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드 앤 매드 (149)화 (150/319)

Chapter 7. Red And Mad

챠르륵 챠르륵. 

말아 쥐지도 않고 누군가 대신 들어 주지도 않은, 완전히 방치된 쇠사슬이 이예주가 걸음을 옮기는 대로 방울뱀처럼 땅바닥 위를 이리저리 구르며 따라왔다. 

햇볕이 쨍쨍 내리쬐는 이른 아침. 토끼를 업고 제드의 안내와 부축을 받아 숲에서 빠져나왔을 때, 동쪽 대륙의 마을은 새벽의 서늘한 기운이 완전히 사라진 상태였다.

챠르릉. 이예주의 오른쪽 손으로부터 이어졌던 시끄러운 쇳소리가 뚝 끊겼다. 

수갑을 찬 장본인이 걸음을 우뚝 멈췄기 때문이다. 

그녀가 걸음을 멈춘 곳은 한 번 와 본 적이 있는 익숙한 곳이었다. 

바로 엊그제 처음 마을로 들어섰던 길이었다. 

관리가 되지 않아 죽은 나무를 보고 슬퍼하던 조롱이. 

누이의 등에 업혀 고작 마을 입구에 산책 온 것을 엄청난 것이라도 되는 양 소중하게 자랑하던 조롱이. 

이예주 대신 그녀를 무시하는 붉은 개가 인간 여자 소리를 못하도록 막아 주던 조롱이. 

그게 바로 엊그제 일이었다. 

단 이틀이었으니, 태풍이라도 덮치지 않는 한 변한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게 당연한 정경이었다. 

조롱이가 없다는 것 빼고. 조롱이가 없다는 것, 빼고. 

머리가 아팠다. 다시 명치를 짓누르는 통증에 이예주가 조금 휘청였다.

“마, 많이 힘들어요, 레, 레이디?”

많이 힘들어여, 누나? 

어디선가 조롱이의 환청이 들려오는 것 같아서 이예주는 흡, 숨을 들이마시며 고개를 황급히 좌우로 돌렸다. 

당연한 일이었지만 조롱이는 없었다. 

걱정을 듬뿍 담은 황금색 눈동자가 아닌, 잿빛 눈동자가 그녀를 흔들리는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속에서 뜨거운 기운이 울컥 북받쳐 올랐다. 

그 뜨거운 기운은 목구멍을 타고 얼굴로 훅훅 기어 올라와 눈을 태워 먹을 것처럼 시큰하게 달구었다. 

이예주는 눈 안쪽부터 자꾸만 아려 오는 통증을 피하기 위해 잠시 고개를 들어 구름 한 점 없이 푸른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이내 마을 초입을 향해 유령처럼 스르륵 걸음을 옮겼다. 

아니, 옮기려던 찰나였다. 

그리 세지도, 그렇다고 무시할 정도로 약하지도 않은 손길이 그녀의 옷자락을 꽉 움켜쥐었다. 

“……마, 마, 마을로 도, 돌아가게요?”

그녀는 돌아보지 않았다. 

그 모습에 제드가 애 타는 얼굴로 다시 한 번 입을 열었다.

“다, 다시 그 거, 검은 파편…… 거, 검은 파편한테 도, 돌아가려는 거죠?”

“…….”

“……아, 안 가면 안 돼요? 거, 검은 파편은 무, 무서운 사람이에요. 이, 인간들은 다 알아요. 그, 그 남자가 이, 인간들을 모두 주, 죽이려고 하는 것을…….”

“…….”

“그, 그냥 아, 안 가면 안 돼요? 저, 저랑…… 저, 저랑 같이 도망가요, 레, 레이디.”

그의 마지막 말은, 남자가 여자에게 구애를 하는 것보단 잘못을 저지른 아이가 매 맞기 싫어 도피하자는 것과 흡사했다. 

그의 절박하고 애절한 목소리에도 답하지 않았던 이예주가 도망가자는 한 마디에 스윽 몸을 돌렸다. 

제드를 돌아본 그녀의 얼굴은 심각하다는 소리가 절로 튀어나올 만큼 창백하고 차가웠다. 

산발한 머리, 멍 든 목, 이곳저곳 찢긴 로브. 

어느 하나 성한 곳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거지 같은 몰골이었다. 

하지만 그 얼굴은 안쓰럽기보단 분가루를 칠한 것처럼 하얗고 딱딱하기 그지없었다. 

그래서 쉽게 천한 이라 판단할 수 없게끔 만들었다. 

온기라고는 없는 냉정한 시선에 제드의 목이 절로 움츠러들었다. 

이윽고 이예주가 무거운 입을 뗐다. 

듣기만 해도 오한이 도는 무서운 쌍욕이나 아니면 상황 파악도 못하느냐는 적나라한 핀잔을 들을 것이라는 예상과는 다르게,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은 전혀 뜻밖의 것이다. 

“그럼 얘는?”

“……예, 예?”

“너랑 도망가면 얘는 어떡해. 누가 데려다주게.”

