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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 앤 매드 (141)화 (142/319)

정신을 차릴 기미가 없이 등 위에 늘어져 있는 토끼 신인류. 

허연 얼굴로 사시나무 떨듯 떠는 멍청한 놈 하나. 

그 멍청한 자식에게 기댄 채 영 몸을 가누지 못하는 아픈 조롱이. 

그리고 아무런 계획도 방법도 생각도 없는 자신. 

답 없는 자신. 

답 없는 이예주.

“진짜…… 진짜 어떡하지?”

이예주는 정말이지 울고만 싶었다. 람이 생각났다. 

그 망할 자식은 끔찍이도 아끼는 애완동물과 자신이 이렇게 개고생을 하고 있는데, 대체 어디서 뭐 하고 있는 것일까. 

밥은 잘 먹고 있나. 잠은 잘 자고 있나. 

람 생각에 화가 불쑥 치밀다가도 금세 우울한 얼굴로 꼬랑지를 내렸다. 

따지고 보면 그 남자의 잘못은 하나도 없었다. 이게 모두 다 자신이 자초한 일이었으니까. 

이 미친년! 멍청한 년! 이예주는 갑자기 든 자기혐오감에 입술을 한껏 씨근덕대며 제 자신에게 쌍욕을 퍼부었다. 

그러다가 조울증 환자처럼 순식간에 생각을 달리하며 욕을 멈췄다. 

아니야, 예주야. 아니야, 넌 멍청하고 머릿속에 똥만 찬 년이 아니야. 너는 그냥 불쌍한 피해자야. 

기껏 용암 피해 간신히 혼자 살아남았더니, 이제는 하나같이 제정신이 아닌 놈들에게 잡혀 죽임당할 신세가 되었구나. 

세상에 너만큼 불쌍한 애가 또 어디 있다고 너마저 자신을 욕하면 어떡하니! 

등 뒤에 신인류를 둘러메고 있지만 않았다면 이예주는 분명 두 손으로 제 자신을 끌어안았을 것이다. 

그만큼 정신이 반쯤 나간 채 때아닌 자기 연민에 가득 빠져 있었다. 

그런데 그때, 그녀의 팔을 누군가 콕콕콕 두드렸다. 

이예주는 이제 곧 잡힌다는 생각에 기분이 매우 좋지 않아 응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무시에도 굴하지 않은 그 누군가가 지속적으로 팔뚝을 두드렸다. 

탈출할 생각만으로도 머리가 벅찬 그녀는 그 작은 진동에 벌컥 화가 치솟았다.

“아, 왜!”

두 눈을 부리부리하게 치켜뜨고 고개를 돌리자, 제드가 푸드덕 뒷걸음질 쳤다.

“왜! 뭐!”

“저, 저, 저기…….”

“저기 뭐! 왜!”

“흐익!”

그가 겁먹은 표정을 지었다. 

이예주는 여전히 무서운 표정으로 그것을 바라보았다. 

제드는 쭈뼛거리다가 이내 그녀를 건드린 이유를 털어놓았다.

“빠, 빠져나갈 방법이 이, 있는데요…….”

기껏 해야 ‘오줌 마려워요, 무서워요.’ 따위 말이나 할 줄 알았던 놈의 입에서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이 튀어나왔다. 

그녀는 화등잔만 해진 눈으로 제드를 다시 보았다.

“뭐? 방법? 무슨 방법?”

“저, 저쪽으로 가면 기, 길이 더 있어요.”

제드가 손가락을 뻗어 한 군데를 가리켰다. 

그 끝에 탈출 방법으로는 생각도 하지 않은 철문이 보였다. 

조롱이와 토끼 신인류를 꺼낸 후 용병대장이 다시 문고리를 쇠사슬로 꽁꽁 싸매고 자물쇠를 채운 오른쪽 문이었다. 

이예주가 눈살을 좁혔다. 

“장난해? 저긴 신인류들 갇혀 있는 곳이잖아!”

“아, 아니에요! 아, 안쪽에 탄광 길이 더 파져 있어요! 저, 정말요!”

제드가 미심쩍어하는 그녀의 눈초리에 부리나케 외쳤다. 

