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드 앤 매드 (124)화 (125/319)

“그, 그러니까, 그, 그 계집 주변에 거, 검은 파편이 이, 있었느냔 말이야!”

문고리를 잡으려던 제드의 손이 허공에서 우뚝 멈췄다. 

아버지의 노성에 이어 걸걸하고 우렁찬 목소리가 그 뒤를 이었다. 

용병대장이었다.

“그 계집 주변이요? 저는 오늘 족장님의 명을 듣고 그 계집도 처음 봤는걸요. 게다가 검은 파편이라니. 검은 파편은 시간족 놈들만 쫓을 뿐, 우리 동쪽 대륙 인간들에게는 관심도 없잖아요?”

“모, 모, 목소리 좀 줄이게! 누, 누가 들으면 어, 어쩌려고!”

“들어도 뭐 별 상관이나 있습디까? 족장님은 그저 그 황조롱이 놈의 배를 산 채로 갈라 심장을 꺼내 먹기만 하면 된다면서요. 그래서 저주를 풀기만 하면 되지 않습니까?”

쓸데없이 크고 무식하기 만한 용병대장의 말이 답답한지 아버지가 짧게 침음을 뱉었다.

“끄응……. 자, 자네는 잘 모, 모르겠지만 내, 내 아버지가 검은 파편과 어, 어떠한 계약을 맺은 것은 사, 사실이야. 계, 계약 조건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그런데요?”

“그, 그런데 그, 그 계집이 거, 검은 파편을 입 밖에 꺼냈단 말일세! 자, 자기를 풀어 주지 않으면 그, 그자가 나를 주, 주, 죽인다고……!”

“선대 족장님이 검은 파편의 계약자인 것과 그 계집을 우리가 납치한 것이 무슨 상관이란 말입니까? 그 계집이 검은 파편의 또 다른 계약자라도 되는갑쇼?”

“하, 하지만 거, 검은 파편이 도, 동쪽 대륙에 있고, 우, 우리가 신인류들한테 한 짓을 아, 알아채기라도 한다면 마, 말이 달라지는 일이야!”

“족장님. 제 말은, 그러니까 그놈이 동쪽 대륙에 왔다 해도 족장님에게는 아무 해코지도 못할 거라 이 소리예요. 선대 족장과 계약을 한 것이 바로 그 증거잖습니까? 검은 파편은 선대 족장과 계약을 해서 이 동쪽 대륙의 주인이 바로 선대 족장임을 인정한 것이에요. 시간족을 죽이고 신인류를 만들어 대기 바쁜 놈이 왜 아무 힘도 없는 인간과 계약을 했겠어요?”

“왜, 왜, 왜란 말인가?”

아버지가 떨리는 목소리로 용병대장에게 물었다. 

용병대장이 당연하다는 듯 우렁차게 대꾸했다.

“바로 족장님 가문의 위대함을 그놈이 알아본 것이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선대 족장의 하나뿐인 자식이니, 족장님도 검은 파편과 계약을 맺는 것이 당연합니다! 또 이 마을의 평화와 안전을 위해 족장님께서 앞으로 얼마나 할 일이 많으신데요. 몇몇 신인류에게 한 짓도 모두 마을 인간들을 위해서 그런 것이잖습니까? 저는 아직 글도 못 뗀 무식한 용병 출신이지만, 족장님이 족장이 되기 이전부터 마을을 위해 얼마나 노력하고 계신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 그런가?”

“알고말구요! 그러니 걱정 붙들어 매시라구요. 족장님은 이제 선대 족장에 이어 검은 파편 놈과 계약을 할 위대하고 고귀한 분이시니까요. 그리고 그 계집년이 헛소리를 한 것인지 아닌지, 알 게 뭐랍니까?”

“그, 그건 그렇지만…….”

기차 화통을 삶아 먹은 것처럼 커다란 용병대장의 말에 반쯤 넘어간 듯 아버지의 목소리에선 불안감이 사라지고 어느 정도 수긍이 그 자리를 대신해 메꿨다. 

그러나 완전히 마음을 내려놓은 것은 아닌지, 아버지는 여전히 미심쩍은 태도를 버리지 못했다.

