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드 앤 매드 (117)화 (118/319)

“어, 언제까지 병신 취급을 당하며 사, 살 수 없다, 제, 제드. 이, 이건 시, 신께서 우리의 저주를 따, 딱히 여겨 내려 주신 기, 기회야.”

“그, 그, 그치만, 그 저, 저주를 내린 신인류를 잡는다고 저, 저주가 풀리는 것은 아니잖아요…….”

“아니!”

소심한 제드의 대꾸에 족장이 아주 드물게 말을 더듬지 않고 불신의 싹을 잘랐다.

“그, 그것을 잡아 사, 산 채로 씹어 먹어야 저, 저주를 풀 수 있다! 이, 이건 네, 네 할머니가 알려 주신 거야! 그, 그 황조롱이를! 그, 그 황조롱이를……!”

족장이 시뻘겋게 충혈된 눈으로 피를 쏟듯이 외쳤다.

제드는 이러다가 아버지의 기도가 막혀 그가 죽어 버릴까 걱정이 되었다. 

발작처럼 황조롱이를 외쳐 대는 족장을 제드가 서둘러 부축했다. 

족장이 와락 손을 뻗어 강한 힘으로 그의 팔을 움켜쥐었다.

“제, 제드야. 우, 우리 꼭 저, 저주를 풀어야 한다. 저, 저주를, 저주를……. 그, 그러기 위해선 그, 그 괴물의 일행을 차, 찾아내야 해. 바, 반드시, 찾아내야만 해.”

그를 잡은 족장의 눈에서 기이한 광기가 번들거렸다. 

제드는 오싹 몸이 떨렸다.

아버지의 말마따나 제드 또한 저주를 풀고 싶었다. 

그러나 저주를 푸는 것과 엄한 사람을 해치는 것은 엄연히 다른 일이었다. 

제드는 망설이다 입을 뗐다.

“하, 하지만 아부지. 그, 그 레이디는 저, 정말 나쁜 사람이 아니에요. 저, 정말로 조, 좋은 분이에요…….”

“제, 제드 네가 저, 정 그렇다면 그, 그 여자는 건들지 않으마.”

“저, 저, 정말요?”

한 수 물러나는 족장의 태도에 제드가 눈을 댕그랗게 뜨고 되물었다. 족장이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래. 그 괴물만 찾으면 그, 그 노예는 소, 손도 대지 않겠다. 그, 그러고말고. 그, 그러기 위해선 제드 네가 저, 적극적으로 그들을 찾아내야 한다. 아, 알겠느냐?”

제드는 아버지의 말에 잠시 입술을 꼭 깨물고 고민했다. 

하지만 여러 번 고민해도 나쁘지 않은 일이었다. 

그는 그 흉악한 괴물이 어떤 식으로 지주들의 아들들을 괴롭혔는지 똑똑히 본 상태였다. 

정말 오줌을 지릴 정도로 무서운 광경이었다.

대부분의 신인류들은 완전한 인간의 형태를 유지하지 못했다. 

얼핏 주워듣기로는, 그들이 불안정한 2세이거나 완벽하게 인간의 형태로 변신할 만한 힘이 부족했기 때문이라 했다. 

그리고 인간의 형태로 변하지 못한 부위는 대체로 입, 코, 귀, 꼬리 등 마을 사람들에게 별로 위협이 될 만한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레이디와 함께 있던 그 신인류는 달랐다. 

스치기만 해도 베일 것 같은 날카로운 발톱. 

그것을 마구 휘둘러 대던 신인류는 지주들의 아들들이 모두 도망친 후 감쪽같이 발톱을 감추고 완벽하게 인간으로 변한 손을 흔들었다. 

신인류가 변신할 때마다 들리는 ‘펑’ 하는 커다란 소음과 뿌연 안개도 없이, 그저 그냥 허공에 손을 흔드는 것만으로.

그 신인류는 강한 힘을 지닌 신인류였다. 