정말이라는 말을 세 번이나 거듭 반복한 그의 말은 거짓 같지 않았다. 

이예주는 조금 뜸을 들이다가 되물었다.

“……확실한 거야?”

“아, 아부지가 여기를 시, 신인류들을 가둬 놓는 곳으로 만들고 나서부터는 내, 내려온 적이 없어서 마, 많이 바뀌었을지도 모르지만…… 그, 그래도 워, 원래 뚫어 놓은 길까지 바꾸진 않았을 거예요.”

그는 이어 이예주의 눈치를 살피며 덧붙였다.

“사, 사실 자, 자물쇠를 딸 수 있는 열쇠를 안 가지고 와서 마, 많이 걱정했는데, 레, 레이디가 가지고 계신 마, 마법 열쇠로 자물쇠를 따면…….”

“들고 있어.”

제드가 미처 말을 다 끝맺기도 전에 이예주는 토끼 신인류의 엉덩이를 떠받치느라 힘겹게 들고 있던 등불을 그의 품에 홱 넘겼다. 

그러고는 오른쪽 문으로 휙휙 걸어갔다. 

빠르게 철문 앞에 도착한 이예주는 바닥에 잠시 토끼 신인류를 내려놓고 서둘러 품 안쪽을 뒤적거렸다. 

딸그락딸그락, 유리병을 한가득 집어넣어 불룩 튀어나온 안주머니를 휘젓다 보니 맨 구석에서 딱딱하고 뾰족한 감촉이 느껴졌다. 

혹여라도 꺼내다가 유리병이 바닥에 떨어져 깨지는 불상사를 막기 위해 신중을 기하며 찾은 열쇠를 끄집어낸 이예주는 혼잣말하듯 제드에게 말했다.

“이건 마법 열쇠 같은 거 아니야.”

“예, 예? 마, 마법 걸린 열쇠가 아니면 뭐, 뭔데요?”

그녀는 자물쇠를 한 손으로 잡아 들고 구멍에다가 열쇠 머리를 쑤셔 넣었다. 

자물쇠의 구멍은 그녀의 열쇠에 맞물리긴커녕, 금방이라도 열쇠를 툭 뱉어 낼 만큼 헐겁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람이 대체 무슨 요술을 부려 놓은 건지는 몰라도, 이음새 하나 맞지 않던 열쇠는 금방 자물쇠를 열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뽀얀 베이지색 털을 자랑하던 열쇠에 매달린 리락쿠마 인형이 탄광에서 몇 번 굴렀다고 그새 더러워져 있었다. 

문고리에 많이도 감겨 있는 사슬을 둘둘 풀어내며 그녀는 툭 내뱉었다.

“뭐긴 뭐야. 처녀 혼자 사는 집 열쇠지.”

“…….” 

“그러니까 넘볼 생각 하지 마. 치한으로 오해받고 뒈지게 얻어터진다.”

철크덕, 그녀는 마침내 무거운 쇠사슬들을 문고리에서 떼어 냈다. 

워낙에 꽁꽁 감아 둔 탓에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끼릭, 끼리리릭― 

여전히 도르래가 돌아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전보다 훨씬 더 크게 들리는 것으로 보아, 위에서 내려오는 놈들이 탄광에 도착하기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이예주는 빠른 몸놀림으로 옆에 내려놓았던 토끼 신인류를 다시 등 위에 둘러메었다. 

끙차, 여러 번의 시도 끝에 무거운 몸을 일으킨 그녀는 비장한 표정으로 철문의 손잡이를 움켜쥐었다.

“가자, 얼른!”

끼이익― 귀곡성과도 같은 녹슨 경첩 소리와 함께 철문이 열렸다. 

눈족 여자에게서 조롱이를 구출해 냈던 왼쪽 방과는 다르게, 오른쪽 문 안의 공간은 매우 어두웠다. 

드문 간격으로 뤼미에르 꽃이 빛을 발했지만 대부분 수명이 다한 듯 그 밝기가 희미하기 그지없었다. 

확실히 방처럼 꾸며 놓은 왼쪽 방에 비해 이곳은 뻥 뚫려 있는지 복도만큼 서늘했다. 

