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드 앤 매드 (145)화 (146/319)

“그렇죠. 그래야죠. 그랬을 리가요. 이년은 오늘 이곳에서 제 칼침 맞고 죽을 관상인데요. 얼굴에 다 쓰여 있습니다, 얼굴에.”

어렵사리 반박한 제드에게 용병대장은 호쾌하게 웃으며 답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놈은 웃는 얼굴을 순식간에 죽이고 얼굴을 콰드득 구기며 제드에게 지껄였다.

“그러니까 네 애비에게 얻어터지기 싫으면 당장 이리로 기어 와, 이 쓸모라곤 쥐뿔도 없는 병신 새끼야. 네 멍청한 짓 때문에 지금 손해가 얼마나 막심한지 알고는 있습니까?”

험악한 강도처럼 이를 드러낸 놈이 급작스레 제드에게 왁 얼굴을 들이밀었다.

제드는 곧장 ‘흐에엑!’ 하고 제자리에서 족히 30센티미터는 펄쩍 뛰었다.

그는 그대로 조롱이를 내팽개치고 뒤돌아 양 갈림길의 오른쪽으로 정신 나간 사람처럼 비명을 지르며 뛰어갔다. 

눈 깜짝할 새 일어난 일이라 잡을 틈조차 없었다. 

이예주는 가까스로 균형을 잃고 넘어질듯 휘청거리는 조롱이를 몸을 던져 받쳤다.

“허어엉! 하, 할아부지! 할아부지이!”

그저 멀찍이서 녀석이 질질 짜 대며 후다다닥 뛰어가는 소리만이 메아리처럼 전해질 뿐이었다. 

그녀는 한참 후에서야 그게 자신과 조롱이를 버리고 도망간 것이란 걸 깨달았다. 

너무나 기가 막혀 헛웃음도 짓지 못했다. 

망할 새끼. 길을 안내해 주는 것 빼곤 비리비리한 게 영 쓸모없다고 생각은 했지만, 이렇게 저 살겠다고 도망질을 칠 줄은 전혀 예상치 못했다. 

아니다, 조금이라도 제드 놈을 믿은 제가 멍청한 것이다. 

첫 만남부터 도망으로 얼룩진 놈이었는데, 그런 놈이라도 도와준다고 팔 걷어붙이고 나서니까 정신 빠져서는……. 

이예주는 과거의 제 멍청한 과오에 욕도 제대로 못하고 그저 까드득 까드득 이만 갈아 댔다.

그녀가 짓지 못한 헛웃음을 용병대장이 소름 끼치는 얼굴로 대신 지어 주었다.

“하하. 도련님도 참, 여전히 까꿍 놀이에는 예민하시다니까…….”

“…….”

“이젠 도련님도 치워 버렸고…… 마지막 보루까지 사라진 네년을 이제 어떻게 육시를 내야 족장님께 칭찬을 들을까?”

놈이 짐짓 고민하는 척 턱에 손을 올리고 이예주의 앞에서 두어 번 왔다 갔다 했다. 

그녀는 그저 자꾸 등 뒤에서 꿈지럭거리는 조롱이의 앞을 막아 선 채 놈의 면상을 노려보았다. 

그런 그녀를 보고 낄낄 웃음 짓던 용병대장이 불쑥 얼굴을 들이밀며 “무섭지? 무서워 죽겠지? 응? 살고 싶지?” 하고 어린아이 놀리듯 물었다. 

이예주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턱이 덜덜 떨렸다. 당연하지. 당연히 살고 싶지. 오줌 지릴 만큼 무섭고, 그에 비례할 만큼 살고 싶다. 

그녀의 흔들리는 눈동자에 담긴 삶에 대한 간절한 열망을 읽었을까. 

놈이 선심 쓴다는 듯 관대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럼 우리 불쌍한 족장님의 저주 풀어 줄 그 황조롱이 새끼를 넘겨.”

“…….”

“족장님이 계집, 너를 보면 무조건 죽여서 도륙을 내고 그 증거를 가지고 오라고 했는데. 이렇게 보니 얼굴도 꽤 반반하게 생긴 것 같구, 그냥 죽이는 것은 재미도 없으니까.”

용병대장이 어깨를 과장되게 으쓱거렸다. 

그는 이예주가 자신의 말 같지도 않은 설득에 넘어올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 것 같았다.

