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드 앤 매드 (142)화 (143/319)

벌써 두 번째로 듣는 것이니 이예주의 일행도 그 소리를 모를 리 없었다. 

엘리베이터가 마침내 긴 여정을 마치고 바닥에 낡고 무거운 몸체를 내려놓는 묵직한 소리였다.

“헉! 이, 인간들이에요! 인간들이 틀림없어요! 도망가세요, 인간님! 산쵸를 데리고 부디 얼른 도망가 주세요!” 

우리 안에서 토끼가 단박에 파리해진 안색으로 비명을 질렀다. 

“누나! 예주 누나, 가야 돼여!”

“레, 레이디. 가요! 가요!”

마비가 제법 풀린 것인지 아니면 마비가 풀릴 만큼 급박했는지, 놀랍게도 조롱이가 한쪽 팔을 번쩍 들어 토끼를 업고 있는 이예주의 등을 마구 밀었다. 

제드가 아직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조롱이의 발이 되어, 등을 떠미는 조롱이에게 힘을 실어 주었다. 

그들의 공세에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못 박힌 듯했던 이예주의 다리가 조금씩 움직였다. 

그녀가 걸음을 옮기기 시작하자 제드와 조롱이가 눈에 띄게 안도하며 그 뒤를 따랐다. 

이예주는 다시 도망을 위해 부지런히 걷기 시작했다. 그런데 자꾸 귓속에서 질척한 흐느낌이 떨어지질 않았다. 

마치 몸 위에 올라탄 처녀 귀신이 가위를 누르며 귓가에 음습한 귀곡성을 쏟아 내는 것처럼. 

흐…… 흐으…… 엄마, 집에 가고 싶어……. 아빠, 무서워…… 무서워…… 죽기 싫어……. 

척추를 타고 짜르르 소름이 돋았다. 머리카락 끝이 쭈뼛 설 정도로 작은 흐느낌이었다. 

그게 귀 옆에서 날숨을 내뱉듯 속삭이면서…….

“씨발.”

이예주는 결국 우뚝 멈춰 섰다. 

어금니를 꽉 문 탓에 그녀의 턱이 눈에 띄게 단단해졌다. 

빌어먹을. 이게 다 아까 철문을 따고 열쇠를 다시 안주머니에 쑤셔 넣지 않은 탓이야. 

멍청하게도 그냥 그걸 손에 쥐고 무작정 문 안으로 들어선 탓에 뾰족한 열쇠 끝이 손바닥을 자꾸 찔러서. 

손바닥이 너무 아파서. 

이게 다 열쇠 때문이야, 이게 다.

“누나.”

조롱이가 우뚝 멈춘 이예주를 의아한 얼굴로 불렀을 때, 그녀는 불쑥 뒤로 돌아 그를 마주 보았다. 

그녀는 절박한 얼굴로 바닥에 토끼 신인류와 등불을 내려놓았다. 

그러더니 그대로 도망 길과는 반대쪽 우리를 향해 성큼성큼 뛰어가기 시작하는 게 아닌가.

“예주 누나!”

이예주의 기행에 조롱이가 불안한 얼굴로 그녀를 소리쳐 불렀다. 

그러나 이예주는 대답도 않고 마구 달려 문과 가장 가까운 첫 번째 우리 앞에 도달했다. 

문이 열린 탓에 바깥에서부터 뤼미에르 빛이 쏟아져 들어와 첫 번째 우리 안에 있는 동물을 비교적 자세히 볼 수 있었다. 

겁에 질린 까만 눈동자, 너구리였다. 

문을 열어 둔 탓인지 멀찍이서 들릴 듯 말 듯 인간들의 말소리가 웅웅 울리는 것 같았다. 

환청이었으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빌어먹게도 제정신이 똑바로 박혀 있는 상태이니 환청은 아니겠지. 

아니, 사실은 모르겠다. 

이예주는 자신이 많이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이런 짓을 할까, 왜. 어쩌면 지하 700미터 아래로 내려올 때부터 조금 미친 게 아닐까. 

그렇지 않다면 제가, 같은 반 친구들이 수학여행 사고로 뒈지든 말든 부득불 ‘문’을 넘어 혼자만 살아남은 제가, 이럴 리가 없는데. 

종소리를 듣고 내려온 인간들이 아주 멀리 있는 탄광 입구에서부터 아주 천천히 걸어오며 대화를 나누고 있더라도, 그 대화 소리는 점점 커질 것이다. 

그리고 종국에는 바로 코앞에서 들릴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그전에, 그러니까 그전에.

