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엔 나름 길을 외우기 위해 온몸에 촉각을 곤두세우던 이예주는 곧 포기했다.
외운다고 다 외워지는 범위도 아니거니와, 뤼미에르가 어지러운 갈림길 사이에서 지표로 작용한다는 사실을 금방 깨달았기 때문이다.
탄광 안은 정말이지 더럽게 넓고 갈래 길도 너무 많았다.
하, 나올 때도 꽤 힘들겠는데.
“대체…… 이 지하에 처박혀서 네 아버지랑 그 일당들은 무슨 짓거리를 하는 거야?”
탈출에 대한 불안감이 자꾸만 고조됐다. 이예주는 제드를 돌아보며 물었다.
“예, 예? 어…….”
“검은 안개 말이야. 대체 그게 뭔데 이렇게 깊숙한 지하에 숨어서 작당을 하는 거냐고. 눈족인가 그 사람들한테서 공급받는 거라며?”
“히이익! 그, 그걸 레, 레이디께서 어떻게 아셨어요?”
제드는 꽥 소리를 지르며 펄쩍 뛰었다.
이것저것 아는 것이 많은 사람이라고 생각은 했지만, 마을 안의 몇몇 지주들도 잘 모르는 일을 그녀가 꿰뚫고 있으리라고는 조금도 눈치채지 못했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지하 탄광의 일을, 이방인이나 다름없는 이 여자가 대체 어디까지 알고 있는 것일까.
“글쎄. 어떻게 알았을까.”
이예주는 자조적으로 웃으며 중얼거렸다.
네 아버지가 하는 그 구역질나는 짓거리에 긴밀히 관련되었던 들쥐의 이야기를 들었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눈족 놈들이 제 것인 양 공급하는 ‘검은 안개’의 진짜 주인이 이 마을에서 눈 부릅뜨고 돌아다니고 있다고 말해 주어야 하나.
“검은 안개, 그게 대체 뭐야? 그게 뭔데 신인류까지 팔아먹으면서까지 구해 대는 건데? 그걸로 뭐 하는 거야. 여기 동쪽 대륙 인간들도 시간족처럼 람에게 대항하게?”
“허, 허억! 라, 람이요?”
람이란 소리에 제드의 얼굴이 단박에 시퍼레졌다.
“그래. 너도 람은 알지? 검은 파편 말이야.”
“마, 말하면 안 돼요! 마, 말하지 마요!”
“엥?”
제드는 겁에 질린 눈동자를 푸들푸들 떨어 대다가, 돌연 그녀의 곁에 바싹 붙어 개미만 한 소리로 속사포처럼 내뱉었다.
“그, 그 이름은 거, 검은 파편과 계, 계약한 자들만 부를 수 있어요.”
“……왜?”
“그, 그가 그 이름을 시, 싫어하기 때문이에요. 그, 그 앞에서 이름을 마음대로 부르면 바, 바로 죽임을 당한대요.”
이예주는 진실로 이해가 안 갔다.
왜냐하면 그녀도 람과 계약인지 뭔지 잘 실감 나지 않는 그런 것을 하긴 했지만, 그보다도 당사자가 직접 그 호칭으로 자신을 부르라고 명령했기 때문이다.
당시에 그는 어깨 위에 짐짝처럼 둘러메진 주제에 그녀가 ‘그쪽’이, ‘당신’이 하고 입을 나불거리는 것을 굉장히 거슬려 하는 것 같았다.
“진짜 무슨 볼드모트야? ……람드모트라고 불러야 되는 거야 뭐야.”
우스갯소리로 혼잣말을 하던 이예주는 “보, 볼드모트가 뭐예요?” 하고 어수룩하게 묻는 제드에게 “넌 알 것 없어.” 하고 냉정하게 그를 내쳤다.
“어쨌거나, 그래서 검은 안개가 뭔데?”
이예주의 말에 제드가 어깨를 파드득 떨었다.
그리고 부담스러울 정도로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는 그녀의 시선을 애써 피했다.
오호라, 말하기 싫다 이거구나.
이예주는 뻔히 보이는 제드의 속내를 쉽게 간파해 내며 눈살을 찌푸렸다.
원래 별거 아닌 비밀이라도 감추려고 들면 더 궁금해지는 법이다.
