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 뭐 하는 거예여, 누나?”
그녀가 세 개의 유리병을 들고 잠깐 고민하는 사이, 조롱이가 갑작스레 덥석 그녀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뭐가?”
그녀가 태연하게 대답했다. 조롱이의 미간이 조금 구겨졌다.
“이거…… 검은 안개잖아여. 이거 어디서 났어여?”
“훔쳤어.”
“예?! 어, 어디서여?!”
이예주는 대답 대신, 그를 지나쳐 모퉁이를 돌아 용병대장과 그의 수하들이 있는 쪽으로 두어 발자국 다가갔다.
일렁이는 불꽃 새로 보이는 그녀의 그림자에 용병대장이 길길이 날뛰었다.
“죽일 년! 넌 잡히면 자비 따위 없이 최대한 고통스럽게 죽여 주마!”
“…….”
“아니지! 아니지! 네년이 그렇게 싸고도는 황조롱이 신인류의 심장을 네 앞에서 산 채로 뜯어 네 주둥이에 처넣어 주마!”
뒷이야기는 차라리 안 했으면 관대한 판단을 내리는데 더 도움이 되었을 텐데. 아쉽게도 용병대장 놈은 눈치라곤 제드만큼이나 없는 모양이었다.
그사이 불길이 더욱 거세졌다.
공중에 부유하고 있는 검은색의 연기가 그에 반비례해 줄어드는 것을 보면, 아무래도 불은 연기를 잡아먹고 갈수록 화력을 키우는 것 같았다.
여기서 조금 더 장작을 던져 준다면 과연 어떻게 될까.
“이 죽일 년! 망할 년!”
용병대장은 불이 점점 더 커지는 것도 잘 모르는지 여전히 펄펄 날뛰었다.
“저 새끼는 지금 상황 파악이 잘 안 되나 보네?”
이예주가 입술을 비죽 비틀며 냉소했다. 그런 그녀의 옷자락을 조롱이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살며시 잡아당겼다.
“누나…….”
“…….”
“검은 안개가 불에 닿으면 터지는 거…… 알고 있었어여? 알고 이런 거예여?”
명백하게 타박이 섞여 있는 조롱이의 물음에 아차 했지만 그녀는 이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응.”
“왜. 왜여? 왜, 왜 그랬어여?”
“그래야 우리가 도망갈 시간을 벌 수 있으니까. 잘돼서 저 새끼들이 죽으면 더 좋고.”
이예주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불 너머 놈들의 뒤에서 여전히 ‘문’이 환하게 빛을 쏟아 내는 것이 보일 듯 말 듯 어른거렸다.
별수 없었다. 하나뿐인 수단이었던 ‘문’을 버린 이상 이제는.
“예주 누나, 누나는…… 누나는 혼자 도망갈 수 있었잖아여. 나 때문에, 나 때문에 이러지 마여. 하지 마여, 누나. 네? 불 더 커지면 위험해여. 진짜 동굴 무너질지도 몰라여. 검은 안개가 불에 닿으면 얼마나 위험한 건데여!”
조롱이가 애원했다.
이예주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조롱아, 너 때문 아니야.”
“그럼여? 그럼 이런 위험한…… 위험한 짓 하지 마여! 나 때문이 아니라면……!”
“이건 너 때문이 아니라, 나를 위해서야. 내가 살고 싶어서 하는 거야. 내가 살아야 하니까.”
“그럼 왜! 누나는! 누나는 그럼 혼자 도망갈 수 있으면서 왜……!”
조롱이가 애타는 얼굴로 무언가 그녀에게 말을 하려 들었다.
그러나 그 순간 휘익 하고 귓속에 섬뜩하게 박히는 소리에 이예주가 홱 고개를 돌렸다.
그 탓에 조롱이는 하려던 말을 다 쏟아 낼 수 없었다.
“죽여 버릴 테다! 흐으, 죽여 버리겠어!”
용병대장과 그의 수하들이 양손에 쥔 두 칼을 마구잡이로 휘두르며 불을 가르고 차근차근 다가오고 있었다.
