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드?”
“예, 예?”
“왜 당신이 여기에…… 그리고 여긴 어디…….”
불현듯 머리가 깨질듯이 아파 와 이예주는 눈살을 있는 대로 찌푸렸다.
아, 왜 이렇게 두통이. 그것보다 정말로 제드가 왜 여기에 있는 거지. 람은? 나비 아저씨는? 그리고 조롱이는?
웅웅 고통스럽게 울리는 와중에도 열심히 돌아가던 머리가 ‘조롱이’라는 단어에서 버퍼링에 걸린 것처럼 턱 멈췄다.
그래, 조롱이와 길을 잃고 헤매다 간신히 그레이의 주점 근처에 도착 했을 때 수상쩍은 인물이 길을 막아섰다.
그놈은 알고 보니 제드였다.
놈이 조롱이한테 주사를 놨다.
그리고 이상한 복면을 쓴 남자들이 나타나서 조롱이를…….
“이 개새끼! 이, 이 나쁜 새끼! 조롱이! 조롱이 어디 있어?!”
이예주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제 앞에 서 있던 제드의 멱살을 휘어잡았다.
아니, 휘어잡으려고 들었다.
그러나 ‘쩔컹!’ 하는 시끄러운 소리와 함께 그녀의 팔은 제드의 코앞에서 더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이예주는 다시 한 번 녀석을 향해 거세게 팔을 뻗었다.
하지만 손목만 아려 올 뿐, 팔은 일정 거리 이상 뻗을 수 없었다.
그제야 이상함을 느낀 그녀는 제 오른손을 내려다보았다.
손목에는 여전히 람이 벌이랍시고 채워 놓은 수갑이 자리하고 있었다.
수갑에 연결되어 있는 검은색의 사슬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조롱이가 풀어 준 이후로는 계속해서 느슨하던 사슬이 지금은 팽팽하게 당겨진 채 그녀의 움직임을 제한했다.
이예주는 쫙 펴진 사슬을 따라 쭉 시선을 움직였다.
사슬 끝이 침대 기둥에 칭칭 감겨 자물쇠로 채워져 있었다.
그렇게 답답해하고 싫어하고 혐오해 마다하지 않는 상황에 또다시 처해진 것이다.
멍하니 그것을 바라보던 그녀의 얼굴이 와작 일그러졌다.
제드를 향해 휙 돌아간 두 눈에선 살기가 풀풀 풍겨 나오기 시작했다.
“이게 뭐야? 이거 풀어, 이 자식아! 이게 무슨 짓이야? 이게 무슨 짓이냐고!”
“저, 저기 레, 레이디. 그, 그게…….”
“이 나쁜 자식아! 은혜를 원수로 갚아도 유분수지! 기껏 저보다 어린애들한테 처맞는 거 구해 줬더니! 이거 당장 풀어! 풀라고!”
“그, 그만! 지, 진정하게!”
그때, 제드가 서 있는 곳과 완전히 반대편에서 또 다른 목소리가 비죽 끼어들었다.
이예주가 살벌한 기세로 홱 고개를 돌렸다.
작고 뚱뚱한 중년의 남자가 삐질삐질 흐르는 땀을 손수건으로 닦으며 서 있었다.
“당신은 또 뭐야? 당신도 얘랑 한패야?”
날 선 물음에 잠시 주춤하던 작고 뚱뚱한 남자가 이내 그녀에게 땀을 닦던 손이 아닌 반대편 손을 내밀며 지껄였다.
“나, 나는 도, 동쪽 대륙 마을의 조, 족장이다.”
이예주는 남자가 내민 손을 빤히 내려다보았다.
악수라도 하자는 것인가?
그러나 별로 악수하고 싶은 마음도, 태평하게 악수나 하며 인사를 나눌 사이도 아니었기 때문에 그녀는 그 손을 가만히 내려다보기만 했다.
민망했는지 남자가 재빨리 손을 거뒀다.
그녀는 남자의 손을 예의 주시하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족장? 족장은 어제 분명 죽었다고 했는데…….”