말 안 듣고 멋대로 나가 버린 것도 모자라 조롱이까지 피해가 막심하니 이번에야말로 기필코 람, 그 미친 남자가 자기를 죽이려 들 것이 분명했다.
쓸모라고는 길을 아는 것뿐인 언어장애인의-제가 장애를 가지고 있는지도 잘 모르는- 도움까지 받아 가며 애써 탈출을 하더라도 바로 그에게 잡힐지 모른다.
탈출하자마자 그 남자의 손에 모가지가 댕강 잘려 나갈 수는 없었다.
암, 그렇고말고.
용암을 피해 ‘문’을 넘었더니 지옥이 기다리고 있는 상황은 한 번이면 충분했다.
이예주는 결심했다. 이왕 제드를 이용해 먹을 거, 들쥐 새끼도 알아내지 못한 정보를 골수까지 쪽쪽 빼내야겠다고.
“너 혹시, 검은 파편인지 하는 그 사람이 화내면 어떻게 되는지 들어 봤니? 나도 꽤 험난하게 살아와서 웬만한 꼴은 웃으면서 넘길 수 있는데 와, 그 남잔 화나면 진짜 오줌 지릴 정도로 무서워. 성격은 얼마나 개차반 같은지, 자비라곤 쥐똥만큼도 없고 말이야. 하여간, 그 남자가 동물들한테 자비를 베푼답시고 신인륜지 뭔지 만들었다는 거 알고 웃음도 안 나왔는데. 아, 너도 알지? 그 남자가 신인륜지 뭔지 만들어 낸 거.”
“……그, 그럼요! 그, 그거 모르는 사람이 어, 어디 있어요. 세, 살배기도 거, 검은 파편 얘기만 해 주면 우, 울다가도 눈물을 뚝 그, 그치는걸요.”
“응, 그치. 무서운 남자지. 그니까 내가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말이야, 내가 그 검은 파편이란 남자를 좀 알거든?”
“레, 레이디가요? 그, 그를 어, 어, 어떻게……!”
제드는 검은 파편을 좀 알고 있다는 이예주의 말에 눈을 화등잔만 하게 치켜뜨고 더 심하게 말을 더듬었다.
그녀는 그의 관심을 차갑게 끊었다.
“어쩌다 보니 알게 됐어. 너무 자세히는 알 거 없고.”
깊이 알면 다쳐.
시큰둥하게 덧붙이며 이예주는 속으로만 뇌까렸다.
어떻게 알긴, 잘 알지. 그 남자는 네놈의 아버지가 납치한 조롱이의 주인이자 바로 내 손목에 달린 사슬의 주인이거든.
승강기에서 내리면서 사슬이 바닥에 부딪치는 소리가 시끄러워 그것을 대강 둘둘 말아 쥐고 있었다.
사슬을 내려다본 그녀의 표정이 우울해지는 것은 삽시간이었다.
“암튼 만약 이런 지하 탄광에서 자신이 직접 만든 신인류를 팔아먹는 짓을 하고 있다는 걸 그 미친놈이 알면, 여기 너네 집 아작 나는 걸론 안 끝날 거야.”
“허억! 아, 아작 나는 걸로는…… 아, 안 끝난다고요?”
“음…… 못해도 여기 동쪽 대륙은 지도에서 사라지지 않을까? 마침 바다도 가깝겠다, 미친 듯이 벼락을 내리쳐서 통구이로 만들기 딱 좋은 환경이네. 으으.”
끔찍해. 차라리 쩍쩍 갈라진 땅속으로 떨어져 죽고 말지.
이예주가 고개까지 저으며 진저리를 치자, 제드의 안색은 당장 졸도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파리해졌다.
“난 그래도 애먼 사람들까진 피해를 안 입었으면 좋겠어. 예를 들면 너 같은 사람들 말이야. 잘못은 저지르지도 않았는데, 그걸 알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진짜 죄를 저지른 사람들이랑 같이 개죽음당하면 얼마나 억울하겠어. 안 그래?”
자, 이래도 네가 말 안 하고 버텨?
이예주는 날카롭게 눈을 빛내며 제드를 살폈다.
그는 그녀가 이런 말을 한 의도 따위는 추호도 의심하지 않는 듯, 불안감에 흐느꼈다. 확실히 검은 파편이 무섭긴 한 것 같았다.
