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드 앤 매드 (143)화 (144/319)

“……아니, 그렇게 못해. 나 너희들 다 못 데려가.”

마지막 단어는 거의 흐느낌에 가까웠다. 

“그, 그럼 우리는 어떡해요? 이, 인간님이 풀어 주셨잖아요. 인간님이 우리를, 우리를 구해 주러 오셨잖아요.”

이번에는 인간으로 변한 제 동생을 둘러업은 사슴이 말했다. 

이예주는 울상을 지었다.

“난…… 난 그냥 풀어 주기만 할 뿐, 나머지는 너희들이 알아서 해야 돼. 나한텐 너희들 주인처럼 다 구할 만한 힘 같은 거 없어. 그러니까…….”

“쉬익! 그러면 우리는 왜 풀어 줬어!”

이예주의 말을 끊고 구렁이가 머리를 바짝 쳐든 채 경계 어린 소리로 위협했다. 

그녀를 둘러싼 신인류들의 표정이 처음보다 더 어두워졌다. 

마치 늪에 빠져 점점 죽어 가는 것처럼, 그들에게서 다시 질척하고 음울한 죽음의 냄새가 풍졌다. 

이예주가 당황하여 주춤주춤 물러섰다. 

그만큼 그들은 거리낌 없이 더 다가왔다.

“네가 모른 척 지나갔으면 어저께 약 먹은 쟤네 셋만 먼저 끌려가고, 나머진 좀 더 살았을 텐데!”

“…….”

“네 등에 업힌 토끼만 데리고 갈 거면서! 우리는 책임도 못 질 거면서! 왜 네 마음대로 풀어 줬냐고!”

이예주는 독기 품은 눈으로 쉭쉭대는 노란 구렁이 앞에서 꿀 먹은 벙어리처럼 한 마디도 하지 못했다. 

토끼도 사슴도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녀를 쳐다보는 우울한 눈으로 보아 구렁이와 한마음 같았다. 

우리를 모두 구해 주지도 못할 거면서 왜 괜히 나서서 우리를 열어 주었느냐고.

“인간 주제에! 인간 주제에, 너만 아니었으면! 너만 아니었으면……!”

“그만해!”

극도로 흥분한 구렁이가 표독스럽게 머리를 양옆으로 흔들며 모든 죄를 이예주에게 뒤집어씌우던 그 순간, 조롱이가 구렁이 앞에 불쑥 끼어들어 이예주를 막아섰다.

“너, 황구렁이! 도와준 사람한테 왜 그런 식으로 말을 해? 너희들이 뭘 안다고! 너희들이 예주 누나에 대해 뭘 안다고!”

“조, 조롱아.”

이예주는 무리하게 몸을 움직여 휘청거리는 조롱이의 팔을 가까스로 잡아채었다. 

잠시 한눈판 사이 조롱이를 놓친 제드가 그녀의 부릅뜬 눈에 허둥지둥 다가와 다시 부축했다. 

조롱이는 여전히 씩씩 숨을 몰아쉬고 소리쳤다.

“설치류들을 봐! 풀어 주자마자 알아서 제 살길 찾아 갔잖아! 가만히 있었으면 이대로 인간들 밥이 되어 죽어 나갔을 너희들, 못 본 체 안 하고 다 풀어 줬으면 도망 정도는 알아서 가야지!”

“…….”

“너희들 때문에 오히려 우리 예주 누나가 잡히게 생겼어! 예주 누나는 날 구하러 온 죄밖에 없는데! 너희들 때문에! 너희들 때문에…… 씨잉!”

“이제 어떡해. 우린 이제 다 죽은 목숨이야. 다 죽은 목숨이라고. 엄마, 엄마…….”

조롱이가 울먹거리자 그때까지 조용히 있던 코끼리가 뜬금없이 눈물을 터뜨리며 엉엉 울어 대기 시작했다. 

아이들 사이에 울음이 순식간에 전파되었다. 구렁이도 두더지도 토끼도 사슴도, 너 나 할 것 없이 엄마가 보고 싶다고 훌쩍거렸다. 

