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드 앤 매드 (131)화 (132/319)

그녀의 지적에 마지못해 도르래를 돌리면서도, 제드는 ‘여기가 허점이니 마음껏 찔러 주십시오.’ 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의 얼굴에서 점점 핏기가 가시기 시작했다. 

“선대 족장이라던 네 할아버지는? 네 할아버지는 벙어리가 되기 이전에는 똑바로 말했대? 내가 듣기로는, 할아버지의 형제들이 네 할아버지를 가리키며 말이나 더듬고 하등 쓸모도 없어서 쫓겨난 병신 새끼라고 했다는 거 같은데.”

“그…… 그, 그건…….”

제드가 느릿느릿 뭐라고 반박을 입에 올리려다가 다시 입을 꾹 다물었다.

“방금 말더듬는 게 저주가 아니라 혀가 뽑힌 게 저주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

“…….”

정곡을 찔렀는지 제드가 허연 얼굴로 입을 떡하니 벌렸다. 

이예주가 가느다래진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혀가 뽑히는 게 저주면, 왜 조롱이가 널 처음 봤을 때 네 혀를 안 뽑았을까? 그리고 넌 믿을지 모르겠지만 조롱이는 네가 누군지도 모르는 눈치였어. 물론 나도 네가 빌어먹을 족장의 손자인지 아들인지 당연히 몰랐고. 네가 누군지 얘기를 안 했는데 우리가 점쟁이도 아니고 그걸 어떻게 알아? 왜, 신인류에 대해서 배울 때 신인류는 독심술 하는 능력도 있으니까 조심해야 한대?”

“…….”

“아직도, 너한테 저주가 걸린 것 같아?”

“…….”

“그리고 말 더듬는 저주에 걸리면 또 뭐가 어때서? 죽기를 해, 뭐를 해? 네가 나한테 뤼미에르 꽃을 주면서 말해 줬던 검은 파편의 저주에 걸린 공주처럼 평생 빛도 못 보고 살아야 하는 거 아니잖아. 말 좀 더듬어도 주둥이로 멀쩡하게 밥 먹고 나랑 이렇게 대화도 하면서 뭐가 문제인데?”

제드는 계속해서 답을 하지 못했다. 

이젠 흡사 뱀파이어에게 피를 모두 빨린 사람인 양 금방이라도 쓰러져 바스러질 것 같은 얼굴로 간신히 서 있을 뿐이었다.

그 얼굴을 들여다보자니 이예주는 울컥 화가 치솟았다. 

조롱이의 박복한 과거나 제드와 그의 가족들이 믿었던 터무니없는 저주 소리 때문에 화가 난 것은 아니었다.

“너 진짜 저주가 뭔지 알아?”

이예주가 딱딱한 목소리로 내뱉었다. 

양 어금니를 꽉 문 탓에 그녀의 턱은 딱딱하게 경직되어 있었다.

“저주는…… 내가 어떤 것을 바라기 때문에 그것을 내가 취하기 위해 남을 팔아먹는 행위야. 남에게 불행이나 재앙을 주고 나는 원하는 것을 손에 얻는 거라고.”

“…….”

“그런데…… 그런데 남의 불행과 재앙을 밟고 그 위에 서서 원하는 걸 손에 쥐었다고, 그게 기쁘면 얼마나 기쁘겠어?”

말을 하면서도 제 팔자가 참으로 박복한 것 같아서 이예주는 자조적으로 웃었다. 

신경질적인 웃음이 어두운 터널 속으로 기기괴괴하게 울려 퍼졌다. 

감아 놓은 태엽 인형처럼 멍한 얼굴로 무감각하게 도르래만 돌리고 있던 제드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내가 살고 싶다고…… 내가, 내가 좀 더 살고 싶다고 다른 사람들 다 죽는 사이에서 나 혼자만 바득바득 살아 봤자, 그게 얼마나 행복하겠어! 응?!”

“레, 레, 레이디…….”

지긋지긋한 이 상황에 울고 싶은 건 이예주 자신인데, 지금껏 자기 맘대로 잘도 저주를 가져다 붙이던 제드가 더 울상을 했다.

이예주는 머리가 지끈지끈 아팠다. 

아, 정말 짜증 나고 싫다. 아까는 그냥 싫기만 했는데, 지금은 진저리 날 정도로 짜증이 났다.