“그렇지만 억울하면 뭐하나. 도와주고 싶어도 아는 게 없는데. 아, 난 네 아버지가 눈족 말고 다리족이랑 계약하고 있는 것도 알고 있어. 아마 그 남자는 다리족까지 엮여 있다는 사실은 미처 모를 거야. 하지만 뭐 어쩔 수 없지. 이대로 다 개죽음을 당하는 수밖에…….”
“……아, 아버지는!”
마음을 먹으니 거짓말이란 게 봇물 터지듯이 쏟아져 나왔다.
끝으로 과장되게 어깨를 으쓱이며 내뱉은 그녀의 체념 어린 어조에, 제드가 덥석 미끼를 물었다.
걸려들었구나! 묵직한 찌가 달린 낚싯대를 살살 흔들며 이예주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아, 아버지는 크, 큰 잘못 없어요! 아버지는, 아, 아버지는 그냥 주, 중간상인이에요! 머, 먼저 할아버지에게 검은 안개를 줄 테니 부, 부를 축적하라고 거래를 제안해 온 것은, 누, 눈족들이에요!”
“눈족들이 먼저 거래를 제안해 왔다고?”
“예, 예!”
제드가 말 잘 듣는 강아지처럼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 할아버지는 눈족들의 제안을 다, 단칼에 거절하셨어요. 왜냐면 하, 할아버지는 거, 검은 파편과 계약한 계, 계약자니까……. 누, 눈족들은 시, 신인류들을 먹이로 달라고 했고 시, 신인류를 건드리는 건 계, 계약 위반이니까요…….”
마을 족장과 람이 계약을 했다는 것은 얼핏 들은 것도 같다.
왜 그 귀하다는 계약을 신인류가 아닌 인간, 그것도 죽은 선대 족장 같은 형편없는 인간과 했을까 싶었는데, 끝까지 신인류를 챙기느라 그랬구나.
역시 그 남자는 뼛속까지 동물성애자다.
“계약 조건이 그거야? 신인류를 건드리지 말라는 거? 그거 말고 또 뭐 있어?”
“하, 할머니도 할아버지의 형제들도 거, 거기까지는 정말 모르셨어요. 하, 할아버지가 어, 언제 계약을 맺으셨는지도 잘 몰랐고……. 그저 하, 할아버지가 시, 신인류들이 마을에 살기 부, 불편하지 않게 하려는 걸 보고 대, 대략 그런 조건이 아닐까 지, 짐작만 한 거예요.”
계약을 하는 대신 어제 죽은 제드의 할아버지가 어떤 혜택을 받았는지 궁금했지만, 이예주는 내색하지 않았다.
정말 모르는 것 같았다.
“하, 할아버지가 제안을 거절하자 누, 눈족들이 아, 아버지에게 거래를 제안했어요. 아, 아버지는 그냥 마, 마을에 잘 곳 없이 떠도는 신인류들을 누, 눈족에게 넘기는 줄로만 알고 제, 제안을 받아들이신 게 분명해요. 저, 절대 다른 의도는 없었을 거예요! 사, 사실 저택의 재정은 거, 거의 다 바닥난 상태예요. 하, 할아버지의 형제들이 마, 말 못하는 할아버지를 우습게 여기고 하, 하나둘씩 다 떼 가서 마, 마을 지주라는 자리를 따로 만들어 버렸거든요. 아, 아버지는 거, 검은 안개로 파, 파탄 난 재정을 복귀하고 조, 족장의 지위를 되살리려…….”
“됐고. 난 네 아버지 사정 같은 건 안 궁금해. 내가 궁금한 건 검은 안개가 정확히 인간에게 어떤 식으로 작용하는지야.”
용을 써 가며 제 아비를 포장하려 드는 제드에게 넌덜머리가 난 이예주가 그의 주절거림을 막았다.
그녀의 단호함에 잠시 상처받은 듯 아련하게 동공을 흔들던 제드가 이내 답했다.
“저, 저도 마, 마셔 본 적이 없어서 잘은 모르지만…… 거, 검은 안개를 마시면 기, 기분이 좋아지고 의욕과 성취감이 급증한대요. 사, 사람들이 검은 안개를 마, 많이 찾는 이유는 기, 기분이 무척 좋아지니까. 펴, 평소에 게으른 사람들도 이, 일을 마구 해 대고, 그, 그만큼 능률도 오른다고 들었어요. 그, 그렇지만…… 주, 중독성이랑 부작용이 너무 심해서 위, 위험해요. 그, 그리고 검은 안개 자체가 바, 발화성이 높아서 가, 가지고 있다가 자칫 불에 닿으면 포, 폭발하는 경우도 많구요.”