불그죽죽한 용병대장의 눈에는 귀기까지 서려 있었다.
반드시 이예주와 조롱이를 잡아 죽이겠다는 강한 결의가 느껴졌다.
휘잉― 휘익―!
놈들이 거세게 칼을 휘두를 때마다 불기둥이 무 썰리듯 쓱싹 썰렸다가 다시 붙었다.
위험을 무릅쓰고 검은 안개를 집어 던진 것이 허무하게도 적들이 조금씩 다시 숨통을 죄어 왔다.
이예주는 조롱이의 손을 다시 쥐었다. 이젠 정말 어쩔 수 없게 되었다.
이윽고 용병대장이 여전히 허우적대고 있는 제 부하들을 뒤로한 채 기어이 불구덩이를 가르고 갈림길에 한 발을 들여 놓았을 때, 그녀는 두 눈 딱 감고 주먹 쥔 손을 높이 쳐들었다.
“자, 잠깐……!”
놈이 당황하여 뭐라 지껄여 댔지만, 벌써 늦었다.
3개의 유리병은 이미 이예주의 손을 떠난 후였다.
그녀는 그것들이 쨍그랑하고 듣기 싫은 파열음을 내며 깨지기 전에 조롱이의 손을 잡고 다시 뒤로 돌아 뛰기 시작했다.
느리기 짝이 없었지만 폭발에서 벗어나기엔 충분했다.
쾅―!
다시 한 번 뒤통수 너머로부터 고막이 찢어질 것 같은 폭음이 들렸다.
“허억, 허억…….”
이예주는 토끼를 업은 채 강아지를 품은 조롱이를 데리고 부지런히 뛰듯 걸었다.
제드 놈이 도망질을 친 오른쪽 길을 버리고 그녀가 선택한 왼쪽 길은 어두웠다.
우리 사이사이에 커다란 간격을 두고 희미하게 달려 있던 뤼미에르마저 갈림길에서부터는 없었다.
뒤에 있는 커다란 불길이 아니었다면, 완전한 어둠에 휩싸인 채로 더듬더듬 벽을 짚고 걸어야 했을 것이다.
더 이상 용병대장과 그의 수하들의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살았는지 뒈졌는지는 알 바 아니었다.
왼쪽 길은 계속해서 모퉁이를 돌아야 하는 나선형의 폭 넓은 오르막길이었다.
이렇게 뱅뱅 도는 길 한가운데에 레일은 대체 어떻게 깔은 건지 신기할 지경이었다.
천만다행히도 오르막의 경사는 평평한 것과 다름없을 정도로 완만했다.
그러나 중간중간 벽에 다른 길로 빠지는 굴들이 나 있어 자꾸만 판단력을 흐리게 만들었다.
그냥 무시하고 지나친 땅굴들은 크기가 작았다.
그녀와 조롱이가 걷고 있는 꽤 폭이 넓은 길에 비해 허리를 굽혀야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높이가 낮은 것으로 보아, 그저 석탄을 캐기 위해 여러 방향으로 땅굴을 뚫어 놓은 것 같았다.
하지만 탄광 길을 모르는 이예주에게는 지금껏 보아 왔던 갈림길과 별다를 바가 없어 보여 헷갈렸다.
두 번째로 오른쪽에 나 있는 땅굴을 지나쳤을 때, 그녀는 더 이상 불안함을 참지 못했다.
혹시 제드 놈이 간 곳으로 따라 들어가지 않고 무작정 반대편으로 뛰어든 것은 잘못된 선택이 아니었을까.
죽이 되든 밥이 되든 길을 아는 녀석을 따라갔어야 했던 걸까.
그러나 제드가 도망친 그 순간부터는 그가 길을 안다는 것조차 신뢰하기 어려웠다.
솔직히 말하면 제드 놈의 허무하기 짝이 없는 배신에 대한 충격으로 머리가 굳어 잘 돌아가지 않았던 것 같기도 했다.
이예주가 길을 잘못 선택했다고 회의(懷疑)할 적에 그들은 어느덧 모퉁이를 따라 반 바퀴를 더 돈 상태였다.
