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벽 바로 뒤, 좁고 코가 쓰라릴 만큼 철 냄새가 심하고 지저분한 틈 안에서 이예주와 제드가 꽉 낀 채 옴짝달싹하고 있는 것이다.
“불결해서 오래 있을 수가 없어…….”
기분이 다 오묘해지는 중성적인 목소리가 느릿느릿 말을 내뱉었다.
말을 더듬지 않으려고 갖은 노력을 하는 것이 티가 나는 족장과는 차원이 다를 만큼 우아한 말투였다.
여자인지 남자인지, 목소리만 듣고서는 잘 구분이 가지 않았다.
“그, 그래서 장로님을 위해 이, 이번에는 철저히 준비를 했습니다! 저, 정말입니다, 장로님! 치, 침구도 갈고 바, 방을 모두 새로 칠했는걸요.”
족장이 당황함이 그득 찬 목소리로 중성적인 목소리의 주인공을 달랬다.
그때, 소리가 나지 않도록 최대한 조심조심 움직이며 그들의 대화를 엿듣던 이예주의 고막이 번쩍 뚫렸다.
장로? 장로라고? 장로라 하면 그녀가 아는 한 시간족밖에는 없었다.
실제로 숲에서 만났던 그 다리 없는 노인네가 제 입으로 힘이 강한 장로였다고 했었다.
그렇기에 시간족에게는 족장이 따로 있고 그 밑에 장로라는 체제가 따로 있는가 보다고 혼자 대강 결론짓곤 했다.
장로라. 장로라면 어느 족 장로? 눈족? 다리족?
하지만 목소리만 가지곤 과연 족장이 달래는 상대가 눈족 장로인지, 다리족 장로인지 알 수 없었다.
일단 신인류가 갇혀 있는 곳까지 기어 내려온 것으로 보아 눈족 장로에 더 무게가 실리긴 하는데…….
“그래? 아아…… 그래도 소용없는걸. 머리가 아파. 난 이 조잡한 쇠비린내가 싫어…….”
정체 모를 시간족의 느릿느릿한 투정이 점차 멀어졌다.
마침내 그들이 가장 깊은 굴곡을 지나쳐 C 자형 길의 머리 쪽으로 옮겨 간 듯싶었다.
제드는 제 아비가 무섭긴 무서웠던 듯 제 입을 틀어막은 채 벌벌 떨어 대고 있었다.
어두워서 그의 얼굴 쪽이 잘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제드의 얼굴이 있을 만한 위치를 한심하다는 듯 한 번 노려보고, 이예주는 다시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 틈의 끝이 얼마나 되는지 가늠하기 위해서였다.
몸이 꽉 끼어 있는 주위는 온통 어두웠다. 빛이라고는 발밑에서 간간이 새어 나오는 작은 빛 무리뿐이었다.
때문에 틈의 끝을 가늠하는 것은 쓸데없는 짓이 분명했다.
하지만 힘겹게 고개를 돌린 그녀는 까무러치게 놀랄 수밖에 없었다.
먼 거리에서 빛이 새어 들어오고 있었다. 이 틈에도 끝이란 것이 있었던 것이다.
이예주는 재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틈의 끝은 어딜까. C 자형 통로의 머리까지 올라가면 다시 납작한 C를 뒤집어 놓은 듯한 돌벽의 모퉁이가 왼쪽으로 튀어나와 있었다.
그것만 돌아서면 그녀가 아까 확인했던 동굴의 끝이 나온다.
모양새가 좀 납작하고 이상하긴 해도 결론을 내리자면 ‘S’ 자를 좌우 반전시킨 모양의 길이었다.
이예주와 제드가 껴 있는 틈이 일자로 나 있다면 틈의 끝은 분명 왼쪽 문이 있는 쪽으로 뚫려 있을 것이다.
그런데 아까 마주 보고 있던 두 개의 철문을 확인했을 땐, 왜 이 틈이 있는 것을 보고도 숨을 생각을 못했지?
그러나 얼마 안 가 그 의문을 풀 수 있었다.
틈의 끝은 틈이라고 볼 수도 없었다. 그저 번개 모양과 같이 지그재그로 나 있는 작은 균열이었다.
양손을 집어넣을 수 있을 것 같았지만, 절대로 사람 몸을 욱여넣을 수 있는 크기는 아니었다.
