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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 앤 매드 (119)화 (120/319)

쩔컥― 

그녀가 멈춘 줄도 모르고 앞서가던 조롱이는 사슬이 팽팽하게 당겨지자 그제야 그녀를 돌아보았다.

“왜 그래여?”

응? 어디서 분명 시선이 느껴졌는데.

저주받을 능력으로 인해 어렸을 때부터 저를 바라보는 시선 하나는 기똥차게 알아맞히던 이예주였다. 

‘문’을 넘은 후, 혹시나 저를 이상한 눈으로 보는 사람이 있을까 봐, 멀쩡히 흐르는 시간 속에 혼자 끼어든 것을 혹여 눈치챈 사람이 있을까 봐 언제나 온 촉각을 곤두세우며 13년을 살아왔다.

엄마는 그녀의 능력을 절대로 발설되면 안 되는 일급비밀처럼 여겼다. 

엄마가 죽은 후 얼마 안 가 홀로 ‘문’을 넘던 이예주는 왜 능력을 반드시 숨겨야 하는지 금방 깨우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남들의 시선만 눈물 나게 눈치 보며 살아왔던 덕인지, 이예주는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을 알아차리는 데에 예민한 편이었다.

볼이 따가울 정도로 느껴지는 시선이었다. 

적의나 살기 같은 건 잘 몰랐다. 그렇지만 자신이 알아차릴 정도면 가까운 곳에서 누군가 자신을 뚫어져라 보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는데…….

그러나 막상 훑어본 거리에는 바삐 오가는 사람들만 있을 뿐, 특별히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은 없었다.

나무 상자를 들고 옮기는 아저씨들과 종종걸음으로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여자들. 

길거리 한구석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청년 둘과 골목 모퉁이 쪽 너머 검은색 후드를 뒤집어쓴 채 뒤 돌아서 있는 노숙자 같은 인간.

이 더운 날씨에 포대 같은 걸 뒤집어쓴 사람이 나 말고 또 있네? 

영양가 없는 생각에 그녀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어느 틈에 바싹 다가온 조롱이가 황금색 눈을 말똥말똥 끔뻑이며 저를 올려다보았다.

“누나, 왜 그러냐구여.”

“응? 아니. 그냥 누가 쳐다보는 것 같아서.”

“누가여?”

“아냐. 그냥 기분 탓인가 봐.”

이예주가 어색하게 웃고는 다시 걷자고 턱짓을 했다. 

조롱이가 별 실없는 사람을 다 본다는 듯, 눈을 흘끔 흘기며 뒤로 돌았다.

그녀는 고개를 또 한 번 갸웃거리며 다시 거리를 둘러보았다. 

이상하다. 

이건 숲에서 빌어먹을 까마귀 놈들을 알아채기 전에 느꼈던 괴이함과 비슷한 느낌인데? 

데자뷰인가.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둘러본 황혼의 거리에선 역시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 따윈 찾아볼 수 없었다. 

이렇게 사슬에 묶인 채 어려 보이는 놈에게 질질 끌려가는데 심지어 무슨 일인지 궁금한 눈빛을 보내는 사람조차 없었다.

제 사슬 한 번, 야속한 조롱이의 뒤통수 한 번, 그리고 다시 길거리를 한 번 번갈아 바라본 이예주는, 이런 사소한 것에서부터 와 닿는 문화 충격에 우울한 얼굴을 쉬이 떨칠 수 없었다.

노을이 사라지고 이른 새벽처럼 푸르스름한 땅거미가 동쪽 대륙 전체에 내려앉았을 때였다. 

거리에 하나둘씩 켜지는 등불을 바라보던 그녀가 기어이 한쪽 구석에 쌓인 나무통에 걸터앉고는 숨을 몰아쉬었다.

“마, 많이 힘들어여, 누나?”

“어! 아직 멀었어?”

“그, 그게…… 거의 다 온 것 같긴 한데…….”

조롱이가 더듬거리며 대답하자, 이예주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시큰둥한 말투로 예의상 물었다.

“이번엔 진짜지?”

“이번엔 정말 그레이의 냄새가 나여! 아까는 인간들이 너무 많아서 헷갈렸는데 이번엔 정말이에여! 한두 골목 정도만 돌아가면 될 것 같은데…….”

확실히 쉬지 않고 걷기만 해서 그런지 어딘지 모르게 눈에 익은 건물들이 몇몇 보였다.