“그, 그 계집의 말이 자, 자꾸만 신경 쓰여. 가, 감히 이 도, 동쪽 대륙의 위, 위대한 족장을 협박하다니…….”

“헤헤. 그럼 그 신인류와 같이 없애 버리면 되지 않겠습니까?”

“히익!”

히익! 아버지가 헛숨을 들이켜는 소리와 동시에 제드의 입에서도 날카로운 신음이 터져 나왔다. 

제드는 혹시나 집무실 안으로 제 소리가 새어 들어갔을까 봐 황급히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그의 잿빛 눈동자가 지진이 일듯 거칠게 떨렸다.

계집을 없애 버리다니? 

용병대장의 입과 아버지의 입에서 동시에 나올 만한 계집이라는 건, 위층 방에 고이 모셔 놓은 레이디뿐이었다. 

저 둘이 레이디를 없애려는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것이다.

아버지의 유난스러운 반응이 웃긴지 용병대장은 낄낄, 기분 나쁜 소리로 쪼개며 말을 이었다.

“제가 조금 생각을 해 보니 말입니다. 이런 일일수록 뒤탈이 없어야 해요, 족장님. 그 계집이 풀려난 후에 입이라도 잘못 놀리고 다니면 안 되니까요. 그렇다고 해서 그깟 이방인 계집 한 명 없앤다고 무슨 큰일이 생기겠습니까? 황조롱이를 씹어 먹고 족장님의 저주를 풀면서 그 계집도 같이 죽여 버리면 될 일이지요.”

“어, 어떻게? 그, 그 계집의 일행이 더, 더 있으면 어쩌려고.”

“배럴에 담아서 배 타고 좀 멀리까지 나가 던져 버리면 죽었는지 살았는지 아무도 모를 겁니다.”

용병대장의 말이 끝나자 집무실 안에는 한동안 침묵이 감돌았다. 

아버지가 과연 그 계획이 괜찮은지 고민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제드는 그 짧은 시간 동안 제발 아버지가 그런 잔인한 사람이 아니기를 빌고 또 빌었다. 

아버지는 분명 자신과 약속을 하였다. 레이디만은 털끝 하나 건들지 않기로.

이윽고 짧은 침묵이 끝났다. 아버지가, 아니 족장이 입을 열었다.

“자, 자네는 그럼 취, 취임식이 끝나면 그 계, 계집이 있는 방을 꼬, 꼼짝 않고 지, 지키고 있어야 하네. 누, 눈족 장로의 일이 끝나면 내, 내 바로 기별을 넣을 테니까. 그, 그 계집이 호, 혹여라도 도망갈 틈 하나 없이 자, 잘 감시하고 있어야 해!”

“아무렴 신인류도 아니고, 그깟 계집이 도망치게 놔둘까 봐요. 족장님은 걱정 마시고 저주나 잘 푸십쇼.”

“그, 그래. 오, 오늘 일만 잘 넘어가면 자, 자네와 자네 부하들이 모, 모두 쓰고도 남을 검은 안개를 주, 줄 테니…….”

그 뒤에 말은 잘 들리지 않았다. 

제드가 주춤주춤 문에서 뒷걸음질 쳤기 때문이다. 

문 사이로 새어 나온 빛에 노출된 그의 얼굴이 퍼렇게 얼어붙어 있었다.

무언가 잘못됐다. 무언가가 완전히. 제드는 두려움으로 달달달 떨리는 몸을 다 잡으려고 노력했다. 

그렇지만 쉬이 진정이 되지 않았다.

저로 인해 저택으로 오게 된 레이디를, 아버지와 용병대장이 없애 버리려고 한다. 

배럴 통에 담아서 아무도 모르게, 바다 깊숙한 곳에 던져 쥐도 새도 모르게…….

―사람이 내민 호의를 이런 식으로 짓밟으면, 아까 널 때리던 놈들과 네가 다를 게 뭐야?

서늘한 그녀의 목소리가 또 한 번 귓가를 맴돈다.

“아, 아, 아니야…….”

제드는 파리하게 질린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이런 것을 원한 것이 아니었다. 

절대로 그녀가 이런 식으로 자신 때문에 위협을 당할 것이라곤 예상치도 못했다.

