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말한 고용인들만 사용하는 계단에 도착했을 때쯤엔 족장의 떠듬거리는 취임사가 한창이었다.
“마, 많이 낡았으니 조, 조심해야 돼요.”
무작정 계단을 내려가려던 이예주에게 제드가 주의를 주었다.
과연 낡았다는 말이 허튼소리는 아니었는지 그녀가 한 발짝 발을 내리자마자 끼이익 하고 음침한 소리가 어두운 복도로 울려 퍼졌다.
끼익, 끼익, 끼익. 계단을 밟을 때마다 나는 귀신 울음소리에 제드는 움찔움찔 어깨를 떨었지만 이예주는 개의치 않고 빠르게 발을 놀렸다.
역시 조롱이는 지하에 있으려나. 이런 꿍꿍이가 가득하고 음침한 저택에서는 보통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는 지하에 비밀스러운 방이나 감옥을 숨겨 놓기 마련이다.
조롱이를 빨리 만나야 한다는 생각에 발길이 바빠진 그녀는 앞장서기로 했던 제드보다 앞질러서 마구 계단을 타고 내려갔다.
나선형이었던 계단의 끝은 생각보다 가까웠다.
하지만 막상 아래층에 발을 내린 그녀의 앞에 펼쳐진 것은 더 아래로 내려가는 길이 아닌, 사람들이 분주히 오가는 부엌 근처였다.
웨이터복을 멋들어지게 차려입은 늙은 남자 한 명이 잔들이 빽빽하게 세워진 트레이를 끌고 주방에서 나왔다.
그는 검은색 로브를 푹 뒤집어쓴 채 계단 앞에 어정쩡하게 서 있는 이예주를 조금 수상하게 바라보았다.
하지만 뒤따라 내려온 제드를 보곤 별말 없이 고개만 한 번 숙인 채 지나갔다.
들킨 건가 싶어 잔뜩 몸을 굳히던 이예주는 옆에 선 제드에게 살벌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야, 뭐야. 조롱이 있는 곳으로 안내해 준다며!”
“시, 신인류들이 있는 곳도 바, 밖으로 나가야 가, 갈 수 있어요. 아, 아부지랑 요, 용병대장에게 아, 안 들키고 나가려면 부, 부엌 뒷문으로 나가는 수밖에 없어요…….”
제드가 억울하다는 듯 해명했다. 그러니까 이, 이제는 그렇게 호, 혼자 막 머, 먼저 내려가면 안 돼요. 덧붙이는 말에 그녀는 하는 수 없이 제 앞에 서라며 턱짓했다.
제드가 후닥닥 달려와 그녀의 앞을 호위하듯 막아선 채 다시 앞장섰다.
마음에 들지 않지만 이예주에게는 제드의 뒤를 조용히 따르는 수 이외의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주방으로 들어서니 수많은 고용인들이 바삐 오가며 음식을 만들고 담고 나르고 있었다.
제드의 뒤에 바짝 붙어 그 틈을 비집고 들어서자, 호기심 어린 이목이 자신에게로 쏟아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녀는 괜히 들킬까 두려워 후드를 깊게 당겨 쓰며 고개를 숙였다.
처음 동쪽 대륙으로 와서 남자가 이런 펑퍼짐하고 두꺼운 포대를 옷이랍시고 사 주었을 때는 정말이지 눈이 뒤집힐 정도로 화가 났는데, 막상 이런 상황에 휩쓸리고 나니 정체를 가리는 데 참으로 요긴했다.
혹시 그 미친놈은 자신이 어떠한 종류의 사고를 반드시 칠 것이라고 이미 예견하고 이런 옷을 사 준 것이 아닐까.
남자의 선견지명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끼며 그녀가 바삐 제드의 뒤를 쫓아 걸음을 옮겼다.
다행히 족장의 아들인 제드 덕인지, 아니면 취임식 때문에 너무 정신없이 바쁜 탓인지, 제드와 이예주는 일하는 이들의 호기심 어린 시선을 받으면서도 금방 주방 반대편에 도착했다.