“저주에 걸렸다는 건 이런 거야. 뒈지거나 말거나 남 팔아먹고 나 혼자 살아남는 게 바로 저주를 받은 거라고. 그런데 조롱이가 네 할아버지나 네 아버지, 너를 죽음에까지 처하게 한 적 있어? 혀 뽑히는 거 말고. 혀 없는 건 죽음 축에도 안 끼니까!”

“…….”

“왜 대답을 안 해? 있냐고!”

대답 없이 뭉그적대며 다시 고개를 떨어뜨리려던 제드를 향해 이예주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있냐고! 있냐고, 있냐고, 있냐…… 있……. 

그 소리가 터널을 타고 텅텅 메아리쳐서 다시 돌아오자, 제드가 화들짝 놀라 도리질까지 치며 부정했다.

촤르륵, 촤르르륵. 

긴장한 탓인지 도르래를 돌리던 제드의 손이 눈에 띄게 빨라졌다. 

이예주는 무서운 눈으로 바쁜 그의 손을 노려보다가, 몇 분 후 눈이 빠질 듯이 아파 오자 온몸에 힘을 뺀 채 다시금 쇠창살에 몸을 기댔다.

“씨, 그니까 왜 되지도 않는 저주 소리는 갖다 붙여서는.”

이런 중요한 때에 괜히 감정 소비만 한 것 같다. 

벌어진 입술 새로 불편한 심기를 숨기지 않고 고스란히 내뱉은 후, 그녀는 느릿하게 눈꺼풀을 감았다가 들어 올리며 시린 눈을 달랬다.

그들 사이로 새로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아까 전처럼 아무 말이나 내뱉지 않고는 못 배길 만큼 어색한 침묵은 아니었다. 

굳이 따지자면 침묵보단 휴식이었다. 

족장과 조롱이 사이에 숨겨져 있던 저주에 관한 비밀을 생각하고 화를 내는 종류의.

전류가 흐르는 코일들이 마구마구 엉긴 것처럼 머릿속이 복잡했다. 

이예주는 눈을 완전히 감았다. 

눈꺼풀이 덮인 눈앞은 작은 빛 한 점조차 없이 깜깜했다. 언제나 그랬듯 답 없는 제 앞길처럼.

“……어, 어쩐지 하, 할머니가 돌아가실 적에 좀 이, 이상한 말을 하셨어요…….”

그때, 말없이 도르래만 돌리던 제드가 풀 죽은 목소리로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이예주는 무슨 말이냐고 되묻지 않았다. 

그렇다고 눈을 떠서 의문 섞인 시선으로 제드를 바라보지도 않았다.

그녀의 반응과는 상관없이, 제드의 말소리가 그녀의 귓가로 조근조근 쏟아져 들어왔다.

“고, 고열에 시달려서 다, 다 죽어 가던 어, 어린 황조롱이를 잡아먹었다고 했잖아요. 2차 전쟁이 이, 일어나기 전에 하, 할머니 탄생일에 말이에요…….”

“…….”

“……그, 그런데 자, 잡아먹은 새의 맛이 도저히 어, 어린 새 같지가 않더래요. 어, 어린 새는 살이 여리고 야, 야들야들해야 하는데 그, 그 새는 꼭 나이 든 노계처럼 따, 딱딱하고 질긴 게…… 주, 죽기 전에 다시 생각해 보니까, 아, 아무리 생각해도 어, 어린 황조롱이 같지가 않더라고…….”

이예주는 제드의 말에도 여전히 미동하지 않았다. 

흐려지는 제드의 말꼬리를 따라, 귓가에 아득한 목소리가 흘러 들어왔다.

―누가 네 누나야? 네 누이는 따로 있어, 엘로! 인간들에게 뜯어 먹히고 죽어 버린 네 불쌍한 누이 말이야!

마담 페니의 옷가게에서 목청이 찢어져라 꽥꽥 소리를 지르던 붉은 개였다. 

조롱이가 이예주에게 ‘누나’라고 부르는 것을 발견한 붉은 개는 섬뜩할 만큼 부릅뜬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그리고 또…….

―만약 꼴사납게 전쟁에서 포로로 잡은 신인류, 찍! 그것도 막 각성한 애송이에게 혀가 뽑혔다는 소문이 돌면 얼마나 비웃음을 샀을까. 아! 비밀이 하나 또 있었지, 참! 넌 마을 족장의 처남이나 마찬가지 아닌가? 찍찍, 누이의 복수를 위해 대대손손 저주를 내리는 신인류라니! 이 얼마나 무서운 일이란 말인가! 너 제법이야, 엘로!

