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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 앤 매드 (132)화 (133/319)

늘어진 목선 밖으로 새어 나오는 빛까지는 막을 수 없었지만, 그래도 이렇게 해 두면 그럭저럭 안 보이게 숨길 수는 있을 것 같았다. 

이예주는 등불을 집어넣고는 제드를 향해 불룩 튀어나온 배를 자랑스레 내보였다.

“자, 안 보이지?”

그 어이없는 행동에 제드가 말을 잇지 못하고 멍하니 입을 벌렸다. 

그녀는 그걸로 그를 납득시켰다고 생각하고 열려 있는 승강기의 입구 쪽으로 먼저 등을 휙 돌렸다.

“그럼 혹시 누가 오면 이렇게 하는 걸로 하고, 빨리 가자.”

“……터, 터, 터져요!”

하지만 제드가 구질구질한 목소리로 이예주의 발목을 잡아끌었다.

“뭐?”

“부, 불에 닿으면 거, 검은 안개가 포, 폭발해요! 그, 그럼 굴이 무너지는 건 수, 순식간이에요.”

“……검은 안개?”

이예주는 멍하니 제드의 말을 따라 중얼거렸다. 

익숙하면서도 낯설기만 한 단어였다. 

검은 안개. 

그녀의 머릿속에 문득 어디서 보았던 한 구절이 스쳐 지나갔다.

아주 오래전, 태초의 지구에 검은 안개를 가진 검은 파편이 있었다.

검은 안개를 가진 검은 파편. 

인간에게 빼앗긴 검은 파편의 검은 안개.

“여, 여긴 거, 검은 안개를 쌓아 두는 차, 창고로도 사용하는 곳이에요. 거, 검은 안개는 기체라서 나, 나무 상자나 유리병에 아무리 가둬도 조, 조금씩 새어 나와요! 그, 그래서 탄광 안에는 부, 불 같은 건 하, 하나도 놓지 않아요.”

로브의 목선 밖으로 빛이 새어 나와서, 이예주는 마치 랜턴을 목 아래 대고 귀신 흉내를 내며 장난을 치는 것 같은 우스운 꼴이었다. 

그러나 표정만큼은 귀신 저리 가라 할 정도로 음산해서, 지금 그녀의 모습을 본다면 그 누구도 장난 소리가 입 밖으로 나오지 않을 터였다. 

소름 끼치는 얼굴로 제드를 무표정하게 바라보던 그녀는 멀리서 반짝이는 빛을 손가락질했다.

“불을 안 놓는다고? 그럼 저 빛나는 건 뭔데?”

“저, 저건…….”

나고 자라는 동안 단 한 번도 남에게 입 밖에 꺼내지 않았던 비밀들을 이미 그녀에게 많이도 말해 버린 후였다. 

하지만 제드는 단연코 이런 극비 사항까지 털어놓을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그의 입은 주인의 의지를 배반하고 기름칠을 한 것처럼 속엣말들을 와르르 쏟아 내었다.

“저, 저건 뤼, 뤼미에르 꽃이에요.”

“뭐? 뤼미에르?”

“네, 네. 어제 레, 레이디에게 드린 비, 빛나는 꽃이요……. 드, 등불을 사용하면 너, 너무 위험하니까 비, 빛나는 꽃으로 등불을 모두 대, 대체한 거예요. 그, 그러니까…… 그러니까 드, 등불을 가지고 가면 안 돼요.”

등불을 들고 가면 안 된다는 그의 주장이 깔끔하게 끝을 맺었다. 

전과 다르게 이유에 대한 타당성이 명백해서 좀체 반박하기가 힘들었다.

불에 닿으면 폭발하는 검은 안개라니. 람이나 조롱이는 이 사실을 알고 있을까? 