“내가 이 짓거리를 하는 것도 다 죽일 놈의 저주 때문이라니까. 계집, 너도 알 것 아니냐? 황조롱이만 넘기면 그냥 네 팔 하나만 잘라서 족장님께 가져다주마. 그럼 족장님도 널 도륙 냈다고 믿어 넘기실 테고, 너도 목숨을 구할 테니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게지. 안 그러냐, 애들아?”

용병대장이 수하들에게 동의를 구하며 묻자 놈들이 하나같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그렇죠! 그렇고 말구요!” 하고 맞장구를 쳤다. 

“아, 팔 자르는 것 때문에 그래? 안 아프게 내 친히 검은 안개도 먹여 주마. 팔 한 짝 없다고 안 죽어. 정말이라니까?”

“……누나.”

이예주와 같이 묵묵히 미친놈의 궤변을 듣고 있던 조롱이가 불현듯 그녀의 어깨를 슬며시 잡았다. 

이예주가 흘끗 뒤를 돌아보았다. 조롱이가 초탈한 얼굴로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예주의 얼굴이 허물어지듯 와르르 구겨졌다. 

반면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는 조롱이의 입가에는 새벽 여명처럼 희미한 웃음이 걸려 있었다. 

이예주는 그게 무엇을 뜻하는지, 빌어먹게도 곧바로 알아챘다. 

용병대장에게 다시 돌아가겠다는 뜻이었다. 

다시 그 끔찍한 방으로 돌아가 피를 빨리고, 말 같지도 않은 소리 때문에 산 채로 족장 놈들에게 잡아먹혀야 하는 그곳으로. 그곳으로…….

그때, 문득 어디서 무대 조명이라도 켠 듯 환한 빛이 이예주의 옆얼굴을 화악 찔렀다. 

꽤 오랜 시간 동굴 속에 처박혀 어두침침하고 희미한 뤼미에르 빛에 적응한 탓에 강렬한 빛을 견디기 힘들었다. 

눈이 아렸다. 이예주는 환한 빛을 따라 다시 고개를 원상태로 돌렸다. 

용병대장의 등 뒤에 ‘문’이 열려 있었다. 빌어먹을 ‘문’이. 

단 하나의 ‘문’이었다. 

이예주는 표정이 사라진 멍한 얼굴로 문 안쪽을 살폈다. 

아무런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아무것도. 그저 새하얀 ‘문’, 단지 그뿐. 

이예주의 얼굴이 기묘하게 꿈틀거린 것은 그쯤이었다. 

그녀를 살릴, 그녀의 단 하나뿐인 방법인 문이 열렸기 때문에 이예주는 용병대장이 지껄인 팔이 잘리는 미친 조건을 들어주지 않아도 충분히, 그리고 무사히 도망칠 수 있었다. 

그 너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니 그 후엔 또 까마득한 시간을 건너 이 미친 세상 어딘가에 떨어져 뒹굴겠지만. 

문 안에 무언가 보였더라도 사실 달라질 것은 없었다. 

어디든 간에 이예주에게 익숙한 곳은 없을 테니, 문을 넘는다는 건 그냥 단순히 목숨을 구하는 것뿐이다. 

언제나 그래 왔듯 ‘문’은 어느 상황에서도 무시할 수 없을 만큼 구미가 당기고 솔깃한 제안이었다. 

조롱이나 그의 손에 들려 있는 강아지, 제 등 위의 토끼를 버리면 살 수 있다.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를 팔아먹고 제 목숨을. 

시발. 이예주는 낮게 읊조렸다. 

그럴 거면 좀 더 빨리 열리던가. 왜 하필 지금 열려서. 왜 하필 아무것도 선택할 수 없는 지금 열려서. 

이예주의 아득한 시선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용병대장이 그녀를 재촉했다.

“뭘 그렇게 보는 거지? 시간이 별로 없다, 계집. 내가 나서서 네년에게 황조롱이를 빼앗는 것보다는 네 스스로 넘기는 것이 서로 얼굴도 붉히지 않고 좋을 텐데.”

“……황조롱이를 팔아넘기라고?”