그녀는 그 틈 사이로 간신히 들어오는 뤼미에르 빛을 봤던 것이다.
틈의 끝이 또 다른 입구가 아니라 그저 작은 균열이었다는 것을 빼고는, 마주 보는 문이 있던 탄광의 끝에 도착할 것이라는 이예주의 예상은 적중했다.
번개 모양의 균열을 통해 족장 일당들의 대화 소리가 실려 들어왔다.
점점 틈의 폭이 좁아지는 것 같았다.
그와 더불어 지금까지 의연한 척 자신을 속여 오던 제 몸도 한계에 다다랐다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아니, 어쩌면 욕 나오게 좁아터진 이 틈으로 몸뚱이를 욱여넣으면서 이미 한계점을 넘었을지도.
눈앞이 흐릿하고 숨이 가빠졌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 올 때처럼 다시 헛구역질이 올라올 것만 같아서, 이예주는 어금니가 부서져라 이빨을 꾹 깨물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누가 손으로 목을 죄는 기분이었다.
숨도 제대로 못 쉴 만큼 협소한 공간을 뚫고 나가던 그녀는 불현듯 옆으로 뻗었던 왼발을 갑작스레 우뚝 멈췄다.
그 덕에 제드가 긁혀서 얼얼한 오른쪽 어깨를 불쾌하게 더듬거렸지만, 신음 소리조차 낼 수 없었다.
갑자기 왜 멈췄느냐고 묻는 듯이 그가 움찔거렸다.
그러나 ‘쉬잇…….’ 하고 뱀 울음소리를 내자 그는 다시 얼음처럼 굳었다.
뻗은 발에 균열에서 새어 들어오는 빛이 닿았다.
더불어 좁은 균열 사이로 눈에 익은 족장의 얼굴과, 그 옆에 서 있는 여자가 얼핏얼핏 보였다.
여자인지 남자인지 모호했던 그 중성적인 목소리의 주인공의 성별을 알게 되었다.
좁아터진 벽 틈에 숨이 짓눌리면서도 이예주는 여자를 관찰하는 시선을 멈추지 못했다.
정체 모를 시간족 장로는 하얗고 두꺼운, 그리고 품이 굉장히 넓은 모포 같은 옷을 입고 있음에도 한눈에 알아볼 만큼 삐쩍 메마르고 왜소한 여자였다.
겉늙었는지 몰라도 나이는 아줌마에서 할머니로 넘어갈 즈음.
살이 없어 툭 튀어나온 광대와 날카로운 턱 탓에 다소 신경질적인 인상이, 걷는 내내 느릿느릿 불만을 내뱉던 고 입과 일치했다.
그러나 제법 성깔 있어 보이는 인상과는 다르게, 얼핏 본 여자의 두 눈동자는 기묘할 정도로 텅 비어 있었다.
족장과 대화하면서도 정신은 완전히 딴 데 가 있는 사람처럼 흐리멍덩한 눈빛. 시선을 어느 곳에 두고 있는지도 애매했다.
족장을 바라보는 것 같으면서도, 그 시선이 멍하니 허공에 못 박혀 있는 것이 보였다.
이지라곤 전혀 존재하지 않는 듯했다.
“이, 이번에는 필히 마음에 드실 겁니다! 자, 장로님의 취향을 맞추기 위해, 저, 정말 어, 어렵게 포획한 것이니까요. 그, 그렇지 않느냐?”
투실투실하고 작달만한 체형의 족장이 땀을 뻘뻘 흘리며 빠르게 말을 내뱉더니, 이내 그 옆에 서 있던 누군가에게로 시선을 돌려 동의를 구했다.
작은 균열로는 족장 옆에 있는 또 다른 인영까지 볼 수 없었다.
때문에 족장의 얼굴만 정확하게 보일 뿐, 장로라는 여자의 얼굴은 볼 수 없었다.
하지만 이어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다행스럽게도 목소리만으로 충분히 예측 가능한 인간이었다.
“예. 암요! 그렇구말구요! 얼마나 잡기 힘들었던지요!”
자신의 목덜미를 넝마로 만들었던, 빌어먹을 용병대장이었다.
“말로만 지껄여 대지 말고 어서 보여 줘……. 시간이 별로 없으니까…….”