“그, 그분은 서, 선대 족장이고! 나, 나는 서, 선대 족장의 유, 유일한 아들로서 차, 차기 족장이 될 몸이다. 내, 내가 조, 족장이 되면, 제, 제드는 내 후, 후계자가 되는 것이지.”
“후계자? 허!”
이예주가 제드를 다시 휙 돌아보며 기가 차다는 듯이 허탈한 웃음을 내뱉었다.
그러니까 자신과 조롱이를 납치한 이 말더듬이 찌질이 자식이 신인류와 전쟁을 벌이고 신인류의 터전을 빼앗은 족장 놈들과 관련이……
아니, 후계자?
후계자면 혈연이란 소리잖아?
제드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이 어이없음에서 분노로, 이어서 배신감으로 변해 갔다.
소심하게 말을 더듬고 저보다 어린애들한테 맞고 다니는 게 안쓰러워 가엾이 여겼더니, 이런 어마어마한 사실을 숨기고 있었던 것이다.
어쩌면 자신에게 뤼미에르를 준 것도 이런 식으로 뒤통수를 후려치기 위한 고의적인 접근일지도 몰랐다.
한참 동안 생각을 거듭하며 분노로 파르르 떨리는 몸을 가다듬던 이예주는 족장을 쏘아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래서?”
“뭐, 뭐?”
“아저씨가 족장이고 얘가 후계자라서 그래서 뭐 어떡하라고요. 나랑 조롱이는 왜 납치한 건데요?”
“그, 그게…….”
제드가 땀을 뻘뻘 흘려 대는 제 아비를 대신해서 대답하려는지 우물쭈물했다.
그러나 곧바로 대답을 막아서는 이예주 때문에 아무런 변명조차 할 수 없었다.
“아, 얘기하지 마요. 쥐똥만큼도 안 궁금하니까. 나는 당신들이 무슨 짓거리를 하던 조금도, 아주 조금도 관심 없어요. 그러니까 이거나 풀어 줘요. 조롱이도요.”
“그, 그건…… 그, 그건 안 된다.”
족장이 거부했다.
이예주는 씩씩거리며 더 큰 소리로 응수했다.
“왜? 아, 진짜 관심 없다구요! 내가 걔네 패서 그래요? 그 마을 지주들의 자식들인지 하는 놈들! 나랑 조롱이가 걔네 패서 그러냐고요! 그건 아저씨 아들이 맞고 있길래 불쌍해서 좀 도와준 건데 대체 왜……!”
“너, 너는 시, 신인류가 아닌 거냐?”
“……하, 무슨 또 신인류 소리야! 내가 왜 신인류예요!”
답답함에 이예주가 꽥 하고 소리를 지르자, 족장이 고개를 끄덕거리며 혼잣말했다.
“하, 하긴. 시, 신인류라면 야, 약을 맞고 이렇게 머, 멀쩡할 리가…….”
“참, 그 주사 뭐예요? 나랑 조롱이한테 무슨 짓을 한 거예요?”
“너, 너는 왜 우, 우리와 같은 고, 고귀한 인간이면서 시, 신인류 같은 더러운 것들과 하, 함께 어울리는 거지?”
족장은 계속해서 그녀를 무시한 채 자기가 하고픈 질문만 해 댔다.
아무래도 큰소리를 내거나 대거리를 한다면 이길 자신이 없어서 저런 식으로 질문만 하는 것 같다고 이예주는 생각했다.
듣기 거북할 만큼 더듬거리는 말소리에 안 그래도 아픈 머리가 더 쪼개지는 것 같았다.
그녀는 질문에 답하지 않고 반문했다.
“아저씨도 내 질문에 대답하지 않는데, 왜 내가 아저씨 물음에 대답해야 하는 건데요?”
“호, 혹시 그 괴물 말고 또, 또 다른 신인류를 아느냐?”
여전히 제 말만 지껄여 대는 족장을 빤히 바라보며 이예주는 이번엔 순순히 대답했다.
“몰라요.”
“……너, 넌 시, 신인류가 아니라고 하니, 개, 개인적인 사감은 없다. 조, 조금 부, 불편한 방식으로 나, 납치한 것에 대해서는 내, 내 사과하지.”
그녀가 순순히 답하자 족장은 마음이 풀린 듯 짐짓 관대한 체하며 사과의 말을 건넸다.
