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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 앤 매드 (139)화 (140/319)

이예주는 다신 놓치지 않겠다는 듯 갈색 머리를 품에 꽉 끌어안고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그 얼굴이 언뜻 보면 환호성을 터뜨리는 것 같기도 했고. 

“내가! 흐으, 내가 드디어 구했다고!”

다시 돌아보면 절규하는 것 같기도 했다. 

“……로…… 엘…….”

따뜻한 손길이 조롱이의 뺨을 어루만지며 그의 이름을 불렀다. 

사실 그렇게 표현하기에는 조금 어폐가 있었다. 

왜냐하면 단순히 어루만진다고 보기에는 행동이 꽤 거칠었기 때문이다. 

찰싹찰싹하고 따가운 소리가 연달아 울려 퍼졌다.

엘로……. 

익숙한 목소리에 조롱이는 힘겹게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황금색 눈동자를 한 번 도로록 굴린 후에야 그는 제가 지금껏 기절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분명 눈족 여장로의 끔찍한 비밀을 알게 되고, 이상한 관이 달린 바늘이 목에 꽂힌 채로 꼼짝없이 피가 빨려 죽는다고 생각했는데. 

가물가물한 시야로 보이는 것은 익숙한 인영이었다. 

너무나도 익숙해서 꿈에 나타날까 두려웠던. 

혹시 나는 벌써 피가 다 빨려 죽은 건가? 조롱이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제가 완전히 죽은 상태인지 생각했다. 

인간들은 죽으면 사후 세계로 간다고 믿는다. 

조롱이를 포함한 신인류들은 그것을 믿지 않았다. 일생은 한 번뿐이고, 죽거나 소멸하면 그대로 끝이라고 생각했다.

사후 세계 따위 있을 리가 없잖아. 

그럼에도 눈에 보이는 인영에 조롱이는 서글퍼졌다. 제게 손을 뻗는 인영에게 잘 지냈냐고 묻고 싶었다. 

그러나 눈꺼풀이 다시 감겨지는 탓에 물을 수 없었다. 

이제 정말 죽는 건가. 깊은 심연이 의식을 침식하기 바로 직전.

“……롱아…… 조롱아!”

“……예주 누나?”

일순 철썩하고 뺨따귀를 때리는 손길에 탁했던 눈이 번뜩 뜨였다. 

“예주 누나가 여길 어떻게…….”

긴장으로 경직된 상태에서 그대로 기절을 해서 그런지, 여전히 풀리지 않은 턱 때문에 조롱이가 우물우물 대답했다. 

그의 뺨 위로 다시 한 번 ‘찰싹!’ 하고 따끔한 매가 날아들었다. 조롱이가 뺨을 부여잡으며 눈을 까뒤집었다.

“악! 그만 때려여!”

“괜찮아, 조롱아? 이제 정신이 좀 들어?!”

“정신을…… 아구구구! 정신은 아까 들었고여! 예주 누나냐고 말했잖아여! 그런데 왜 계속 때려여! 왜여! 왜여!”

“그, 그래? 언제?”

“언제는 무슨! 솔직히 일부러 때렸져! 그쳐! 씨잉!”

부정할 수 없는지 이예주는 잠시 입술을 깨물고 삐쭉거렸다. 

그러다 조롱이가 몸을 일으켜 앉자 그에게 와락 달려들었다.

“으아앙! 조롱아아!”

“으헉! 왜, 왜 이래여!”

“깜짝 놀랐잖아, 진짜! 뺨따귀를 몇 대나 내리쳤는데 눈도 안 뜨고! 벌써 죽은 걸까 봐, 내가 못 구하고 죽어 버린 걸까 봐 얼마나 무서웠는데!”

그녀는 마치 어리광을 부리듯 저보다 작은 조롱이의 품에 마구 얼굴을 들이밀었다. 

울지 않으려고 했는데 자꾸만 눈물이 새어 나올 것 같았다. 

이제 됐어. 지하 700미터 깊은 곳까지 기어 오는 내내 마음 한구석을 벌벌 떨게 했던 두려움이 완전히 해소되는 느낌이었다. 

입을 타고 환호 소리가 새어 나올 지경이었다. 

이제 됐어. 