하…… 이예주가 속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는 한숨을 참지 않고 여과 없이 내쉬었다. 

몇 시간 헤매긴 했지만 결국 어떻게든 숙소로 돌아갈 것 같긴 한데. 

그렇다면 이제 생사를 고민해야 하는 순간인가.

별로 구경도 못하고 하루가 꼬박 저물었다. 

조롱이의 말에 도망에의 욕구를 꾹 눌러 참은 채 여기까지 따라온 것은 맞으나, 이예주의 마음에서 그 미친놈에 대한 희망은 사실 반쯤 죽은 것이나 진배없었다.

제가 기어이 조롱이를 데리고 나간 것을 알면 정말이지 사막에서 히카톤인지 뭔지 그 괴물을 끌고 와 동쪽 대륙에 패대기를 칠 남자였다.

하…… 이예주가 다시 한 번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나마 아직 동쪽 대륙이 멀쩡해 다소 안심이 되었다. 

그녀가 도망간 것을 알면 온 마을을 다 때려 부수는 한이 있어도 찾아낸다고 엄포를 늘어놓았던 남자니까. 

아직 돌아오지 않은 게 아닐까? 

그렇다 해도 땀에 절어 엉망이 된 저와 조롱이의 몰골을 본다면 눈치채는 것은 시간문제일 것이다. 

지금이라도 있는 힘, 없는 힘 쥐어짜서 숙소까지 달려가 미친 듯이 씻어?

이예주는 곧 머리를 있는 대로 굴리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이 개고생을 하자고 생난리를 피운 탓에 욕실은 온 선반이 무너지고 부서져 전쟁이라도 난 모양새일 것이다.

산 넘어 산이로다. 

과거의 제 무지함과 멍청함에 끊임없이 속으로 자학을 해 대던 그녀는, 불현듯 또다시 느껴지는 기이함에 흠칫 몸을 굳혔다.

또다, 또. 어디선가 자꾸 정체불명의 시선이 느껴졌다.

이예주가 아래로 힘없이 내리깔았던 시선을 슬며시 들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나 거리를 지나가는 몇 안 되는 사람들 중 그녀를 보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동료와 함께 집으로 돌아가는 것인지 호통하게 웃고 있는 아저씨 둘과, 거리 반대편 과일 가게에서 값을 흥정하는 아줌마와 뚱뚱한 가게 주인, 양 갈래로 땋은 머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모퉁이로 사라지는 예닐곱 살쯤 먹은 계집아이 둘…….

그리고 아이들이 사라지는 모퉁이에서 검은 후드를 뒤집어쓴 채 서 있던 정체 모를 인간과 딱 눈이 마주쳤다.

“……어?”

이예주의 시선에 남자가 흠칫 크게 몸을 한번 떨더니 이내 모퉁이 너머로 허둥지둥 몸을 감췄다.

누가 봐도 수상쩍기 그지없는 행동거지였지만, 비단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저 인간, 아까도 보았던 인물이다.

오늘 하루 종일 돌아다니며 마을과 마을의 인간들을 구경했지만 꽤 후덥지근한 동쪽 대륙에는 그녀처럼 검은색의 펑퍼짐한 옷을 뒤집어쓴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아니,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볼 수 없었다. 

시원시원한 옷을 입고 제 곁을 스쳐 지나가는 마을 사람들을 보며 자신이 얼마나 부러워했던가.

그런데 두 번이나 검은색 옷을 뒤집어쓴 사람을 보았다. 

그것도 얼마 되지 않는 시간 차이로. 게다가 자신과 눈이 마주치자 몸을 숨기는 것처럼 보이는 행태까지.

……뭐지? 뭐지? 

이예주의 얼굴이 일순 혼란스러움으로 범벅이 되었다.

설마, 혹시, 만에 하나, 우리를 뒤따라온 건가?

“왜여? 저쪽에 아는 사람이라두 있어여?”

좋지 않은 얼굴로 멀찍이 떨어진 꺾인 골목 입구를 뚫어져라 노려보는 이예주를 보고, 조롱이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한번은 우연이라지만 두 번은 필연이라고 하던가. 

천 년 후 세상으로 온 뒤 숲에서 외눈박이 형제들을 아들로 둔 미친 노인과, 팔족 족장 같은 정신 나간 인간들을 겪다 보니 같은 사람일지라도 불신하게 되었다.

“……있잖아, 기분 탓인지 모르겠는데.”

