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드 앤 매드 (120)화 (121/319)

조롱이의 말을 듣자마자 제 손목에 감긴 검은색 수갑을 열쇠로 이리저리 쿡쿡 찔러 대던 이예주는 번뜩 눈을 부라렸다.

“왜!”

“예?”

“모든 자물쇠 다 딸 수 있다며!”

지금 내가 처한 가장 위험한 상황은 이 지옥에나 갈 사슬이란 말이야! 

이예주가 목구멍까지 치오른 욕지거리를 참으며 씩씩대자, 눈을 끔뻑이던 조롱이가 여상하게 대답했다.

“누나 사슬은 잠금장치 없잖아여. 오직 주인님만이 채울 수 있고 주인님만이 풀 수 있는걸여.”

“……이런 미친.”

이젠 분노가 차오르기보단 울음이 나올 것 같았다. 

이 정도 묶어 뒀음 됐지! 반성을 며칠이나 더 해야 하는 건데!

동쪽 대륙에 온 지 겨우 하루가 지났음을 완전히 잊어 먹은 그녀는 그저 하염없이 억울하고 또 억울했다. 

그럼에도 소중한 10만 원짜리 열쇠, 아니 이제 흉한 검은색의 만능열쇠로 변해 버린 것을 안주머니에 고이 챙기며 한탄했다.

“어헝, 대체 언제 풀어 준대…….”

“그건 주인님께 가서 직접 말하구여. 빨리 가여, 그니까. 씨잉, 열쇠도 벌써 주면 안 되는데 누나 많이 힘들어 보여서 힘내라구 준 거예여.”

“이건 네가 길을 잃어버려서 생긴 일이잖아.”

조롱이는 답하지 않았다. 양심에 가책이라도 느끼는 모양이었다.

둘은 다시 걷기 시작했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1초라도 빨리 그레이의 주점으로 되돌아가야 하는 시점이었다.

그들이 그레이의 주점을 코앞에 두고 골목을 벗어나려던 그때였다. 

검은 인영이 어디선가 훅 튀어나와 그들의 앞을 가로막고 소리쳤다.

“아, 안 돼! 레, 레이디를 더, 더 이상 끌고 가려 하지 마라! 이, 이 괴물!”

그 우렁차고 당찬 기세에 조롱이도 이예주도 흠칫 멈춰 섰다.

“……어!”

갑작스럽게 등장한 인물에 눈을 휘둥그레 뜨고 놀라는 것도 잠시, 이예주는 양팔을 쩍 벌려 앞을 가로막은 인간을 향해 손가락질했다.

“……제드?!”

“레, 레, 레이디. 그, 그 괴물에게 떨어져서 이, 이쪽으로…….”

“왜 그런 옷은 뒤집어쓰고 우릴…….”

말끝을 흐리던 이예주는 퍼뜩 깨달았다. 그렇다. 

자신과 비슷한 옷을 입고 저와 조롱이의 뒤를 쫓아오던 사람은 다름 아닌 제드였던 것이다.

이런 엉성한 변장을 하고 졸졸 쫓아온 멍청이 때문에 잠깐이라도 겁에 질렸던 제가 한심했다. 

이예주의 눈주름이 팍 찌푸려졌다. 

옆에서 황금안을 뒤룩뒤룩 굴리며 사태 파악을 하던 조롱이가 그녀와 같이 제드를 손가락질하며 입을 열었다.

“저 인간, 아까 그 말을 더듬던 인간 아니에여, 누나?”

“맞아.”

그녀가 지끈지끈 울리는 이마를 부여잡으며 인정했다.

“아까부터 우릴 쫓아왔단 소리네, 그럼.”

“누나가 말했던 그 따라온다는 이가 이 인간이었던 거예여?”

“히윽!”

들킬 줄은 몰랐는지, 이예주와 조롱이가 주고받는 말소리에 제드가 헛바람을 들이켜며 몸을 떨었다.

“우릴 왜 쫓아오는 거예요? 구해 주니까 고맙다는 인사도 안 하고 도망칠 땐 언제고.”

“그, 그건…….”

이 더운 날, 짙은 잿빛 머리를 감추느라 두꺼운 로브를 온몸에 휘두른 채 용케 뒤를 쫓아왔다 싶다. 

제드가 머리 위로 자꾸만 흘러내리는 후드를 손으로 들어 올리며 버벅거렸다. 

