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촉즉발의 상황에서, 그녀는 새삼 자신이 과거로 돌아가기 위해 의자와 이불을 밑에다 잔뜩 받쳐 놓은 채 목을 매달았던 것이 얼마나 장난 같은 짓이었는지 깨달았다.
그리고 람이 자신을 죽인다고 한 말들과 행동들이 모두 다 적당히 봐준 것이라는 것 또한.
그가 자신을 진짜 죽이려 했다면 이 남자처럼 얼마든지 목뼈를 부러뜨려 죽일 수 있었을 것이다.
“신인류냐고?”
남자에게 꽉 잡힌 목이 뼈가 부러질 듯 아팠다.
이예주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을 하고 싶어도 남자가 죽일 듯이 억세게 목을 잡아 누르고 있어서 대답할 수가 없었다.
하얗게 점멸된 시야가 점점 거멓게 물들어 갈 때쯤, 이예주는 문득 턱 밑에서 따끔한 감각을 느꼈다.
그리고 무섭도록 목을 조이던 압박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
“커헉! 쿨럭!”
자신도 모르게 거센 기침을 쏟아 내며 그녀가 흐끅 흐끅 하고 다시 공기를 들이마시기 시작했다.
그때 이예주의 몸이 누군가에게 훌쩍 둘러메졌다.
“뭐, 신인류든 아니든 상관없어. 둘 다 끌고 오랬으니까 말이야.”
용병대장이라는 놈이 앞에서 히죽 웃었다.
녀석이 앞에 있는 걸로 보아 그녀를 둘러멘 것은 다른 놈인 것 같았다.
쿨럭쿨럭. 연달아 기침이 터져서인지 이예주의 시야가 가물가물해졌다.
정신을 놓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놓아선 안 되었다. 절대, 절대로 정신을 놓아선 안 돼, 예주야.
“이, 이, 이게 무, 무슨 짓이냐! 레, 레이디는 건들지 않기로 야, 약속했는데! 레, 레이디는 풀어 줘!”
흐릿한 눈동자에 제드가 잔뜩 격양된 목소리로 소리를 지르는 것이 보였다.
자신만은 풀어 달라고 하는 것으로 보아, 구해 준다 어쩐다 헛소리를 지껄였던 것이 거짓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래 봤자 개새끼인 건 똑같았지만.
“따질 거면 도련님의 아비한테나 가서 따지슈. 난 그저 받을 거 받고 시키는 일만 할 뿐이니.”
용병대장이 귀를 파며 제드를 밀쳤다.
허약한 몸뚱이가 종잇장처럼 쉽게 밀려 내동댕이쳐졌다.
쓸모없는 새끼. 이예주는 속으로 욕지거리를 중얼거렸다.
짐짝처럼 어깨 위에 얹힌 탓에 머리가 하릴없이 흔들렸다.
이예주는 온 힘을 쥐어짜 고개를 들어 어느 방향으로 가는 것인지 확인했다.
도망갈 힘도 없게 만든 주제에 또 다른 복면들이 그녀를 둘러멘 남자를 삼엄하게 둘러싸고 있어서 주변이 잘 보이지 않았다.
남자들의 옷자락 사이로 점점 멀어지는 그레이의 가게가 간신히 보였다.
멀어지고 있구나.
눈꺼풀이 자꾸만 감기는 와중에도 이예주는 머릿속에 끊임없이 주입시켰다.
멀어지고 있어, 멀어지고…….
그때였다.
어지러이 흔들리는 그녀의 동공이 일순 커다랗게 확장된 것은.
점점 멀어지는 그레이의 주점에서 익숙한 인영이 걸어 나왔다.
이예주가 입을 벌려 소리쳤다.
“라……암…….”
멀리서도, 눈이 가물가물해도, 앞이 잘 보이지 않아도 그가 누군지 알아볼 수 있었다.
오지 않는 조롱이와 자신을 마중이라도 나온 걸까.
덩치 큰 남자들 사이로 무뚝뚝하게 정면만을 바라보는 람의 옆모습이 보였다.
람! 람! 이예주는 미친 듯이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입에서 나오는 거라곤 우물우물 웅얼거리는 소리뿐이었다.
