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나 드라마에서 보면, 기절을 시키기 위해 목 뒤나 뒤통수를 세게 내리치던데.
하지만 이것은 영화나 드라마가 아닌 실제 상황이기 때문에, 그저 마구잡이로 휘두른 의자에 제드가 맞아 쓰러진 것도 얼떨떨하기만 했다.
물론 쓰러진 그의 손에 코피가 좀 묻어 있지만 그 정도야 피가 난 축에도 끼지 못한다.
어느 틈에 이렇게 잔인하고 폭력적인 사람이 다 됐니, 예주 이 불쌍한 지지배야.
그녀는 좋지 않은 표정으로 자신을 위로하며 다시 한 번 발로 제드의 어깨 부근을 툭툭 건드려 보았다.
“야, 죽은 건 아니지? 기절한 거지?”
이번에는 움찔거리지도 않았다.
확실히 기절한 거야. 이예주는 그저 기절한 것뿐이라고 여러 번 주입하듯 혼잣말을 하며 자신을 합리화했다.
이건 피치 못해 일어난 어쩔 수 없는 폭력이고, 사람 뒤통수나 치고 다니는 이 배은망덕한 새끼는 좀 맞아도 싸다고. 그럼, 그럼.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는 녀석의 얼굴을 후려친 탓에 약간 아릿한 손목을 돌리며 슬슬 문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문 열어 줘서 고마워. 난 그럼 간다.”
예의 바르게 고맙다는 인사를 건네는 것도 잊지 않았다.
바닥에 아무렇게나 나동그라져 있는 제드의 팔을 밟지 않기 위해 그녀는 신중하게 발을 옮겼다.
그때였다.
무언가가 이예주의 발목을 덥석 움켜쥐었다.
“아악!”
소스라치게 놀란 그녀가 괴성을 지르며 미친 듯이 발을 굴렀다.
발목을 쥐었던 무언가는 발버둥에 금방 떨어져 나갔지만, 한번 발동 걸린 이예주의 발은 닥치는 대로 주변을 밟고 차며 춤을 추었다.
“억! 윽! 자, 자, 잠깐! 그, 그만! 때, 때리지 마세요!”
의자로 맞았을 때보다 더한 그녀의 발길질에 제드가 결국 기절한 척을 관두고 비굴한 얼굴로 애원했다.
“일어났으면 일어났다고 말을 하지, 왜 소리도 없이 사람 발목을 잡고 지랄이야!”
이예주가 시뻘게진 얼굴로 악다구니를 썼다.
그러자 화들짝 놀란 제드가 꾸물꾸물 몸을 일으켜 앉으며 작은 목소리로 더듬거렸다,
“그, 그게…… 아, 안 죽은 거 아시면 화, 화내실까 봐…….”
“하, 이런 미친…….”
시체처럼 엎어져 있던 인간이 갑자기 다리를 잡고 늘어지니, 그녀는 처음 람을 만나 용암 구덩이로 떨어질 때보다 더한 긴장감을 맛볼 수 있었다.
“아으, 진짜! 아직 기절 안 했냐?!”
어떡하지, 이젠 의자도 다 부서졌는데. 뭐로 때려야 하지. 다시 사슬이라도 감아서 줘 패야 하나.
남들이 들으면 깜짝 놀랄 소리를 잘도 떠올리며, 그녀가 난감함을 감출 데 없이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 순간이었다.
제드가 갑작스레 무릎을 꿇은 채 그녀의 한쪽 다리를 잡고 늘어지기 시작했다.
“뭐야! 이거 놔!”
“도, 도, 도와주러 온 거예요, 레, 레이디!”
“야! 도와주긴! 입에 침이나 바르고 그런 거짓말을 해라! 내가 한 번 속지 두 번 속냐?! 나 빨리 가야 되니까 이거 놔!”
“아, 아까 일은 자, 잘못했어요, 레이디! 하, 하지만 이, 이번에는 진짜예요!”
“허 참. 나한테도 이렇게 줘 터지는 놈이 누구를 지켜 준다고. 됐어! 난 이제 이 마을에서 인간은 누구도 안 믿기로 했으니까, 좋은 말 할 때 놔라. 더 맞기 싫으면!”