멍청한 얼굴로 고개를 휘저으며 뒷걸음질 치던 제드가 불현듯 등을 돌렸다. 

레이디를 위해 뭐라도 해야 했다. 

그녀를 이대로 죽게 만들 수는 없었다.

하지만 무엇을? 

저택 내는 물론이고 마을에서 아무런 힘도, 쓸모도 없는 말더듬이 병신인 자신이 대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래도 그는 해야 했다. 

할아버지처럼 그녀를 허무하게 잃을 순 없어.

집무실에서 비틀비틀 떨어지는 그의 발걸음이 점점 명확해졌다. 

얼마 안 가, 아무도 없는 적막한 복도엔 타닥타닥 하고 누군가가 빠르게 뛰어가는 소리가 가득 찼다.

*       *       *

콱, 쾅, 콰직!

“아오, 악, 아오!”

이예주는 침대 끄트머리에 앉아 되지도 않을 짓에 열을 올렸다. 

그녀의 앞쪽에는 비싸 보이는 침대 헤드의 기둥이 이리 파이고 저리 파여 넝마가 되어 있었다. 

그 위를 그녀의 오른 손목에 매달려 있는 수갑이 다시 ‘쾅!’ 하고 내리찍었다.

캉, 캉, 콰득! 

수갑 모서리에 더욱더 깊이 파인 기둥에서 나뭇조각이 퍼석하고 튀어 이예주의 눈 아래를 근처를 스쳐 지나갔다. 

번쩍하는 쓰라림이 피부를 쓸고 지나가자 그녀는 수갑을 내려치는 것을 관두고 눈 옆을 문지르며 있는 대로 신경질을 내었다.

“아악! 진짜!”

빌어먹을, 빌어먹을! 

몇 번을 내리쳤지만 빌어먹을 수갑은 망가지기는커녕 흠집 하나 나지 않았다. 

여러 번 내리친 충격으로 손목만 징 울리며 뻐근하게 아파 왔다.

또한 침대 기둥 역시 부서지지 않았다. 

그녀는 정말 끔찍하다는 얼굴로 진저리를 쳤다.

“흑, 왜 이렇게 쓸데없이 내구성 좋은 걸로 채워 놓고 난리야!”

첩보 영화나 액션 영화를 보면 주인공들은 쉽게 사슬도 풀고 침대도 부시고, 잘만 탈출을 감행하던데. 자신은 주인공이 아니어서 이러는 걸까. 

수갑도 침대도 하나같이 단단하고 매우 좋은 제품들이었다. 

정말 영화에서 나오던 납치 장면들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건지 깨닫게 해 줄 만큼 말이다.

쩔컹쩔컹! 미련을 못 버리고 사슬을 두어 번 잡아당기던 이예주는 ‘억’ 소리가 나올 만큼 손목이 시큰해지자 그것도 관두었다.

“어떡하지.”

정말 어떡하지. 그녀는 불안에 안절부절못하고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중얼거렸다.

역겨운 서쪽 대륙에서 나온 이후로 옆에 누군가가 없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새 다른 이들과 같이 다니는 것에 익숙해진 것인가. 

조롱이가 없을 땐 람이, 람이 없을 땐 조롱이가 번갈아 가며 이예주의 곁에 찰싹 붙어 있었다. 

그래서인지 그들이 곁에 없다는 사실이 그녀를 극도로 불안하게 만들었다.

기실, 그녀는 제드의 배신으로 인해 정신 조금 나간 상태였다. 

아무리 1000년 후가 미쳐 돌아가는 세상일지라도, 아까까지 아무렇지도 않게 멀쩡히 대화하던 인간이 단 몇 시간 사이에 이렇게 돌변해서 사람 뒤통수를 후려칠 줄은 전혀 예상치 못했기 때문이다.

“흐으, 어떡해…….”

답 없는 제 상황에 개탄하며 이예주가 다시 한 번 쩔컹쩔컹 묶인 사슬을 잡아당길 때쯤이었다.

침대 기둥에 둘둘 말려 있던 사슬이 그녀가 잡아당김과 동시에 움찔움찔 움직였다. 

그와 함께 사슬에 달린 자물쇠도 달그락달그락하며 움직이는 것이 눈에 포착되었다. 