“아…… 람…… 라…….”
람! 여기 봐요! 나, 여기 있어요, 람! 나, 납치당하고 있어요. 여기 봐요. 제발, 여기 봐요. 람!
“대장. 이 계집, 아직도 깨어 있는 것 같은데요?”
“뭐? 아직도? 신인류가 아니었던가. 에이, 모르겠다! 약 한 방 더 놔.”
심장박동이 서서히 느려지는 것이 느껴졌다.
소리 없는 비명이 허공에서 아스라이 흩어지고 목에서 다시 따끔한 감각이 일었다.
람, 람…….
점점 멀어지는 그를 애타게 부르던 그녀는 얼마 안 가 깊은 심연 속으로 까무룩 끌려들어 갔다.
그 순간, 남자의 시뻘건 눈동자가 번뜩 빛을 냈다.
그레이의 건물 앞에 서서 무뚝뚝하게 앞을 바라보고 있던 남자가 느릿느릿 시선을 돌렸다.
그레이의 건물에서 꽤 멀어, 눈살을 찌푸리지 않으면 잘 보이지 않는 골목 끝에서 한 무리의 인간들이 사라지고 있었다.
주위는 완전히 어둠 속에 가라앉은 상태였다. 람이 그들이 인간이라고 알아챈 것은 순전 그들에게서 나는 인간의 기척 때문이다.
거뭇거뭇한 어스름 속에서 시뻘건 눈동자를 번쩍 빛내는 남자의 미간이 서서히 좁혀졌다.
이상했다. 한 무리의 인간들의 기척이 빠르게 다가오는 것이 느껴짐과 동시에, 인간 여자와 황조롱이의 기척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벌건 눈으로 인간들이 멀어지는 쪽을 그가 무표정하게 바라보던 때였다.
남자의 뒤에 굳게 닫혀 있던 문이 ‘끼익―’ 하고 열리며 안쪽에서 환한 빛이 쏟아졌다.
“주인님, 황조롱이와 이례주는 아직이로라?”
주점 내부의 왁자지껄한 소음을 등진 채 나오는 덩치 큰 이는 나비였다.
람은 그에 답하지 않았다.
한참을 형형한 눈빛으로 허공만 노려보던 남자가 이윽고 느리게 입을 떼었다.
“기척이 끊겼다.”
“으엥?! 기, 기척이 끊겼…… 그, 그럼 도망을 간 것이로라?!”
나비는 어제부터 눈치채고 있었다.
제 주인이 어딜 가든 데리고 다닐 정도로 아끼는 황조롱이까지 감시로 붙여 둘 만큼 그 인간 여자에게 꽤 많은 신경을 쓰고 있다는 것을.
그런데 그 아무것도 모르는 인간이 도망을 가 버렸다.
나비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덜덜 떨며 주인의 눈치를 보았다.
그런 나비는 신경도 쓰이지 않는지, 남자는 다시 한 번 한 무리의 인간들이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았다.
“분명 이리로 다가오고 있었는데.”
그래. 인간 여자가 사라진 텅 빈 방 안을 보자마자 모든 것을 파괴할 것처럼 부글부글 끓기 시작한 시뻘건 분노를 억누를 수 있었던 것은, 근처로 되돌아오고 있던 계집의 기척 때문이었다.
분노가 사라지자 남자에게는 어느 정도의 여유까지 찾아왔다.
또 어떤 벌을 내려야 그 발칙하고 깜찍한 것이 기염을 토해 내며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손이 발이 되도록 용서를 빌까.
어떤 족쇄를 채워야만, 어떤 인질을 잡아 두어야만 그 계집이 제게서 도망치는 짓거리에 대해 생각조차 꺼내지 못할까…….
“찾아.”
하지만 그 여유는 인간 여자의 기척이 사라짐과 함께 순식간에 같이 사라졌다.
아드득, 그의 입에서 살벌한 소리가 들려왔다. ‘문’을, 그 계집이 시도 때도 없이 사용하곤 했던 ‘능력’을 사용하여 또 도망을 간 것일까.
“예, 예? 그, 그 인간 여자 말이로라?”
나비가 어리둥절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남자가 딱딱하게 답했다.
“황조롱이를.”