이예주는 기가 찬 얼굴로 헛웃음을 내 뱉으며 녀석에게 잡힌 발을 빼내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사내자식 주제에 그녀가 힘주는 대로 매가리 없이 이리저리 흔들리면서도, 제드는 다리를 끌어안은 팔을 쉽게 풀지 않았다.
짜증이 있는 대로 치솟은 그녀가 기어이 두 주먹을 불끈 들고 치켜들 때였다.
제드가 다시 한 번 쥐어 터질 각오를 무릅쓰고 필사적으로 소리쳤다.
“아, 아버지가, 취, 취임식이 끝나는 대로 요, 용병대장한테 다, 당신을 배럴 통에 넣어서 바, 바다에 집어 던지라고 시, 시키셨어요!”
“……뭐?”
이예주가 위협적으로 흔들던 주먹을 우뚝 멈췄다.
이때다 싶어 제드는 재빨리 애원했다.
“이, 이제 곧 취, 취임식이 시작돼요. 그, 그 전에 빨리 저, 저택에서 빠져나가야 돼요, 레이디! 저, 정말이에요. 미, 믿어 주세요!”
제드는 온 진심을 다해 제 마음을 호소했다.
그는 정말로 레이디가 다치거나 위험에 처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것이 저로 인한 것이라면 더욱더 끔찍했다.
비록 생각보다 무섭고 조금 손이 매운 사람이었지만, 이 정도는 심심하면 동네 아이들에게 불려 가 맞았던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또한 저주에 걸린 자신을 동등하게 대해 주었고 인생을 그렇게 살면 안 된다고 조언을 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얼굴도 예쁘고 상냥하다.
몇 번밖에 만나지 못했지만, 제드는 레이디가 좋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며 좋아하던 사람을 잃는 것은 한 번으로 족했다.
“제, 제발 미, 믿어 주세요! 제, 제가 안내할게요! 저, 정문으론 못 나가요. 요, 용병대장의 부하들이 버, 벌써 다 지키고 있거든요. 그, 그니까, 부, 부엌 옆 창고에 난 뒤, 뒷문으로 모, 몰래 빠져나가야 하는데…….”
“됐고.”
이예주가 손을 들어 제드의 말을 불쑥 끊었다.
“조롱이 어디 있어?”
“예, 예? 조, 조롱…….”
“나랑 함께 온 황조롱이 신인류 말이야. 데리고 나가야 하니까 걔 있는 곳이나 말해. 나가는 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가만히 눈알을 굴리며 이예주의 말을 가늠하던 제드의 낯빛이 싸악 굳어졌다.
그녀가 말하는 신인류가 누굴 가리키는지 알아챈 듯했다.
“그, 그, 그건! 그, 그곳은 안 돼요. 거, 거긴!”
“참 나. 믿어 달라니, 거짓말이 아니라 할 땐 언제고 조롱이 있는 곳은 또 말해 주기 싫어?”
이예주가 어이없다는 듯 되묻자, 제드의 시선이 아래로 툭 떨어졌다.
“그, 그곳은…… 그, 그곳은 위, 위험한 곳이에요. 차, 차라리! 차라리 레, 레이디가 먼저 여기서 나가서 도, 도움을 청하는 게…….”
“알려 주든가, 꺼지든가. 네가 날 도와줄 일은 두 개밖에 없어.”
다소 격한 이예주의 발언에 제드의 눈동자가 하릴없이 흔들렸다.
그러나 끝내 조롱이가 저택 안 어디에 있다는 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역시나. 이예주는 불쾌함을 얼굴에 가득 담고 제드에게 붙잡힌 다리를 힘 있게 털어 내었다.
이 찌질한 놈의 말이 진짜인지 거짓인지도 모르는데, 조롱이를 찾아야 하는 시간이 자꾸만 지체되고 있다.
서둘러야 돼. 그녀는 바닥에 두 무릎을 붙이고 앉아 있는 제드를 지나 열린 방문으로 다급히 다가갔다.
그러자 흐느적대던 제드가 눈빛을 달리하고 벌떡 일어나 허겁지겁 이예주의 앞을 막아섰다.
