, 꼬질꼬질한 어린 것 하나가 어른들의 다리 사이에서 얼굴을 불쑥 외치고 소리쳤다.
“아니에요! 쉬익― 저 언니는 우리 배신한 거 아니에요!”
그나마 지금과 과거의 다른 점이라면, 몇몇 애들이 군중에 휩쓸려 그녀를 못 본 체하고 같이 매도하지 않는다는 점일까.
이예주를 도와준 것은 그녀가 동굴에서 구해 준 노란 구렁이었다.
네댓 살 먹은 귀여운 여자아이가 입 사이로 소름 끼치는 두 갈래 혀를 날름거렸다.
딱딱하게 굳어 있던 이예주의 표정이 일순 봄철 눈 녹듯 조금 풀렸다.
다행이다. 아이들끼리만 보내서 마음 한구석이 계속 편치 않았는데, 천만다행히도 끔찍한 지하에서 무사히 빠져나온 것 같았다.
노란 구렁이가 저를 원망할 적엔 정말 한 대 쥐어박고 싶을 만큼 야속했지만, 그래도 모든 위험을 감수하고 용병대장을 붙잡아 놓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 맞아요! 저 누나가 탄광 감옥에서 우리 다 구해 준 거예요!”
구렁이의 옆, 한 어른의 가랑이 밑에서 구렁이보다 조금 큰 아이가 엎드린 채 고개를 쑥 내밀며 소리쳤다.
기다란 회색 코가 달린 코끼리였다.
그 옆엔 제일 먼저 빠져나갔던 너구리가 있었다.
“맞아요! 저 인간 누나 없었으면 우리 다 인간들에게 잡아먹힐 뻔했어요!”
“어허! 어린아이들은 가만히 있어라!”
터져 나오는 역성에 보다 못한 신인류 중 한 명이 큰소리를 내었다.
아이들의 말에 수많은 신인류들의 무리가 또다시 술렁였다.
이예주는 그레이를 돌아보았다.
난감한 표정을 짓던 그는 성성한 얼굴로 구렁이가 있는 쪽을 노려보며 “어른들끼리 말씀하시는데 끼어들면 안 된다.” 하고 핀잔을 주었다.
그런 그를 만류한 것은 바로 그의 딸이자 이예주가 구해 준 또 다른 토끼였다.
“아버지, 저 애들 말이 맞아요!”
무리를 헤치고 다급하게 튀어나온 딸에게 그레이가 당황한 얼굴을 숨기지 못하고 내보였다.
“……칸쵸야!”
“인간님이 우리 모두 구해 주신 거예요. 저분이 없었다면 산쵸는 아직도 족장에게 잡혀서 끔찍한 일을 겪었을 거예요. 모두 도망치기에 급급했으니까요. 인간님이 아니셨다면 아무도 산쵸를 못 데리고 나왔을 거예요. 우리 중에 산쵸를 들어서 이곳까지 옮길 수 있을 만한 힘이 있는 애는 아무도 없었다구요!”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주인님을 배신한 것은 크나큰 잘못이야!”
결국 그레이의 입에서 큰 노성이 터져 나왔다.
진정시키려고 노력해도 잦아들지 않던 신인류들의 술렁임이 그 순간 뚝 멈췄다.
그레이가 손을 들어 이예주의 뒤에 숨어 있는 제드를 사납게 손가락질했다.
그때까지 말 한 마디 없이 조용히 숨죽이던 제드가 갑작스레 몰리는 이목에 파드득 어깨를 떨며 이예주의 등 뒤에 코를 박고 더욱 몸을 움츠렸다.
“게다가 족장의 아들인 저 인간을 무려 살려서 데리고 왔다! 이게 얼마나 큰 죄인지 아직 어려서 너희들은 잘 모르겠지만……!”
“그게 중요해?”
그때, 이예주가 그레이의 말허리를 뚝 잘라먹고 질문했다.
그로 인해 잠시 멍청한 표정을 짓던 그레이가 되물었다.
“……뭐라고 했습니까?”
“내가 너희들 주인을 배신하고 얘와 같이 있는 게 중요해?”
한마디 예고도 없이 어린 인간 여자로부터 튀어나온 반말에 그레이를 비롯한 몇몇 신인류들의 눈살이 불쾌하게 꿈틀거렸다.
“네, 중요합니다. 저 인간은 우리의 자식을 납치한 죽일 놈의 아들이니까요!”
그레이는 예의를 가장한 말투 안에 이예주를 향한 적의를 숨기지 않고 고스란히 내뱉었다.
그녀는 마치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맞받아쳤다.
“그럼 얘가, 족장의 아들인 얘가 너희들 자식을 죽이지 않고 데려온 건 안 중요해?”
“그건…….”
“그럼 난?”
회색 토끼가 뜻밖의 물음에 바로 답을 찾지 못하고 우물거리는 사이, 이예주의 얼굴이 기괴하게 일그러졌다.