그러나 안도하는 그녀에 비해 조롱이는 제가 아슬아슬하게 구해진 것이 별로 대수롭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안도감에 취한 인간 여자를 제 품에서 떼어 내기 위해 몸을 비틀며 그는 다급하게 물었다.

“그런데 예주 누나, 여긴 어떻게 알고 왔어여?”

“응? 어떻게 알고 왔냐니?”

“주인님은여? 주인님이랑 같이 온 거예여?”

조롱이의 주인 언급에 이예주는 입을 다물었다. 

주인은 개뿔, 여기까지 바득바득 기어 오는 데만 해도 얼마나 오금이 저렸는데, 뭔 놈의 주인. 

그 말이 턱 밑까지 차올랐지만 방금 졸도했다가 일어난 조롱이에게 차마 말할 수 없었다. 

대신, 나오지 않은 목소리를 간신히 내어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아니.”

환희에 가득 차 있던 그녀의 두 눈은 어느덧 조롱이의 황금색 동공을 마주하지 못하고 슬며시 바닥으로 내리깔렸다. 

조롱이는 의아한 듯 고개를 기울이며 곰곰이 생각했다.

“그럼여? 그럼 누구랑…….”

부스럭, 그때 이예주의 뒤에서 누군가의 인기척이 들렸다. 조롱이의 고개가 그쪽으로 홱 돌아갔다.

“……설마.”

“아, 안녕하세요. 또, 또 보네요.”

그레이의 주점을 코앞에 두고 그들을 이곳까지 끌고 온 장본인이 창백한 낯으로 조롱이에게 인사했다. 

조롱이의 작은 입이 짜악 벌어졌다. 

눈족 장로 여자의 혐오스러운 나체를 마주했을 때와 비슷한 강도의 충격이 뒤통수를 세게 후려치는 기분이었다.

“누, 누나. 누나, 혹시…….”

조롱이는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 고개를 힘겹게 이예주 쪽으로 돌려 다시 한 번 확인하듯 물었다. 

경악에 가득 찬 황금색 시선이 너무 적나라해서 이예주는 민망함을 참지 못하고 어색하게 웃었다. 

그 모습에 화병 난 사람처럼 조롱이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악! 정말! 지금 웃음이 나와여? 웃음이 나오냐구여!”

“아, 왜에.”

제 몸 하나 간수 못하는 주제에 꽥꽥대기 시작하는 조롱이의 행태에 이예주는 입을 쭈욱 내밀었다. 

그러나 그것은 조롱이를 더 화나게 하는 행위에 지나지 않았다. 

“왜에? 지금 ‘왜’라고 했어여? 미쳤어, 진짜 미쳤다구여! 여기를 어떻게 저 인간과 내려올 생각을 다 해여?! 이 사고뭉치 인간 여자!”

조롱이는 결국 참지 못하고 푸들푸들 떨며 그들 사이에 금기시되어 있던 단어를 빽 소리 질렀다.

사고뭉치란 소리에 이예주는 울컥 억울함이 치솟았다. 

누군들 저 쓸모없는 제드 놈과 여기까지 오는 것이 즐거웠으리요. 오는 내내 복장 터지는 것도 감수하고 낙후된 고철 덩어리까지 탄 채 죽음도 무릅쓰고 달려왔더니, 뭐가 어쩌고 어째?!

“야! 내가 여기까지 오느라 얼마나 개고생을 했는지 알아?! 칭찬은 못해 줄 망정, 왜 화를 내고 그래!”

이예주가 흉악하게 구겨진 얼굴로 소리쳤다. 

되레 적반하장으로 나오는 그녀 때문에 잠시 주춤하던 조롱이는, 절대로 지지 않겠다는 듯 그녀보다 더 큰 목소리로 응수했다.

“그럼 지금 화 안 내게 생겼어여! 아니, 기껏 탈출했으면 바로 나가서 주인님께 알려야지, 무식하게 여길 내려오긴 왜 내려와여!” 

“뭐? 무식? 이게 죽을라고. 너 구하러 왔지, 왜 내려와! 아니면 내가 이 망할 곳에 왜 내려왔겠어!”

“씨잉, 이러다 둘 다 죽으면 어쩌려구여! 난 죽기 싫어여! 흐에엑! 난 죽기 싫다구여! 황조롱이 살려!”

