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롱이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이예주는 가슴이 덜그럭거릴 정도로 불안해졌다.
숨이 가빠 왔다.
당장이라도 작은 균열 틈을 비집고 나가 조롱이를 용병대장의 손아귀에서 데려오고 싶었다.
그러나 아직은 안 되었다.
지금 나가면 조롱이는 물론이고 제 몸 또한 부지할 수 없을 게 뻔하니.
그렇지만, 당장 데려오고 싶어. 데려오지 못하더라도, 불안한 마음이라도 가시게 눈앞에, 눈앞에 두고 싶어.
자꾸만 움찔거리는 몸을 다잡으며 그녀가 끊임없이 자신과의 싸움을 하고 있을 때, 철컥하고 다시 열쇠와 이음새가 맞물리는 소리가 들렸다.
용병대장이 왼쪽의 철문 자물쇠를 푸는 소리였다.
“놔! 이거 놓으라구!”
조롱이의 악다구니가 연이어 들어왔다. 보지 않아도 황금색 동공이 겁에 질려 파르르르 흔들리고 있을 것이 눈에 훤했다.
조롱아.
이예주는 이제 온몸이 덜덜 떨렸다.
이가 딱딱 부딪힐 정도로 격렬한 감정이 머릿속을 휩쓸었다.
어떡하지? 어떡하지? 조롱이 어떡하지? 구해야 돼. 내가, 구해 줘야 해.
“시끄러워…….”
“좀 시끄럽죠? 약을 두 방이나 맞췄는데도 이렇게 팔팔한 겁니다. 필히 하바리 신인류들이 아닌, 힘이 꽤 센 1세대 신인류에 가까운 놈인 게 분명합니다. 그만 입 닥치고 있으렴, 얘야. 곧 있으면 시체처럼 피가 쪽쪽 빨릴 텐데 벌써부터 힘 뺄 것 없단다.”
“악! 더러운 인간! 더러운 인간 명령은 안 들어여!”
“이 쬐끄만 게 어디다 대고!”
퍽. 멈추지 않고 조잘대는 조롱이를 내리친 건지 커다란 타격음과 함께 그의 목소리가 희미해졌다.
“억! 으으…… 황조롱이 죽어여. 황조롱이 죽…….”
이예주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렇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하지 말라고 비명을 지를 것 같았다.
철컥, 끼이익―
마침내 용병대장이 왼쪽에 위치한 철문을 열었다.
“이거 놔여…… 이거 놓으라구…….”
털썩. 방 안으로 조롱이를 집어 던진 건지, 가까운 곳에서 묵직한 것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균열 새로 용병대장의 커다란 덩치가 다시 나타났다.
놈은 여태 열려 있던 오른쪽 문 속으로 다시 들어가더니 이전과 마찬가지로 신인류의 멱살을 잡고 질질 끌고 나왔다.
신인류라고 바로 알아챈 것은 아래로 푹 숙인 머리카락 사이로 길쭉한 토끼 귀가 삐죽 솟아 있는 것이 언뜻 보였기 때문이다.
그 신인류는 완전히 정신을 잃은 것인지 악을 쓰며 몸을 가누려 하는 움직임조차 보이지 않았다.
균열에서 용병대장이 다시 사라졌고 얼마 안 가 또 한 번 둔탁한 것이 바닥에 닿는 소리가 들렸다.
“토끼는 족장님이 주시는 성의 표시입니다. 저 계집은 볶아 먹든 삶아 먹든 마음대로 하셔도 좋지만, 황조롱이는 반드시 목숨을 붙여 놓으셔야 합니다. 아셨죠, 장로님?”
“알았어. 알았으니까…… 이제 둘 다 꺼져…….”
시간족 여자의 목소리에서 무언가에 안달 난 것 같은 조바심이 느껴졌다.
“규칙은 아시죠? 문 안쪽에 잠금장치가 또 있습니다. 족장님과 제가 아니면, 누가 와도 절대로 문을 여시면 안 돼요. 또 도중에 무슨 일 있으시거나, 일 다 보시면 문 옆에 밧줄 있으니까 흔드시면 돼요. 지상 위의 종이랑 연결되어 있걸랑요. 종이 울리면 다 끝나신 걸로 알고 다시 모시러 오겠습니다.”
용병대장이 장로를 비웃는 듯 낄낄 웃으며 덧붙였다.