그녀의 사슬을 침대 기둥에 묶어 두기 위해 달아 둔 자물쇠였다.

순간, 머릿속에 번뜩 무언가가 스치고 지나갔다.

“맞아! 내 열쇠!”

람이 압수했다가 조롱이가 다시 돌려준 제 집 열쇠. 

눈 깜짝할 새에 보쌈당해서 방구석에 처박힌 탓에 까맣게 잊고 있었다.

이예주는 서둘러 묶여 있지 않은 반대편 손으로 제가 입고 있는 포대의 안주머니를 뒤졌다. 

딱딱하고 차가운 금속이 손끝에 닿았다. 망설임 없이 그것을 꺼내 들었다.

예전에 숲에서 거대 돌 뱀과 마주쳐 하나뿐인 휴대폰을 빼앗겼을 적, 울던 자신에게 휴대폰 대신 남자가 쥐어 주었던 돌조각처럼 시커먼 원룸 열쇠가 등불 빛에 반사되어 영롱하게 빛이 났다. 

그녀는 떨리는 손을 가다듬고 열쇠를 고쳐 쥔 후 자물쇠에 가져다 대었다.

“열쇠 구멍 모양이 완전히 다른데…….”

눈을 비비고 다시 보아도 정말 그랬다. 

제 열쇠와 자물쇠의 열쇠 구멍의 모양은 그 크기부터가 달랐다. 

열쇠를 하나 더 꽂아도 남을 만큼 자물쇠의 열쇠 구멍이 훨씬 더 컸다.

설마 하다가도 내심 미심쩍은 마음이 들었다. 연금술사도 아니고, 멀쩡한 열쇠를 만능열쇠로 만드는 게 가능할까?  

조롱이와 그것의 주인 놈 둘이서 자신을 농락하기 위해 작당 모의를 한 것은 아니겠지.

“설마 거짓말은 아니겠지.”

의심스러운 마음에 이예주가 잠시 진정을 못하고 꿍얼거리다가 이내 “에잇, 모르겠다.” 하고 자물쇠의 열쇠 구멍에 제 원룸 열쇠를 욱여넣었다. 

자물쇠가 훨씬 커서 열쇠는 뭐 하나 걸리는 것 없이 수월하게 구멍 속으로 쑤욱 빨려 들어갔다.

그리고 신기한 일이 일어났다. 

열쇠를 채 돌리기도 전에 철컥하고 맞물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자물쇠의 이음새가 허무하게 풀어졌다.

이예주는 얼빠진 얼굴로 잠시 자물쇠의 구멍 속에 들어가 있는 열쇠와 풀어진 이음새를 번갈아 바라보다가 짧게 중얼거렸다.

“……대박.”

정말 연금술사야 뭐야? 무슨 이런 만능열쇠가 다 있어?

열쇠를 자물쇠에서 뽑아 다시 안주머니에 고이 넣고, 나무 기둥에 꽁꽁 휘감긴 사슬을 풀면서도 그녀는 당혹스러움을 감출 수 없었다. 

너무 허무하게 묶인 상태에서 벗어나서 실감도 잘 나지 않았다.

얼마 안 가 억세게 감겨 있던 사슬조차 모조리 풀어졌다. 

침대에서 벗어나자 그녀는 급한 걸음으로 방문으로 다가섰다. 어쨌거나 어서 속히 조롱이를 데리고 이 저택에서 벗어나야 했다. 

족장은 조롱이를 산 채로 씹어 먹어야 자신의 저주를 풀 수 있다고 지껄여 댔었다. 

어떻게 된 것이, 이 세상은 제대로 된 인간들이 하나도 없는 걸까.

그래도 인간들이 사는 마을에 가면 뭔가 말이 통하는 사람을 만날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있었다. 

그러나 이제 완전히 죽어 버렸다. 

이곳의 사람들은 천 년 전의 이들보다 이기적이고 괴팍하고 무지했다.

대대로 말을 더듬는 것이 유전이라고는 생각 안 하나? 무슨 저주를 내릴 게 없어서 말을 더듬는 저주 따위를 내린다는 생각을 다 한담. 

어처구니없는 족장의 말에 고개를 설레설레 휘젓던 그녀는 고급스러운 문양이 새겨진 방문 앞에 다다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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