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컥 문고리를 돌려 문을 열어 버릴까 잠시 망설이던 이예주는 이내 생각을 고쳐먹고 문에 살며시 귀를 가져다 대었다.
문 너머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혹시 누군가 방문 너머에 있을까 봐 귀에 온 신경을 쏟아부었지만 문이 두꺼워서인지, 아니면 정말로 아무도 없어서인지 아무런 인기척도 없었다.
이윽고 문에서 귀를 뗐다.
이예주는 결심한 듯 결연한 얼굴로 바닥에 아무렇게나 질질 늘어진 사슬을 오른손에 칭칭 감기 시작했다.
만에 하나라도 방문 밖에 누군가 있다면, 강철 주먹으로 명치를 세게 후려갈겨서라도 이곳에서 빠져나가야겠다는 생각이 그녀의 머릿속을 지배했다.
계획이나 작전 따윈 없었다.
무조건 전진, 그리고 어딘가에 있을 새대가리를 찾아서 탈출.
제가 생각해도 참 답 없고 무모한 일이었다.
과연 그 징그러운 제드와 족장에게 다시 잡히지 않고 조롱이를 찾아낼 수 있을까.
마침내 사슬을 오른손에 똘똘 말아 쥔 이예주가 마음을 굳게 먹고 문고리 위에 손을 올렸다.
괜히 긴장되잖아. 굳게 다짐했음에도 자꾸 마음이 약해져서 그녀는 몇 번 심호흡을 했다.
실은 긴장되는 것이 아니고 너무 무서웠다.
서쪽 대륙에서 워낙 호되게 당해서 그런지, 족장이고 저택이고 간에 또다시 그런 것들과 관련됐다고 생각하자 온몸을 타고 두려움이 스멀스멀 기어 다니는 것만 같았다.
약해지는 마음 사이로 차라리 자신이 탈출한 것을 알아챈 람이 천둥 번개와 지진을 마구마구 일으키며 자신을 찾을 때까지 기다리는 것은 어떨까, 하는 생각이 튀어나와 자꾸만 그녀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정말 그러는 게 낫지 않을까. 쥐뿔도 없고 싸움도 못 하는 제가 괜히 나서서 일을 더 크게 만드는 것보단, 차라리 람을 기다리는 것이…….
“아냐, 아냐! 정신 차려!”
그러나 이예주는 곧 머리를 뒤흔들며 자신을 채찍질했다.
놈들이 조롱이를 잡아먹으려고 한다. 지금 자신이 망설이는 이 시각에도 조롱이는 어느 주방 도마 위에서 털을 한 주먹씩 뽑히고 있을지도…… 으으!
문득 닭 잡는 장면이 떠올랐다.
이예주는 끔찍함에 몸서리를 치며 애써 그런 상상을 떨쳐 내었다.
그 전에, 그 전에 구하면 돼. 부정적인 생각을 해 봤자 좋을 것 하나 없다.
비록 특별한 전략도 없고, 답도 없는 자신이지만 도망 하나는 자신 있으니까.
연금술사가 만들어 준 만능열쇠도 있고…….
“하.”
이예주는 눈을 감고 다시 크게 숨을 들이마시었다.
셋 세면 벌컥 열고 무조건 앞으로 튀어 나가면서 문이란 문은 다 열어 보는 거야.
그녀는 속으로 수를 셌다.
셋, 둘, 마지막으로 하나…… 동시에 이예주는 있는 힘껏 문고리를 돌렸다.
그리고―
철컥.
“응?”
철컥철컥.
문고리를 제 쪽으로 잡아당기고 힘껏 밀어도 보았지만 문은 꼼짝도 안 했다.
“뭐야.”
이예주는 미친 듯이 문고리를 돌렸다. 그러나 문은 여전히 굳건히 앞을 막아서고 있었다.
혹시나 열쇠 구멍이 있을까 싶어 이리저리 살폈지만, 열쇠 구멍은커녕 개미구멍 하나 없이 멀끔한 문이었다.
문이 잠겨 있었다.
“미친.”
어쩐지 사슬을 너무 쉽게 푼 게 아닌가 싶더라니.