이예주의 혼잣말을 저에게 하는 말인 줄 알은 용병대장이 비린내가 나도록 실실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죽을 때가 되면 인생이 파노라마처럼 눈앞에 스쳐 지나간다고들 했다. 그러나 이예주의 눈앞에 촤르르륵 스쳐 지나가는 것은 방년 23세 꽃 처녀의 인생이 아니었다. 

그녀의 눈앞에 스쳐 지나가는 것은 억센 얼굴로 제드의 얼굴을 후려치고, 그를 쫓아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 낙후된 엘리베이터를 탄 채 지하 700미터까지 내려와서 숨이 턱턱 막히는 좁은 틈 사이로 숨고, 족장과 장로의 말을 엿듣고, 조롱이의 피를 빨아 먹으려던 눈족 장로를 후려갈기던 제 모습이었다. 

이것들을 자신이 대체 왜, 무슨 정신으로 했었던가. 모든 손해를 감수하고 왜. 

무서웠다. 목이 졸릴 때는 너무 정신이 없어서 ‘문’이 열렸는지, 열리지 않았는지 살필 경황도 없을 정도였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이예주는 수십 번, 수백 번도 더 많은 고민을 했고, 또 그에 대한 선택을 해야 했다. 

하지만 무서워서 덜덜 떨면서도 선택하는 데에 망설임이 없었던 것은, 그녀의 일생에 있어 이번만큼 목표가 명확했던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 처음부터 이 짓거리를 하는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두려움에 질려 벌벌 떨면서도 포기할 생각조차 들지 않을 만큼 움직였다. 

반드시 구해야만 한다고 생각했기에. 

그런데 그 목표를 넘기라고? 그렇게 아등바등 데리고 나온 너를. 너를 넘기고 홀로 살아남으라고?

“……까.”

이예주가 작게 무어라 웅얼댔다. 

“응? 뭐라고? 그리한다고?”

용병대장이 귀에 손을 가져다 대며 되물었다. 그녀는 번쩍 고개를 쳐들었다. 

‘문’을 바라보는 동안 안개가 덧씌워진 듯 뿌옇기만 하던 이예주의 두 동공이, 언제 그랬냐는 듯 말끔하게 빛났다. 

더할 나위 없이 제정신이란 뜻이었다. 

이렇게 쉬운 걸, 이렇게 명쾌한 걸 왜 그깟 목 좀 한 번 조였다고, 말 한마디 못했던 건지. 

과거의 제가 바보 같고 한심하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황조롱이를 내놓는다고?”

용병대장이 또 한 번 물었다. 

이예주는 더 이상 웅얼거리지 않고 한 자, 한 자 상냥하게 대답해 주었다.

“아니.”

“…….”

“좆 까라고, 이 새끼야!”

누나! 얼핏 조롱이가 저를 불렀다고 생각했을 때, 이예주는 들고 있던 등불을 용병대장의 발치에 집어 던졌다. 

퍽― 

날카로운 파열음과 함께 유리등이 산산조각 나고, 그 안에서 작은 불이 붙어 있는 심지가 튕겨져 나왔다. 

“이, 이런! 뭐 하는 거야!”

아주 작은 불씨에도 불구하고 용병대장과 두 부하의 안색이 시퍼렇게 질리는 것이 보였다. 

그 모습이 마치 희극의 한 장면을 슬로우 모션으로 되감아 보는 것처럼 천천히 흘러갔다. 

이예주는 텅 빈 손으로 불룩 튀어나온 제 안주머니를 뒤져 차가운 유리병들을 한가득 꺼내 들었다. 

액체 같기도 하고 기체 같기도 한 검은색 뭉텅이들이 깨진 등불의 기류라도 느낀 것처럼, 병 안에서 꿈틀꿈틀 요동쳤다. 

그녀의 손에 든 것이 무엇인지 단번에 알아본 용병대장이 벌게진 얼굴로 악다구니를 썼다.

“저, 저! 저 미친년! 하지 마! 다 죽어, 이 미친년아! 다 죽는다고!”

이예주는 정신병자 바라보듯 저를 바라보는 인간들을 보며 픽,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목숨 가지고 장사치 짓을 하더니, 제 목숨들은 끔찍이 여기는 그 모습이 배를 잡을 만큼 웃겼기 때문이다. 

무서워? 그녀는 자문했다. 

아니, 안 무서워. 이예주는 소리 내지 않고 입모양으로 자답했다. 

