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드 앤 매드 (129)화 (130/319)

하지만 제드 놈은 뭐가 그리 두려운지 등불을 보고 사색이 되어 푸들푸들 떨어 댔다.

“가, 가져가면 위, 위험한데요…….”

“왜? 밑에 지키는 사람 또 있어?”

“아, 아뇨. 그, 그건 아닌데…….”

“그럼 왜. 또 뭐.”

“그, 그게…….”

제드가 또 대답을 하지 않고 우물거렸다. 이예주의 미간이 팍 구겨졌다.

“너 또 말 안 하려고 그러지?”

“예, 예? 아, 아니 그, 그건 아니고요…….”

“그게 아니면 뭐.”

“그, 그게 있잖아요. 그, 그러니까…….”

“아악! 답답해!”

끝까지 더듬기만 하고 제대로 된 말을 내뱉지 않는 제드 때문에 그녀는 결국 참지 못하고 들고 있는 등불로 그를 위협하며 소리쳤다.

“야! 너 말하지 마. 나도 내 맘대로 들고 갈 테니까 너도 그냥 말하지 마. 말하면 죽어, 너!”

“그, 그래도…….”

“닥치라 했다.”

그래도 아까 보초를 서던 덩치들 앞에서 기지를 발휘해 도와준 것을 좋게 봐서 험한 소리는 자제하려고 했는데 1시간을 못 간다, 1시간을 못 가.

식도까지 차오른 짜증을 그대로 발산하며 이예주는 들고 있는 등불 손잡이를 난로 뒤에 나타난 틈새로 휙 들이밀었다.

유리병 안에 든 등불은 기름이 별로 없어 밝기가 미미했다. 그래도 없는 것보단 훨씬 나았다.

난로 뒤 비밀의 공간이 마침내 훤히 밝혀졌다.

“헐, 이게 뭐야?”

이예주의 입이 떡 벌어졌다. 이건 또 무슨…….

“설마…… 이거 엘리베이터……?”

언젠가 이런 걸 본 적이 있다. 

대학에 다닐 때 심리학 마녀가 낸 과제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보게 된 쌍팔년도 고전 영화에서였다. 

한 다세대 빌라에서 일어나는 연쇄살인 사건을 다룬 영화였는데, 영화 속 빌라 사람들이 이용하던 것이 딱 제 앞에 있는 모양새와 같았다.

흑백 스크린을 통해 본, 낡고 녹슨 쇠창살로 이뤄진 작은 상자가 얼마나 후지고 위험해 보이던지. 

옆에 달린 층 번호 같은 것을 누르던 주민 한 명이 넓은 쇠창살 사이로 쑤욱 들어온 범인의 식칼에 찔려 죽지만 않았어도, 이예주는 끝까지 그게 엘리베이터인지 모르고 엔딩 크레디트를 보았을 것이다.

아무튼 그랬다. 녹슬다 못해 붉은색으로 산화된 삭은 쇠창살들이 죽죽 엮인 그 영화 속의 낡고 후진 엘리베이터가 눈앞에 현실화되어 나타나 있었다.

아니, 그녀의 앞에 존재하는 것은 영화 속 엘리베이터보다 더 심했다. 

영화 속의 그것은 최소한 층수를 눌러 전자동으로 이동하기라도 했지, 이건 무슨…….

“이거 혹시 도, 도르래야?”

이예주가 한쪽에 삐쭉 솟아 있는 ‘니은’ 자 모양의 손잡이를 손가락질하며 떠듬떠듬 물었다.

보통의 엘리베이터라면 층수를 누르는 버튼이 존재해야 하는 왼쪽 구석에, 버튼이나 거울 대신 웬 굵직하고 커다란 사슬이 칭칭 감긴 커다란 도르래만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에 감겨 있는 사슬조차 붉게 산화되어 있었다.

이건 좋지 않아, 매우 좋지 않아.

“아니지?”

이예주가 절박한 심정을 한껏 담아 제드를 돌아보며 다시 한 번 현실을 부정했다.