조롱이에게 괜한 말을 꺼내는 게 아닌가, 그녀는 조금 망설여졌다.

“뭔데여?”

“누가 우리를 따라오는 것 같아.”

“에에엣?! 누, 누가여? 혹시 아까 그 못된 인간들이……!”

이예주의 말에 조롱이가 곧바로 대경실색하며 고개를 휙휙 돌렸다. 

그녀가 황급히 “돌아보지는 말고.” 하며 막았다.

“나랑 눈이 마주치고 나서 모퉁이 뒤로 숨었어.”

“히익! 수, 숨어여?!”

“으응. 아무래도 뭔가 이상한 거 맞지?”

이예주가 고개를 모로 기울이며 묻자, 조롱이가 심각하게 굳은 얼굴로 그녀의 손목에서부터 연결된 사슬을 두어 번 제 손에 꽉 말아 쥐었다. 

절대 놓치지 않겠다는 의지가 가득 담긴 그 행동에 이예주는 기분이 좀 떨떠름해졌다.

“안 되겠어여. 우리 빨리 돌아가야 할 것 같아여.”

가여, 빨리. 

별로 쉬지도 못한 것 같은데 사슬부터 잡아당기고 보는 조롱이 때문에 이예주는 엉덩이를 붙였던 나무통 위에서 일어나 빠른 걸음으로 걸었다.

“누, 누가 우리 따라오면 큰일인 거야?”

조롱이의 옆에 바짝 붙어 차가워진 그의 얼굴을 살피던 이예주가 눈치 없이 물었다. 

이렇게 경계를 해야 할 정도로 큰일인 것인가?

그러나 다른 때 같았으면 그걸 말이라고 하냐고 핀잔을 줬을 조롱이가 어쩐 일인지 아무 말 없이 마구잡이로 걷기만 했다.

두 번이나 마주친 검은색 옷을 뒤집어쓴 수상한 남자가 모퉁이에 몸을 감춘 골목, 바로 옆에 나 있는 샛길로 빠지며 조롱이의 발걸음이 한층 더 바빠졌다.

좁은 샛길은 사람 하나 없이 어두침침하게 뻥 뚫려 있었다. 

이제는 빨리 걷는 것이 아닌 흡사 뛰는 것과도 같은 양상으로 휙휙 건물을 지나쳤다. 

저질 체력을 조금도 충전하지 못하고 가쁘게 끌려가던 이예주는 허옇게 들뜬 얼굴로 조롱이의 뒤통수에 대고 외쳤다.

“좀만 천천히! 천천히!”

“멈추지 마여. 지금 누가 쫓아와여, 누나.”

“뭐? 뭐가?”

“누가 쫓아오는 것 같아여. 이리로!”

그녀의 사슬을 마구 끌며 내달리던 조롱이가 중간에 나 있는 골목으로 휙 몸을 돌렸다. 

이예주는 ‘으헉!’ 하고 괴성을 지르며 그를 따라 거세게 방향을 틀 수밖에 없었다.

조롱이와 함께 내달리며 그녀는 몇 번이고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어둑어둑한 골목길에는 헐레벌떡 뛰고 있는 자신과 조롱이 뿐, 누가 쫓아오는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진지해진 조롱이를 따라 긴장하며 이예주는 자꾸만 꼬이는 발을 추슬렀다.

길을 아는 건지 의심이 갈 정도로 조롱이는 무작정 이예주를 끌고 한참을 요리조리 골목골목을 돌아 달렸다. 

두 사람이 걸음을 멈춘 것은 그레이의 주점으로 추정되는 5층짜리 건물이 꽤 가까이 보였을 때쯤이었다.

“허억, 헉…… 살았다! 살았어! 헉헉, 이제 안 쫓아와?”

이예주가 탄성을 내지르듯 기뻐하며 거칠게 호흡했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계속 뛴지라 숨이 벅차고 목이 따끔거려 죽을 것만 같았다.

쉬익 쉬익, 당장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처럼 콧소리를 내뿜는 그녀와는 다르게 조롱이는 아무렇지도 않은지 숨소리 하나 바뀌지 않고 이예주가 진정하길 기다렸다.

“이제 안 쫓아오냐고, 조롱아. 진짜 갑자기 왜 뛴 거야? 아무도 없더만.”

방금 빠져나온 골목과 그 주위를 휙휙 둘러보며 이예주가 재차 물었다. 