이예주는 너무 착잡한 나머지 죽을 것 같았다.

“울지 말렴, 아이들아. 저 황조롱이의 말이 모두 맞단다.”

그 순간, 계속 침묵을 고수하던 바다거북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이 인간 아가씨는 우리를 돕기 위해 최선을 다한 것이 틀림없다. 틀림없고말고……. 우린 인간 아가씨에게 고마워해야 해.”

“하지만, 하지만…… 그럼 이제 우린 어떻게 도망가요, 할아범. 우린 설치류들처럼 몸이 작은 것도 아니라 땅 구멍 같은 곳에 숨었다가 도망칠 수도 없는데…… 흐윽, 흑.”

코끼리가 여전히 눈에서 구슬같이 올망졸망한 눈물을 쏟아 내며 통곡했다. 떼를 쓰는 듯한 코끼리에게 바다거북은 천천히 고개를 저어 보였다.

“이젠 힘을 합쳐 인간들을 물리치고 도망을 칠 수밖에 없단다. 언제까지 어리광을 부리는 어린아이로 있을 수만은 없지 않니.”

바다거북의 엄숙한 말에 너도 나도 울음을 터뜨리던 아이들이 차차 소리를 죽였다. 바다거북이 이번에는 이예주를 바라보며 말했다.

“듣자 하니 황조롱이와 인연이 깊은 인간이로군. 약을 맞아 거동이 불편한 황조롱이를 데리고 힘들게 도망치는 마당에 우리한테 발목이 잡혀 어찌하누. 미안하네, 아가씨.”

“아…… 아니에요.”

이예주는 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숙였다. 차마 신인류들을 마주 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모든 것이 제 탓 같았다.

“미안해하지 마세요. 미안한 건 오히려…….”

“포포포! 너구리 살려! 포포포!”

그때였다. 철문 입구 쪽에서 망을 보던 너구리의 날카로운 비명 소리가 동굴 안에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이예주와 모든 신인류들의 시선이 동시에 휙 돌아갔다.

“어랍쇼? 오늘이 짐승 새끼들이 모이는 날이던가?”

“…….”

“오늘이 우리 족장님 취임식이라 이 집에 인간 모임이 있다는 소린 들었어도, 털 날리는 것들의 모임이 있다는 소리는 못 들었는데?”

이예주의 근처에 몰려 있던 짐승들이 제각기 거친 숨을 들이켜며 딱딱하게 얼어붙었다. 

그들의 시선이 닿은 철문 앞에, 커다란 인간이 버둥거리는 너구리의 꼬리를 부여잡고 우뚝 서 있었다. 그 뒤로 그만큼 험상궂은 남자 두 명이 더 있었다. 

“요, 용병대장이야…….”

이예주의 곁, 가장 가까운 곳에 있었던 구렁이가 꿈틀꿈틀 제 몸통을 움직여 머리를 꽁꽁 감싼 채 와들와들 떨었다. 

손끝이 저릿저릿하게 떨리는 것은 이예주 또한 마찬가지였다. 

지금까지 조금도 느끼지 못했던 목의 상처가 욱신거리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태어나서 처음으로 타인에게 목이 졸려 또 하나의 트라우마가 생긴 것 같았다. 

뚜벅뚜벅, 너구리를 손에 틀어쥔 용병대장이 철문을 지나 동굴 안쪽으로 걸어오기 시작했다.

“종이 울리기에 부리나케 우리 귀한 손님 데리러 내려왔더니, 대가리가 완전히 깨져 있더군. 응? 대가리가 완전히 아작 나 있더란 말이야.”

“…….”

“대체 어떤 망종이 부르는 게 값인 우리 귀한 손님 대가리를 그렇게 처참하게 깨뜨려 놓았을까……. 고민을 하다 보니 글쎄, 내가 없으면 족장님도 열지 못하는 철문이 활짝 열려 있지 않은가. 그도 모자라 온 마을을 이 잡듯이 뒤져 잡아 온 동물들이 모두 우리에서 나와 사이좋게 노닥거리고 앉아 있네?”