그레이의 주점에서 계단 위로 올라갈 때, 등 뒤로 불분명하게 들려왔던 들쥐의 빈정거림이었다. 

조롱이보고 ‘마을 족장의 처남이나 마찬가지가 아닌가?’라고 말했었지.

멀리서 모기가 윙윙거리는 것처럼 작은 목소리가 바로 귀 옆에서 고함을 지르는 것처럼 선명하게 메아리쳤다. 

눈앞이 아연해졌다. 

―네 누이는 따로 있어, 엘로!

몇십 년 전에 마을 족장의 혀를 뽑고 저주를 내린 것이 마지막 남은 어린 황조롱이였나?

―인간들에게 뜯어먹혀 죽어 버린 불쌍한 네 누이 말이야!

―누이의 복수를 위해 대대손손 저주를 내리는 신인류라니! 너 제법이야, 엘로!

동쪽 대륙으로 와서 이것저것 주워들은 말이 부메랑처럼 되돌아와 이예주의 고막을 파고들었다.

머릿속이 온통 혼잡스럽고 어지러워질 때쯤, 일순 정수리부터 발끝까지 내리꽂히는 섬뜩한 깨달음과 동시에 참을 수 없는 욕지기가 치밀었다.

“……우욱.”

“레, 레이디! 괘, 괜찮아요? 왜, 왜 그러세요?”

뜬금없이 헛구역질을 하는 이예주 때문에 제드가 깜짝 놀라며 그녀 쪽으로 다가오려고 했다. 

등불을 쳐들며 그런 제드를 제지한 이예주는 고개를 돌리고 다른 한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그러나 자꾸만 목젖까지 치오르는 토기를 참아 내기가 어려웠다.

“……으윽. 욱, 우욱!”

금방이라도 입을 열면 그대로 위장 안에 든 것을 모조리 토해 버릴 것 같은 격렬한 구토감에 경련하듯 몸부림쳤다.

꽤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간신히 진정이 된 그녀가 입을 틀어막고 있던 손을 힘없이 떼어 냈다. 

입가에서부터 손까지 묻은 제 축축한 묽은 침을 바라보며, 이예주가 듣는 사람 또한 몸서리칠 만큼 스산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거 조롱이 누나야.”

“……예, 예?”

제드가 어리바리한 얼굴로 되물었다. 

그런 그의 얼굴을 흘깃 한번 쳐다본 이예주는 쇠창살 사이의 껌껌한 어둠으로 금세 고개를 돌렸다.

이건 꼭 추적추적 비가 쏟아지는 날, 불 꺼진 원룸 침대 위에 홀로 우두커니 앉아 있을 때와 같은 기분이었다. 

정체 모를 끈적끈적하고 축축한 손들이 온몸에 다닥다닥 붙어서 침대 아래로, 아니 그보다 더 깊은 곳으로 자신을 끌어 내리려 목을 죄던 그때와 같은 더러움.

“……네 할머니가 잡아먹은 새. 그거 조롱이 누나라고, 멍청아.”

“…….”

“네 할아버지가 계속 찾았다는 황조롱이 각시 말이야.”

이예주는 그 말을 끝으로 무너지듯 제자리에 쭈그려 앉았다. 

제드는 제게 걸린 저주가 결국 저주가 아님을 알았을 때보다 더한 충격을 받아 이번에야말로 도르래를 감던 손을 멈췄다.

끼이, 끼이이익― 

괴기한 소리를 내며 아래로 조금씩 내려가던 승강기가 덜커덩하고 멈췄다. 

그러나 내려가는 내내 위태롭게 진동했고, 워낙에 천천히 내려가던 중이어서 그런지 승강기가 갑자기 멈췄는데도 별로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쇠창살 너머, 등불의 빛이 조금이라도 닿지 않으면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캄캄한 터널 벽. 

그것을 바라보며 이예주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토할 것 같아.”

그녀는 힘없이 쇳내가 나는 쇠창살에 머리를 기대었다. 

구토감이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이젠 지긋지긋하고 싫은 것을 넘어 무서워질 지경이었다.

자신이 감당하기엔 너무나도 벅찬 태풍 한가운데에 서 있는 기분이다. 

사실은 거센 강풍에 휩쓸려 빙글빙글 돌고 있는데, 나 혼자 옳은 길을 가고 있다고 믿는 어리석은 새처럼.