“그렇게 위험한 걸 왜 그렇게 찾아 대는 건데? 공급량은 적은데 수요량이 너무 많아서 가격이 어마어마하다며?”
“마, 말했잖아요. 주, 중독성이 심하다고. 거, 검은 안개를 한 번이라도 마시면 그, 그 누구라도 도취감을 잊지 못해서 미친 사람처럼 그걸 차, 찾아 대요. 하, 하지만 그걸 마시고 소, 소처럼 미친 듯이 일하다가 거, 검은 안개의 기운이 가시면, 그, 그때부터 극심한 무기력증과 자괴감, 자, 자기혐오에 시달리게 된대요. 그, 그렇게 해서 폐, 폐인이 된 사람들이 너무 많아요.”
검은 안개에 대한 제드의 설명을 들은 이예주의 기분이 오묘해졌다.
원래 람이 소유하고 있던 것이라고 해서 뭐랄까, 무기나 혹은 그를 돕는 어떤 힘과 같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제드의 입을 통해 전해 들은 검은 안개의 이미지는 상상과는 너무 달랐다.
이건 마치, 대마초나 히로뽕 같은…….
“뭐야, 마약이야?”
“마, 마약 아니에요. 마, 마약이랑은 달라요.”
“여기에 마약도 있어? 아, 이게 중요한 게 아니라.”
싸구려 마약일수록 중독성과 부작용이 큰 법이다.
천년 후에도 마약이 존재할 줄 미처 몰랐던 그녀는 깜짝 놀랐지만, 곧바로 수긍했다.
“그럼 왜 그렇게 중독성이 심해? 부작용도 꼭 마약에 중독된 사람들 같잖아.”
“마, 마약에 취해 다, 단순히 환각을 보고 기, 기분이 좋아지는 것과는 많이 달라요. 왜, 왜냐하면 검은 안개를 먹으면 저, 정말로 일의 능률이 오르고요. 또, 또 하고자 한 바를 뭐, 뭐든 쉽게 이룰 수 있기 때문이에요.”
“하고자 한 바……?”
이예주가 이해가 안 돼 제드의 말을 되풀이했다. 그가 친절하게 덧붙였다.
“예, 예를 들면, 지, 집을 지어야 하는데 너, 너무 힘들어서 차일피일 미루고 있는 사람이 있으면요. 거, 검은 안개를 마시면 하, 하루 만에 집을 다 지어요. 다, 다른 것도 마찬가지예요. 도, 돈을 모을 생각이라면, 다, 단 며칠 만에 악착같이 일을 찾아다니고, 자, 장사를 하고 싶다면서 이, 있는 돈 없는 돈 다 털어서 거, 건물을 산 사람도 봤어요.”
“허, 뭐지? 뭐 그런 게 다 있어?”
이예주는 좀체 이해가 안 가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의욕을 증가시켜 하고자 하는 바를 쉽게 이루게 하는 약물이라.
아, 약물은 아닌가?
하여간에 중독성과 부작용을 빼면 꼭 마법 같은 일이었다.
그 성취감에 도취된다는 것, 23년 살면서 딱히 뭘 이뤄 본 적이 없는 이예주로선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거참, 신기한 물건이네……. 그럼, 눈족 놈들은 그게 그렇게 수요가 많으면 지들이 직접 팔아먹으면 될 것을 왜 굳이 네 아버지를 통해 파는 거야? 설마, 고작 네 아버지가 잡아다 주는 신인류를 먹으려고?”
“그, 그건…….”
제드가 잠시 말을 멈추고 뜸을 들였다.
“그, 그들이 이상할 정도로 시, 신인류에게 집착하는 것도 있지만…… 아, 아버지가 다, 다리족과 거래를 하게끔 유, 유도하기도 했대요.”
“에? 다리족? 갑자기 다리족은 왜 튀어나오는 거야?”
물론 그레이의 주점에서 들쥐 새끼가 미주알고주알 토해 낸 얘기 덕에, 제드의 아비가 다리족과도 모종의 거래를 하고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예주는 그 거래의 내용이 뭔지 조금도 감이 잡히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