용병대장이 걸음을 멈추고 동물들 사이에 얼빠진 얼굴로 서 있는 이예주를 정확히 쳐다보았다. 

아드득, 그의 입에서 이를 가는 섬뜩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녀를 노려보는 남자의 눈이 어둠 속에서 형형히 빛났다.

“이런 환장할 상황을 만든 인간은 대체 어떤 낯짝을 하고 있으려나 했더니. 발칙한 계집년.”

“…….”

“바로 너로군.”

이예주는 저릿저릿 떨려 오는 한 손을 뒤로 감췄다. 

자꾸만 뒷목이 뻣뻣하게 굳는 것 같았다. 

이 마비가 온몸에 퍼져 나가, 옆에 있는 어린 신인류들처럼 꼴사납게 떨게 될까 봐 두려웠다. 

“망할 년. 이번에야말로 잡아서, 산 채로 껍데기를 벗겨 바닷물에 염장해 주마.”

남자가 욕지거리를 걸게 지껄이며 발걸음을 다시 옮겼다. 

놈이 너구리가 갇혀 있던 첫 번째 우리를 지나려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우리와 우리의 넓지 않은 틈새로 갑자기 시커먼 쥐 떼가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뭐야! 이게 다 뭐야!”

갑작스런 쥐 떼의 습격에 용병대장과 그 수하들은 자리에서 펄쩍펄쩍 뛰며 괴성을 질렀다. 

오랫동안 지하 탄광 속에서 숨어 산 쥐들은 하나같이 털이 새까맸다. 

그중 유일하게 새하얀 털을 가진 생쥐가 용감하게 용병대장의 바지를 물고 늘어졌다. 

아까 전 이예주가 풀어 주자마자 꽁지가 빠져라 작은 구멍으로 도망친 생쥐였다.

찍찍, 찍찍찍찍. 동굴 안은 온통 쥐 울음소리 천지였다. 

그러나 그것은 약과였다. 어디선가 끼끼끼끼, 꾸꾸꾸꾸 하는 정체불명의 소리가 울려 퍼졌다. 

곧 열려 있는 철문을 타고 새까만 박쥐 떼가 나타나 용병대장 일행에게 날아들었다. 

“악! 윽! 으악―! 이게 뭐야! 당장 이것들을 죽여! 당장!”

용병대장이 두 팔을 미친 듯이 휘휘 내저으며 소리 질렀다. 

하지만 그의 명령을 들을 수하들 또한 사정이 여의치 않은 것은 마찬가지였다. 

발치를 맴도는 쥐 떼와 끊임없이 달려드는 박쥐 떼 때문에 놈들은 좀체 균형을 잡지 못하고 자꾸만 레일 왼쪽으로 몰렸다. 

철문까지 길이 트였다. 바다거북이 소리 질렀다.

“지금이야! 달리려무나!”

그 소리에 멍하니 인간들의 꼴을 바라보던 어린 신인류들이 달음박질치기 시작했다. 

가장 앞서 철문 근처에 도착한 참매 세 마리가 푸드덕푸드덕 힘찬 날갯짓을 했다. 

매들은 박쥐 떼와 더불어 용병대장에게 달려들어 놈의 손을 미친 듯이 쪼아 대었다.

“아악!”

날카로운 맹금류의 부리와 발톱에 팔이 찢긴 용병대장이 아차 한 사이 부여잡고 있던 너구리의 꼬리를 놓쳤다. 

가볍게 착지한 너구리가 제일 먼저 철문을 지나 바깥으로 나갔다. 

그 뒤를 닭, 돼지, 토끼, 사슴, 병아리가 차례차례 따랐다. 

그들은 헐레벌떡 뛰어 문밖으로 빠져나갔다. 

이예주 앞에 남은 것은 머리를 숨긴 채 여전히 와들와들 떨어 대는 구렁이와 훌쩍거리는 코끼리, 그리고 두 신인류를 태운 채 열심히 움직이고 있지만 여전히 이예주의 시야 안에 남은 바다거북뿐이었다. 