“우리 이거 막 돌려서…….”

“…….”

“아니…… 그러니까, 우리 이거 타야 하는 거 아니지? 그치?!”

제드는 또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왜 아니라고 말을 못 해! 그녀는 터져 나오는 절규를 가까스로 참으며 이마를 부여잡았다.

아, 정말 싫다. 천년 후까지 와서, 나고 자랄 때도 보지 못한 최초의 승강기를 타게 생겼다. 

이 얼마나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힐 일인지.

지끈지끈 두통이 올라와 얼굴을 찌푸린 이예주가 안쓰러웠는지, 제드가 위로한답시고 우물쭈물 입을 열었다.

“그, 그래도 지난 10년간은 하, 한 번도 멈추거나 떠, 떨어지거나 그, 그런 적은 없었어요.”

“그럼, 그 전에는?”

“…….”

침묵하는 제드 덕에 그녀는 욕설을 참지 못했다. 망할. 

녹슨 쇠로 이뤄진 이동수단을 한 번 더 바라보던 이예주는, 미처 보지 못했던 밑바닥까지 확인하곤 또다시 절망했다. 

녹이 슬고 산화된 쇠창살보다 더 위험해 보이는 얇은 쇠판이 밑바닥에 깔려 있었다. 

얼마나 오래된 건지 군데군데 엄지손가락만 한 구멍이 뚫려 있었다.

“여기, 깊어?”

“예, 예?”

“여기 깊이가 깊냐고.”

“어…….”

한참 뜸들이던 제드가 마지못해 진실을 토로했다.

“사, 사실…… 여, 여기는 타, 탄광 입구예요. 서, 석탄이 있는 곳 지반이 약해서 더, 더 파고들면 위험하다고 폐, 폐쇄됐지만…….”

“그래서 얼마나 깊은데?”

“지, 지하 700미터 정도…….”

지하 700미터나 되는 탄광 입구에 이런 건물을 세운 선대 족장인지 뭔지 하는 인간도 알아줄 만한 또라이였던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또라이 같은 건 이 폐탄광까지 신인류들을 끌고 와 가둬 두는 현 족장이겠지. 

팔족 족장을 능가하는 미친 인간은 더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이건 정말 예상치 못한 복병이었다.

자신이 사막에서 ‘문’을 넘어 동쪽 대륙까지 오지 않았더라면. 

그렇다면 조롱이는 물론이고 람 또한 동쪽 대륙에 이런 미친 짓이 자행되고 있는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그녀의 벌어진 입술을 타고 얄팍한 한숨이 새어 나왔다. 

이젠 진짜로 모르겠다. 이 세계를, 그리고…….

“이거 타면 우린 죽을 거야…….”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이예주는 진지하게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밖으로 나가 아직 마을 안에 있을 람을 찾아 도움을 청하는 게 맞지 않을까 생각했다.

람이라면 이런 깊숙한 지하 따윈 땅을 갈라서 언제든지 열어 볼 수 있을 테니 조롱이를 구하는 것쯤이야 금방일 것이다. 

비록 사슬을 손목에 매달고 있는 기간이 훨씬 길어질 테지만, 이런 위험천만한 승강기에 목숨을 걸었다가 700미터 아래로 떨어져 그대로 황천길로 가는 것보다야 불편함을 감수하는 쪽이 훨씬 나았다.

아니, 뭐가 낫고 안 낫고를 떠나 현대의 자신이었다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후자를 선택했을 것이다. 

가능한 한 안전하고, 실패하더라도 자신에겐 최대한 위험이 적은, 속된 말로 이기적이고 약아빠진 방법을 택했으리라.

“그, 그럼 지금이라도 저, 저택 뒷문으로 나, 나가시는 게 어떨까요?”

엘리베이터를 앞에 두고 망설이는 이예주의 기색을 눈치챈 건지 제드가 그녀의 고민에 힘을 싣는 발언을 내뱉었다. 

그 또한 이런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다가 죽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는 것 같았다.