그 강한 힘으로 할아버지와 아버지와 저에게 저주를 내린 것이다. 

또한 레이디에게도 위험한 인물이 틀림없었다.

레이디에게 위험한 인물. 위험, 위험…….

레이디가 위험하다는 생각에 제드는 물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몸을 한번 퍼덕였다.

“야, 야, 약속하시는 거예요. 레, 레이디는 터, 털끝 하나도 다치면 안 돼요.”

제드가 족장에게 다짐하듯 반복해서 말했다. 

족장이 번들거리는 눈알을 뒤룩뒤룩 굴리며 환하게 웃었다.

“그, 그럼, 그럼. 어, 얼른 나가서 찾아보거라. 이, 이것도 가지고. 어, 얼른!”

“가, 가, 가 볼게요!”

아버지의 재촉에 제드가 다급하게 몸을 돌려 방 안에서 뛰어나갔다.

한시가 급했다. 

빨리 그 끔찍한 괴물에게서 아름답고 곱고 연약한 레이디를 구해 내야 했다. 

지금도 레이디가 그 흉측한 사슬에 묶여 마을 어딘가를 질질 끌려 다니고 있을 것이란 생각에 제드의 발걸음이 급해졌다.

순식간에 사라지는 멍청한 아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족장은 제드가 저택을 나서고도 한참이 지난 후에야 더듬더듬 사람을 불렀다.

“바, 밖에 드, 들어오너라.”

“예, 족장님. 부르셨습니까요.”

족장의 부름에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우락부락한 용병대장이 잽싸게 들어왔다. 

비록 자신이 내미는 돈 때문에 굽실거릴지라도, 족장은 저를 진짜 족장처럼 대해 주는 이 용병이 참으로 마음에 들었다.

족장이 오만한 귀족의 표정을 흉내 내며 오동통한 손가락으로 탁자 위에 너저분하게 널린 종이를 가리켰다.

“제, 제드를 따라 마, 마을을 샅샅이 뒤져 이, 이것을 찾아 데려오도록 하게.”

“흠, 이 갈색 머리 꼬맹이를 말씀이십니까?”

뚜벅뚜벅 탁자 근처로 걸어온 남자가 널브러진 종이 중 한 장을 들어 올렸다. 

족장 또한 다가와 다른 종이를 집어 들며 말했다.

“그, 그, 그래. 이, 이 괴물…… 아, 아니 신인류를.”

“에, 뭐. 이런 조막만 한 것을 잡아 오는 건 식은 죽 먹기겠죠. 근데 이 꼬맹이를 뭐에 쓰시려고 그러십니까요? 아, 그러고 보니 이번에 온다던 그 눈족 장로라는 여자가 이런 어린 소년을 바치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쉬, 쉿! 이, 이, 입조심하게! 누,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

주위를 살피며 손가락을 입에 가져다 대는 족장을 보고 용병대장이 헤벌쭉 웃었다.

“이런 짓 한두 번 하는 것도 아니고…….”

“어, 어쨌든! 아, 아직 이런 것이 시, 신인류들의 귀에 들어가면 저, 절대로 안 되니까. 야, 약이 추, 충분히 공급될 때까지……. 그, 그래! 참, 그, 그놈을 잡을 땐 꼭 야, 약을! 그, 그 약을 쓰도록 하게.”

“잡을 때 바로요? 이런 애새끼한테요?”

용병대장이 무슨 이딴 것을 상대로 약까지 쓰냐며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나 족장은 안심할 수 없었다. 

조금도, 아주 조금도 빠져나갈 틈을 주지 않고 숨통을 죄어야 했다.

“그, 그래. 보, 보기보다 노, 녹록지 않은 놈이야. 조, 조심하게.”

“뭐, 알겠습니다. 추적은 어디서부터 시작하면 될깝쇼?”

“그, 그 신인류와 같이 다니는 노, 노예 계집이 있다는데.”

“예? 노예 계집이요? 그 계집도 신인류입니까?”