“아, 아, 안 돼요! 그, 그곳은 아버지랑 소, 손님들만 드, 들어갈 수 있어요!”
그의 아버지가 잡아 온 신인류들이 있는 곳은 그랬다.
저택에서 오랫동안 일을 한 사용인들도 잘 모를 만큼 아주 깊고 은밀한 곳이었다.
오죽하면 할아버지도 그곳에 그런 장소를 만들어 놓은 것을 알고 기함을 했더랬다.
입구도 아는 사람이 드물었지만, 출구를 아는 사람은 이제 세상에 자신밖에 남지 않은 것과 다름없다.
그런 속 타는 자신의 마음을 모르는 레이디는 벌컥 화를 내며 온갖 짜증을 퍼부었다.
요지부동이다. 그 신인류 괴물을 괴물이 있는 곳에 데려다주지 않으면 자기 맘대로 저택을 들쑤시고 다닐 거라는 결의가 그녀의 온몸에서 뿜어져 나왔다.
“야, 나 지금 시간 없어! 나 죽기 전에 빨리 조롱이 데리고 그 미친놈한테 가 봐야 돼. 그니까 좀, 맞기 싫으면 가만히 좀 있으라고오!”
“제, 제, 제가 안내해 드릴게요!”
“방금은 너네 아버지만 들어갈 수 있다며.”
“너, 너무 기, 깊숙한 곳에 있어서 자, 잘못하면 길을 잃어 요, 용병대장에게 잡힐지도 몰라요! 그, 그러니까, 제, 제가 안내해 드릴게요.”
“넌 애가 진짜……!”
이예주가 버럭 답답함을 토해 내려다가 도로 입을 다물었다.
제드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이 한없이 복잡했다.
그가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이 동쪽 대륙 마을처럼, 이 찌질한 인간도 정말 알다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에게 그렇게 맞고서도 안내해 준다는 말이 나오나? 것도 자기 아버지 하는 행동에 반하면서까지?
이예주가 착잡한 눈으로 제드를 바라보기만 하자 부끄러운지 녀석이 뜬금없이 볼을 붉히며 고개를 조금 숙였다.
얼씨구, 가지가지 한다.
“저, 저기 레, 레이디. 제, 제 말은 정말 거, 거짓말이 아니라…….”
“……앞장서.”
“예, 예?”
“조롱이 있는 곳으로 앞장서라고. 코피도 좀 닦고. 쌍코피잖아.”
으으. 역시 피를 보는 일은 심신에 안 좋단 말이야. 이예주가 흘끗 제드의 코 밑을 손가락질 하자, 그가 헐레벌떡 품에서 잘 개어진 새하얀 손수건을 꺼내서 코를 훔쳤다.
그러고는 뻘건 물이 든 손수건을 다시금 차곡차곡 잘 개어 품에 고이 집어넣었다.
이러니까 마을 남자애들이 싫어하는 거야.
이예주가 속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애완견처럼 그녀의 말을 착실히 받아 들던 남자가 어딘가 감격에 찬 눈을 하고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저…… 레, 레이디. 그, 그럼 이제 저를 미, 믿어 주는…….”
“나 너 믿는 거 아니야.”
제드의 희망이 채 싹을 틔우기도 전에 이예주는 칼같이 잔인하게 끊어 냈다.
그의 얼굴이 금방 시무룩해졌지만,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건 그냥 거래야. 비즈니스, 알지?”
정말 아는 건지 알 수 없었지만, 제드가 우울한 낯짝으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네가 또 뒤통수치지 않고 구라도 안 치고 날 조롱이한테까지 안내해 주면 네 말을 더듬는 언어장애…….”
언어장애란 표현이 맞나? 이예주가 다시 말을 고르며 말끝을 흐리자, 제드가 “저, 저, 저주요?” 하고 정정했다.
저주는 개뿔이다, 이렇게 대꾸해 줄까 하던 그녀는 이내 마음을 고쳐먹고 순순히 ‘저주’를 인정했다.
“그래, 저주. 조롱이랑 무사히 만나면 네 저주가 완화되는 방법은 가르쳐 줄 수 있어. 완전히 고칠 수는 없어도.”