그레이의 주점에서 검은 안개에 대해 이것저것 주워들은 게 많았다고 생각했으나, 이예주는 실상 검은 안개가 어떤 역할을 하고 어떤 식으로 공급되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아는 것이라곤 그게 말로만 들었지 한 번도 본 적 없는 눈족에게서 공급된다는 것과, 마을에 젊은 인간들이 제 몸을 노예로 팔아 사들일 정도로 중독성이 있다는 것뿐. 

검은 안개는 마치 현대의 마약처럼 거래되어 마을 안에서 암암리에 나돌고 있었다.

원치 않아도 입에서 침음과도 같은 깊은 한숨이 터져 나왔다. 

조롱이 하나 구하러 들어온 이 탄광 안에서, 전혀 예상에 없던 별의별 이야기들을 다 알게 되었다.

그것이 그다지 달갑지 않음에도 전처럼 가볍게 무시하고 넘길 수 없었던 건, 그녀가 구하러 온 조롱이와 그의 주인인 시뻘건 미친놈이 거미줄처럼 어떻게든 엮여 있었기 때문이다.

이예주는 잠시 고민했다. 등불을 깨뜨려서 꺼 버리느냐, 뒈질 각오를 하고 들고 가느냐.

고민하는 시간조차 아까울 정도로 답은 너무 쉬웠다. 

명치끝에서부터 깊은 한숨이 우러러 나올 정도로.

“하…… 잘됐네. 여차하면 폭발시키면 되니까 가지고 가야겠어.”

“예…… 예?!”

그녀의 입에서 정반대의 말이 튀어나왔다. 

그녀가 수긍할 줄 알았던 제드가 꽥 소리를 지르며 반문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레, 레이디! 이, 이러지 마세요. 자, 잘못하면 레, 레이디의 동료분을 구하기도 전에 우, 우리 죽을 거예요!”

“어쩔 수 없어.”

이예주는 우울한 얼굴로 덧붙였다.

“이 등불은 나름 각오이자 보루야.”

“가, 각오이자 보루요?”

“그래. 네 아버지나 용병대장에게 걸리는 변수에도 대비해야지. 조롱이를 데리고 탈출하는 데 성공할 수 있다고 무조건 믿고 있을 수만은 없잖아? 나라고 아무 생각 없이 여기까지 기어 왔겠어.”

“…….”

“차라리 다행이야. 그나마 이게 있으면 도망갈 시간을 벌기 위해 협박이라도 할 수 있으니까. 그래도 정 잡혀갈 처지에 놓인다면…….”

“자, 잡혀갈 처지에 놓인다면요……?”

말끝을 흐리는 그녀 때문에 제드는 마른침을 꼴깍 삼키고 조급하게 물었다. 

심드렁한 표정으로 이예주가 대꾸했다.

“……다 같이 뒈져야지 뭐.”

“히, 히이익!”

말이 끝나기 무섭게 제드가 단번에 괴성을 질렀다. 

그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그놈의 낯빛은 피를 공급했다 중단했다 하는 장치라도 있는 건지 시시각각 안색을 달리해 주인의 절박한 심정을 대변했다.

“넌 죽기 싫으면 지금이라도 다시 이거 타고 올라가든가.”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선 주섬주섬 겉옷을 들어 올려 품고 있던 등불을 옷 속에서 빼내었다.

등불을 한 번, 이예주의 얼굴 한 번 번갈아 바라보던 제드는 진저리를 쳤다. 

그의 얼굴이 이번에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처럼 벌겋게 달아올랐다. 

제드는 절벽에 매달린 심정으로 이예주에게 이러지 말라고 호소했다.

“레, 레, 레이디이……!”

“야, 조용히 말해! 누가 있을 줄 알고.”

물론 그의 호소는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순식간에 커다랗게 울리는 제드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란 이예주가 입술 위로 손가락을 가져다 대며 짜증을 냈다.

참인지 거짓인지는 모르겠지만, 지하 700미터를 내려오기 전에 등불을 가지고 승강기에 올라타려던 그녀를 막으면서 제드가 말했었다. 