“보, 보여 주기 전에. 위, 위에서 먼저 약속드린 사항을 꼬, 꼭! 지켜 주십시오, 장로님. 부, 부탁 좀 드리겠습니다.”
“약속……? 무슨 약속을…… 말하는 거지?”
여자가 전혀 모르는 일이라는 듯 느릿느릿 되묻자, 족장의 얼굴이 보기 좋게 일그러졌다.
그는 당황한 듯 허둥대다가 도움의 손길을 바라는 어린 양처럼 제 옆을 돌아보았다.
“으음, 그새 잊어버리셨습니까?”
용병대장이 족장을 대신해서 나섰다. 여전히 그 얼굴은 균열 사이로 보이지 않아서 이예주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숨이 턱턱 막히는 이 좁은 공간에서 저 망할 새끼의 얼굴까지 봤다면 혈압이 치솟아 그대로 졸도해 버릴지도 모르니까.
그녀의 부글부글 끓는 속내와는 다르게 놈은 침착한 태도로 비실비실 웃으며 말을 이었다.
“이번 것은 아―주― 귀하신 몸이라고 말했잖습니까. 떡을 치던, 피를 쪽쪽 빨아 먹던 상관 않겠지만 대신 목숨만은 꼭 붙여 주셔야 한다구요, 장로님. 저번처럼 피를 다 빨아 마셔서 죽여 버리시면 곤란해요. 게다가 잠자리를 할 거면 곱게 해야지, 왜 그렇게 애를 때려서 피떡을 만들어 놓고 그러십니까.”
용병대장이 족장을 대신해서 시원시원하게 말을 전달했다.
그 말소리가 그녀의 귀까지 커다랗게 들려와 박혔는데도 불구하고 이예주는 그것이 무얼 말하는 건지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 사실은 알 것도 같았다. 아니, 잘 모르겠다. 놈이 말하는 것이 자신이 짐작하는 그 끔찍한 것과 일치하는 건지 알고 싶지 않았다.
눈족 장로는 한참이나 대답이 없었다.
책망하는 어투인 용병대장의 말에 분노하고 있는 건가 싶었는데, 한참 후에 들려온 말투는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예쁜 아이니?”
“그럼요. 뽀얀 게 아주 예쁘다마다요. 그리고 장로님께서 요구하신 모습에 정확히 부합하는걸요! 어린 소년의 모습을 하고 있어요! 우리 족장님이 이렇게 자랑을 하실 만합죠, 암요. 그러니까 절대로 죽이시면 안 됩니다. 죽여 버리면 정말로 이쪽이 곤란하게 된다구요, 장로님.”
“……그래. 예쁜 아이라니 죽이진 않으마. 예쁜 아이를 죽이는 건 나도 싫어…….”
여자가 고개를 끄덕이는 바람에 축 늘어진 미역 같은 머리칼이 균열 새로 살랑살랑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여자는 족장과 용병대장을 채근했다.
“너희들이 말하는 아이를 어서 내게 보여 줘……. 시간이 별로 없으니까…….”
“아, 알겠습니다! 어, 어서 문을 열고 그, 그것을 꺼내 오게!”
이어서 족장이 명령하며 뚱뚱한 몸을 옆으로 움직였다.
그간 족장의 몸뚱이에 가려져 있던 반대편의 철문이 균열 사이로 드러났다.
그러나 드러난 철문은, 족장보다 더 거대한 인영에게 가려져 금세 시야에서 사라졌다.
용병대장이 네네, 대강대강 흘려 대답하며 이예주가 있는 쪽의 반대쪽, 오른쪽 철문의 자물쇠에 열쇠를 꽂으러 온 탓이었다.
절그럭, 철컥.
열쇠가 딱 맞게 맞물리는 경쾌한 소리가 난 후에도 용병대장은 시야를 가리고 선 채 문에 붙어 있었다.
쩔그럭쩔그럭 소리가 계속해서 나는 것을 보니, 문고리에 칭칭 감아 놓은 굵은 사슬들을 푸느라 애쓰는 것 같았다.
“어휴, 이건 풀고 매는 것도 일이라니까요.”
마침내 걸걸한 투덜거림과 함께 사슬이 떨어져 나갔다.