이예주는 진심으로 어이가 없었다.
족장이 하는 행동이 모두 하나의 연극을 보는 것 같았다. 그의 행동거지 하나하나가 과장되어 있었다.
땀을 닦는 불쾌한 행동도 짐짓 고상한 여인네가 차를 마신 후 입을 닦는 것처럼 우아해 보이기 위해 기를 쓰는 것 같았다.
심지어 그녀에게 말을 하는 와중에도 한 손으로는 자꾸만 멋져 보이는 몸짓을 해 보이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광대가 귀족 나리를 풍자하는 것처럼 우스꽝스럽기 그지없는 몸짓이었다.
“내, 내가 저, 저주만 풀린다면 마, 마을 지주들도 나, 나한테 함부로 하지 모, 못할 것이야. 그, 그러면 나는 더, 더 강한 부를 갖게 될 것이고 내, 내게 협조하면 너, 너한테도 그 중에서 일부를 기, 기꺼이 나눠 주지.”
“풀어야 하는 저주가 뭔데요? 아저씨랑 제드가 말을 더듬는 거요?”
“그, 그, 그렇다. 사, 삼대째 내려오는 우, 우리 집안의 저주이지.”
저주에만 관심을 보일 뿐, 협조에는 영 말을 아끼는 이예주 때문에 초조한지 족장이 황급히 덧붙였다.
“도, 돈뿐만이 아니라, 거, 검은 안개도 나눠 줄 것이다. 누, 눈족들의 검은 안개 말이야. 거, 검은 안개가 무엇인지 너, 너도 잘 알고 있겠지?”
이예주는 사실 검은 안개가 대체 무엇인지 아직 잘 몰랐다.
그러나 모른다고 대답하는 대신 족장에게 질문을 하며 그를 유도했다.
“……어떻게 협조해야 되는데요?”
“네, 네가 알고 있는 시, 신인류에 대한 정보를 내, 내게 알려 주면 된다. 호, 혹은 아, 알고 있는 신인류를 데, 데리고 온다면 더, 더 좋겠지. 어, 어쨌거나, 네가 데리고 다니던 괴, 괴물을 잡은 탓에 저, 저주가 곧 풀릴 테니, 나, 나와 같이 제, 제3차 전쟁을 이, 일으키는 데 앞서는 것이…….”
“잠깐, 잠깐. 제3차 전쟁이요? 누구랑 누구랑요?”
“그, 그야 당연히 시, 신인류를 모두 바, 박멸하는 전쟁이지.”
이예주는 말을 멈췄다.
하지만 한번 말문이 터진 족장은 홍수처럼 그녀가 듣고 싶지 않은 정보까지 좔좔 내뱉기 시작했다.
“시, 신인류 같은 더러운 것들은 도, 동쪽 대륙에서 모, 모두 깡그리 어, 없애 버려야 돼. 저, 저주 같은 비, 빌어먹을 것을 나, 남기지 못하도록 말이다. 그, 그것들은 우리 인간들에게 하, 하나같이 해, 해악한 것들이야. 매, 매년 번식은 왜, 왜 그렇게 많이 하는 건지, 아, 아무리 아이들을 훔쳐서 누, 눈족 장로에게 바, 바치고 바쳐도 끝이 없어! 지, 징글, 징글한 것들. 모, 모조리 죽여야 해. 하, 하나도 남기지 않고 바, 박멸해야 한다고.”
“…….”
“어, 어, 어떤가. 이 위대하고 멋진 계획에 도, 동참할 생각이 없나? 그, 그 괴물을 아, 아무렇지 않게 데리고 다닌 걸로 보아, 너, 너는 신인류들의 약점에 대해 자, 잘 알고 있는 것 같은데. 나, 나와 겨, 결탁하는 게 어떤가?”
“아…….”
족장이 다시 한 번 이예주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녀는 의미 모를 소리를 내며 멍하니 그 투실투실한 손을 내려다보았다.
족장이 더럽게도 더듬거리며 지껄여 댄 말 중에 ‘박멸’이라는 말이 있었던 것 같은데.