그러나 조롱이는 어딘가에 시선이 팔린 듯 이예주가 아닌 허공을 바라보며 약간 몽롱한 얼굴로 웅얼거렸다.

“……발걸음 소리가.”

응? 뭐라구? 잘 들리지 않아 이예주는 눈살을 찌푸리며 크게 되물었다. 

그제야 허공만을 응시하던 조롱이가 스르륵 그녀를 마주 보았다.

얘가 왜 이렇게 답답하게 굴어. 

그렇게 생각한 것이 무색하게 해가 진 뒤의 어스레한 석음 속에서 황금빛 두 동공이 명확하게 빛나고 있었다.

“우리 말고 발걸음 소리가 많이 났어여.”

“발걸음 소리?”

“그 샛길에 아무도 없었는데…… 우리가 뛸 때 들리던 발걸음 소리가 여러 개였다구여.”

자주 보기 힘든 조롱이의 진지한 눈동자와 마주하고 있자니, 이예주는 목덜미부터 등골을 타고 소름이 쫘아악 돋는 것이 느껴졌다.

샛길에는 그녀와 조롱이 단둘뿐이었다. 

그리고 샛길을 벗어나 골목길을 따라 걸으며 이곳까지 오는 동안 다른 사람을 본 적도 없다. 

그래서 더 쉽고 빨리 이곳까지 무사히 도착했다고 생각했는데.

그 아무도 없는 좁은 길에서 여러 명의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고?

“무, 무섭게 왜 그래. 네가 잘못 들은 거겠지. 계속 뒤돌아봤는데 아무도 없었어.”

이예주가 떨리는 목소리를 하고 조롱이를 툭 치며 말했다. 

그러나 그녀가 건 장난에도 조롱이의 표정은 풀릴 줄 몰랐다.

“잘못 들은 거 아니에여. 청력은 다른 황조롱이만큼 멀쩡하단 말이에여…….”

조롱이는 어두운 얼굴로 힘없이 대꾸했다. 이예주는 괜히 더 무서워졌다.

“일단 빨리 돌아가자. 네 주인한테 벼락 맞아 죽든 어쨌든, 돌아가는 게 좋을 것 같아.”

5층까지 불이 환하게 켜진 그레이의 건물을 바라보며 그녀가 서둘러 조롱이를 재촉했다.

누가 쫓아온다는 조롱이의 말이 사실인지 거짓인지는 모르겠지만 아까 수상쩍은 남자와 눈이 마주친 것도 있고, 해도 지는데 괜히 밖을 싸돌아다니다 본의 아니게 다른 일에 휘말리는 것만큼 재수 없는 일도 없을 터였다.

그런 생각에 마음이 점점 다급해질 때였다.

“누나, 이거.”

쩔컹, 마저 골목을 가로질러 숙소를 향해 걸으려던 이예주를 조롱이가 잡아당기더니 발길을 멈추게 했다. 

그러고선 품에서 주섬주섬 무언가를 꺼내 들고 쭉 손을 내밀어 건넸다.

“응? 뭐야?”

“이거 사실 주인님이 누나가 반성 많이 했다고 생각할 때쯤 돌려주라고 했…….”

“헐! 내 열쇠잖아!”

조롱이의 손바닥 한가운데에서 반짝거리는 것은 이예주의 십만 원짜리 원룸 열쇠였다. 

익숙한 리락쿠마가 수줍게 인사를 하자, 눈이 번쩍 트였다. 

그녀는 조롱이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번개처럼 그것을 낚아챘다.

“뭐야? 이걸 왜 이제 줘! 그리고 내 열쇠 색이 왜 이래?!”

열쇠를 요리조리 바라보던 이예주의 얼굴이 험악하게 찌푸려졌다. 

고운 은색 자태를 자랑하던 열쇠가 입고 있는 포대 밑에 감춰진 제 손목만큼이나 흉측한 검은색으로 변해 있었기 때문이다.

검은색 대리석처럼 반짝반짝 빛나는 열쇠를 보자니 누가 자신의 열쇠에 이딴 짓거리를 했는지 알 만했다.

“주, 주인님이 힘을 부여하셔서 열쇠를 좀 특별하게 바꾸셨다고 했는데여. 훨씬 좋게 바꿔 주셨어여! 모든 자물쇠를 다 딸 수 있을 거래여. 혹시 위험에 처했을 때 요긴하게 쓰일 수 있을 거라고……. 근데 누나 수갑은 못 따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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