“저, 저 괴, 괴물 때문이에요! 레, 레이디를 저 괴, 괴물에게서 구해 주려고 왔어요. 위, 위, 위험하니까요.”

“괴물? 위험?”

누가 위험에 처하고 누가 누굴 구해? 

도통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눈으로 조롱이와 제드를 번갈아 보던 이예주가, 조롱이에게 눈짓으로 저 멍청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아냐고 물었다. 

조롱이는 그녀보다 더 크게 눈을 치켜뜬 채 황당하다는 얼굴로 도리질을 쳤다.

“혹시 괴물은 얘고, 위험한 건 나예요?”

설마 그럴 리는 없겠지만 이예주가 희박한 가능성에 중점을 두고 의미심장하게 물었다. 

그러자 제드가 크게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그, 그 괴물은 저, 저주를 내리는 괴물이에요. 차, 착한 레이디를 끌고 가서 저, 저, 저주를 내릴지도 몰라요. 내, 내가 구해 줄게요, 레이디. 그, 그 사슬도 내, 내가 풀어 주고 마, 마을에 있는 동안 이, 이런 후미진 곳 말고 우, 우리 저택에서 편하게 묵도록…….”

쟤 지금 뭐라냐. 

제드가 천천히, 그리고 떠듬떠듬하는 이야기에 기가 막혀 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조롱이가 쌍심지를 켜고 역정을 내었다.

“아까부터 누구보고 자꾸 괴물이라는 거에여! 캬악!”

“흐헉!”

“저주라니! 저주라니! 마을 족장 놈처럼 똑같이 혀를 뽑아 주마!”

“아악! 다, 다, 다가오지 마!”

흥분한 조롱이가 공중에 훅 팔을 휘둘렀다. 

그러자 다섯 개의 손가락과 손등이, 날카로운 발톱이 달린 노란 새 발바닥으로 바뀌었다. 

이예주가 조롱이의 머리에 꿀밤을 쿵 날리며 “그만! 그만!” 하고 마침맞게 말리지 않았더라면 아마 또 눈깔을 허옇게 뒤집고 그것을 마구 휘둘러 댔을지도 모른다.

제드는 조롱이의 변신에 허옇게 질린 채 도망도 못 치고 그 자리에서 바들바들 떨었다. 

그런 주제에 누가 누굴 구한다는 건지 참. 천 년 후의 인간들은 알다가도 모르겠다고 이예주는 생각했다.

“그러니까 그쪽 말은 지금 내가 얘한테 어쩔 수 없이 붙잡혀 있는 거고, 당신이 나를 구…… 구해 주러 온 거라고요?”

“예, 예, 예! 저, 저랑 같이 가요, 레이디. 그, 그 괴물은 마, 말을 더듬게 만드는 저, 저주를 내리는 시, 신인류 괴물…….”

“저주 내린 적 없다니까여!”

조롱이가 괴물 소리에 다시 예민하게 반응하자 이예주가 서둘러 그 앞을 막아섰다.

“제드, 뭔가 잘못 알고 있는 거 같은데. 첫째로 조롱이는 괴물이 아니라 그냥 신인류예요.”

“예, 예?”

“둘째, 나는 얘한테 억지로 붙잡혀 있는 게 아니라…… 아! 이 사슬은 억지로 묶여 있는 거지만. 어찌 됐건! 난 절대로 붙잡혀 있는 게 아니라 내 의지, 내 주관, 내 판단에 의해서 남아 있는 거라고요. 억지로 붙잡히긴 누가! 아오, 기분 나쁘네.”

안 그래도 사슬 때문에 불편해 죽겠는 마당에 억지로 붙잡혀 있다는 남자의 말에 괜히 뜨끔한 이예주가 필요 이상으로 목소리를 높이며 격분했다.

그녀의 강력한 주장에 제드는 잠시 이해가 안 가는지 눈을 한참 동안 끔뻑끔뻑 감았다 떴다.

“그, 그, 그치만…… 그, 그 괴물이 저, 저주를 내린 건 마, 맞는데요. 저, 저랑 아, 아버지랑 하, 할아버지가 저주에 걸렸는데…….”

“당사자가 저주가 아니라고 하잖아요. 저주인지 뭔지 하도 들어서 귀에 딱지 앉겠네.”

“그, 그래도…….”

“아, 거참!”

자꾸만 그치만, 그래도 하고 토를 달던 제드는 이예주가 버럭 소리를 지르고 나서야 달싹였던 입을 다물었다. 