이예주가 등에 업고 있던 토끼를 으쓱하고 고쳐 업으며 물었다. 

제드는 완전히 배제해 둔 현실에 버벅거리느라 그녀의 말에 아무 답도 못했다. 

토끼를 끝까지 책임질 의무가 레이디와 자신에게 있었던가. 

잠시 머릿속에 그런 의문이 스쳤지만, 이내 흘깃 제 품 안을 턱짓하는 레이디 덕에 제드는 아차 했다. 

“너도 들고 있잖아.”

그렇다. 깜빡 잊고 있었지만 저도 신인류를 품에 안고 있었던 것이다. 

고작 그의 팔뚝 반절만 한 하얀색의 작은 털 뭉치. 태어난 지 얼마 되어 보이지 않는 아기 강아지였다. 

강아지는 많이 고단했는지, 어느덧 제드의 품에서 고롱고롱 앙증맞게 코를 골며 잠들어 있었다.

“걔도 부모 찾아 줘야지.”

“…….”

“그럼 마을 안 가고 여기서 기다릴 테니까 네가 둘 다 데려다주고 올 수 있어? 근데 너 둘 다 못 들잖아.”

딱히 비난조로 말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메마르고 텁텁한 목소리로 사실만을 말했을 뿐인데도 제드는 이예주의 말이 왠지 자신을 비난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아무래도 죄책감으로부터 시발된 자각이었다. 

저에게 처음으로 말을 걸어 주고, 말더듬이 병신인 제 말을 귀 기울여 들어 준 레이디에게 도움이 되고 싶었다. 

그러나 결국 아무런 쓸모도 못 되고 하루가 지났다는 것과, 저와 제 일가가 그녀에게 소중한 이를 앗아 갔다는 죄책감.

이예주는 제드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다시 등을 돌려 양옆에 논과 밭을 끼고 마을의 중앙까지 이어져 있는 하나의 길을 걷기 시작할 뿐이었다. 

툭. 그녀의 옷자락을 잡고 있던 제드의 손이 힘없이 떨어졌다. 

제드는 이예주가 꽤 멀어져 작아질 때까지 그 자리에 못 박힌 채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녀가 한 번이라도 돌아봐 주었다면 미안하다고, 죄송하다고, 용서해 달라고 할 참이었다. 

그러나 제드가 따라오지 않음에도 천사 같은 레이디는 단 한 번도 돌아보지 않았다. 

그가 뒤따라오든 말든, 그저 축 늘어진 토끼를 업은 채 제 갈 길만 바삐 걸었다.

확실히 무슨 날은 날인 건지 마을은 괴기하게 느껴질 정도로 조용했다. 

아침이라서 그런가. 하지만 선대 족장의 장례식이었던 엊그제도 문을 여는 가게들이 존재할 정도로 나름 착실하게 돌아가던 마을이었다. 

다 쓰러져 가는 초가집들이 있는 마을 초입을 지나면 수많은 골목들로 이어지는 중앙 광장이 나온다. 

이예주와 제드가 광장 안으로 들어설 때까지 지나친 사람 혹은 신인류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오늘, 무슨 날이야?”

공허할 만큼 텅 빈 광장 안을 둘러보며 이예주가 물었다. 

저한테 물어보는 줄도 모르고 멍하니 있던 제드는, 이예주의 마른 눈동자가 저를 직시하자 그제야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저었다.

“아, 아무 날도 아닌데요?”

“그런데 왜 이렇게…….”

휘잉― 소금기 섞인 바닷바람이 썰렁한 광장 안을 휘돌다 제드와 이예주 사이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녀는 광장의 중앙으로 천천히 걸어 나가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제드 또한 날파리 하나 날라 다니지 않는 마을이 평소와 같다고 생각되지 않는지, 그녀가 움직이자 놓칠세라 그 뒤를 허겁지겁 바짝 따라붙었다. 

이예주는 기분이 조금 이상해졌다. 

광장은 마을 초입처럼 어제와 별반 다름없었다. 

그러나 중앙 광장에 가까워질수록 묘한 위화감이 점점 더 짙어졌다.

그건 어떠한 냄새에 가까웠다. 해안 마을에서 나는 생선 냄새라고 치부하기엔 좀 더 질척질척하고 비릿한…….

“피 냄새 같은 비린내가…….”

이예주가 채 말을 끝맺기도 전이었다. 

흐이익! 제드가 괴성을 꽥 지르며 갑작스레 그녀를 앞질러 섰다. 

그녀가 의아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왜 그러냐고 묻기도 전에 그는 찢어질듯 눈을 크게 뜨고 이예주의 뒤를 가리켰다.

“레, 레, 레이디! 저, 저기! 저기!”

이예주는 천천히 뒤로 돌았다. 모두들 어디에 꼭꼭 숨어 있나 했더니, 광장 정중앙에 서 있는 그녀 뒤쪽의 골목과 건물 사이사이에 숨죽이고 숨어 있었던 모양이었다. 

우르르르. 사람들이, 아니 신인류들이 넘어진 컵에서 물 쏟아지듯 이예주와 제드의 앞으로 쏟아져 나왔다. 