“씨발, 내가 무슨 광영을 보겠다고. 내가 무슨 광영을 보겠다고…….”

미친, 이건 오지랖이야. 당장 도망가도 모자를 판에. 정말 몸에 성인군자라도 납신 것이 틀림없어. 미친년, 너 돌았어. 넌 미친 것이 확실다고. 

이예주는 끊임없이 욕설을 지껄였다. 

그러나 현실을 똑바로 자각하고 있는 입과는 다르게, 그녀의 손은 벌컥 우리 문을 잠가 둔 커다란 자물쇠를 쥐고 있었다. 

그녀는 급한 마음에 열쇠 구멍도 제대로 확인하지 않고 무작정 열쇠를 쑤셔 넣었다. 

철컥. 마법 열쇠가 또 한 번 그 진가를 발휘했고, 너구리가 갇혀 있는 쇠창살 문이 활짝 열렸다. 

이예주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이 일그러진 얼굴로 헉헉, 가쁜 숨을 몰아쉬며 겁에 질린 작은 너구리에게 말했다.

“나와.”

망할.

“으으! 망할! 지금부터 문 다 열 테니까. 정신머리 있는 놈들은 빨리 튀어나와서 정신 못 차리는 것들 데리고 도망가. 얼른!”

망할 놈의 이예주. 

그것만이 유일하게 남은 생각이었다.

조롱이는 동굴 한가운데에 깔려 있는 레일 위에 서서, 딱딱하게 굳은 상태로 인간 여자가 하는 양을 바라보았다. 

이예주는 레일을 중심으로 왼쪽 오른쪽을 번갈아 허겁지겁 뛰어 다니며 우리의 문들을 열고 있었다. 

생쥐나 박쥐 따위의 작은 설치류는 문이 열리자마자 제각기 뚫려 있는 구멍으로 쪼르르르 도망을 쳤다. 

박쥐는 인간의 나이로 치자면 청년 정도 되었는데, 그는 탄광에서 살아서 딱히 도망갈 데가 없었다. 

먹이를 찾으러 승강기 주변까지 나왔다가 인간이 휘두르는 각목에 두드려 맞고 어이없이 잡힌 것이라 그는 인간의 손에 다시 풀려나는 것에 관해 굉장히 상심해 하였다. 

물론 이예주는 신경도 쓰지 않았지만.

지하 깊은 곳에 파져 있는 굴이라는 단점은 몸집이 작은 동물들에게는 단점으로 작용하지 않았다. 

이곳저곳 파인 것이 굴이고 구멍이라 일단 동물의 모습을 하고 있다면 도망을 치는 것은 일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몸집이 큰 육지 동물과 날아다니는 조류였다.

제일 먼저 풀려난 작은 너구리는 몸이 유연하여 설치류들이 도망가는 틈새를 비집고 도망치거나 숨을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너구리는 포포포포 울다가 ‘펑!’ 하고 10살 정도 된 인간 남아의 모습으로 변하더니 망을 본답시고 철문 앞에 붙었다. 

철컥, 끼익― 

마술을 부리듯 이예주의 손이 쉴 새 없이 자물쇠를 땄다. 

방금 막 열린 쇠창살에서 참매 세 마리가 퍼덕퍼덕 힘차게 날갯짓을 하며 그녀의 얼굴 위로 깃털을 흩뿌렸다. 

아직 어려서 그런지 도약하는 것이 어수룩했다. 

참매들은 날다가 떨어져서 총총총 뛰다가 다시 나는 것을 반복했다. 

그러나 어린 것들이라고 해 봤자 황조롱이보다 두 배는 커다랬다. 

아직 인간의 말을 하는 각성 단계까지는 못 갔는지, 밖으로 나온 참매들이 사납게 깩깩댔다. 

이예주는 머릿결에 회갈색의 깃털이 엉기든 말든 바로 반대편 레일로 뛰어갔다. 

참매들이 그녀의 뒤를 어미 새 따르듯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졸졸 따랐다.

“……누나.”

조롱이는 작은 목소리로 이예주를 불렀지만 그녀는 그 소리를 전혀 듣지 못하는 것 같았다. 

어쩌면 들었음에도 차마 그를 마주할 자신이 없어 못 듣는 척하는 것일 수도 있다. 

열쇠를 들고 날듯이 뛰어다니는 이예주의 턱을 타고 굵은 땀방울들이 물 떨어지듯 뚝뚝 떨어졌다. 