아래에 따로 지키는 사람이 있는 것은 아니라고.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는 않았지만, 막상 지하 700미터를 내려와 보니 정말로 따로 지키고 서 있는 인간들은 없는 것 같았다. 

그 증거로, 승강기서부터 희미한 빛이 반짝이는 거리까지 딱히 인기척이 느껴지거나 사람 그림자가 보이지 않았다.

여차하면 방어나 공격을 해서라도 탈출에 방해되는 요소를 제거해야 했지만, 방금 전 제드 덕분에 그럴 필요성조차 사라졌다. 

이 어둡고 답답한 지하에서 가장 치명적인 무기가 그녀의 손에 들려 있었기 때문이다.

이예주는 말리는 제드를 가볍게 무시하고 활짝 열린 승강기의 문을 지나쳤다. 

그녀를 망연자실 바라만 보던 제드가 기겁을 하고 허겁지겁 따라붙었다.

“레, 레, 레이디! 다, 다시 한 번만 생각하시는 게…….”

“난 분명 너보고 다시 타고 가라고 했다.”

“흐이익! 그, 그래도 레, 레이디께서 이, 일부러 죽으러 가시는 건 좀……!”

“아, 거참! 일부러 죽으러 가다니!”

바로 전 제 입으로 ‘다 같이 뒈지는 거지.’라고 심드렁하게 지껄인 사람치고는 꽤 히스테릭한 반응이었다.

“누가 죽어! 난 절대 안 죽어! 죽더라도 이 구질구질한 곳에선 절대 안 죽을 거야! 내가 왜 이 미친 곳까지 기어 와서 죽어야 되는데?!”

“그, 그럼 드, 등불은 놓고 가는 게 아, 안전한데요.”

“아오, 이 답답아! 머리는 폼으로 들고 다니니? 이거라도 어떻게 들고 있어야 할 거 아니야! 만약에 용병대장인지 뭔 지한테 걸렸다고 해 봐. 너 그 새끼가 달려들면 싸워서 이길 자신 있어?”

“아, 아니요! 어, 없어요.”

“없으면 어떻게 도망칠 건데! 너야 족장 아들내미이니까 볼기짝 좀 맞고 끝나겠지만, 나는! 나는 잡히면 그대로 고래 밥 신세거든?”

“그, 그래도…….”

“그래도는 뭔 그래도야! 불에 직접 닿아야 터진다며? 불은 유리등 안에 잘 있으니까 호들갑 떨지 마. 조롱이 어느 쪽에 있는지만 손가락으로 찍고 넌 이제 그만 가. 너랑 같이 있으면 복장 터지니까.”

복장만 터지면 다행이게. 목청까지 안 터지면 그거야말로 고마운 일일 것이다. 

이예주는 제 할 말을 마구 쏘아붙인 후, 조롱이가 어느 쪽에 있는지 제드가 알려 주지도 않았음에도 맘대로 걷기 시작했다. 멀어지는 그녀의 등 뒤로 제드가 따라가지도, 그렇다고 승강기 안에 있지도 못한 채 안절부절못했다. 

결국 그녀의 주위를 밝히던 등불이 어둠에 침범되어 사그라질 듯 보이지 않게 되자, 그는 잡고 있던 도르래 손잡이를 내팽개치고 승강기에서 냅다 뛰쳐나왔다.

“가, 같이 가요, 레이디!”

제드는 놓칠세라 허둥지둥 이예주에게로 뛰어갔다.

쿠룽― 쿠구구궁― 

얼마 안 가 커다란 소음과 함께 그의 뒤에 있던 승강기가 천천히 공중으로 뜨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내 끼이, 끼리릭 하는 귀곡성을 내지르며 자동으로 올라갔다. 

제드가 내려오는 내내 태엽을 감듯 쉴 새 없이 감았던 도르래의 쇠사슬이 손잡이를 놓음으로써 풀어지기 시작해, 빈 승강기 또한 자동으로 원상 복귀되는 원리였다.