구역질 때문에 절로 벌어진 입술 사이로 숨을 들이쉬고 내쉴 때마다 역겨운 쉰내가 섞여 나오는 것 같았다. 

냄새가 났다. 이기적이고 잔혹한, 인간의 냄새가.

“……정말 토할 것 같다고.”

승강기는 한참이 지난 후에서야 다시 내려가기 시작했다.

끼릭, 끼이, 끼이이이― 

지하 700미터, 그들이 내려가는 자리마다 위태롭고 음산한 쇳소리가 해묵은 저주처럼 따라붙었다.

쿠룽, 쿠우우우웅. 

전에 없던 커다란 흔들림이 그들을 실은 고철 덩어리를 덮쳤다. 

짧게 신음하며 휘청거리던 이예주가 서둘러 창살을 잡았다. 

자칫했으면 들고 있던 등불을 놓칠 뻔했다. 

그녀는 거칠게 흔들리는 등불을 고쳐 잡으며 몸을 바로 했다.

“다, 다 온 것 같아요, 레이디.”

제드가 걸쇠를 옆으로 밀어 잠금을 풀고 문을 잡아 젖혔다. 

철컥, 끼이익― 

귀곡성처럼 낡아 빠진 소음을 내며 문이 열리고, 마침내 지하 700미터의 끝이 눈앞에 펼쳐졌다.

“머, 먼저 내리세요.”

제드가 아직도 도르래에 손을 떼지 않은 채로 말했다. 

이예주는 쓰레기를 털 듯 쇳가루가 묻어나는 쇠창살에서 재빨리 손을 떼고 문을 지나려던 찰나였다. 

제드가 다급하게 이예주를 불러 세웠다.

“자, 잠깐요. 드, 등불은!”

“……응? 뭐.”

“드, 등불은…… 노, 놓고 내려야 돼요.”

제드가 손잡이를 잡지 않은 다른 한 손으로 그녀의 손아귀에 들린 등불을 가리켰다. 

등불과 이예주를 번갈아 가며 바라보는 그의 두 눈동자가 하염없이 떨렸다.

“왜?”

이예주가 물었다. 

그는 고민하듯 고개를 약간 모로 세워 말했다.

“아, 안에도 빛나는 게 있는걸요. 부, 불은 아니지만…… 어, 어둡지는 않아요.”

“빛나는 거?”

그녀는 들고 나가면 안 된다는 제드의 말에 문 앞에서 고개만 쭉 빼어 승강기 밖을 바라보았다. 

과연 빛을 내는 것이 있다는 게 사실인지 멀리서 희미하게 반짝이는 것이 보였다.

그 빛은 그녀가 들고 있는 등불보다 어두웠다. 

그쪽으로 가면 또 다를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승강기와 그 반짝이는 빛 사이는 완전한 어둠에 휩싸여 있었다.

여긴 왜 이렇게 답답하게 불을 다 꺼 둔 거지? 안 그래도 지하라서 빛 한 점 들지도 않겠구만. 

하긴, 누군가를 가둬 두는 감옥이 ‘여 좀 보오.’ 하듯 환하게 밝으면 그건 또 그대로 이상할 것이다.

이예주는 답답함과 불안으로 속이 뒤틀렸다.

“아니야. 그냥 등불은 들고 가는 게 낫겠어.”

“……예, 예? 아, 안 되는데요. 어, 어두운데 우, 우리만 불을 가지고 있으면 모, 몰래 숨어서 온 거, 걸릴지도 모르고…….”

“그럼 이미 가져온 이 등불은 어떻게 하게? 승강기에 넣어서 다시 올려 보내? 그럼 등불이 다시 지 스스로 걸어가서 별관 벽에 걸린대? 퍽도 안 들키겠다.”

“그, 그냥 깨트려서 저, 저쪽 안 보이는 곳에 버리는 게…….”

“아, 멀쩡한 등불을 왜 깨는데? 답답하네. 그냥 조심히 들고 가면 되잖아. 자, 봐 봐. 누구 오는 소리 들리면 내가 이렇게 겉옷 안에 숨길게.”

그러면서 이예주는 발목까지 닿는 제 포대를 주섬주섬 들어 올려 그 안에 등불을 쑤욱 집어넣었다. 

로브에 비해서는 터무니없이 얇았지만 안에 바지와 윗옷을 입은 상태였고, 유리 등 안에 있는 불 자체가 워낙 작아서 뜨거운 느낌은 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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