“허억, 허억…….”
완만한 길임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금방 숨이 턱까지 차올라 가쁜 숨을 내뱉었다.
그저 보폭 맞춰 간신히 뛰는 것이 다인 조롱이 또한 마찬가지였다.
다시 곡선을 돌자 시야가 한층 어두워졌다. 광원인 불에서 멀어졌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아직도 뒤통수에서 뜨뜻한 화마가 느껴지는 것으로 보아, 위험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은 아니었다.
이예주는 마음이 조급해졌다. 속히 걸음을 옮겨야 했다.
그러나 불안하고 다급한 마음과는 다르게 자꾸만 걸음이 뒤처졌고 몸이 무거웠다.
다리가 금방이라도 꺾일 것처럼 후들거렸다. 그렇지만 이것이 약과라는 것을 그때 그녀는 알지 못했다.
“하……!”
둥글게 튀어나와 있는 벽을 돌자마자 경사가 산을 깎아 놓은 듯 급격하게 높아졌다.
눈앞이 아득해지는 기분에 이예주는 기염을 토해 냈다.
어쩌면 이렇게 지지리도 환경이 따라 주지 않는 거지?
‘엎친 데 덮친 격’도 모자라 ‘산 너머 히말라야’다. 이예주의 얼굴 위로 절망이 드리워졌다.
기실 이 악물고 굳게 마음먹으면 제 몸 하나 건사하기는 어렵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현재 혼자의 몸이 아니었다. 도저히 축 늘어진 토끼를 등에 지고 나선으로 된 이 가파른 오르막길을 오를 자신이 없었다.
“흐으…….”
이예주가 다시 한 번 침음을 내뱉었다. 조롱이가 많이 지친 얼굴로 “누나…….”하고 그녀를 불렀다.
이예주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도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누나, 우리 그냥…….”
벽에 기댄 채 잠시 숨을 고르던 조롱이가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떼어 내 힘겹게 말문을 열었다. 그때였다.
콰광― 콰르르릉, 쾅―!
그들이 지나친 길 저편에서 검은 안개를 던졌을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무시무시한 굉음이 터졌다.
아악! 이예주와 조롱이가 동시에 머리를 감싸 안으며 주저앉았다.
그들이 있는 곳까지 숨을 내쉬기 힘들 만큼 뜨거운 화기가 뻗쳤다.
마치 서울 한복판에서 용암을 직면했던 그때와 같았다.
들이마시는 공기가 너무 뜨거워서 호흡기 전체가 타오를 듯이 아렸던 그때처럼.
하지만 거대한 폭성(爆聲)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쿠구구구구궁― 쿵, 쿠우웅―!
돌연 누군가 탄광 전체를 손에 쥐고 뒤흔들듯 거센 진동이 동굴 길을 덮쳤다.
아아아악!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이예주는 덮쳐진 진동 때문에 정처 없이 흔들리면서 비명을 질렀다.
지진을 동반한 크고 작은 폭발음이 쉴 틈을 주지 않고 연이어 몰아닥쳤다.
투둑, 투둑. 천장에서 돌가루와 자그마한 돌덩이들이 떨어지자 조롱이가 소리쳤다.
“다른 곳에 쌓여 있는 검은 안개에 불길이 닿아서 연쇄 폭발이 일어난 것 같아여!”
“뭐야? 어떡해? 어떡해!”
일촉즉발의 상황에 이예주의 안색이 두려움에 질려 허옇게 들떴다.
“누나, 당장 가야 돼여! 위로 더 올라가야 돼여!”
“……여, 여기를? 오르막길을?”
당장 가파른 경사를 올라야 한다는 조롱이의 주장에 그녀가 새된 목소리를 내었다.
조롱이가 마구 고개를 끄덕였다.
“폭발이 안 멈추고 계속 일어나면 동굴 무너져여! 여기 계속 있다간 폭발에 휩쓸려 먼저 죽을 거예여!”
한 시가 급한 조롱이의 태도에도 불구하고 이예주는 오르막길을 흘끗흘끗 바라보기만 할 뿐, 선뜻 발을 내밀지 못했다.