“그럼 즐거운 시간 보내십시오, 장로님.”
끼이익, 철컥. 문이 닫혔다. 시간족 장로가 철문 안으로 들어간 것 같았다.
이예주는 질끈 감고 있던 눈을 떴다.
더불어 고통을 꾹 참고 있던 종아리를 살짝 움직여 통증을 일으키는 근원에서 떼어 냈다.
“가시죠, 족장님. 연회에 많이 늦었습니다.”
“그, 그래. 얼른 가지. 비, 빌어먹을 장로가 이, 이렇게 일찍 왔을 줄이야.”
“저 까다로운 장로년도 황조롱이 신인류의 진가를 알아본 모양이죠. 연통을 치자마자 한달음에 달려온 것을 보면요.”
족장과 용병대장이 대화를 나누는 소리가 조금씩 멀어졌다.
모퉁이를 돌기 위해 움직이는 것 같았다.
“그, 그런데 그 인간 계집은 잘 지키고 있겠지? 도, 도망칠 기미를 보이지는 않는가? 호, 혹시라도 그 계집이 도, 도망가면 저, 절대로 안 되네. 절대로!”
꽤 멀찍이서 동굴 벽을 통해 웅웅 울리듯 전달되던 족장의 음성이 ‘절대로’와 함께 훅 가까워졌다.
C 자형 길에서 가장 굴곡진 안쪽으로 진입한 것 같았다.
족장이 찾는 인간 계집이 자신의 바로 옆, 얇실한 벽 뒤에서 숨죽이고 있는 것은 꿈에도 모르는 용병대장이 태평하게도 지껄였다.
“두말하면 잔소립지요. 세 명이나 문 앞에 붙여 두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복도 끝에 모조리 철통 방어를 해 놓았으니 그 계집이 혹시나 방을 나오더라도 도망갈 길이 있겠습니까? 취임식이 끝나자마자 바로 술통에 처박을 테니 걱정 붙들어 매세요, 족장님!”
“그, 그래그래. 난 자, 자네만 믿고 있어. 이, 이번 일만 잘 풀리면 내 거, 검은 안개 판매권의 절반을 자네에게 주기로 한 것, 이, 잊지 않았겠지?”
“헤헤, 그럼요. 제가 뭐 때문에 이런 개고생을 사서 하고 있는…… 아, 아닙니다. 하여간 얼른 가죠, 족장님! 오늘은 정말 특별하고 바쁜 저녁이 될 것 같습니다!”
두 사람의 대화 소리와 발걸음 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이윽고 멀찍이서 희미하게 ‘쿠룽, 쿠궁’ 하고 승강기가 다시 올라가는 소음이 동굴 사이사이로 텅텅 메아리쳤다.
도르래의 손잡이를 곧바로 놓아 버린 제드와는 다르게, 놈들은 승강기가 다시 되돌아가지 않게끔 따로 손잡이를 묶어 둔 모양이었다.
이예주와 제드는 승강기의 시끄러운 소음마저 완전히 사라진 후에도 한참 동안이나 좁은 틈 안에서 꿈쩍하지 않았다.
꽤 많은 시간이 흐른 후, 먼저 입을 연 것은 제드였다.
“……미, 미안해요, 레이디.”
그의 목소리는 자세히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어디서 모기가 웽웽거린다고 생각될 정도로 작고 알아듣기 힘들었다.
울먹임 사이에서 미안하다는 말을 간신히 건져 올린 이예주가 정면을 똑바로 노려보며 되물었다.
“뭐가?”
“……이, 일이 이렇게 될 줄은 저, 저도 정말 몰랐어요. 정말로요. 그, 그냥 아버지의 취임식이 끄, 끝나기 전에 어, 얼른 내려오면 될 거라고만 생각했는데…… 죄, 죄송해요, 정말로요.”
제드의 흐느낌이 점점 거세졌다.
좁은 공간에 애 우는 소리까지 울려 퍼지자 이예주는 머리가 득득 아파 왔다.
아니, 실은 머리가 아픈 것이 아니라 그녀도 그를 따라 울고 싶은 것일지도 모른다.
“됐어.”
이예주는 떨리는 목소리를 어렵사리 내뱉었다.
잠시 그들이 끼어 있는 틈 안에 공허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녀가 입을 꾹 다문 사이, 제 감정을 추스른 제드가 훌쩍거리며 다시 말문을 열었다.
