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드 앤 매드 (123)화 (124/319)

“그, 그……! 그, 그건…… 아, 아니야! 그, 그럴 리 없어! 아, 아버지가 죽었더라도 그, 그가 알 리 없어! 알 리 없어!”

“누, 누군데 그래요, 아버지?”

갑작스레 경기를 일으키듯 벌벌 떨어 대는 제 아버지가 꽤 당황스러운지, 제드가 족장을 부축하기 위해 허겁지겁 달려오며 물었다.

족장은 계속해서 알 리 없다고 중얼거리며 고개를 미친 듯이 휘저어 댔다. 

제드가 그만하라고 힘겹게 붙잡아도 소용없었다.

“왜 말을 못한대. 검은 파편 말이에요, 검은 파편! 람 몰라요?”

이예주가 왜 그것도 모르냐고 핀잔을 주자 족장의 얼굴이 한순간에 시퍼렇게 질렸다.

“아, 아, 아니야! 아니야! 그, 그럴 리, 그럴 리 없어. 그럴 리…….”

“미안한데, 아저씨랑 손 못 잡아요. 저는 그 미친놈한테 죽기 싫거든요? 그러니까 당장 나랑 조롱이 풀어 주는 게 좋을 거야. 당장 이거 풀어! 풀라고!”

혼이 나간 사람처럼 멍하니 중얼거리는 족장에게 이예주는 이때가 기회다 싶어 팔을 격하게 흔들어 대며 요구했다. 

쩔컹쩔컹! 사슬이 시끄럽게 쇳소리를 내며 울었다.

“당장 풀라고!”

“히이익!”

족장이 괴상한 비명을 지르며 그녀에게서 주춤주춤 물러섰다. 

그는 이내 지난날의 제드처럼 뒤를 보이며 방문을 향해 달려갔다. 

이예주는 허옇게 들뜬 얼굴로 꽁지가 빠지게 도망가는 족장의 뒤통수에 대고 분노를 쏟아 냈다.

“아저씨, 이거 풀고 가라고요! 갑자기 왜 도망을 가고 그래요! 아저씨!”

쾅! 

기어이 방문을 열고 뛰쳐나간 족장은 문이 부서져라 세게 닫은 후 방에서 사라졌다.

족장이 사라진 호화로운 방 안은 일순 정적에 휩싸였다.

이예주는 인상을 찌푸린 채 생각에 빠졌다. 

검은 안개인지 뭔지를 가지고 신인류를 없애기 위해 무언가 공작을 꾸미는 마을 족장이, 막상 검은 파편 이야기를 하자 두려움에 벌벌 떨면서 도망을 갔다.

자신이 몰래 하고 있는 짓거리가 절대로 검은 파편의 귀에 들어갈 리 없다고 자신하고 있었던가. 

역시 무슨 꿍꿍이가 있어. 족장의 입에서 나온 눈족 이야기도 그렇고…….

하지만 그녀는 동쪽 대륙의 마을 족장이 어떠한 사악한 비밀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별로 알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것을 알아낸다고 자신이 무언가를 바꿀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지금은 제 코가 석 자인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우연찮게 그것을 알아서 조롱이와 함께 무사히 조롱이의 주인에게 도망간다면 이야기를 전해 줄 용의는 있었다. 

그러나 그것뿐이다.

괜한 일을 파고들어 깊게 연관될 필요는 없어. 

그럼, 그럼. 이예주, 네 목숨은 아홉 개가 아니라 한 개뿐이야. 그 요망한 붉은 개의 탈을 쓴 불여시처럼 꼬리가 아홉 개나 달려 있지 않단 말이야.

애써 자신과는 무관한 일이라고 그녀가 자위할 때였다. 

깊은 상념에 잠겨 있느라 아직까지 방 안에 존재하는지도 잘 몰랐던 인기척이 그녀의 곁으로 쭈뼛쭈뼛 다가와 말을 걸었다.

“레, 레이디. 무, 묶여서 조금 부, 불편하시겠지만 그, 그래도 레이디를 위해서, 소, 손님방 중에선 가, 가장 좋은 방으로 선택했어요.”

제드였다. 