다시 볼 때마다 경사가 점점 높아지는 것 같았다.
도저히 신인류를 업고 이 길에 오를 자신이 없었다.
조롱이의 말처럼 폭발에 휩쓸리지 않게 더 위로 올라간다 해도 이렇게 느려 터진 속도로 벗어나는 것은 어림도 없을 것이다.
투두둑. 머리 위로 계속해서 작은 돌멩이들이 떨어져 동굴 붕괴에 대한 불안감을 증폭시켰다.
쿠루루릉. 동굴이 한 번 더 울었다.
후회가 파도처럼 밀려왔다.
모로 가도 서울로만 가면 된다고, 어떻게 되든 간에 제드 놈의 뒤를 따라갈걸.
길도 모르면서 무슨 객기로 몸도 성치 않은 조롱이를 데리고 제멋대로 행동했는지.
이예주는 아랫입술을 껌 씹듯이 잘근잘근 씹어 댔다.
이런 후회는 모두 부질없다.
차라리 뜨거움을 좀 감수하더라도 다시 내려가 다른 땅굴로 빠진다면 좀 더 안전하지 않을까.
당장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이 길보다는…….
그러나 그런 생각을 할 때쯤 불쑥 모퉁이 너머에서 불 그림자가 넘실거렸다.
몇 번의 폭발로 인해 무섭도록 커진 화염이 벌써부터 태워 먹을 먹이를 찾아 이예주와 조롱이의 뒤를 바짝 쫓았다.
그녀의 얼굴이 울음을 터트리기 직전의 아이처럼 흐려졌다.
이 지옥 불을 감수하고 더 완만한 길을 찾아 내려가야 하나?
이예주가 황망한 시선으로 경사가 높은 앞과 그림자를 일렁이며 불꽃을 토해 내는 뒤를 번갈아 바라보던 그때였다.
쿠구구궁. 끼이, 쿠궁.
아래쪽에서부터 뜬금없이 바퀴가 돌아가는 듯한 소음이 들렸다.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뭉툭한 무언가가 레일 위에서 모퉁이를 돌아 화염을 뚫고 이예주와 조롱이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뭐, 뭐야? 뭐지?”
쿠구구궁. 쿠쿠, 쿠구.
“타, 탄차에여.”
조롱이가 긴장이 역력히 묻어난 목소리로 그것의 정체를 알아맞혔다.
이예주와 조롱이에게 점점 다가오고 있는 것은 네모난 박스 모양의 사륜이 달린 탄차(Mine tub)였다.
짐을 나르거나 동굴 안에서 이동할 때 흔히 쓰이기 때문에 일반 탄광이라면 이상할 것 없었다.
하지만 이곳은 일반 탄광이 아니었다. 탄차를 타고 오는 이는 그 안에서 고개를 숙인 것인지 보이지 않았다.
저 화염을 뚫고 탄차를 끌고 온 이는 대체 누구인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이예주의 몸이 바싹 긴장했다.
조롱이를 제 등 뒤로 끌어다 두며 그녀는 경사로 쪽으로 주춤주춤 뒷걸음질 쳤다.
끼이익―
그러나 아차 할 새 없이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탄차는 경사의 진입 부분인 그들의 앞에 속도를 줄여 멈춰 섰다.
그리고 그 안에서 아까 전 용병대장이 말했던 까꿍 놀이를 하듯 예기치 못한 인간이 튀어나왔다.
“레, 레, 레이디!”
아까 전 이예주와 조롱이를 버리고 부리나케 도망을 쳤던 제드였다.
화염을 뚫고 오느라 탄차 안에 바싹 엎드렸지만 커다란 불꽃의 손길을 미처 다 피할 수 없었는지, 녀석의 머리끝이 거뭇거뭇하게 그슬려 있었다.
이예주는 어이가 없음을 숨기지 않고 고스란히 드러냈다.
기가 막힌 것은 조롱이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너, 뭐야?”
“당신! 뭐 하는 인간이예여?! 또 무슨 꿍꿍이냐구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