탄광 특유의 매캐한 석탄 냄새와 뭐라 형용할 수 없는 비린내가 훅 끼쳤다. 

문 앞에 우뚝 서 있던 이예주는 뒤쪽으로 한 손을 뻗어 짧게 “등불.” 하고 명령했다. 

제드가 후다닥 등불을 대령했다. 그녀는 넘겨받은 등불을 문 안쪽을 향해 훅 들어 보였다. 

등불의 미미함은 밝은 빛 아래에서만 해당되는 사항이었다. 

완전한 어둠 속에서 기름 등불은 무섭도록 빛을 발하여 머나먼 반대편 갈림길까지 보이도록 시야를 터 주었다. 

오른쪽 문 안은 도저히 방이라고 부를 수 없었다. 그저 동굴 통로의 연장선일 뿐. 

제드는 제가 오지 못한 사이 길이 변했을지도 모른다고 걱정했지만, 다행히 길은 변하지 않았는지 광활한 동굴이 그들의 앞에 펼쳐졌다. 

등불이 밝힌 것은 동굴 속 통로만이 아니었다. 

어둠이 걷히자 조롱이가 갇혀 있던 곳의 처참한 광경이 드러났다. 

문밖에서 끊겼던 레일이 문 안쪽에서부터 다시 시작되었고, 그 레일을 따라 양옆으로 커다란 동물을 수송할 때나 볼 수 있을 우리들이 쫘악 늘어서 있었다. 

“이, 이게…… 이게 다 뭐야?”

어딜 둘러봐도 쇠창살만 그득했다. 듬성듬성 빈 우리도 있었으나, 대부분의 우리 안에는 살아 있는 것들이 갇혀 있었다. 

그들의 모습은 제각기 달랐다. 동물의 모습인 이도 있었고, 동물과 사람의 중간 모습인 이들도 있었다. 

이예주의 등에 업혀 있는 토끼 신인류처럼 완전히 사람의 모습을 한 채 정신을 잃고 축 늘어져 있기도 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들 모두 신인류가 틀림없다는 점이었다. 

수인들의 음울한 시선이 피부가 따갑도록 느껴졌다. 

하나같이 어린아이들이었다. 

동물의 모습을 했건, 인간의 모습을 했건 하나같이 약하고 어린 것들. 

이예주를 바라보는 그 어린 것들의 동공 속에는, 눈곱만큼의 희망조차 존재하지 않았다. 

오로지 공포, 절망, 체념만이 한가득 깃들어 있었다.

대충 세어 보아도 열 명은 넘어 보이는 아이들의 모습에 그녀는 눈앞이 아연해졌다.

어째서― 매번 오는 인간들과 다른 인간이 왔는데도 어째서 단 한 명도 구해질 거란, 무사히 집으로 돌아갈 거란 기대조차 하지 않는 걸까. 

어째서. 얼마나 험한 꼴을 보아 왔으면. 

문득 이는 현기증에 휘청거리던 그녀는 이내 중심을 바로잡고 조심스럽게 문 안으로 들어섰다. 

그녀가 들고 있는 등불이 닿을 때마다 그들에게서 짙은 두려움이 왈칵왈칵 쏟아져 나왔다. 

아이들인데. 신인류들이 나이에 대해서 인간들과 아무리 다른 개념을 가지고 있더라도 기껏해야 조롱이뻘, 그보다 더 어린 것이 틀림없어 보이는 아이들인데.

이예주가 멍하니 문 가까이에 있는 비좁은 우리 안을 등불로 들여다보던 그 순간이었다.

“사, 산쵸!”

쩔컥! 그녀가 있는 곳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우리의 쇠창살에 누군가 와락 달라붙어 어디선가 들어 본 이름을 커다랗게 불렀다.

“산쵸! 산쵸!”

이예주는 그 부름이 들리는 쪽의 우리까지 한달음에 다가갔다. 

그 뒤를 조롱이를 부축한 제드가 쫓아갔다.

“내 동생이에요! 내 동생 산쵸예요! 산쵸! 산쵸!”

좁은 쇠창살 사이로 얼굴을 욱여넣을 만큼 우리 밖으로 애타게 손을 뻗는 인영을 향해 이예주는 등불을 비췄다. 