신인류들이라는 것을 알아챌 수 있었던 것은 그들 사이로 드문드문 동물의 특징-귀와 꼬리 등-들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보였기 때문이다. 

대체 이 많은 신인류들이 어떻게 기척도 하나 내지 않고 자신을 조용히 지켜보고만 있었던 걸까. 

신인류들의 얼굴에 하나같이 음울한 기운이 그득했다. 

그들은 모두 손에 삽이나 곡괭이, 각목 같은 살벌한 무기를 하나씩 들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 그것들은 농사 기구가 아닌, 다른 이를 해치는 무기였다. 

그것들의 중간중간 뻘건 피와 살점이 더덕더덕 말라붙어 있었다. 

당연하겠지만 그들 사이에 완벽하게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는 신인류는 있어도, 진짜 인간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인간들에게 혈세를 내고, 또 족장의 이율 높은 고리대금에 시달리며 인간에 대한 증오심을 키우던 그들이 마을 인간들과 결합하여 폭동을 일으킬 리 없다는 것은 3살 먹은 어린아이라도 다 알 만한 것이다.

살벌한 그들의 시선에 제드가 이예주의 옷자락을 부여잡고 부들부들 떨었다. 

“사, 산쵸! 우리 산쵸야!”

그때, 무성한 신인류들의 틈을 헤치고 중년 여성이 이예주가 서 있는 쪽으로 헐레벌떡 뛰쳐나왔다. 

여성의 얼굴이 귀여운 토끼 귀와는 어울리지 않을 만큼 울음으로 벌겋게 익어 있었다. 

이예주는 그녀가 누군지 단번에 알아보았다.

“부인!”

기다란 나무 막대에 식칼을 엮어 만든 살벌한 창을 든 그레이 씨가 그 뒤를 쫓아왔다. 

역시나 회색 토끼 귀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얼굴이었다. 

“아가! 내 아가!”

제게는 한 마디도 없이 무작정 제 등에 업힌 산쵸부터 끌어 내리는 그레이 부인이었지만 이예주는 순순히 그녀에게 그들의 자식을 넘겨주었다. 

때마침 토끼를 들고 있는 것이 거의 한계에 이르렀거니와, 아이를 잃어버린 부모가 얼마나 절박한 얼굴로 람에게 애원했는지 이미 보았기 때문이다.

산쵸가 제 부모의 품으로 돌아가자 등허리가 허전할 정도로 가뿐해졌다. 

“흰둥아!”

이번에는 왼쪽에서 백발의 젊은 여자 하나가 튀어나와 제드의 품에서 곤히 잠들어 있던 하얀 강아지를 낚아채듯 빼앗아 갔다. 

그 덕에 강아지가 화들짝 잠에서 깨어나 낑낑거렸고, 제드는 더욱 겁에 질려 이예주의 허리에 찰싹 달라붙다시피 했다. 

그 무례한 행동에 이예주의 눈살이 와작 찌푸려졌다.

“당신은 주인님과 같이 온 인간이 아닙니까? 그런데 왜 족장의 아들을 뒤에 숨기고 보호하는 거죠?”

제 부인과 되찾은 딸을 품에 안은 채 그레이 씨가 신인류들을 대표해 이예주를 향해 들고 있던 창을 겨누며 물었다. 

“그전에 고맙다는 인사부터가 먼저 아닌가.”

“…….”

“부모인 당신들도 못 구했던 자식들을 내가 구해다 줬는데, 창부터 겨누는 게 당신들 감사 인사법이야?”

이예주가 국어 책 읽듯 무미건조하게 묻자 그레이는 잠시 주춤했다. 

그러나 다시 전투태세로 표정을 가다듬고 동문서답했다.

“우린…… 우리 신인류들은 더 이상 횡포를 부리는 족장과 마을 인간들을 참지 않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러니 묻는 말에 먼저 대답해 주십시오. 당신은 저 인간과 한통속입니까?”

“…….”

“당신은 인간이지만 주인님과 계약을 맺지 않았습니까? 주인님을 배반한 겁니까!” 

이예주는 침묵했다. 

그러자 신인류들이 웅성웅성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음에도 그녀의 배반이 그들에게는 기정사실화되어 갔다. 

그녀는 문득 머릿속 아득한 곳 어딘가부터 지끈지끈 통증이 울려 퍼지기 시작하는 것을 느꼈다. 

왠지 모르겠지만 현대에서의 학창 시절이 떠올랐다. 

수학여행의 사고가 일어난 지 일주일이 지난 후의 교실이었다. 

그냥 안면만 좀 익은 옆 반의 수다쟁이 한 명이 복도를 지나가는 이예주를 붙잡고 물었다. 

정말, 너 정말 무당 딸이야? 너 때문에 수학여행 사고가 일어난 거야? 너 액땜하느라 다른 애들이 죽은 거야? 그런 거야? 

그때 그 말도 안 되는 지껄임에 제가 뭐라고 대답했더라.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