그녀는 아득 이를 악물었다.
지금까지는 제 본질이 인간이라는 이유 하나로, 많은 수인들의 적의와 살기를 꾹 눌러 참아 왔다.
이유 모를 증오는 사람을 지치게 만든다. 매번 울컥 억울함이 치솟았지만 이예주는 참았다.
인간에게 당하고 살던 그들의 참혹한 모습이 안쓰럽고 죄스러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롱이의 목숨이 오간 일이었다.
조롱이의 목숨이 달렸는데 그럼에도, 그럼에도 나는…….
“너희 주인을 배신하고 인간 편에 붙은 내가, 네 자식을 죽이지 않고 다시 돌아온 건 어때? 나랑 얘가 너희들을 적으로 여기고 족장 편에 붙었다면, 뭣 하러 개고생을 사서 하면서 네 딸을 등에 업고 여기까지 걸어온 건데?”
“…….”
“왜 말을 못해? 람도 아닌 네가 내 죄를 정해 주었잖아. 얘를 살려서 데리고 온 거 말고! 너희한테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는지! 무슨 피해를 줬는지! 얘기해 봐! 얘기해 보라고!”
이예주가 참지 않고 소리쳤다.
마치 차가운 물이라도 뿌린 듯 장안에 무섭도록 적막이 내려앉았다.
뭘 잘못했는지 얘기하라고 소리치는 그녀의 말에 아무도, 그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심지어 숨소리 하나 제대로 내지 않았다.
그런 신인류들을 이예주가 형형한 눈으로 휙휙 돌아보았다.
누구 하나 그녀의 시선을 똑바로 쳐다보는 이가 없었다.
방금 전, 그녀를 돌로 쳐 죽일 듯 흉흉하게 노려보던 그들이 눈이 마주치는 족족 시선을 피하기 급급했다.
“……그거 알아? 조롱이가 죽었어.”
이예주가 위장에 달라붙어 있는 오물들을 토해 내듯 힘겹게 말했다.
“인간들에게 무능력하게 자식을 뺏긴 너희들 때문에. 그런 너희를 그저 방치만 한 너희 주인 때문에. 아무런 힘도 없이 갇혀만 있던 너희 자식들 때문에. 그리고 그걸 구한답시고 설친 멍청하고 얼빠진 나 때문에!”
“…….”
“조롱이가 죽었어.”
“…….”
“조롱이가, 조롱이가 죽었어. 알아? 황조롱이 말이야. 조롱이가 죽었다고! 조롱이가! 조롱이가!”
이예주가 핏발이 선 눈으로 한 걸음 한 걸음 그레이에게로 다가갔다.
그 두 눈동자에 범접할 수 없는 선뜩한 기운이 서려 있었다.
꼭 그레이의 부인이 처음 숙소에 들어선 그녀를 노려보던 때와 비슷한 눈빛이었다.
그레이의 앞에 선 이예주는 손을 뻗어 그의 멱살을 잡듯 옷자락을 와득 움켜쥐었다.
온몸에서 풍겨져 나오는 음습한 절규에 그레이가 움찔거리며 몇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조롱이가 죽었어. 조롱이가 죽었다고…….”
그레이의 상의를 부여잡은 이예주의 고개가 죄인처럼 아래로 뚝 떨궈졌다.
그녀는 멍한 얼굴로 땅바닥을 내려다보며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이제 어떡하지? 난 이제 평생 조롱이 꿈을 꿔야 돼. 봉구 꿈도, 엄마 꿈도, 수학여행에서 죽은 애들 꿈도 모자라 이제 평생 조롱이 꿈까지 꿔야 돼.”
“…….”
“이게 얼마나 끔찍한지 알아? 이게 얼마나 꾸기 싫은지. 이게 얼마나 끔찍하고 무서운 일인지…… 어떡하지? 나 정말 꾸기 싫은데…… 이제 어떡하지?”
희게 질린 그 얼굴이 길을 잃은 어린아이처럼 갈피를 못 잡겠다는 듯 혼란스러웠다.
꽉 쥔 그녀의 두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턱 밑까지 엄습하는 자책감과 두려움에 숨이 컥컥 막혔다.
입으로 인정하고 나니, 오한이 드는 사람처럼 몸이 으슬으슬 떨렸다.
무서웠다. 무섭고 또 두려웠다. 이제 어떡할까, 예주야. 어떻게 해야 할까.
이예주는 자신에게 재차 물었다.
하지만 아까 신인류들을 구할 때까지만 해도 팽팽 잘만 돌아갔던 머릿속이 지금은 백지처럼 하얗게 지워져서 아무런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녀는 그렇게 그레이를 부여잡은 채 한참을 혼잣말처럼 어떻게 해야 하는지 답을 구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하고 또 생각해 봐도 아무런 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레이의 옷자락을 부여잡고 있던 두 손이 힘없이 툭 떨어지면서, 동시에 이예주의 얼굴이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왈칵 흐려졌다.