“나도 죽기 싫어! 누군 죽고 싶은 줄 알아?! 나도 죽기 싫어! 난 이 망할 탄광 구석에선 절대 안 죽을 거야!”

“그러니까여!”

조롱이는 자꾸 제자리를 맴도는 이예주와의 대화가 답답한지 목에 핏대가 설 만큼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그 탓에 그의 목에 난 바늘구멍 주변이 금방이라도 피가 솟구칠 것처럼 붉어졌다. 

이예주는 걱정 어린 시선으로 그것을 바라봤다.

“바로 주인님한테로 갔으면 됐잖아여! 주인님께 가서 알리면 그래도 무슨 방법이 있었을 거 아니에여?! 누나랑 저 인간이랑 같이 이제 어떻게 빠져나가여? 빠져나갈 길은 알아여? 그리구 여기 인간들이 얼마나 잔인하고 무서운데! 팔족 인간들보다 더 무서운 인간도 있단 말이에…….”

“그럼 어떡해!”

이예주는 요모조모 따져 대는 조롱이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비명을 지르듯 그의 말을 막아섰다. 

‘어떡하긴!’ 하고 다시 설전에 들어서려던 조롱이는 자신을 내려다보는 이예주의 얼굴에 멈칫했다. 

그녀의 얼굴이 요상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평소에 자신과 다투던 악마 같은 얼굴과 비슷한데, 그렇다고 완전히 바싹 약이 올라 있는 그 얼굴이라고 볼 수는 없었다. 

후각이 발달한 조롱이의 코끝에서 짠 내가 훅 밀어 닥쳤다. 

바다에서 나는 짠 내와는 달랐다. 어느덧 일그러진 이예주의 표정으로부터 나온 음습함이었다.

“갔으면? 너 두고 나만 혼자 갔으면! 그러다 그사이에 너 죽으면?”

“그러니까여, 제 말은…….”

“난 그렇게 못해!”

난 그렇게 못해! 그렇게 못해! 그렇게 못해. 못해……. 그녀의 비명이 동굴 벽에 반사되어 텅텅 메아리치듯 울려 퍼졌다. 

이곳까지 오는 동안 제 앞의 인간 여자가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한눈에 봐도 알 수 있었다. 

마담 페니의 가게에서 깔끔하게 갈아입은 지 고작 하루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그녀의 몰골은 거지꼴과 다름없었다. 

검은색 후드 사이로 언뜻언뜻 비치는 목덜미 역시 완전히 엉망이었다. 

누군가 그녀의 여린 목을 조른 게 분명했다. 

온통 엉망진창인 인간 여자가 간신히 죽다 살아난 황조롱이에게 말했다. 

“네가! 네가 나한테 동료가 위험에 처했을 땐 도와줘야 한다고 했으니까!”

“…….”

“우리. 우리, 동료잖아. 나도 정말 무서워서 나 혼자 도망가고 싶었는데! 그렇지만!”

“…….”

“그렇지만 우리…… 동료잖아.”

이예주의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친구는 될 수 없어도 우리, 여행 동료라고 그랬잖아. 네가.”

“…….”

“나…… 나, 동료 가진 적 처음이란 말이야…….”

그녀는 그 말을 하고 잠시 질근질근 입술을 깨물었다. 

그들 사이로 서늘한 정적이 사뿐히 내려앉으려 들었다. 

그러나 그것이 모두 내려앉길 기다릴 시간도 아까웠던 그녀는, 불현듯 손을 뻗어 여전히 어정쩡한 자세로 엎어져 있는 황조롱이의 팔을 덥석 부여잡았다. 

자신을 붙잡은 손을 조롱이는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주인님께서 친히 채워 주신 수갑에 묶여 있는 손이었다. 

이예주의 오른손은 그녀의 목과 별 차이를 느낄 수 없을 정도로 처참하게 찢긴 상태였다. 

뼈마디가 툭 불거진 손등이 무언가에 찍혀 벌겋게 피를 드러내고 있었다.

사슬에 찍힌 거야. 조롱이는 단번에 알아챌 수 있었다. 

사슬을 둘둘 말아 쥐고 요령 없이 내려치기만 했나 보다. 