“그럼, 그럼 이례주는 그냥 놓아주는 것이로라?”
“무슨 소리지?”
나비의 말에 남자의 무표정했던 얼굴이 일순 사나워졌다.
“그 계집의 능력을 볼 수 있는 건 나뿐이니 난 그 계집을, 너희는 황조롱이를 찾아야지. 해가 뜨기 전까지 황조롱이의 흔적을 찾아내. 그 전까지 찾아내지 못한다면…….”
“…….”
“동쪽 대륙의 모든 것들은 재도 남기지 않고 소멸이다.”
허억, 나비가 겁을 집어먹으며 파들파들 몸을 떨었다.
남자가 덧붙였다. 그의 시뻘건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다시 한 번 번뜩였다.
“그것이 인간이건, 신인류건.”
* * *
남자가 보였다.
눈앞이 흐릿흐릿하고 그 얼굴이 아득해서, 처음엔 누군지 알아보기 위해 눈살을 찌푸리고 한참을 들여다보아야 했다.
이른 새벽의 자욱한 안개가 서서히 걷히는 것처럼, 뿌옇던 눈앞이 서서히 환해졌다.
남자가 보였다.
그다음에는 형형히 빛나고 있는 피처럼 붉은 눈동자가 보였다.
아…… 이예주는 짧게 신음했다.
왜 몰라보았을까? 멀리 있어도, 시야가 가물가물해도, 앞이 잘 보이지 않아도 알아볼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저렇게 시뻘겋게 빛나고 있는 눈을 왜 알아보지 못했을까?
이예주는 조금 멀리 떨어져 있는 남자를 바라보며 고민했다.
그러나 곧 답을 알아낼 수 있었다. 남자의 눈이, 마치 낯선 타인을 바라보는 것처럼 완전한 적의로 가득 차서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왜 그렇게 봐요?”
이예주가 그에게 물으며 한 발자국 다가섰다.
그러자 남자가 그녀에게서 누군가를 보호하는 것처럼 팔을 내뻗으며 한 걸음 물러섰다.
그녀를 꼭 끔찍하고 무서운 괴물처럼 여기는 것만 같았다.
“주인님.”
그때, 남자의 뒤에서 붉은 꼬리가 살랑살랑 움직이며 튀어나왔다.
그의 동공처럼 벌건 꼬리가 아홉 개나 달린, 벌거벗은 요망한 것이다.
아니, 저건 왜 또 옷을 다 벗고 지랄이야.
이예주는 험악하게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고 그들을 떼어 놓기 위해 한 발자국 다가갔다.
“뭐 하는 거예요?”
그러자 남자가 꼬리가 아홉 개나 달린 붉은 개를 데리고 두 걸음이나 물러섰다.
까드득, 이예주의 입술 사이에서 어금니가 갈리는 섬뜩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지금 뭐 하는 거예요!”
“주인님, 무서워요.”
이예주가 참지 않고 버럭 소리를 지르자, 요망한 것이 거대한 두 유방을 덜렁덜렁 뒤흔들며 그를 뒤에서 슬며시 껴안았다.
남자의 허리에 하얗고 가녀린 두 팔이 얹어졌다. 한 손으로 움켜쥐면 똑 분질러질 것만 같이 얇고 가는 손목일 뿐인데, 그것이 흡사 넝쿨처럼 남자의 허리를 억세게 휘어 감고 압박하는 것만 같았다.
절대로 보내 줄 수 없다는 것처럼.
순간 이예주의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이리 와요!”
그녀가 제 옆을 손가락질하며 소리쳤다.
붉은 개가 남자의 어깨 너머로 빠끔 고개를 내밀더니 그의 허리에 감은 팔에 더욱 힘을 주었다.
“이리로 와요!”
“……왜지?”
“뭐요?!”
“내가 왜 너한테 가야 하는 거냐고.”
이예주는 불현듯 말문이 막혔다.
왜? 왜냐고? 그녀는 뭔가 적당한 말을 찾아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그러나 마땅히 떠오르는 말이 없었다.
그사이 남자가 붉은 눈동자로 그녀를 응시하며 시리도록 차가운 말을 내뱉었다.
“너는 나와 아무 상관없는 관계가 아니었나?”