“그, 글쎄. 그, 그건 잘 모르겠네. 제, 제드가 보면 알 걸세.”

“그래서 그 계집은 어떻게 하라구요?”

용병대장이 성급하게 물었다. 

족장은 말없이 제 손의 그림을 내려다보았다. 

갈색 머리를 한, 많아 봤자 열대여섯쯤 돼 보이는 인물의 스케치가 종이 위에 그려져 있었다.

얼굴을 자세하게 알 수 없어 아쉬웠으나, 이걸로 단서는 충분했다. 

갈색 머리, 황금색 눈동자. 

검은색의 잘 벼려진 발톱이 달린 발을 머리 위로 날카롭게 치켜든 모습.

대충 그려진 그림으로만 보아도 역겹고 치가 떨렸다. 

선대 족장이 편집증 환자처럼 그려 대던 그 무섭고 두려운 신인류의 모습과 일치했다. 

게다가 사슬에 묶여 있는 노예 계집 일행. 

이 정도면 마을 안에서 찾기 충분한 단서다. 충분하고말고.

괴물에게 일행이 있다는 데에 생각이 미치자, 족장은 좀 더 빠릿빠릿하게 머리를 굴려 보였다. 

데이비슨의 아들놈의 말로는 그것들이 뤼미에르를 훔치려 한단다. 

우락부락한 용병들이 첩첩이 쌓여 있는 족장의 집 안을 감히 도둑질 하려 든다니.

족장은 그것이 성공할 것이라는 생각은 단 1퍼센트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모든 위험은 ‘사전에 제거해야 한다.’는 말이 있다. 

그것이 어떤 인간이든, 어떤 신인류든 싹을 짓밟고 불로 지져 허튼짓을 할 틈을 주지 않고 우둑우둑 씹어 먹어야 했다.

족장은 두툼한 살집이 잡힌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웃지 않으려고 해도 자꾸만 입술 사이로 비실비실 웃음이 흘러나왔다. 

신이 자신을 돕는 것이 틀림없었다. 

갑작스럽게 방문하는 눈족 장로의 취향에 맞는 것을 찾지 못해 아침부터 체한 것처럼 불편하던 심기가 말끔해졌다.

눈족과의 거래도, 저주를 풀 방법도 이렇게 한 번에 쉽게 손안으로 들어오다니. 믿을 수가 없을 지경이다. 

운이 좋아서 그 노예 계집이 괴물과 같은 신인류라면, 눈족 놈들에게 팔아먹을 수도 있겠지.

그러면 더 많은 검은 안개가 제 손에 들어올 테고, 그리고 자신은 그것을 이용해서 더, 더 많은…….

“어떻게 하냐니까요, 족장님?”

용병대장의 짜증 섞인 채근에도 족장은 웃었다. 

덧니가 삐뚤빼뚤 자란 흉측한 이가 보일 정도로 환한 미소였다. 

그리고 그는, 오늘에만 두 번째로 더듬지 않고 말을 내뱉을 수 있었다.

“당연히 그것도, 같이 끌고 와야지.”

헤에, 일석이조. 아니, 일석삼조다.

*       *       *

처음 약속은 분명 건물 근처에서 30분만 적당히 시간을 때우다가 되돌아가는 것이었다. 

조롱이는 도망간 들쥐를 죽이기 위해 떠난 제 주인님이 그들이 나갔다는 것을 조금도 눈치채지 않기를 소원했다.

그것은 이예주 또한 별반 다를 바 없었다. 

매번 갖은 계략과 말발로 그녀를 이겨 먹고 사슬에 묶어 두기까지 하는 남자였다. 

그녀가 제 충신과 함께 사이좋게 손잡고 길거리를 나돌아 다니고 있는 것을 알면 그 미친놈이 어떤 식으로 난리를 칠지 상상만 해도 눈앞이 아찔해졌다. 

정신 건강을 위해 애써 람이 알게 될지도 모른다는 가정을 훌훌 털어 버려야 했다. 