토끼 귀가 머리 위로 삐죽 솟아 있는 것이 보였다. 

이예주가 업은 신인류와 데칼코마니라도 한 듯 똑 닮은 얼굴이었다.

“우, 우리 산쵸를 살려 주세요! 제발 저를 데려가고 산쵸를 풀어 주세요! 우리 산쵸를 잡아먹지 마세요, 제발!”

갑작스레 비춰진 등불 빛에 눈살을 찌푸리며 잠시 쇠창살에서 떨어졌던 토끼 신인류가 곧 다시 쇠창살에 달라붙어 애원했다. 

순하고 동그란 두 눈에서 닭똥 같은 눈물들이 뚝뚝 떨어졌다. 

문득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 왔다.

“살려 주세요! 우리 동생을 살려 주세요! 살려 주세요!”

“예주 누나는…… 네 동생을 해치러 온 게 아니야.”

보는 사람의 가슴이 다 에일 만큼 애절한 구걸에 보다 못한 조롱이가 나섰다. 

동생을 업고 있는 인간의 등 뒤에서 들려오는 또 다른 목소리에 토끼가 흠칫 놀라 고개를 돌렸다. 

“너는……! 아까 끌려 나갔던 황조롱이?”

흉흉한 용병대장의 손에 질질 끌려갔던 황조롱이였다. 

그런 황조롱이가 잡아먹히지 않고 그들의 앞에 우뚝 서 있었다. 

튀어나올 것 같이 커다랗게 뜨여진 눈으로 인간 여자와 황조롱이를 번갈아 보던 우리 안의 토끼가 작게 외쳤다.

“어, 어떻게…….”

“예주 누나는 좋은 인간이야. 나를 구하러 와 주었어. 나를 구하면서 네 동생도 같이 구해서 나가는 거야.”

음울한 절망으로 감싸였던 동굴 안이 일순 경악과 놀라움으로 술렁거렸다. 인간이 신인류를 구해? 

인간이 황조롱이를 구했다. 

인간이 황조롱이를 구하러 와 주었대. 

그 술렁임은 곧 어린것들의 훌쩍임으로 변질되었다. 

아이들이 하나둘 흐끅 흐끅 울음을 터트리기 시작했다. 

엄마 아빠, 보고 싶어요. 집에 가고 싶어, 엄마.

“가, 감사합니다. 감사드려요, 인간님. 우, 우리 동생을 꼭 데리고 나가 주세요, 인간님! 우리 동생만이라도 꼭이요. 제발요!”

아이들의 울음 섞인 헐떡임 속에서 토끼가 벌건 눈으로 인간 여자에게 빌었다. 

그에 울음소리가 더욱 커졌다. 

이예주는 두통이 너무 심해져서 꿀 먹은 벙어리처럼 한 마디조차 하지 못하고 서 있었다. 

“……누나, 어쩔 수 없어여. 그만…… 그만 가여.”

조롱이가 떨리는 목소리로 이예주를 재촉했다. 

“마, 맞아요. 빠, 빨리 가야 돼요, 레이디.”

제 아비가 저지른 죄악의 광장에서 속히 벗어나고 싶은 제드가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조롱이의 말에 동의했다. 

두통에 휩싸인 이예주의 뇌는 이 상황에서 가장 당연하고 적합한 명령을 내렸다. 

뭐 해, 이예주. 그만 가. 무슨 광영을 보겠다고 아직도 도망 안 가고 이렇게 서 있는 거야, 이 멍청한 계집아. 

그러나 이미 동굴 저편으로 헐레벌떡 달리고 있는 뇌와는 다르게 이예주의 몸은, 그러니까 그녀의 다리는, 누가 발밑에 본드라도 발라 놓은 양 좀체 움직이지 않았다. 

그때였다. 끼이, 끼리리릭― 쿠우웅― 

열린 철문 밖, 멀찍이서 무언가 거대한 것이 떨어지는 것과 같은 굉음이 들렸다. 

헉. 신인류들은 그 소리가 무엇인지 곧바로 알아챈 듯, 훌쩍거리던 숨을 한가득 들이마시며 두려움에 벌벌 떨었다. 

동굴 안이 다시 끔찍할 만큼 고요하고 음울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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