눈을 크게 홉뜨고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이예주에게서 시선을 떼고 남자가 피곤하다는 듯 지친 표정을 지었다.
“……지긋지긋하군.”
“…….”
“인간들은 나를 증오하고 두려워하면서도, 하나같이 내가 가진 힘을 탐하지. 정말 진저리나는 것들이다.”
그는 진저리가 나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고는 다시금 이예주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얼굴에 오랜 지겨움과 찌든 권태가 여실히 드러나 있었다.
이예주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꽉 깨물었다.
완전한 타인을 바라보는 것처럼 자신을 응시하는 그의 시뻘건 시선에 숨이 턱턱 걸리는 것만 같았다.
“왜…….”
무어라 입을 떼려던 이예주가 목구멍이 조여드는 감각에 흐으, 하고 짐승 우는 소리를 내며 잠시 호흡을 가다듬고 다시 입을 열었다.
“왜, 왜 아무 상관이 없어요?”
“그럼 우리가 무슨 상관이 있지?”
정말 모르겠다는 듯 되묻는 남자의 말에 가슴에서 울컥 뜨거운 게 치솟는다.
이예주는 말없이 제 왼쪽 손목을 내려다보았다.
손목 위엔 검은색의 흑요석처럼 흉측하게 변질된 흉터가 손목을 한일자로 가르며 자리하고 있었다.
주변이 어둡다고 생각했는데, 그 속에서도 검은색 흉터는 반짝반짝 빛이 났다.
흉터는 자각몽임을 깨우치는 일종의 매개체였다.
그러나 이예주는 너무 격한 감정에 사로잡힌 나머지 그것을 보고도 지금이 꿈인지 생신지 구별할 수 없었다.
그저 남자가 바꿔 버린 제 손목의 흉터를 노려볼 뿐이었다.
그녀는 왼쪽 손목을 남자에게 들이밀며 소리쳤다.
“당신이 이렇게 만들었잖아!”
“…….”
“나랑 계약도 하고, 내 목숨도 구해 주고, 그리고 나랑 키스도 했잖아요!”
남자는 대답 없이 무뚝뚝하게 이예주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녀는 이제는 눈물이 차오를 것처럼 코가 맵고 눈앞이 흐렸다.
“당신이 이렇게 만들어서, 이젠 과거로 돌아가도 잊을 수도 없게! 잊고 살 수도 없게 만들어 놓고! 그랬으면서 왜, 왜 아무런 상관이 없어요? 왜냐구요!”
“…….”
“인간이 지긋지긋하다고? ……흑, 그럼 난 어떡해.”
이예주는 어린아이처럼 울먹거렸다.
“난 벌써 당신을…… 당신을…….”
그녀가 고개를 쳐들고 자신을 바라보는 시뻘건 시선과 정면으로 마주했다.
차오르는 눈물 때문에 원치 않아도 흐릿한 남자의 잔상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래도 상관없었다. 내가 먼저 알아보면 되니까.
멀리 있어도, 시야가 가물가물해도, 앞이 잘 안 보여도 먼저 알아보면 돼.
그러다 문득 늦어 버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난 벌써 늦었구나. 난 이미 당신을, 당신을…….
“그러니까 이리로 와요.”
이예주는 이를 악물고 자신의 앞을 손가락질했다.
남자의 허리를 감은 요망한 것의 팔은 여전히 풀릴 줄 모르고 꽉 조여져 있었다.
시야가 흐릿한 와중에도, 그 모습에 눈에서 번뜩 불똥이 튀는 것 같았다.
그녀는 벼락처럼 커다랗게 소리를 질렀다.
“그 손 떼고 당장 이리로 오라고, 이 자식아!”
살벌한 시선으로 남자를 노려보자 드디어 그의 입이 열렸다.
여자보다도 빠알갛고 보드라워 보이는 그 입술이 살며시 벌어지더니, 이내 그 사이에서―
“와, 와, 왔는데요, 레, 레이디?”
“헉!”
이예주는 번쩍 눈을 떴다.
동쪽 대륙에 와서 몇 번 말을 섞었다고 그새 익숙해진 주눅 든 면상이 제 앞에서 얼쩡거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