그녀가 데려온 족장의 아들은 그녀의 행동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질린 안색으로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다. 

조롱이는 다시 한 번 이예주를 부르려다가 이내 입을 다물고 한숨을 내쉬었다. 

부른다고 해서 들을 인간도 아니었지만, 우리에 갇혀 있는 신인류들과 같았던 입장으로서 그녀가 지금 하는 행동이 너무나도……. 

그래, 너무나도 당황스러웠다. 

얼마나 당황스럽냐면 족장의 아들이 발을 동동 구르다 못해 손톱까지 톡톡 깨무느라 조롱이를 부축하던 것을 멈추었을 때, 약 기운으로 마비된 다리임에도 꼿꼿이 섰을 정도였다.

이예주는 다시 왼쪽으로 넘어와 새로운 우리의 문을 열었다. 어딘가 모르게 스산한 느낌의 네댓 살 먹은 여자아이가 그녀가 자물쇠 따는 모양새를 말똥말똥 바라봤다. 

이윽고 쇠창살을 훅 잡아당기며 아이에게 다정스레 말했다.

“얼른 나와.”

아이가 이예주를 경계하듯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가느다랗고 끝이 두 가닥으로 갈라진 혀가 날름날름 움직였다.

“쉬익― 고마워, 쉭.”

여자아이라고는 믿기 힘든 거칠거칠한 소리가 혓바닥을 타고 나왔다. 

이내 ‘펑!’ 하고 검은색의 자욱한 연기가 터졌다. 

매캐한 연기 사이로 조롱이의 닭발만큼 노란 색의 굵은 구렁이 한 마리가 꿈틀꿈틀 기어 나와 이예주의 다리를 스산하게 스치고 지나갔다. 

머리 끝까지 소름이 쫘악 끼치는 기분이었다. 

그녀는 고맙다는 인사에 답도 못하고 로봇처럼 뻣뻣한 몸으로 삐걱삐걱 등을 돌렸다. 

간신히 레일을 넘어 오른쪽에 도착해서야 뒤늦은 몸서리를 칠 수 있었다.

“……으으!”

차마 대놓고 반응할 수 없었지만, 정말이지 뱀은 질색이었다. 

그다음 우리에 있는 것은 대체 어디서 잡아 왔는지 모르겠지만 커다란 코끼리였다. 

그는 실제 나이도 15살이었고, 인간의 모습으로도 조롱이처럼 딱 15살짜리 남자애 같았다. 

코가 있는 자리에 인간의 짧고 뭉툭한 코 대신 길쭉한 회색 코가 있는 것이 참 인상 깊었다. 

그다음 우리에는 완전한 인간의 모습인 바싹 마른 할아버지가 앉아 있었는데, 그는 이 탄광 전체에서 유일한 성체 신인류였다. 

어린 신인류들만 잡혀 온 이곳에 웬 할아버지가 있을까 싶어 고개를 갸웃거리는 이예주에게 그는 끙끙거리며 사정을 설명했다.

“파도에 휩쓸려서 해안가까지 떠내려왔는데, 다시 바다로 돌아가던 도중에 인간 아이들이 너무 빨라서 잡혀 버렸다오…….”

대체 어떤 동물이기에 인간보다 느려서 잡혀? 

그 궁금증은 이예주가 조롱이와 같이 데리고 나온 토끼의 쌍둥이 자매를 꺼내고, 그 옆 우리에서 정신을 못 차리고 쓰러져 있는 두더지까지 꺼내 주고 나서야 풀렸다.

작업 도중, 그때까지 꺼낸 신인류들의 수를 모아 보니 열이 약간 넘는 정도였다. 

그중에 조롱이와 토끼처럼 약을 맞고 정신을 잃은 어린것들이 세 명이나 되었다. 그것들은 고작해야 세네 살은 넘었을까 싶을 만큼 완전히 아가들이었다. 

동물의 모습이 아닌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어서 어떤 동물들인지 종잡지 못하던 이예주에게 한 사슴이 껑충껑충 뛰어와 왼쪽부터 차례대로 여우, 두더지, 사슴라고 알려 주었다. 

약을 맞아 쓰러진 사슴은, 어린 신인류들이 어떤 동물인지 알려 준 사슴의 동생이었다. 

다행히 그 사슴은 제 오빠가 책임지고 태워 나르기로 했다. 

그러나 남은 신인류가 무려 두 명이었다. 

오랜 시간 갇힌 채 지속적으로 약을 맞은 탓에 몸이 많이 약해진 칸쵸는 부축을 도울 순 있어도 제 자매를 업고 이동할 정도는 못 되었다. 