쌍팔년도 영화 속의 승강기보다도 더 후진 고철 덩어리라고 오는 내내 이예주가 욕을 했지만, 놀랍게도 그들이 타고 온 승강기는 반자동이었던 것이다.

*       *       *

멀찍이 반짝이던 빛이 있는 쪽으로 다가가니, 정말로 고개를 축 숙인 뤼미에르 꽃이 쇠로 만들어진 꽂이에 꽂혀 있었다. 

원래는 등불을 꽂는 자리인지, 짧은 쇠기둥이 700미터 위에서 보던 것과 비슷했다. 그 꽃을 기점으로 길이 꺾여 있었다.

어둠이 가시자 천장이 꽤 높은 탄광 길과 바닥 정중앙에 깔린 레일이 드러났다. 

그 위를 일정한 간격으로 꽂혀 있는 뤼미에르 꽃들이 밝히고 있었다. 

빛이 새어 들어올 틈 없는 지하 깊숙한 탄광인데도, 지하 위 별관보다 이곳이 훨씬 밝았다.

불에 닿으면 폭발하는 검은 안개. 그 검은 안개를 공급하기 위해 모든 등불을 없애고 이런 꽃을 꺾어 가져다 꽂은 미친 인간들이라니. 

누구의 머릿속에서 생각해 낸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아이디어 하나만큼은 기가 찰 정도로 신박했다. 

빛을 내는 희귀종이 없는 세상에서 살던 그녀로서는 상상조차 못해 볼 일이었다.

가까이서 본 꽃들은 지속적으로 물을 주거나 따로 관리를 하는 것은 아닌지, 하나같이 고개를 축 늘어뜨린 채 간신히 빛만 뿜어내고 있었다. 

원래 용도가 불빛 대신 쓰이는 것은 아닐 터였다. 

옥에 티처럼 하얀 꽃봉오리에 다닥다닥 붙은 석탄가루가 꼭 꽃들의 생명을 빨아먹고 있는 것 같았다. 

보기 싫었다. 이예주는 근 하루 만에 다시 보는 낯설지 않은 꽃의 자태에 흘낏 시선을 던지며 제드에게 물었다.

“이거, 한 송이당 수명이 얼마나 돼?”

“뤼, 뤼미에르요? 어…… 기, 길게는 일주일 가는 것도 있는데 대, 대부분 3, 4일이면 시, 시들어 버려요. 그, 그래서 자, 자주 꽃을 갈아 줘야 돼요.”

빛도 들지 않고 따로 관리도 하지 않기에 수명이 짧을 거라 예상은 했어도 이렇게 짧을 줄은 생각 못했다. 

이예주는 인상을 찌푸렸다. 

이거 한 송이, 한 송이도 다 생명인데. 

게다가 2017년 현대에선 구경조차 해 볼 수 없는 귀하디귀한 꽃을 이런 식으로 낭비하다니.

아무리 미래가 살기 퍽퍽하다지만 꽃의 진가를 알아보는 사람조차 없는 무식한 천년 후 세상에 입이 썼다. 

좋지 않은 표정으로 걸음을 옮기던 그녀의 소매를 제드가 문득 잡아당겼다.

“거, 거긴 막혔어요. 이, 이쪽으로 가야 해요.”

탄광으로 쓰기 위해 이곳저곳 굴을 뚫었기 때문인지 음습한 지하 동굴 안은 거니는 내내 길이 여러 곳으로 갈렸다. 

길이 뚫려 있는 것 같으면서도 결국 그 끝은 막혀 있는 굴이 여럿인 것 같았다.

정말 제드 없이 혼자 왔으면 오자마자 탄광 입구에서부터 길을 잘못 들었을 것이다. 

아니면 막다른 길로 돌아가 한참 시간을 지체했을 것이 분명했다. 

마냥 쓸모없는 건 또 아니네. 새삼스러운 눈으로 제드를 돌아보며 이예주는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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