제 아비가 자신에게 그런 취급을 받고 콧수염 휘날리게 도망을 쳤는데도 아직까지 방 안에 남은 그가 경이로울 지경이었다.

참으로 태평한 소리를 잘도 지껄여 대는 제드를 사납게 째리자, 그가 ‘흐허억!’ 하고 숨을 삼키며 침대에서 조금 물러났다.

“너도 사슬 풀어 줄 생각, 없는 거지?”

이예주가 침대 기둥에 둘둘 말려 묶인 사슬을 잡아당기며 물었다. 

제드가 그녀의 눈치를 흘끔흘끔 보며 답했다.

“아, 아버지가…… 아, 아니 조, 족장님이 오, 오늘이 지나면 사, 사슬은 풀어 주신다고 야, 약속해 주셨어요. 그, 그런데 수갑은 뭐, 뭐로 만들어졌는지 토, 통 몰라서 아, 안타깝게도 수, 수갑을 풀어 드릴 수는 없…….”

“지금 당장 풀어 주는 거 아니면 헛소리 집어치우고 꺼져.”

이예주의 사나운 일갈에 또다시 기함한 제드가 이내 힘없이 어깨를 내렸다. 

그리고 그녀에게 풀 죽은 목소리로 속삭이고는 뒤돌아섰다.

“……미, 미, 미안해요, 레이디. 그, 그렇지만 레이디를 위, 위험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어, 어쩔 수 없었어요……. 그, 그 괴물은 저저, 저주를 내리는 위, 위험한 괴물이니까.”

이예주는 말더듬이 놈을 향해 그놈의 빌어먹을 저주 소리, 그만 좀 지껄여 대라고 있는 대로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하지만 목구멍까지 차오른 욕지거리를 참은 것은 연신 미안하다고 중얼거리는 제드의 소심한 목소리 때문이다.

그렇게 미안해할 거면 사과할 짓은 왜 저지른 거지?

만난 지는 얼마 안 되었지만 그의 첫인상은 나쁘지 않았다. 

떠듬떠듬 말을 버벅거리는 모습, 어딘가 우울한 낯빛을 하고 있으면서도 자신이 조금 내밀었던 호의에 반색을 하고 달려드는 것이 안쓰럽기도 했다.

자신에게 꽃을 주며 수줍게 웃던 제드가 거짓으로 그랬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모두 정신이 나가 버린 것 같은 이 천 년 후의 세상에서 유일하게 동질감을 느낄 수 있었던 사람이었다.

“그, 그럼 저는 그, 그만 가 볼게요. 조, 조금 이따가 저, 저, 저녁을 가지고 다, 다시 올게요. 미, 미안해요, 레이디.”

하지만 인간은 누구나 가면을 뒤집어쓸 수 있고, 얄팍하고 비열하다. 

기껏 이야기를 들어 주고 나쁜 놈들에게서부터 더 이상 맞지 않게 도움을 주었더니 이제는 자신의 뒤를 쫓고 조롱이를 내놓으라고 한다.

방문 쪽으로 걸음을 옮기면서도 자꾸만 뒤를 돌아보며 주절대는 그를 차갑게 얼어붙은 눈으로 응시하던 이예주는 조용한 목소리로 나직이 말했다.

“인생 그렇게 살지 마.”

제드가 막 방문을 열다가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문고리를 돌리던 손을 멈췄다. 

그가 뒤를 돌아보았다. 

자신을 말더듬이 병신이라고 놀리지도 않고 더듬거리는 자신의 말을 끝까지 귀 기울여 들어 준, 또 자신을 위험에서 구해 준 뒤 걱정스럽게 내려다보던 천사 같은 레이디는 침대 위에 없었다. 

적대감이 가득 담긴 눈으로 자신을 경계하는 이방인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분명 조롱이는 저주를 내리지도 않았고, 괴물이 아니라고도 말했잖아.”

“…….”

“사람이 내민 호의를 이런 식으로 짓밟으면, 아까 널 때리던 놈들과 네가 다를 게 뭐야?”

레이디의 말에 제드는 흠칫 몸을 굳혔다. 

그게 아니라고, 저주를 풀기 위해서, 그리고 레이디를 위해서 어쩔 수 없었다는 변명이 입에서 맴돌았다. 