때문에 산쵸를 업어야 하는 이예주가 남은 둘까지 안아 들고 움직일 수는 없었다. 

그녀는 실신하기 직전인 제드를 잠시 돌아보았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조롱이 하나도 제대로 부축하지 못하는 저 심신미약자가 이 유아들까지 데리고 움직일 수 있을 리 만무했다. 

난감한 표정으로 어찌할 바를 모르는 이예주에게 선뜻 아이들을 제가 옮기겠다며 나선 것은, 바로 늙은 할아버지였다. 

‘펑!’ 하고 변한 그는 제 등에 아이들을 올려 달라고 요청했는데, 우리 넓이만 한 커다란 등딱지를 가진 바다거북이었다. 

아이들을 들어 그의 등딱지에 올려놓으면서도 이예주는 이게 과연 잘하는 짓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바다거북이 왜 인간 아이들에게 잡혔다고 말했는지 막 깨달았기 때문이다. 

아이들을 태운 바다거북은 열심히 움직였다. 하지만 전혀 움직였다고 볼 수 없을 만한 움찔거림에 불과했다. 

그때였다. 멀리 떨어진 철문 쪽에서 망을 본답시고 서 있던 너구리가 화들짝 놀라 쩌렁쩌렁 소리를 질렀다.

“포포포! 다 왔어요! 인간들이 왔어요! 거의 다 왔어요!”

그 소리에 동굴 안이 커다랗게 술렁였다. 

끼엑 끼엑 하는 새소리부터, 왈왈, 멍멍, 꾸어엉, 쉬익 쉬익, 꾸엑, 꿀꿀까지. 

제각기 울어 대는 동물들의 겁에 질린 소리가 마치 동물원에 와 있는 것만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이예주는 일그러진 얼굴로 고개를 들어 아직 우리 안에 남아 있는 동물들의 수를 세었다. 

병아리, 돼지, 강아지가 공포에 잠식된 눈으로 그녀를 애타게 바라보며 어서어서 꺼내 달라고 울고 있었다.

그들이 갇혀 있는 우리 옆으로 동굴이 끝나는 게 아니었다. 

그 뒤로도 수많은 우리들이 쫘아악 늘어서 있었고, 가깝다고 느꼈던 반대편의 갈림길은 생각보다 멀리 있었다. 

도망치든 숨든, 이제 이예주도 제 살길을 도모해야 할 때였다. 

그녀는 서둘러 뛰듯이 걸어가 저보다 조금 앞선 곳에 내려놓았던 토끼 신인류 산쵸를 다시 힘겹게 둘러업고 조롱이와 제드를 챙겼다. 

이예주의 시선이 닿자 조롱이를 놓은 채 안절부절못하고 있던 제드가 허겁지겁 그를 부축했다. 

이예주는 흘끗 바닥에 놓아둔 등불을 향해 턱짓하며 제드에게 그것을 들기를 종용했다. 

이제 제법 눈치가 빨라진 그는 끽소리도 않고 그것을 행했다. 

그녀는 다시 뛰듯이 걸어 닭이 있는 우리 앞에 도착했다. 

그 뒤를 동물들이 우르르 뒤따랐다. 다급한 손짓으로 자물쇠를 마저 연 후, 그녀는 고개를 돌렸다. 

“……이제 그만 따라와.”

그러나 신인류들은 말을 듣지 않았다. 

이예주가 돼지가 갇혀 있는 우리의 자물쇠를 따며 “따라오지 마.” 하고 한 번 더 말해도 소용없었다. 

꼭 엄마가 좋아서 달라붙는 어린아이를 억지로 떼어 내는 기분이었다. 

이예주는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제 뒤에 죽 늘어선 신인류들을 바라보고 이야기했다. 

뒤늦게 엉금엉금 기어 온 바다거북이 뭉쳐 있는 동물들에게 합류했다. 

거북 할아범을 제외하면 하나같이 작고 미성숙한 아이들이었다. 

그 아이들의 까만 눈동자가 오롯이 자신을 향해 못 박혀 있었다.

“따라오지 말라고.”

이예주가 다시 한 번 말했다. 

이번에는 목소리가 떨리지 않았다.

“우, 우리도…… 우, 우리도 데려가 주세요.”

그녀의 등에 업힌 토끼의 쌍둥이 자매가 어렵사리 입을 열어 애원했다. 

이예주는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냉정하게 내치면서도 그녀는 울고 싶어졌다.

“안 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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