“이, 이제…… 이제 어, 어떡하죠, 레이디?”
“어떡하긴 뭘 어떡해. 조롱이 구하러 가야지.”
“헉, 흐이익! 누, 눈족 장로가 있는데요?”
당연하다는 양 바로 쏟아져 나오는 이예주의 대답에 제드가 두려움이 가득한 눈으로 그녀를 돌아보았다.
눈족 장로였구나. 예상은 했지만, 제드의 입으로 확인을 받으니 입에서 절로 침음이 터져 나왔다.
장로쯤이면 그 능력인지 뭔지가 강한 사람이겠지?
지금껏 만난 시간족들은 하나같이 기염을 토할 만한 인간들밖에 없어서, 조롱이를 끌고 들어간 그 소름 끼치는 여자는 대체 어떤 또라이일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과연 그런 여자에게서 아무런 생각도, 계획도 없는 제가 조롱이를 무사히 구할 수 있을까?
장담할 수도 없었고, 무사히 구출할 것이라는 자신도 없었다.
오히려 팔족 족장의 트라우마가 자꾸만 떠올라서 더럭 겁이 났다.
“시, 신인류들을 사, 산 채로 잡아먹는 것도 모자라서…… 주, 죽을 때까지 패는 걸로 유, 유명한 여자라던데. 흐, 흐흡…… 무서워요, 레이디.”
나도. 나도 무서워. 그렇지만 어쩔 수 없었다.
겁먹은 제드 옆에서 나도 무서워 죽을 것 같다고 꼴사납게 벌벌 떨 수도 없는 것이고. 그렇다고 눈앞에서 끌려간 조롱이를 버리고 나만 살겠다고 도망칠 수도 없는 일이고.
결국 이예주는 주먹을 부득 쥐고 떨리는 제 몸을 숨길 수밖에 없었다.
금방 뚝 끊겨 떨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낡고 위험한 고철 덩어리를 타고 지하 700미터까지 내려왔다.
등불을 들고 가길 말리던 제드를 무시하고 탄광 안으로 들어섰을 때부터 어쩌면 그녀는 이미 예상하고 있던 걸지도 모른다.
죽거나 죽이거나, 방법은 둘 중 하나뿐이라는 것을.
“입 다물고 다시 나가게 옆으로 움직여. 이 좁아터진 곳에 있다간 숨 막혀 죽을 것 같으니까, 빨리.”
* * *
문 안쪽은 방이라기엔 애매했다.
나름 방처럼 꾸미기 위해 군데군데 뚫려 있는 동굴 구멍들을 천으로 막아 두고 한쪽 구석에는 침상과 테이블까지 놓았다.
하지만 탄광 특유의 쇳내와 울퉁불퉁한 동굴 벽까지는 숨길 수 없었다.
방 안을 샅샅이 훑어보던 조롱이는 쇠사슬에 꽁꽁 묶인 상체를 조금이라도 움직이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묶여 있는 쇠사슬은 고사하고, 아무리 힘을 줘도 손에 힘이 조금도 들어가지 않았다.
조롱이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아무래도 몸에 이상이 있는 것 같았다.
그때, 활짝 열린 철문 안으로 또 다른 인영이 그의 옆에 털썩 던져졌다.
조롱이는 휘둥그레진 눈으로 어렵사리 고개를 가누어 그쪽을 바라보려고 노력했다.
그 결과, 간신히 들린 그의 눈에 기다란 머리카락 사이로 삐쭉 튀어나온 토끼 귀가 보였다.
조롱이는 직감했다.
토끼 신인류 그레이가 잃어버렸다던 쌍둥이 딸들 중 하나임이 틀림없다고.
“산……쵸? 산쵸! 칸쵸!”
조롱이는 어렵사리 생각해 낸 그레이 딸들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나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을 뿐 정신과 입은 멀쩡한 그와는 달리, 토끼는 완전히 의식을 놓은 건지 아무리 불러도 반응하지 않았다.
“산쵸? 칸쵸니? 내 목소리 안 들리는 거야? 저기…….”
다시 한 번 토끼를 애타게 부르던 조롱이는 불현듯 철문이 열리고 그 사이로 누군가 들어오는 소리에 후닥닥 입을 다물었다.
저벅저벅, 누군가가 지체 없이 자신에게로 다가왔다.