괜찮아, 이예주. 너와 조롱이는 반드시 살아 나갈 테니까. 

이미 예상했던 일이다. 이 탄광굴에 들어선 순간부터. 죽거나 죽이거나, 방법은 단 두 개밖에 없었단 것을. 

이예주는 죽기보단 죽이는 방법을 선택했다. 

“예주 누나!”

공을 던지는 투수처럼 그녀는 망설임 없이 손에 힘을 풀었다. 

검은 안개가 담긴 유리병들이 그녀의 손을 떠나는 것은 찰나였다. 

꺼져 가는 깨진 등불의 불씨 앞으로 그것들이 제각기 다른 포물선을 그리며 떨어질 때, 이예주는 조롱이의 손을 낚아챘다. 

“뛰어!”

이예주는 ‘문’으로부터 등을 돌렸다. 

벌써 두 번째로 ‘문’을 버렸다. 

그녀가 살던 2017년도에서는 절대로 행하지 않을 미친 짓이었다.

그들이 제드가 도망친 오른쪽 갈림길이 아닌 왼쪽 갈래 길로 아슬아슬하게 들어섰을 무렵, 돌연 그들의 등 뒤에서 ‘쾅―!’ 하고 천지가 개벽하듯 엄청난 굉음이 들렸다.

이예주는 미친 듯이 달음박질쳤다. 제 인생에 이렇게 초인적인 힘을 발휘했던 적이 몇 번이나 있었을까. 

빌어먹을 돌산에서 돌뱀을 피해 도망치던 때? 

차라리 그때가 상황은 더 나을지도. 그때는 이렇게 거동을 짓누르는 짐 따위 없이 제 몸 하나만 잘 간수하면 끝이었으니까. 

“예주 누나!”

조롱이가 그녀를 불렀다. 하지만 이예주는 대답도 않고 달렸다. 

콰쾅! 

뒤로부터 한 번 더 폭음이 들려왔다. 그녀는 그제야 다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조롱이의 손을 낚아챈 순간부터 정신없이 뛰었기에 꽤 멀리까지 도망쳤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혼자만의 착각이었다. 

그들은 겨우 왼쪽 갈림길의 문턱에서 꺾어진 길을 약간 돌아 있는 상태였다. 

때문에 그들은 방금 전 용병대장으로부터 위협을 당했던 갈림길의 초입이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그곳은 마치 유독 가스가 담긴 통이 폭발한 것처럼 뿌옇고 독한 검은 연기에 휩싸여 있었다. 

잘 보이지 않는 연기 사이로 허리 높이만큼 일어난 불길이 화르륵 일렁이고 있었다. 

폭발을 한다는 것이 사실이었는지 검은 안개가 소량 들어 있던 작은 유리병 몇 개 던진 것치고는 커다란 불길이었다. 

“으허억! 쿨럭쿨럭!”

용병대장과 그의 수하들이 목을 부여잡고 거세게 기침을 해 대는 것이 보였다. 

그와 동시에 이예주의 콧속으로도 쓰고 매캐한 냄새가 훅 끼쳤다. 

“크헉! 잡…… 커흑! 저! 저 쳐 죽일 것들을 잡아!”

호흡하는 것이 힘이 드는지 용병대장이 꽉 막힌 소리를 내면서도 기어이 일렁이는 불길 너머를 손가락질했다. 

우락부락한 몸집을 헛짓거리로 키운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바로 앞에서 무언가가 폭발했는데도 두려워하기는커녕, 놈들은 금방이라도 이예주를 잡으러 화르륵 타오르는 불길을 헤치고 튀어 올 것 같은 기세였다. 

그녀는 부들부들 경련이 이는 아랫입술을 꾹 깨물며 중얼거렸다.

“좀 부족했나?”

“에? 에? 뭐, 뭐가여?”

“이 정도는 네 주인 주려고 남겨 놓으려고 했는데…….”

이예주는 품속에 남겨 두었던 나머지 유리병들을 꺼냈다. 

용병대장을 죽일 생각에 너무 흥분해서 잡히는 대로 모두 집어 던졌더니 남은 유리병은 단 세 개뿐이었다. 

타닥, 타다닥. 

불타는 소리가 들렸다.

이예주와 조롱이에게 다행인지 불행인지 용병대장 앞을 가로막고 있는 불길이 방금 전보다 더 커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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