그런데 이상하게 입이 굳은 것처럼 열리지 않았다.

그녀의 말이 맞았다. 

레이디는 조롱이가 괴물이 아니고 자신의 의지로 남은 거라고 몇 번이나 말했지만, 제드는 믿지 않았다.

그 결과 선뜻 호의를 내밀었던 천사 같은 레이디는 완전히 사라졌다. 

이제 남은 것은 레이디에게 미움을 받는 자신뿐이었다.

제드는 덜컥 겁이 났다. 

그녀에게까지 쓸모없는 말더듬이 자식이란 소리를 듣는다면 정말 너무, 너무 슬퍼질 것 같았다.

“미, 미, 미안해요. 미, 미안해요……!”

제드는 그 한마디를 이예주에게 던지듯 내뱉고는 서둘러 방문을 열고 제 아비처럼 허겁지겁 방에서 도망쳤다.

어쩔 수 없었다. 

도망치는 것, 그것이 제드가 지금껏 살면서 배운 유일한 해결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       *       *

족장의 저택은 매우 분주했다. 

오늘 있을 차기 족장의 정식 취임식 때문이다.

선대 족장이 살아 있을 땐 이렇게 저택이 활발하고 바쁘게 돌아가는 일이 없었다. 

당연했다. 할아버지는 고용인은 물론이고 가족들이 집 안을 나다닐 때 소리를 내는 것조차 극도로 싫어했다.

물론 그의 조부가 벙어리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극비라고 해 보았자 그것은 아무것도 모르는 평범한 마을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소리였다. 

저택을 제 집처럼 드나들던 마을 지주들과 그 밖의 일을 보는 사람들은 조부가 말더듬이도 못 되는 벙어리라는 것을 모두 알고 있었다.

말은 할 수 없어도 살아 있을 적의 조부는 하나뿐인 말더듬이 손자를 매우 아끼고 사랑했다. 

저택에서 오로지 제드만이 할아버지의 집무실에 드나들 정도로 제드와 선대 족장의 사이는 돈독했다.

혀가 없는 할아버지는 버벅대는 제드의 말을 들어 주는 유일한 이였다. 

하지만 돌아오는 답은 없었기에, 매번 제드 혼자 재잘대다 지쳐 나가떨어졌다.

해가 바뀌고, 나이를 먹고, 마을 사람들에게 말더듬이 병신이라는 욕설을 듣기 시작하면서, 제드는 할아버지를 찾아가는 횟수를 점점 줄였다.

그렇다고 해서 할아버지가 존경스럽지 않은 것은 절대로 아니었다. 

말 못하는 할아버지가 음침하고 어두컴컴한 방에 몇십 년간 처박혀 있는 이유가, 마을 사람들의 말마따나 족장으로서의 책임을 다하기 위해서라고 굳게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믿음도 레이디와 괴물을 찾으라고 명령한 아버지로 인해 산산조각 났다. 

할아버지는 신인류에게 저주를 받았기 때문에 혀가 뽑혔다. 

그리고 그 저주로 인해 말을 더듬는 아버지가, 그 아버지에게서 말을 더듬는 자신이 태어났다. 

대를 잇는 저주. 

아버지는 저주를 풀 방법이 그 신인류를 산 채로 으득으득 씹어 먹는 방법밖엔 없다고 했다. 

지긋지긋한 저주에서 벗어날 수 있다니 설렜지만, 그 설렘은 오래가지 않았다.

대물림하는 저주를 내릴 정도라면 할아버지의 혀를 뽑은 그 신인류 괴물은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을 텐데. 

그러면 그 괴물에게 잡혀 있는 천사 같은 레이디가 너무나도 위험하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레이디는 마을 안에서 할아버지에 이어 두 번째로 자신의 말을 들어 준 고마운 사람이었다. 

아니, 그녀는 할아버지보다도 더욱더 고마운 사람이다. 

그가 무슨 말을 지껄이건 간에 한마디의 답조차 하지 않던 조부와는 달리, 레이디는 유일하게 정상적으로 자신을 말을 들어 주고 대답도 해 준 사람이었으니까.