족장이 말한 박멸이고 전쟁이고 하는 단어가 참 와 닿지 않았다.
신인류는 더럽고 해악한 존재이니 전쟁을 일으켜야 한다고?
그녀가 조롱이와 마을을 헤매며 보았던 신인류들은 모두 자기 생업에 매달리기 바빴다.
마담 페니나 그레이만 봐도 그랬다. 세금을 올리면 올리는 대로 내고, 대신 더 열심히 일을 했다.
자식이 없어져도 주점을 열 수밖에 없었다.
하루하루 먹고살기 바빴기 때문이다.
이예주는 그 모습을 보고 기분이 좀 이상했다.
저들이 신인류라고는 하지만 기본적으론 동물들인데. 왜 저렇게 인간처럼 살아야 하는 것이지?
그러나 람은 말했다.
인간에게 핍박당하고 힘없이 죽어 가는 것들이 쉽게 죽지 않도록 내린 힘이라고.
살아갈 수 있게 내린 힘.
신인류에게 내려진 그 힘이, 저주 따위와 같은 것이 되어 인간들에게 영향을 끼칠 리 없다.
그러니 조롱이도, 마을 안의 신인류들 중 그 누구도 족장 놈들에게 저주 같은 것을 내렸을 리 없다.
이예주는 조롱이에게 혹시 저주를 내린 게 사실이냐고 물었던 자신이 떠올라서 마음이 무거워졌다.
아, 인간이란 얼마나 대단한 동물인가.
눈앞에 주워진 것만 가지고도 무작정 책임을 전가할 수 있는 참으로 편리한 사고를 가졌다.
대답은 않고 물끄러미 족장을 바라보기만 하는 이예주가 답답했는지 족장이 한 번 더 말을 걸었다.
“모, 모든 부와 며, 명예를 거머쥘 있을 것이다. 그, 그러니 내, 내 손을 잡아. 어, 어서 잡으래도, 응?”
“……일단 내가 족장님이랑 손을 잡기도 전에, 내가 없어진 걸 알면 족장님은 죽을 거예요.”
이예주가 아저씨라고 낮잡아 부르던 경어체를 집어치우고 그를 족장님이라 불러 주었다.
“으, 응? 뭐, 뭐라고?!”
“없어지면 동쪽 대륙을 다 때려 부순다고…… 여길 멸망시켜서라도 찾는다고 했는데…….”
말끝을 흐리며 그녀는 조금 허망한 시선으로 자신이 있는 공간을 둘러보았다.
방은 굉장히 넓고 화려했다.
하지만 아무리 둘러보아도 조롱이는 보이지 않았다.
자신과는 다른 방에 갇혀 있는 것일까?
뭔가 목적을 가지고 납치한 사람한테 이렇게 좋은 방을 내줘도 되는 것일까.
그런 생각을 하던 중, 문득 그녀는 복면을 쓴 남자들에게 납치당하기 전에 제드가 더듬더듬 내뱉었던 말들을 떠올렸다.
―내, 내가 구해 줄게요, 레이디. 그, 그 사슬도 내, 내가 풀어 주고 마, 마을에 있는 동안 이, 이런 후미진 곳 말고 우, 우리 저택에 편하게 묵도록…….
사슬을 풀어 주고 편하게 묵게 해 주긴 개뿔.
오히려 조롱이와 간신히 타협해서 풀린 사슬이 도로 묶여서 이예주는 굉장히 기분이 더러웠다.
다시 한 번 묶인 사슬과 제드, 그리고 족장을 번갈아 보던 그녀가 또박또박 명확한 발음으로 그들에게 사실을 상기시켰다.
“그 남자도 족장님이 검은 안개를 사들이는 것과 무슨 꿍꿍이가 있다는 걸 알고 있거든요. 그러니까 동쪽 대륙에서 제일 먼저 죽는 건 여기, 족장님과 가족들이겠죠.”
“누, 누가? 누, 누가 감히 조, 족장의 저택에서 그, 그런 짓을 한단 말이냐!”
“누구긴요? 죽은 선대 족장인가 그 사람이랑 계약을 맺었다는 그 남자가 그러겠죠. 죽었으니까 계약은 파기될 거 아니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