그녀는 더 이상 그레이에게 제가 뭘 잘못했는지 묻지도, 더 이상 어떻게 해야 할지 답을 구하지도 않은 채 그저 스르륵 등을 돌렸다.
머리가 아팠다.
아니, 머리뿐만이 아니라 온몸이 삐걱거렸다.
꼬박 하룻밤하고도 반나절을 잠 한숨 못 자고 격렬하게 움직였으니 이젠 좀 쉬어야 할 때였다.
이예주는 허옇게 질린 얼굴로 신인류들에게 등을 돌렸다.
그러고는 광장으로 올 때와 같이 다시 유령처럼 비척비척 길을 걷기 시작했다.
“레, 레이디.”
덜덜 떨고 있는 저를 봤음에도 이예주가 처음 보는 사람처럼 스윽 스쳐 지나가자, 제드가 당황하여 그녀를 불렀다.
그럼에도 그녀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신인류들에게서 뒤돈 채 반대편 쪽으로 걸음을 옮기는 이예주를 이번에는 그레이도, 그 아무도 붙잡지 않았다.
자유로워진 그녀는 그저 홀로 쉴 곳을 찾아 계속해서 다리를 움직였다.
속히 씻고 죽은 것처럼 깊은 잠에 빠져들고 싶은 간절한 마음과는 다르게 그 걸음은 거북이처럼 느릿하기 그지없었다.
그리하여 그녀가 엉금엉금 기듯 걸어 중앙 광장의 반대편 끝에 도달했을 적이었다.
두두두두두. 멀찍이서 한 무리의 점이 흙먼지를 일으키며 빠르게 다가오는 것이 희미하게 보였다.
이예주는 느리지만 꾸준히 움직이던 걸음을 멈췄다.
처음엔 그저 또 다른 신인류 무리이겠거니 싶었다.
인간들이 코빼기도 비치지 않은 것을 보니 마을은 이미 신인류들한테 점령당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안일한 생각은 무리의 선두에 위치한, 인력거로 추정되는 가마에 앉아 땀을 뻘뻘 흘리고 있는 족장의 면상을 확인하고 단번에 금이 갔다.
“허, 허억!”
제 아버지임을 알아본 제드에게서 거칠게 숨을 들이마시는 소리가 들렸다.
저를 도와준답시고 날뛰더니, 또 제 아버지 얼굴 보기는 무서운 듯싶어 픽, 웃음이 다 나왔다.
족장의 인력거 뒤로는 신인류와 버금가는 수의 복면을 쓴 남자들이 일목정연하게 대열한 상태로 걸어오고 있었다.
아무래도 조롱이와 함께 납치당할 때 보았던 용병 대장의 수하들 같았다.
끼이익―
이윽고 족장이 이예주로부터 삼 보 정도 떨어진 곳에 멈췄다.
족장이 앉아 있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보다 아래에 있는 그녀를 바라보며 노발대발 소리를 질렀다.
“이, 이, 이년! 드, 드디어 잡았구나! 이, 이 죄인 년!”
이예주를 삿대질하는 족장 놈의 검지가 통통한 소시지같이 탐스러웠다.
그녀는 그 와중에도 위협을 느끼기는커녕 저 퉁퉁하게 부운 몸이 앉아 있는 인력거를 고작 두 명이서 용을 쓸며 끌고 왔다는 것이 대단하다는, 우습지도 않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네, 네년 때문에! 네, 네년 때문에 저택이 폭발했다! 와, 완전히 저택 하나가 나, 날아갔다 이 말이야! 게, 게다가 그도 모자라 가, 갇혀 있는 죄인들까지 모, 모조리 풀어 줬겠다! 네, 네 죄를! 네 죄를 다 어, 어떻게 갚을 테냐! 다, 당장 이년을 잡아 들여라!”
족장이 온갖 위엄 있는 척을 하며 떠듬떠듬 이예주의 죄를 읊었다.
족장의 명령을 듣고 그의 뒤에 서 있던 인간들 중 두어 명이 주춤주춤 그녀에게로 다가왔다.
이예주는 기가 찼다.
지하 감옥에 갇혀 있던 죄인들? 죄인들을 풀어 줘?
그 어린아이들이 죄가 있으면 무슨 죄가 있다고. 뻔뻔하고 돼지 같은 놈.
그녀는 도망갈 생각은 않고 팔짱을 낀 채 가만히 족장을 노려보았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제드는 애간장이 다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아, 아, 아부지!”
그때까지 뒤에 서 있던 제드가 불쑥 뛰쳐나와 양손을 크게 벌리고 이예주의 앞을 막아섰다.
매일 꽁지가 빠져라 도망치기 바쁘던 녀석이었는데, 과거에 비하면 장족의 발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