마구잡이로 쌓인 식재료가 담긴 박스들 옆에 작게 난 문이 하나 있었다.
제드가 문을 밀어젖히고 허리를 숙여 먼저 밖으로 나갔다.
그 뒤를 이어 따라 나가니, 몇 시간 만에 마주친 밖은 완전히 어둠에 잠겨 있었다.
그도 모자라 추적추적 비까지 내리는 상황이었다.
왜 이렇게 재수 없는 날, 더 재수 없게 비까지 내리고 난리야.
울적한 얼굴로 비가 내리는 검은 하늘을 바라보며 이예주는 짧게 욕설을 뇌까렸다.
불안감이 턱밑까지 차올라 온몸을 내리누르는 기분이었다.
기도가 묵직하게 아픈 것이 목에 선명하게 남은 멍 자국 때문인지, 저택에서 뿜어져 나오는 스산함에서 비롯된 압박감 때문인지 잘 분간이 가지 않았다.
“이, 이리로…….”
제드가 멍청히 하늘을 바라보고 서 있는 그녀의 옷자락을 소심하게 잡아끌었다.
이미 실외에 서 있는 탓에 빗물에 젖어 들어가는 제드를 바라보면서도 이예주는 어쩐지 그와 같이 빗속으로 선뜻 몸을 던질 수가 없었다.
그녀는 개인적으로 비 내리는 날, 더군다나 시원하게 쏟아지는 장대비도 아니고 이런 가랑비가 내리는 습기 찬 날을 극도로 싫어했다.
이런 날 어두운 원룸에 홀로 처박혀 있다 보면, 음울하고 축축한 물 기운이 온몸을 늘어 잡고 저 밑바닥 끝까지 끌고 갈 것만 같은 기분이 들곤 했다.
잠시 망설이는 이예주를 제드가 다시 한 번 재촉했다.
덕분에 마음의 준비도 채 하기 전에 그녀는 빗줄기 사이로 끌려 나왔다.
입고 있는 검은색 로브가 젖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그러나 두꺼운 탓에 직접적으로 몸이 젖는 찝찝한 느낌은 들지 않았다.
빗줄기는 가늘지만 끊이지 않고 떨어졌다.
어둠에 서서히 눈이 익었다.
제드에게 끌려가며 걷는 길은 저택 뒤로 나 있는 듯한 좁은 돌길이었다.
혹시 몰라 주위를 더 둘러보고 길을 익혀 놓고 싶었다.
그러나 워낙 주변이 어둡고 비까지 내리고 있어 듬성듬성 박혀 있는 넙적한 돌을 따라 걷고 있다는 것만 알아챌 뿐, 그 주변으로 뭐가 있고 어떻게 생겼는지까지는 알 수 없었다.
그녀는 짧게 한숨을 내쉬며 길을 외우겠다는 생각은 바로 포기했다.
이만큼 와 버린 지금으로써는 이 길의 끝에 자신이 모르는 또 다른 함정이 있건, 자신을 집어 처넣을 배럴 통이 있건 그저 부딪치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그 둘은 말 한마디 나누지 않고 길을 따라 걷기만을 반복했다.
얼마만큼 지났는지 가늠하기 힘든 시간을 보낸 후, 마침내 길의 끝에서 희미한 빛이 뿜어져 나오는 것이 보였다.
이예주는 길 끝에 뭐가 있는지 자세히 보기 위해 눈살을 있는 대로 찌푸렸다. 제드를 따라 조금 더 길을 걷고 나서야 그것이 외딴 곳에 우뚝 서 있는, 2층짜리 작은 건물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임을 알아볼 수 있었다.
건물? 의문에 찬 눈빛을 알아챈 건지 제드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이, 이제 그 괴물…… 아, 아니, 시, 신인류가 있는 곳에 거, 거의 다 왔어요…… 그, 그런데 앞에 요, 용병대장의 부하들이 서 있으니까 아, 아무 말도 하면 안 돼요. 제, 제가 모두 알아서 할 테니까…….”
그의 말처럼 길 끝에 있는 외진 건물 입구의 양옆에 두 남자가 등불을 들고 우두커니 서 있었다.