그녀는 그들을 보다가 저도 모르게 혀를 꽉 깨물었다. 정말이지, 뱀은 싫은데.

“정신 차려!”

이예주는 손을 뻗어 노란 구렁이를 세게 흔들었다. 

구렁이가 화들짝 놀라 쑤욱 뱀 대가리를 빼냈을 때, 그녀는 혼절하고픈 심정이었다. 

“어, 어떡해? 우리 죽어? 우리 죽어?”

뱀이 애처롭게 물었다. 

이예주는 단호하게 부정했다.

“안 죽어. 안 죽으니까 정신 차리고 몸으로 바다거북 감아.”

“…….”

“빨리!”

이예주가 버럭 소리 지르자 구렁이가 그제야 꾸물꾸물 똬리를 풀고 거북의 등딱지를 타고 넘어, 밧줄처럼 바다거북을 온몸으로 꽁꽁 싸맸다. 

정신을 잃은 두 명의 어린 신인류들을 꽉 감는 게 마뜩잖았는지 구렁이가 손가락 하나 정도 들어갈 여유를 두었다.

“이, 이렇게?”

“더 세게 감아. 아이들이 떨어지면 안 되니까.”

더 세게, 더 세게. 이예주의 계속되는 요구에 구렁이는 몸에 힘을 줘 신인류들과 바다거북을 세게 조였다.

“코끼리! 너 지금 코끼리로 변해.”

그녀가 이번에는 코끼리에게 명령했다. 

길쭉한 코를 가진 남자아이가 울먹울먹 거리다가 이내 ‘펑!’ 하고 커다란 코끼리로 변신했다. 

이예주는 바다거북을 감은 채 고개를 빠짝 들고 있는 구렁이에게 다가가 뱀의 머리를 콱 잡았다. 

“윽…….” 

구렁이가 신음 소리를 다 내기도 전에, 이예주는 코끼리 꼬리를 구렁이의 벌어진 아가리에 쑤셔 넣었다. 

그리고 구렁이 입을 꾹 다물리면서 말했다.

“이거 절대 놓지 마. 어쩔 수 없으니까 아파도 좀 참고.”

“우우?”

구렁이가 입에 한가득 코끼리의 꼬리를 물은 채 동그랗게 눈을 치뜨고 웅얼거렸다. 

돌산에서 만난 빌어먹을 돌뱀 이후로 뱀이라면 치가 떨리는 이예주였지만, 그 반짝이는 까만 눈을 보니 조금 귀엽기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절대 놓지 마. 간다!”

이예주는 잡았던 구렁이의 머리를 놔주었다. 

그리고 구렁이를 잡았던 그 손에 온 힘을 실어 코끼리의 엉덩이를 힘껏 내리쳤다. 

철썩―!

“뿌우우우―!”

아닌 밤중에 볼기짝을 맞은 코끼리가 길쭉한 코를 위로 쳐들고 괴성을 지르며 전력 질주하기 시작했다.

“아악! 엑! 으윽! 큭!”

코끼리의 꼬리를 꽉 물은 구렁이와 그에 감겨 끌려가는 바다거북은 이곳저곳에 몸이 부딪혀 철문을 넘을 때까지 끊임없이 고통 어린 신음 소리를 냈다. 

그러나 여러 번 당부했기 때문인지, 노란 구렁이는 비늘이 까지고 피부가 긁히는 것을 감수하면서도 끝내 입에 문 꼬리를 놓지 않았다. 

그렇게 그들이 철문을 통과할 무렵, 아슬아슬한 차이로 용병대장이 품에서 두 개의 칼을 꺼내 쥐고 휘둘러 대기 시작했다. 

날카로운 칼날에 박쥐들은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대장이 도구를 사용하기 시작하는 것을 보고 두 부하도 뒤늦게 칼을 뽑았다. 

얼마 후, 박쥐 뭉치가 군데군데 휑하게 비었다. 그러자 좌측으로 치우쳤던 놈들이 길을 뚫고 중앙으로 오기 시작했다.

“우, 우, 우리는 어떻게 해요, 레, 레이디?”

제드가 벌벌 떨며 이예주에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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