그와 동시에 꽤 센 악력이 아무리 애를 써도 들리지 않았던 자신의 고개를 너무 쉽게 들어 올렸다.
“이런…… 그 용병 놈이 무식하게도 때렸구나……. 고운 얼굴에 흠집이 생겨 버렸네. 아까워…….”
조롱이의 커다란 황금색 눈동자에 아무 표정 없이 건조한 여자의 얼굴이 비쳤다.
한눈에 보아도 마른 여자는 제 몸에 비해 몇 배는 커다란 옷을 입고 있었다.
여자의 눈이 기묘했다.
흐리멍덩하기 그지없는 그 눈동자는 얼핏 보면 아무런 욕(欲)도 없어 보였으나, 다시 보면 어딘지 모르게 기이한 열망으로 번들거리는 것 같았다.
“……눈족 장로군여.”
조롱이가 단번에 여자의 정체를 알아맞혔다.
여자가 입술 끝을 힘겹게 들어 올려 씨익 웃었다.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은데, 이가 보일 정도로 환하게 웃는 그 얼굴은 오싹했다.
“얼굴도 예쁜데 머리까지 똑똑한걸…….”
여자가 느릿느릿 중얼거리더니 나동그라져 있는 조롱이 앞에 쭈그려 앉아 그 괴상한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러더니 양껏 숨을 들이쉬는 게 아닌가.
조롱이는 소름이 쫙 끼치는 기분에 얼굴을 찌푸렸다.
한참을 그렇게 조롱이의 머리 쪽에 코를 박고 냄새를 맡는 듯하던 여자는 이윽고 다시 고개를 들어 몽롱한 표정으로 말했다.
“하아…… 네게선 냄새가 나……. 강력하고 아름답고 절제된…… 검은 파편의 냄새가…….”
“…….”
“넌…… 검은 파편과 가장 가까이 다니는 그 새가 맞지? 응? 그렇지……?”
“…….”
“널 먹으면 한동안 신인류는 입에 대지 않아도 돼……. 너는 예쁘고 똑똑하니까 말해 주는 거지만, 나도 이렇게 나와 같이 인간 거죽을 뒤집어쓰고 있는 것들을 먹고 싶지 않단다. 족장의 명령이 아니었다면, 이런 더럽고 불결한 곳에 올 생각도 전혀 없고……. 다른 역겨운 장로 놈들은 너희를 먹지 못해 우리가 죽어 가고 있는 것이라고, 별 시답지도 않은 원망을 갖다 붙이면서 너희들을 산 채로 씹어 먹지만…… 난 그러지 않을 거야. 그럴 필요가 없으니까……. 무슨 말인지 알지?”
여자가 손을 올려 조롱이의 얼굴을 더듬더듬 쓰다듬었다.
조롱이는 그 도발에 넘어가지 않고 침착하게 대응했다.
“눈족들은 남쪽 대륙까지 도망쳤잖아여.”
“……맞아.”
“그런데 왜 남쪽에 꽁꽁 숨어서 살던 눈족들이 동쪽 대륙까지 와서 시간족이 아닌 인간들이랑 검은 안개를 주고받는 거져? 어째서여?”
“…….”
“거래를 하는 인간들이 검은 안개를 내어 줄 만큼 강한 인간들이란 것을 알고 있어여. 장로 이상의 힘 있는 눈족들이겠져. 물론 주인님도 알고 계시구여. 대부분을 알게 되셨으니, 당신들이 죽는 것도 시간문제라구여.”
조롱이의 똑 부러진 말에 여자의 눈이 조금 커졌다가 곧바로 원상태로 돌아왔다.
거기까지 정보가 유출되었단 것은 미처 몰랐던 모양이다.
여자가 비실비실 웃음을 터뜨리며 술에 취한 사람처럼 흐느적거렸다.
“똑똑해…… 맞아, 네 말이 모두 맞아…… 네 주인이 우리들을 찾아서 모두 죽여 가고 있지……. 그렇지만 아무리 네 주인이라도 나만은 죽일 수 없을 거야……. 난 그저 장로의 탈을 쓴 일개 눈족인걸. 난 진짜 장로가 아니야…… 난 장로가 아니라구…….”
“사실 장로든 족장이든,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여. 주인님은 시간족이라면 보이는 대로 죽이시니까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