용병대장은 육중한 팔로 철문을 아무렇지도 않게 벌컥 열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얼마 안 돼 철문 안쪽에서 놈이 저보다 훨씬 작은 인영의 멱살을 대충 부여잡은 채 끌고 나왔다.
“이거 놔아! 이거 놓으라구우!”
용병대장에게 끌려 나온 작은 인영은 쇠사슬에 상체가 꽁꽁 묶여 있었다.
그런데 마치 술에 취한 사람처럼 통 제대로 걷지 못했다.
어린아이가 처음 걸음마를 시작하듯 위태위태하게 서 있던 그는, 그 와중에도 목을 뻣뻣이 들려고 무던히도 노력을 하며 반항했다.
멱살이 잡힌 채 질질 끌려 나오고 있는 그의 앞으로 여자 장로가 한달음에 달려갔다.
그리고 그 인영의 머리채를 잡고 위로 휙 들어 올렸다.
“악! 아구구구! 황조롱이 죽네! 왜 머리채를 잡구 그런대!”
빛나는 뤼미에르 꽃 아래 찬란한 황금색 눈동자가 드러났다.
그리고 그 순간, 이예주의 심장이 쿵 하고 횡격막까지 내려앉았다.
“조……! 흐, 흐읍!”
조롱아. 이예주는 저도 모르게 터져 나온 비명 소리에 놀라 황급히 왼손을 들어 입을 틀어막았다.
그러나 이미 균열 새로 새어 나간 소리까진 막을 수 없었다.
우악스러운 손길로 조롱이의 부드러운 갈색 머리채를 휘어잡고 있던 장로 여자가 흠칫 몸을 떨었다.
그와 함께 초점이 없던 그녀의 흐리멍덩한 두 눈동자가, 이예주가 그들을 훔쳐보고 있는 균열 새를 정확히 바라보았다.
기분 탓일지 모르겠으나, 일순 여자와 눈이 마주친 것 같았다.
이예주는 벽과 혼연일체가 된 것처럼 온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왜, 왜 그러십니까, 장로님?”
“방금…… 무슨 소리가 들린 것 같은데…….”
여자가 느릿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들켰나? 들킨 건가?
혹시 발밑에 있는 등불이 보이지는 않을까 싶어 그녀는 천천히 다리를 오므려 발밑에 있는 등불을 발로 더욱 끌어안았다.
비명을 지를 것 같은 심정이었다.
타오르는 등불 연기가 뿜어져 나오는 부분에 살이 맞닿은 건지, 악 소리 날 정도의 고통이 종아리의 한 부분을 꾹 눌렀다.
순간 괴성을 지르며 등불을 차 버릴 뻔했던 이예주는 가까스로 이를 악물고 타오르는 통증을 억눌렀다.
등 뒤로 비지땀이 비질비질 쏟아져 내렸다.
들켰을까 봐 겁에 질린 것은 제드 또한 마찬가지인지 옆에서 내내 들려오던 거센 숨소리가 뚝 끊겨 있었다.
“저 틈은…… 뭐지?”
시간족 장로 여자가 이예주와 제드가 들어 있는 균열을 뼈밖에 남지 않은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족장이 손수건을 꺼내 비가 내리듯 땀이 떨어지는 이마를 닦아 내며 더듬더듬 답했다.
“저, 저건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장로님. 구, 굴을 뚫는 도중 그, 그냥 균열이 간 것뿐입니다. 아니면 오,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자, 자연적으로 갈라진 것일 수도요……. 어, 어찌 됐건 무, 무슨 소리를 들으셨다면 그건 아마 쥐, 쥐새끼가 찍찍대는 소리였을 겁니다.”
“아아, 역시 불결해…….”
여자가 납득한 듯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메마르고 버석한 얼굴을 머리채가 잡혀 있는 조롱이에게로 돌렸다.
“그래도 이 예쁜 얼굴을 보니 조금은 살겠구나……. 어서 문을 열어. 시간이 없으니까 어서…….”
여자가 명령했다.
족장도 그 여자의 명령에 크게 동조하며 용병대장을 재촉했다.
제대로 걷지 못해 축 늘어져 있는 조롱이를 한 손으로 거뜬히 잡고 서 있던 용병대장이 다시 “네네, 그럽지요.” 하고 비꼬듯 대꾸한 후 조롱이를 질질 끌고 균열에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