소심하게 도망치듯 방에서 빠져나간 제드 자식이 언제 문까지 잠그고 나간 것일까.
쥐새끼 같은! 망할, 망할 자식! 망할!
황당함에 문을 잡아당기기만을 반복하던 그녀의 얼굴이 점점 흉포해져 갔다.
얼마 안 가 그녀의 강철 주먹은 감시인들의 명치가 아닌, 멀쩡한 문을 후려치기 시작했다.
쾅, 쾅!
“야! 문 열어! 이거 안 열어?”
쾅, 쾅, 쾅!
“야! 야, 제드! 이거 열어! 야! 야, 이 개새끼야아악―!”
쇠사슬을 꽁꽁 말아 쥔 강철 주먹으로 나무문이 파일 정도로 격렬하게 문을 두들기던 이예주는 불현듯 성대가 찢어질듯 아파 왔다.
그녀는 아무리 외쳐도 코빼기도 비치지 않는 제드 자식을 부르는 것을 관두고 목을 부여잡았다.
“아, 목 아파…….”
목뿐만이 아니라 꿈쩍도 안 하는 문을 향해 열심히 날렸던 주먹과 팔, 다리, 발가락이 모두 욱신욱신 쑤셔 왔다.
그러나 그중 가장 아픈 곳을 꼽으라면 단연 뜨끈뜨끈한 열이 치오르는 것 같은 목덜미였다.
콜록콜록. 누가 식도를 잡아 뜯는 것과 같은 거센 고통에 목을 부여잡고 마른기침을 몇 번 내뱉던 그녀는 침대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위치한 화장대로 다가갔다.
비치된 반신 거울에 꾀죄죄한 자신의 몰골이 비쳤다.
목을 붙잡고 있는 손가락 사이로 시뻘겋다 못해 거무죽죽해진 피부가 보였다.
“헐?!”
제가 잘못 본 것이 아닌가 싶어 이예주가 거울 앞으로 득달같이 달려갔다.
“세상에, 미친! 이게 뭐야?”
거울을 통해 보니, 목 주위의 피부색이 완전히 꺼멓게 죽어 있었다.
이런 목을 하고서 그렇게 바락바락 소리를 지른 방금 전의 자신이 대단할 지경이었다.
“아, 아파! 아! 씨이…….”
목덜미를 따라 이리저리 짚어 보던 이예주는 살짝만 건드려도 찌르르 통증을 호소하는 환부에 화들짝 놀라 손을 떼고 울상을 지었다.
납치당하기 직전에, 용병대장인지 뭔지 그 미친 자식에게 목이 졸렸을 때 얻은 상처일 터였다.
뻘겋고 퍼렇고 거무튀튀한 멍들을 따라 누군가가 그악스럽게 쥐었던 손자국이 선명하게 나 있었다.
몰랐을 때는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막상 흉측하게 다쳐 버린 목을 보니까 눈물이 핑 돌 정도로 아팠다.
아니, 눈물이 쏟아질 만큼 아프다는 것이 더 정확했다.
어떻게 이렇게 시퍼렇게 피멍이 든 것도 모르고 그렇게 발악을 칠 수가 있었을까.
“아, 아.”
작게 소리를 내어 보던 그녀는 얼마 안 가 식도가 타오르듯 따끔거리고 비릿한 피 내음까지 올라오자, 말하는 것을 관뒀다.
그리고 터벅터벅 문 쪽으로 걸어가 벽에 기대듯 쭈그려 앉았다.
어떡하지?
양팔로 무릎을 끌어 모아 최대한 몸을 쭈그린 그녀가 속삭이듯 중얼거렸다.
조롱이를 데리고 금방 빠져나갈 수 있다고 호기롭게 생각했는데.
그런데 막상 이렇게 크게 다친 목을 보자 더럭 몸이 떨렸다.
족장이 문제가 아니었다.
조롱이를 넘기기 싫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죽기 직전까지 목을 조른 남자가 족장의 수하로 있는 것이 문제였다.
자신이야 묶여 있지만 않다면 죽기 전에 ‘문’을 통해서 어찌어찌 빠져나갈 수 있을 것이다.
‘문’을 넘으면 목숨은 유지할 수 있을 테니 어찌 되었건 저에겐 차선책이라도 있는 셈이다.