방금 전 그녀가 발견한 불빛은 아무래도 저 남자들이 들고 있는 등불에서 나오는 것이었나 보다.
건물의 창문에서는 빛 그림자조차 새어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예주는 건물을 바라보며 뜬금없이 내뱉었다.
“바다 냄새가 나.”
“예, 예?”
“여기로 오는 동안 바다 비린내가 짙어졌어. 바다 근처에 있나 봐.”
제드는 이예주의 말에 침묵했다. 그녀는 그것이 긍정임을 알아챘다.
그러는 사이 둘은 어느덧 건물 바로 앞까지 도달했다.
“멈춰! 누구냐!”
어두운 시야와 쏟아지는 비 때문인지, 다가온 이예주와 제드를 뒤늦게 발견한 남자 두 명이 들고 있는 등불을 둘에게 비추며 물었다.
갑작스레 훅 눈으로 쏟아지는 빛에 ‘으’ 하고 고개를 돌린 이예주와는 달리, 웬일인지 소심하고 둔해 빠진 제드가 침착한 태도로 앞으로 나섰다.
“나, 나…… 나다.”
“에? 제드 도련님?”
뜬금없이 등장한 차기 족장의 아들 때문에 어지간히 놀랐는지, 남자들이 휘둥그레진 눈으로 서로를 흘끔흘끔 눈짓했다.
아무리 서로를 바라보아도 둘 중 누구 하나 도련님에 관한 언질을 듣지 못했을 테지만.
그 혼란을 틈타 제드가 조금 더 강한 어조로 내뱉었다.
“아,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왔으니 무, 문을 열어라.”
“족장님이요? 그런 말은 못 들었는데……. 야, 넌 들었냐?”
남자가 고래를 좌우로 휘저었다.
들었을 리 만무했다.
남자들의 시선이 다시금 제드에게로 모였다.
제게 쏟아지는 이목에 ‘흐끅’ 하고 목을 움츠리던 제드는 이예주가 쌍라이터를 켜고 눈을 부라리자 재빠르게 목을 빼냈다.
“어, 어허! 조, 족장님께서 보내셨다니까! 어, 어서 문을 열라!”
“저건 뭡니까?”
“뭐, 뭐 말이냐?”
“도련님 등 뒤에 저거 말입니다.”
남자가 제드의 등 뒤에 서 있는 이예주를 턱짓했다. 저거라니, 저 새끼가!
그녀가 들키지 않기 위해 최대한 잡아당겨 푹 눌러쓴 후드 밑에서 낯빛을 붉으락푸르락할 때쯤, 제드는 예상치 못한 허점을 찔렀다는 듯이 “어, 어…….” 하고 답답한 신음만 내뱉었다.
“저건 뭐냐니까요?”
“그, 그게…….”
남자가 금방이라도 이예주의 후드를 벗길 것처럼 성큼 다가왔다.
방금 전까지 자신과는 전혀 무관하다는 듯이 한 발자국 떨어져서 관망하던 이예주는 몸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후드를 벗기더라도 사실 문제 될 것은 없었다. 하지만 저놈들이 조롱이와 자신을 납치할 때 뒤따라왔던 놈들 중 한 명이라면?
이예주의 얼굴을 알고 있는 놈들이라면, 그녀가 제드의 뒤를 따라 이곳까지 온 것에 당연히 의문을 품을 것이다.
놈들이 수상쩍게 여긴 나머지 자칫 용병대장인지 뭔지 그 무식한 놈에게 연락이라도 한다면, 그거야말로 생으로 술통에 담겨져 바다에 수장당하는 지름길일 것이다.
그녀가 그렇게 침을 꼴깍 삼키며 긴장하는 와중에도 제드는 여전히 변명 하나 못하고 버벅거리고 있었다.
‘그냥 전용 하인이나 뭐 그런 거라고 대충 말하면 될 거 아냐!’
환장할 노릇에 이예주가 참지 못하고 번뜩 고개를 치켜들 무렵, 기발한 생각이라도 난 듯 제드가 제 무릎을 탁 치며 외쳤다.