제드는 정말로 레이디가 안전해지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런 자신의 생각이 레이디에겐 되레 배신과 증오를 전달할 줄은 정말로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인생 그렇게 살지 마.

레이디가 머무는 방을 나오고 나서도 서릿발처럼 차갑기 그지없던 그녀의 목소리가 귀에서 자꾸만 맴돌았다. 

그녀는 고요하고 차분하게 말을 건넸지만 자신을 노려보던 그 눈만은 분노로 이글이글 불타고 있었다.

―분명 조롱이는 저주를 내리지도 않았고, 괴물이 아니라고도 말했잖아.

언제까지나 친절하게 웃어 줄 줄로만 알았던 레이디의 서늘한 냉대에, 자신은 어떻게 했더라. 

마을 사람들이 자신을 놀릴 때마다 들어 왔던 말더듬이 병신처럼 정말로 벌벌 떨며 제대로 된 사과조차 건네지 못한 채 줄행랑을 쳤다.

레이디의 굳은 얼굴과 차가운 목소리가 귓가에서 떠나지 않는다. 

혹시…… 혹시 정말로 레이디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녀와 함께 다니는 신인류가 정말로 저주를 내린 괴물이 아닌데 자신 때문에 위험에 처하게 된 거라면.

“히, 히이익!”

그 생각에 미치자 제드는 기괴한 소리를 내지르며 제 입을 틀어막았다. 

그, 그럴 리가. 그런 생각은 하기 싫다. 정말로 하기 싫어. 자신 때문에 레이디가 곤경에 처했다는 생각은…….

제드는 이까지 딱딱 부딪치며 레이디가 묵고 있는 방 근처 복도를 정신없이 배회했다.

아버지는 그에게 약속했다. 

취임식이 성황리에 끝날 때까지 만약을 위하여 잠시 잡아 두는 것일 뿐, 절대로 그녀를 해치거나 위협을 가하는 것이 아니라고. 

게다가 그녀가 원래 머물고 있던 숙소가 마을 내의 신인류가 운영하는 주점이라는 것을 들먹이며, 신인류들이 득실득실 모여 있는 건물보단 차라리 마을 안에서 가장 안전한 족장의 저택에 그녀를 머물게 하는 것이 더 나은 일이라고 하였다.

하지만 막상 어렵게 모셔 온 레이디는 누구보다 격렬하게 화를 냈다. 

“어, 어떡하지. 어, 어, 어떡하지…….”

제드는 갈팡질팡하며 손톱 끝만 자근자근 깨물었다. 

그는 자신에게 확신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틀리지 않았다는 확신이.

복도 근처에서 정신없이 왔다 갔다 하던 제드는 퍼뜩 레이디의 말에 사색이 되어 앞서 방을 뛰쳐나간 아버지가 떠올랐다. 

그는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계단 쪽을 향해 발걸음을 돌렸다.

아버지에게 다시 한 번 물어보아야겠다. 

그래서 레이디가 안전하다는 것에, 자신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에 확신을 받아야 했다.

허겁지겁 1층으로 내려간 제드는 분주히 오가는 고용인들을 피해 저택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다. 

차기 족장의 자리에 오른다고 하더니, 아버지는 할아버지의 장례가 채 끝나기도 전에 선대 족장의 집무실을 제 방처럼 이용하곤 했다. 

마을의 수장으로서 권위를 내세우기 위함이었지만, 족장의 집무실은 저택의 가장 깊숙하고 음침한 곳에 박혀 있어서 권위를 내세우기엔 우스운 감이 없지 않아 있었다.

그나마 조금 변한 점은, 선대 족장이었던 할아버지가 살아 계실 적에는 그 누구도 얼씬하지 않았던 집무실이 돌아가신 지 채 하루도 안 되어 완전히 개방되었다는 점이랄까.

그러나 모두 새로운 족장의 취임식 때문에 바쁜 것인지, 집무실로 향하는 복도는 어둡고 적막에 가득 차 있었다.

복도의 맨 끝에 위치해 있는 아버지의 집무실 문이 살짝 열려 있었고, 그곳에서 빛이 새어 나왔다. 

제드가 천천히 그곳을 향해 걸어갈 즈음, 문틈으로 커다란 노성이 쏟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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