그렇지만 이 빌어먹을 저택 어딘가에 잡혀 있을 조롱이는?
자신이 가 버리면, 조롱이는 제 주인이 올 때까지 이곳에 있어야 하는 걸까?
‘주인’이란 단어에 문득 떠오르는 한 남자의 얼굴에 이예주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람…….”
그냥 말 잘 듣는 아이처럼 가만히 있을걸.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밖으로 나오긴 나와서.
……화 많이 났겠지?
이 와중에도 그가 얼마나 화가 나 있을지 가늠하는 제 자신이 한심했다.
하지만 납치는 진짜 당하고 싶어서 당한 것도 아니고, 제드 그 망할 새끼 때문인 건데.
그러나 그 남자는 그녀의 사정 따윈 듣지도 않을 것이다.
자신 때문에 조롱이가 납치당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칼 같은 살기를 쏘아 대며 자신을 죽이려 들 것이 뻔했다.
“흐…….”
이예주가 엄지손톱을 입에 물고 따각 따각 씹으며 난리를 칠 미친놈을 생각할 때쯤이었다.
터벅터벅, 터벅. 희미하게 들려오는 소리에 그녀는 손톱을 물어뜯는 짓을 멈추고 흠칫 고개를 들었다.
발자국 소리다.
이예주는 순간, 반사적으로 숨을 멈추고 조심스럽게 문에 귀를 가져다 대었다.
터벅터벅, 느리지만 일정한 발자국 소리가 점점 더 가까워졌다.
누군가 그녀가 있는 방 쪽으로 오고 있는 것이다.
이예주는 재빨리 문에서 귀를 떼고 바닥에 아무렇게나 어질러진 쇠사슬을 한쪽 손에 다시 감기 시작했다.
중간에 사슬이 서로 부딪쳐 짤그락 소리를 내는 바람에 몇 번이고 심장이 내려앉았다.
다행히도 문밖으로까지 그 소리가 새어 나가진 않은 듯했다.
발자국 소리는 점점 더 선명해졌다.
그녀는 주먹에 돌돌 말고 남은 사슬 끝자락을 안전히 손아귀에 쥘 수 있었다.
혹시 몰라 까치발로 최대한 빠르게 후다닥 뛰어가서 화장대 근처에 있는 가벼운 나무 스툴도 들쳐 안아 제 옆에 세워 두었다.
누군가 들어오면 무조건 사슬을 말아 쥔 강철 주먹을 날리고, 그 후엔 의자로 무작정 내려치는 것이 그녀가 방금 세운 답 없는 계획이었다.
이 정도면 기절하겠지?
바로 옆의 벽에 조용히 기대서며 이예주는 조금 인상을 찌푸렸다.
가벼워도 나무로 만들어진 의자니 맞으면 엄청나게 아플 것이 분명했다.
으으, 피는 보기 싫은데.
언제부터 이렇게 자신이 이렇게 무식하기 짝이 없는 방법을 남용하게 되었는지.
그 변화에 섬뜩함을 느끼면서도 그녀는 마음을 굳게 다잡았다.
여기 있는 놈들은 하나같이 제정신이 박히지 않은 미친놈들뿐이다.
그러니 너무 죄책감 가질 필요 없어. 네 목을 생각하라고, 멍청한 계집아.
검붉은 피멍이 잔뜩 들은 제 가냘픈 목을 떠올리며 이예주는 애써 분노에 불을 지지려고 노력했다.
그 와중에도 일정한 간격으로 들려오던 문 너머의 발자국 소리가 더욱더 가까워졌다.
이제 발자국 소리의 주인은 바로 문 너머에 위치해 있을 것이다.
점점 더 가까워지던 누군가의 발걸음 소리가 마침내 문 앞에서 탁 멈춰 섰다.
이내 절커덕, 철컹 하고 문 너머로 자물쇠를 푸는 소리가 들렸다.
제드, 그 망할 놈이 역시나 문을 잠가 둔 것이 맞았다.
이윽고 쇳덩이가 문에서 완전히 떨어져 나가는 듯한 소리와 함께 문고리가 쩔컥하고 돌아갔다.