사슬에 손등이 부딪치고 멍 들어서 종국엔 찢어져 피까지 보게 된 것이다. 

이예주의 너덜너덜한 손등을 멍하니 내려다보던 조롱이의 표정이 어쩐지 조금 이상해졌다. 

“그러니까! 두고 못 가. 두고 안 갈 거야. 그렇다고 네 말처럼 같이 죽지도 않을 거야.”

“……예주 누나.”

“난 살 거야. 여기서 나갈 거야! 너 데리고 엉금엉금 기어서라도 여기서 빠져나갈 거야. 그러니까 일어나! 죽이 되던 밥이 되던 우린 나가야 되니까, 앉아서 떽떽거리지만 말고 일어나라고!”

피가 나는데, 아픈 것도 못 느끼는지 인간 여자는 수갑이 채워진 손으로 아무렇지 않게 제가 입은 로브 안주머니를 거칠게 뒤적거렸다. 

그녀의 손에 반짝반짝 빛나는 무언가가 끌려 나왔다. 귀여운 곰 인형이 매달려 있는 열쇠였다. 

“무, 무슨 열쇠예요, 레이디?”

커다랗게 뜬 눈을 이리저리 굴려 대며 불안함을 감추지 못하고 있던 제드가 용케도 이예주의 손에 들린 열쇠를 보고 물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를 무시한 채, 조롱이의 상체를 꽁꽁 묶어 둔 사슬의 자물쇠에 열쇠를 가져다대었다. 

철컥― 

전혀 아귀가 들어맞지 않아 열릴 것이라는 생각은 일체 들지 않았던 자물쇠가 거짓말처럼 풀렸다.

챠르륵, 챠르륵. 이예주는 정신없이 조롱이를 김밥처럼 둘둘 말고 있는 사슬을 풀었다. 

제드는 ‘흐에엑!’ 하는 괴상한 소리를 내며 귀신 보듯 그녀와 열쇠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싸구려 쇳덩이를 녹여 만든 건지, 자신의 손목에 매달린 람의 사슬과는 다르게 쇠사슬은 손이 축 늘어질 만큼 무거웠다. 

그것을 바닥에 내팽개치듯 내려놓고, 재빠르게 열쇠를 안주머니에 다시 집어넣은 이예주는 정신없이 조롱이를 안아 들었다. 

힘이 조금도 들어가 있지 않은 조롱이의 몸뚱이가 종잇장처럼 가볍게 들렸다. 

조롱이는 손가락 끝을 움직여 보았다. 천만다행히도 손목을 돌릴 수 있을 만큼 마비가 풀려 있었다. 

기절하기 전보다는 전체적으로 몸이 나아진 것 같다고 느꼈지만, 그래 봤자 다른 이가 보기에는 큰 변화가 없는 미미한 차이였다.

이예주는 제대로 몸에 힘을 주지 못하고 자꾸만 미끄러지는 조롱이를 양손으로 껴안듯이 받쳐 들고는, 여전히 멍청하게 서서 눈만 끔뻑끔뻑 대는 제드에게 눈을 부라렸다. 

제드 놈이 허겁지겁 달려와 조롱이의 한쪽 팔을 어깨에 두르며 부축을 도왔다. 

조롱이가 넘어질까 봐 단단하게 감싸 안은 이예주가 그를 내려다보며 한층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걸을 수 있어? 응?”

“…….”

“걸을 수 있어, 없어?”

조롱이는 그보다 더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손이…….”

“응? 손?”

“손이 이게 뭐예여…….”

이족 보행에 대한 답 대신, 그는 움찔거리는 손으로 이예주의 오른쪽 손목을 슬며시 잡았다. 

갑작스러운 접촉에 그녀가 움칫하자 조롱이는 제가 다 아프다는 듯 화들짝 놀라며 제 손을 떼어 냈다.

“고운 손이 이렇게 다 찢어져서…… 누나 손은 고왔는데. 고운 손이…….”

“…….”

“히, 히잉. 목은, 목은 또 왜 이러구여. 엉망이잖아여……. 씨이, 누가 이런 거예여? 내가 누나 지켜 줬어야 됐는데. 우, 우리 예주 누나는 돈도 없구, 힘도 없구, 아무것도 없는 불쌍한 인간인데. 대체 누가 이렇게…… 이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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