“저, 저, 저주가 와, 완화된다고요?”
“응. 말 더듬는 것도 언어장애의 일종이니까…….”
말을 천천히 하는 것을 습관화하고, 연필 물고 혀에 피가 날 만큼 ‘아에이오우’를 되뇌고, 또 매일 거울 보고 스피치 연습을 빡세게 하다 보면 언젠간 멀쩡하게 말할 날이 오지 않을까?
있는 머리, 없는 머리 쥐어짜 내어 현대의 언어장애에 관한 지식을 생각해 내던 이예주는 별안간 서릿발처럼 차가운 얼굴로 제드를 노려보았다.
“그런데 만약 널 뒤따라갔는데, 또 날 배신 때린다든가, 함정을 파 놓고 기다리거나 하는 거라면…….”
그, 그런 거라면? 제드가 꿀꺽 마른침을 삼키며 그녀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이예주는 제드의 흔들리는 두 눈을 정확히 바라보며 한 자 한 자 힘주어 내뱉었다.
“넌 조롱이한테 말해서 특별히 평―생― 저주에서 못 벗어나게 만들 거야. 것도 모자라서 말 더듬는 것도 못하게 확 벙어리로 만들까 보다.”
평생이야, 평생.
이예주는 평생을 여러 번 강조하며 무시무시한 얼굴로 제드를 협박했다.
다행히 협박의 약발이 아주 잘 먹혀든 건지, 그는 벙어리로 만든다는 마지막 말에 핏기가 가신 얼굴로 가볍게 헛구역질까지 했다.
“그러니까 평생 말 더듬고 살기 싫음, 잘 안내하는 게 좋을 거야.”
이예주는 밀가루 반죽보다 더 허옇게 들뜬 제드를 곁눈질하며 흘끗 문 쪽을 향해 턱짓했다.
“앞장서.”
“예, 예!”
멍하게 서서 ‘평생’이란 단어를 중얼거리던 제드가 퍼뜩 정신을 차리더니 앞장서서 방을 쏜살같이 빠져나갔다.
그 뒤를 따라 복도로 나서며 이예주는 그의 잿빛 뒤통수를 멀거니 바라보다가 이내 심도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평생은 평생이지. 유전병은 평생 가는 게 아닌가?
만약 유전이 아닌 후천적 요인 때문이라 하더라도 잘못된 훈육으로 인한 발달 장애의 폐해는 벌써 삼대나 걸쳤다.
쉽게 고쳐질 만한 종류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유전은 물론 저주에 관해서도, 언어장애에 관해서도 지금 제드에게 친절히 하나하나 설명해 줄 생각은 터럭만큼도 없었다.
복도를 걸으며 제드는 이예주에게 뒤에 달린 후드를 쓰기를 종용했다.
명령하지 말라고 성질을 내면서도 그녀는 잠자코 후드를 잡아당겨 머리 위로 푹 눌러썼다.
동쪽 대륙 족장의 저택은 구조가 특이했다.
무조건 넓은 홀과 광활한 복도가 공간의 전부였던 서쪽 대륙의 팔족 족장의 저택과는 다르게, 디귿 자 형식으로 지어져 있었다.
학창 시절 고등학교의 구조와 똑같아서 이예주는 기분이 더 안 좋아졌다.
그녀가 갇혀 있던 방은 북쪽 복도의 가장 끝에 위치해 있었다.
조롱이에게로 안내해 준다던 제드는 아래로 내려가지 않고 그들이 있던 방에서 아예 반대쪽인 남쪽 복도로 그녀를 안내했다.
왜 이렇게 구석진 곳으로 가느냐고 미심쩍어하는 그녀에게, 제드는 지금쯤 1층엔 마을 안의 웬만한 인간들은 다 도착해서 모여 있을 것이라고 더듬거리며 대꾸했다.
그 말이 거짓은 아니었는지, 불이 훤히 켜져 있는 중앙 계단을 지날 때쯤 아래에서 왁자지껄한 소음이 들려왔다.
계단 난간에 기대어 잠시 아래층을 내다보려던 이예주는 펄쩍 뛰다시피 자신을 뜯어말리는 제드 때문에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끌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