끼이익―
오래되고 음산한 나무 문의 신음과 함께 문턱과 문 사이에 서서히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이예주는 아득 이를 악물었다. 사람 하나 거뜬히 드나들 수 있을 만큼 문이 열렸다.
그 틈새로―
“저, 저기…… 레, 레, 레이…….”
퍼억―!
일생을 살면서 사람을 후려치기 위해 젖 먹던 힘까지 다 끌어 올려 몸을 날린 적이 몇 번이나 있을까.
방 안으로 들어오는 잿빛 머리에게 있는 대로 강철 주먹을 휘두르며, 이예주는 단언컨대 이번이 머리털 나고 처음이라고 장담할 수 있었다.
“크허억!”
쇠사슬을 말아 쥔 단단하고 딱딱한 그녀의 주먹에 남자는 정면으로 얼굴을 후려 맞았다.
놈이 코를 부여잡으며 신음했다. 안면을 가린 손 사이로 핏방울이 후두둑 떨어졌다.
마음이 약해질세라 이예주는 재빨리 옆에 둔 스툴을 번쩍 쳐들었다.
“자, 자, 잠시만! 자, 잠시만요, 레이디!”
어쩐지 익숙한 찌질함이다 싶더라니, 방문을 따고 들어온 것은 제드였다.
방 안에 발을 들여놓기가 무섭게 안면을 강타당한 충격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했는지 녀석의 두 동공이 바들바들 떨렸다.
포식자 앞의 작은 하룻강아지처럼 발발 떨어 대는 제드를 바라보자 애써 불을 지핀 이예주의 분노가 순식간에 화르르 점화되었다.
이 망할 자식 때문에 내가 이렇게 목도 졸리고 팔자에도 없는 족장의 저택에까지 끌려와 개처럼 묶여 있는 것이다.
이 나쁜 자식. 이 은혜도 모르는 자식!
“오호라, 배신자 아니신가? 너 다시 잘 왔다! 이 자식, 죽어!”
이예주가 부드득 이를 갈며 들고 있던 스툴을 녀석을 향해 거세게 휘둘렸다. 의자 다리의 모서리가 닿기 전에, 제드는 간신히 몸을 구부려 아슬아슬하게 그녀의 공격에서 벗어났다.
휘잉!
코앞에서 휘둘러지는 나무 의자 때문에 그의 얼굴이 삽시간에 창백해졌다.
“헉! 레, 레이디! 자, 잠깐만요! 자, 잠시만, 제, 제 말을 좀 드, 들어 주시면……!”
“그냥 조용히 죽어!”
퍼억―!
하지만 첫 타는 운 좋게 피했을지라도, 미친 사람처럼 무자비하게 휘두르는 의자 앞에서 굼뜬 제드가 다음 공격까지 피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이예주가 휘두른 의자가 도망가기 위해 침대 쪽을 향했던 제드의 등허리를 정확히 내려치고는 뿌각, 부서졌다.
제드는 신음 소리도 못 내고 앞으로 철퍽 엎어졌다.
“후…….”
덜그럭, 쿵.
이예주의 손아귀에서 부서진 의자의 몸통이 바닥에 떨어졌다.
그녀는 송골송골 땀이 배어 나온 이마를 옷소매로 스윽 닦아 내고는, 쓰러져 미동도 않는 왜소한 몸뚱이를 발로 툭 건드렸다.
“야.”
엎어진 제드의 몸뚱이는 한 번 움찔하고 경련할 뿐, 여타 다른 반응을 보이질 않았다. 설마 죽은 건 아니겠지?
1000년 후까지 기어 와서 사람을 죽이고 다니면 과거로 돌아갔을 때 엄마 볼 낯이 안 서는데.
이예주는 혹시나 주먹과 의자에 좀 맞은 걸로 제드가 죽어 버렸을까 봐 덜컥 겁이 났다.
그녀는 엎어진 제드의 몸 주위를 샅샅이 훑어보며 바닥에 처박힌 그의 얼굴이 있는 곳까지 걸음을 옮겼다.
“머리에서 피는 안 나는데…….”
심각한 유혈 사태를 일으키지 않아 다행이라 생각하며 이예주는 소심하게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