“시, 신인류다!”
“예?”
“아, 아버지가 일이 있어서 내, 내게 대신 가둬 두라고 며, 명하셨다!”
뭐라는 거야, 이 말더듬이가. 공모자인 그녀도 이렇게 어이가 없을진대 과연 믿을 것인가.
의심이 좀체 풀리지 않는지 남자들이 미심쩍은 눈으로 제드를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저들끼리 얼굴을 마주 보며 눈빛 교환을 했다.
지레 찔끔한 제드가 그때까지 이예주의 손에 대충 헐겁게 들려 있던 사슬을 낚아채어 쩔컹쩔컹 패기 넘치게 흔들어 댔다.
“봐, 봐라! 여기! 다, 당연히 사, 사슬에 묶어 두었지!”
“우리 대장님은 같이 안 오셨습니까?”
“요, 용병대장은 아버지가 따로 시, 시킨 일이 있다!”
“족장님이 대장님과 동행하신 분이 아니면 절대로 문을 열지 말라고 했습니다만…….”
“이, 이 저택 족장의 하나뿐인 아들인 나를, 모, 못 믿는다는 거냐? 이, 이 나를?!”
중딩들에게 맞고 있을 때도 느꼈던 것이지만, 저놈은 말투가 은근히 재수가 없단 말이야.
자신들보다 한참이나 작은 제드가 벌벌 떨면서도 바락바락 윗사람인 양 구는 게 남자들에게 얼마나 가소롭게 들릴지는 안 봐도 뻔했다.
제드의 도움을 받아 탈출하는 것은 이 길로 실패인 것인가. 반응 없는 남자들을 보며 이예주가 시큰둥하게 다른 방안을 찾기 위해 머리를 굴렸다.
그때 제드가 생각지도 못한 초강수를 두었다.
“아, 안 되겠구나! 도, 돌아가서 네, 네놈들의 태도를 요, 용병대장에게 말하고 그, 그를 데리고 와야겠군! 조, 족장의 아들인 내, 내 말을 무시하는 것은 곧, 조, 족장님을 무시하는 것이니까!”
제드가 토라진 아이처럼 남자들로부터 고개를 팽 돌리고는 이예주의 사슬을 마구 잡아끌었다.
그녀는 얼빠진 얼굴로 이놈이 드디어 미쳤나,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제드는 몰라도 족장과 용병대장 소리는 무서웠는지 놀랍게도 그의 마지막 강수가 먹혀들었다.
“자, 잠깐! 잠시만요, 도련님!”
“뭐, 뭐냐?”
“족장님을 무시하다니요! 절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저희들이 도련님이 오신다는 전갈을 못 받아서 뭔가 착오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흥. 이, 이제 와서 그런 말을 해 봤자 이, 이미 늦었다!”
아까와는 180도 다른 태도로 제드를 부여잡는 남자들에게 그는 정말 귀한 집 도련님처럼 새침하게 쏘아붙였다.
이예주는 신들린 것처럼 말투가 변한 제드를 그저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그가 다시 한 번 그녀의 사슬을 잡아끌며 마지막 일침을 가했다.
“나, 나중에 저, 저택에서 쫓겨나더라도 너, 너무 원망 말거라!”
“도련님!”
끼이익―
철옹성처럼 덩치 큰 남자 둘이 가로막고 있던 건물의 문이 제드의 새침에 너무나도 쉽게 열렸다.
“그러지 마시고 어서 들어가시죠! 비 오는 날 저택에서 여기까지 신인류를 데리고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을 텐데. 오는 동안 이 더러운 동물 새끼가 불편하게 만들진 않았죠? 안까지 제가 모셔 드릴까요?”
“아, 알아서 갈 테니 시, 신경 꺼라.”
그는 마지막까지 도도한 도련님을 흉내 내었다.
진짜 신인류를 끌고 가듯이 사슬을 쩔컹쩔컹 흔들며 대꾸한 제드 덕에, 이예주는 더러운 동물 새끼라는 욕을 얻어먹었을지언정 얼굴을 확인당하진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