주눅이 들어 축 늘어진 어깨가 안쓰러웠다.

이예주는 애를 써서 상냥한 목소리를 내려고 노력했다.

“오늘은 일단 날도 저물었으니 그만 돌아가고 내일 다시 만나서 얘기하든가 해요. 우린 지금 1분이라도 더 늦었다간 생사가 오가는 긴급한 상황이거든요.”

흘끗 이예주가 골목 끝에 위치한 그레이의 건물을 눈짓하며 “그치, 조롱아?” 하고 조롱이에게 동의를 구했다.

조롱이가 기세 좋게 고개를 주억거리며 그녀의 손목 끝에 연결된 사슬을 힘 있게 잡아끌었다. 

쩔컥! 사슬 소리가 경쾌하게 울려 퍼졌다.

“누나 말 들었져? 우리 이제 가 봐야 되니까 빨리 비켜여!”

여전히 좁은 골목길을 막고 선 제드에게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며 조롱이가 외쳤다. 

그러나 저주가 아니라는 말에 충격이라도 먹은 건지, 제드는 재빨리 몸을 움직여 길을 터 주지 않았다.

“비키라니까여? 우리 가 봐야 된다구여.”

“…….”

“아이씽.”

움직일 기미를 보이지 않는 제드의 태도가 답답한지 조롱이가 막무가내로 그를 마구 밀어 내며 마저 가려 했다.

저 앞이 그레이의 건물이었다. 

제드 때문에 좀 더 시간이 지체되었으니 이제는 정말 람이 돌아와 있을 것만 같았다. 

이예주는 어느덧 완전히 해가 저물어 어두운 하늘을 바라보며 이제 죽을 시간이구나, 하고 마른침을 넘겨 삼켰다.

그리고 그녀마저 조롱이를 따라 제드를 스쳐 지나가던 그 순간이었다.

모든 일은 정말 눈 깜짝할 새에 벌어졌다. 

이예주가 온전히 지나칠 때까지 미동도 없이 서 있던 제드가, 전광석화처럼 몸을 날려 조롱이에게 달려들었다.

“……아!”

조롱이가 짧게 비명을 지르며 팔을 부여잡았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몰라 제드와 조롱이를 번갈아 보던 이예주의 눈에, 조롱이의 팔에 박혀 있는 주사기가 들어왔다.

“왜 그래? 뭐야? 뭐야!”

이예주가 제드를 거칠게 밀치고 허겁지겁 달려들었다. 

조롱이의 팔에 박힌 주사기를 재빠르게 잡아 뽑았지만, 안에 든 주사액이 이미 주입되었는지 주사기 안이 텅 비어 있었다.

이예주는 험악한 기세로 제드를 돌아보았다. 

그녀가 그런 표정을 지을 줄은 몰랐는지 그는 흠칫하고 뒷걸음질을 치며 더듬거렸다.

“미, 미, 미안해요, 괴물…… 괴, 괴물을 잡으면 레, 레이디는 무, 무사하다고 약속해서…… 그, 그, 그리고 우리는 저, 저주도 풀어야 하고…….”

“이게 뭐 하는 짓이야?!”

“어, 어, 어…….”

“이 주사기 뭐야? 뭐 한 거야! 무슨 짓거릴 한 거냐고, 이 새끼야!”

한 대 칠 것처럼 이예주가 주먹을 말아 쥐고 제드에게 한 걸음 다가갈 무렵, 조롱이가 어딘지 힘이 완전히 빠진 목소리로 힘겹게 그녀를 불렀다.

“누, 누나…….”

“조, 조롱아! 괜찮아?”

“우, 우리 빨리 주점으로 돌아가야 할 것 같아여……. 모, 몸이 좀 이상한 것 같은데…….”

“나한테 기대. 빨리 가자, 빨리!”

이예주가 황급히 조롱이를 부축했다. 대체 무슨 짓을 한 거냐며 당장 제드를 족치고 싶었지만, 일단 조롱이가 우선이었다.

정말 주사기에 무슨 짓을 했는지, 조롱이가 힘없이 축 늘어지며 그녀에게 몸을 기댔다. 

이예주는 마음이 급해졌다. 

빨리, 빨리 람에게 가야 돼. 빨리.

그러나 그녀가 조롱이를 데리고 채 한 발짝을 떼기도 전에, 어디선가 제드와 같이 검은색 옷을 뒤집어쓴 여러 명의 사람들이 소리도 없이 스스스스 나타나 좁은 골목길을 가로막았다.