제드의 말에 그를 돌아본 이예주는, 오히려 그 간절한 얼굴을 확인하자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정신이 퍼뜩 깨어나는 것을 느꼈다.

놈의 말투에서 더듬거리며 신인류들과 전쟁을 하고 그들을 모두 죽여야 한다고 지껄여 대던 족장의 흔적이 보였다. 

그 빌어먹을 부하한테 자신을 죽이라고 명령했다는 걸로 보아, 족장은 그녀가 제가 내민 손을 잡든 말든 처음부터 상관없었을 것이다.

생각은 어느덧 그레이의 주점, 람 앞에서 비열하게 조소하며 찍찍대던 들쥐의 모습으로까지 이어졌다.

―한마디로 신인류들을 매춘, 그리고 음식으로 원한 것이지요, 찍찍.

이예주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기껏 여기까지 오느라 시간을 잔뜩 지체했는데, 자기 하나 좀 안전하자고 다시 람을 찾아 나선다면, 그사이 조롱이는? 

그사이에 조롱이가 인간 같지도 않은 놈들한테 능욕을 당하고 잡아먹히기라도 한다면. 

그러면 자신은…….

“하…… 진짜 내가 무슨 영광을 누리겠다고.”

이예주는 어느덧 울상이 된 얼굴로 중얼거리며 떼어지지 않은 걸음을 억지로 움직였다. 

발밑에 본드라도 붙여 놓은 것처럼 다리가 무거웠다.

마치 구름 위를 걷는 느낌으로 최대한 체중을 싣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겨우겨우 얇고 구멍 난 쇠판 위로 올라선 그녀가, 몸을 돌려 등불을 제드 쪽으로 비췄다.

“레, 레, 레이디.”

제드가 당황한 표정으로 그녀를 불렀다.

혹시라도 잘못 움직이면 그대로 추락할까 봐 뻣뻣한 목석처럼 서 있던 이예주가 입을 열었다. 

그러고선 시퍼렇게 질린 얼굴로 벌벌 떨며 간신히 한마디를 내뱉었다.

“……안 타고 뭐 해. 빨리 타.”

*       *       *

끼잉, 끼이이익― 

살짝 건들기만 해도 녹슨 가루가 부스스 떨어져 묻을까 봐 손대기를 꺼리던 것도 잠시. 

이예주는 덜컹덜컹 내려가기 시작하는 낡은 기계 때문에 사색이 되어 쇠창살을 꽉 움켜쥐었다.

손에 든 등불이 덜렁덜렁 양옆으로 흔들렸다. 

그에 따라 그녀의 두 동공 또한 바람 앞의 촛불처럼 하염없이 흔들렸다.

제드는 옆에서 무거운 쇠사슬이 감긴 도르래를 돌리며 낑낑대고 있었다. 

“난 절대 안 돌려. 죽어도.” 

안쪽으로 완전히 젖혀져 있던 문을 닫아 걸쇠를 걸며 그녀가 대뜸 내뱉은 단호한 말에, 제드는 끽소리도 못하고 도르래를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종잇장처럼 펄럭거리는 몸뚱이로 안간힘을 쓰는 것이 안쓰럽기는 했지만, 이예주는 제가 대신 도르래를 돌린다든가 할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제드를 그저 멀거니 바라보기만 하던 중 문득 ‘쿠룽, 쿠구구구―’ 하는 묵직한 소음이 텅 빈 통로에 울려 퍼졌다. 

흠칫 놀란 그녀와 제드가 동시에 소리가 나는 위를 쳐다보았다. 위에서 내려오던 희미한 빛이 완전히 사라졌다.

“벽난로가…….”

방금 전까지만 해도 빛이 새어 나오던 입구였지만, 지금은 그저 깜깜한 어둠뿐인 지점을 바라보며 이예주가 중얼거렸다.

“허, 헉, 허억…… 스, 승강기가 우, 움직이면 벼, 벽난로를 고정해 둔 돌이 가, 같이 빠지게 해, 해 놓아서 그래요. 허억…… 자, 자동으로 벼, 벽난로가 다시 움직이게끔요…….”