“다, 당신들 뭐야?!”

이예주가 반사적으로 뒷걸음질 쳤다. 하지만 뒤로 몇 발자국 움직이기도 전에 등 뒤에서 들려오는 인기척에 그녀는 소스라치게 놀라 고개를 뒤로 돌렸다.

어느 틈에 다가온 건지, 등 뒤에도 검은 후드를 입은 여러 명의 남자들이 퇴로를 완전히 차단했다. 

제드와는 다르게 그들은 복면을 뒤집어쓰고 있었다.

“다, 당신들 뭐야? 뭐냐고!”

이예주의 두 눈동자가 사방팔방 날뛰었다. 

그 와중에 조롱이는 그녀의 품에 축 늘어진 채 통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검은색 가면의 남자들이 점점 포위망을 좁혀 왔다. 

이예주는 그때까지 어리바리하게 가만히 서 있기만 하던 제드를 쏘아보며 소리쳤다.

“이 사람들 네가 부른 거야? 이거 다 네가 벌인 짓이야?!”

“레, 레, 레이디. 그, 그게…….”

제드는 이예주의 눈에 고스란히 담긴 적대감에 적잖이 당황한 것처럼 보였다. 

그가 그녀의 물음에 답도 못하고 버벅거리기만을 반복하던 때였다.

짝, 짝. 

그들을 둘러싼 복면 쓴 남자들 중 한 명이 박수를 치며 걸어 나왔다.

“잘 했습니다, 제드 도련님. 아주 용감했어요. 족장님께서 도련님이 하신 일을 들으면 매우 기뻐하시겠는걸요? 잡은 저 괴물을 포상으로 줄지도 모릅죠.”

“요, 용병대장…….”

제드가 그를 아는 체했다.

역시 같은 패였어. 

용병대장이라 불린 놈이 그녀의 품에 힘없이 늘어져 있는 조롱이를 손가락질하자, 이예주는 반사적으로 조롱이를 꽉 끌어안으며 남자를 경계했다.

한눈에 봐도 제드보다 더 위험한 놈이었다. 

키와 덩치도 운동하는 사람같이 거대했다. 

“그걸 넘겨. 그럼 목숨만은 살려 주지.”

남자가 이번에는 이예주에게 말을 걸었다. 

예상했듯 조롱이를 넘기라는 말이었다. 

그를 노려보며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싫어.”

“싫어? 흠. 넌 신인류인가?”

“…….”

“대답도 싫으냐? 그럼 어쩔 수 없군.”

답을 하지 않는 이예주를 내려다보던 남자가 뒤의 남자들에게 손짓했다. 

그러자 세 명의 남자들이 눈 깜짝 할 사이 그녀의 앞으로 훅 다가와 품에 안고 있던 조롱이를 빼앗으려 들었다.

“이거 놔! 이거 놓으라고, 이 자식들아!”

이예주는 남자들에게서 조롱이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있는 힘껏 발버둥을 쳤다. 

그녀의 발악이 생각보다 거셌는지 남자들이 주춤거렸다. 

그러자 명령을 내렸던 용병대장이라 불린 남자가 뚜벅뚜벅 다가와 두꺼운 손으로 그녀의 목을 한 손으로 콰득 틀어쥐었다.

양손으로 조롱이를 잡고 있는 탓에 이예주는 그 손아귀를 피하지도 막지도 못하고 그대로 목덜미를 내어 줄 수밖에 없었다.

“……컥!”

딱딱한 손아귀가 무섭도록 목을 조였다.

“아휴, 시끄럽잖아. 족장님께서 오늘은 취임식이니 소란 피우지 말고 조용히 잡아 오라고 하셨단 말이야.”

“크…… 컥! 끄흡……!”

시야가 하얗게 점멸했다. 그때까지 조롱이의 옷자락을 억세게 쥐고 있던 그녀의 두 주먹이 스르르 풀렸다. 

숨이 막혔다. 

온몸이 심장이라도 된 것처럼 쿵쿵 맥박이 울렸고, 귀에서 삐익 하는 이명이 들려왔다.

“다시 한 번 묻는다. 너 신인류냐?”

남자가 허옇게 눈을 뒤집기 시작하는 이예주에게 물었다. 

그 목소리가 멀리서 메아리치는 것 같다가도 가까이서 선명하게 들려왔다. 

아, 이게 죽는 거라는 거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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