제드가 숨넘어갈 듯 껄떡거리며 자동으로 닫힌 벽난로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이예주는 고개를 끄덕이며 넓은 쇠창살 사이로 들고 있던 등불을 훅 비춰 보았다.

탄광으로 내려가는 입구라는 제드의 말처럼, 엘리베이터가 내려가는 널따란 통로는 깊은 땅굴처럼 우둘투둘한 암벽으로 이뤄져 있었다.

탄광이면 동굴일 거 아냐. 어둡고 축축한 동굴은 정말이지 딱 질색인데. 

저 스스로 가벼운 폐소공포증을 앓고 있다고 믿고 있는 이예주는 등불을 가지고 온 자신의 혜안에 감탄했다. 

비록 빛이 밝진 않지만, 등불이라도 없었다면 그들은 완전한 어둠에 잠긴 채 끝없는 터널을 내려가야 했을 것이다. 

그것도 이런 안전장치 하나 없는 위험한 쇠창살에 갇힌 채로…….

“거 봐. 내가 등불 가져오길 잘했지? 이렇게 깜깜한데 불빛도 없이 내려가는 건 미친 짓이야.”

물론 이딴 고철 덩어리에 올라탄 것부터가 미친 짓이지만. 

뒷말은 가까스로 삼킨 채 이예주가 이번에는 제드 쪽으로 등불을 휙 비추었다.

제드는 도르래를 돌리느라 정신이 없는 건지 대답이 없었다. 

딱히 답을 바라고 뻐긴 것은 아니었기에 이예주 또한 입을 다물었다.

기이익, 끼익, 끼이이익― 

더욱 깊이 내려갈수록 그들이 타고 있는 엘리베이터는 흔들리는 일이 잦았다. 

그때마다 이예주는 움찔거리며 창살을 움켜쥔 손에 힘을 주었다. 

제드는 이 망할 고철을 타고 나다닌 게 꽤 익숙한지 도르래를 돌리느라 얼굴이 창백해진 것을 빼고는 딱히 이렇다 할 반응은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그들 사이로 침묵이 내려앉았다. 

엘리베이터의 한쪽 구석에 서 있던 이예주는 그들을 감싸는 정적을 견디지 못하고 먼저 입을 열었다.

“……많이 힘들어?”

퍼뜩 고개를 든 제드가 이예주의 소심한 걱정을 읽고 양 볼을 발그레 붉혔다.

“아, 아니요……. 태, 태엽 감는 거랑 같아서 처, 처음에만 좀 돌리기 힘들고 주, 중간부터는 괜찮아요. 도, 돌리기 수월해요.”

“다행이네.”

태엽이라면 인형의 태엽 같은 걸 말하는 건가? 

어찌 됐건 수월하다는 소리가 그저 안심하라고 내뱉은 소린 아니었는지, 튀어나온 손잡이를 잡고 열심히 돌리는 제드의 몸짓이 제법 가벼웠다. 

아까처럼 낑낑대는 소리도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지하 700미터 아래로 생각보다 잘 내려가고 있는 건가. 

가벼운 제드의 몸놀림에 두려웠던 마음 또한 한결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이예주는 쇠창살을 꽉 부여잡고 있던 손에 힘을 풀고 느슨하게 등을 기댔다. 

끼익, 끼익. 사슬에 매달린 엘리베이터가 움직일 때마다 기댄 쇠창살을 통해 그 진동이 전해졌다. 

다행히 심각한 움직임은 아니어서 멀미가 나진 않았다.

“……아까 대답 안 한 거, 말해 줬으면 좋겠어.”

이예주는 어렵사리 운을 뗐다. 

제드가 화들짝 놀라 더듬거리며 되물었다.

“……뭐, 뭐를요?”

“황조롱이 각시에 대해서. 그거…… 조롱이랑.”

“…….”

“네 저주하고 관련된 거…… 맞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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