이예주는 문득 한산한 거리 위로 쨍쨍하게 내리쬐는 정오의 태양을 올려다보았다. 

이런 식으로 나다니다가 조롱이의 주인 놈과 마주칠까 무서워 계속 후드를 푹 뒤집어쓰고 있었더니 등허리가 축축할 정도로 땀이 났다.

아침의 서늘함은 완전히 사라지고 어느덧 완전한 한낮이 되었다. 

이제 슬슬 돌아가 봐야 할 것도 같은데……. 

그 멍청한 들쥐 놈이 생각보다 멀리 못 가 벌써 잡히기라도 했다면 큰일인데.

“조롱아, 우리 이제 돌아가 봐야 하는 거 아니야? 너무 덥기도 하고.”

그녀가 조롱이를 돌아보며 물었다. 

큰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치곤 목소리에는 별로 급박함이 담겨 있지 않았다.

“에, 누나도 그 생각 했어여?”

“네 주인이 벌써 들쥐 잡아서 돌아왔으면 어떡해? 우리 둘 다 네 주인 손에 죽는 거야?”

그사이 동그란 모양에 가운데만 뻥 뚫린 새로운 형태의 건물에 시선을 빼앗긴 이예주가 흘러가듯 내뱉었다. 

조롱이가 고개까지 설레설레 저으며 답했다.

“들쥐를 벌써 잡았더라도 아직 안 돌아오셨을 거에여.”

“왜?”

“붉은 개가 어제 늦게 들어와서 자기도 꼭 주인님이랑 마을 구경할 거라고 그랬어여.”

“뭐어?!”

이예주가 불현듯 꽥 괴성을 지르며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그 우렁찬 목소리에 조롱이가 화들짝 어깨를 떨다가 덩달아 주춤 멈춰 섰다.

“왜, 왜여?”

“마을 구경을 한다고?!”

“에…… 네. 어젯밤에 테이블 위에 있는 누나 당과 보고 얼마나 화를 냈는데여. 그 오밤중에 주인님께 자기도 당과 먹고 싶다고 얼마나 노래를 불러 대던지……. 오늘 아침에 신나게 주인님을 따라나설 때까지 저랑 나비 아저씨는 붉은 개한테 말도 못 걸었어여.”

아마 오늘 주인님이 당과를 사 줄 때까진 밖에서 생떼를 부릴 거에여, 어휴. 

서슬 퍼런 기색을 내뿜던 붉은 개가 떠오른 조롱이가 덧붙였다.

조잘조잘 떠들어 대며 자연스럽게 다시 걸음을 옮기려던 조롱이는, 문득 근처에서 풍겨 오는 오싹한 아우라에 흠칫 놀라 발을 멈췄다. 

그의 눈에 여태 걸음을 옮길 생각은 않고 부들부들 몸을 떨고 있는 이예주가 보였다.

망할! 역시 당과 가게로 먼저 갔어야 했어! 

그녀의 온몸에서 흘러나오는 흉측한 기세에 조롱이가 주춤 물러섰다. 

그가 움찔거리며 제가 했던 말을 돌이켜 보던 그때, 인간 여자가 번쩍 고개를 쳐들고 사납게 소리쳤다.

“당장! 당장 돌아가자!”

“예? 어, 어디를여?”

“어디긴! 그 토깽이네 주점인지 모텔인지 거기로!”

“에? 에? 그레이네 주점이여? 갑자기 왜여? 밖에 나오고 싶어 했잖아여.”

“그 불여시가 네 주인 꼬드기고 있다며! 아악! 안 돼!”

그 말을 입 밖에 소리 내는 동시에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상상의 나래에 그녀의 낯빛이 순식간에 창백하게 질렸다. 

사이좋게 팔짱을 낀 채 네 당과가 맛있니, 내 당과가 맛있니 알콩달콩할 두 사람을 생각하니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 들었다.

아니 될 소리다, 절대로 아니 될 소리야! 누가 누구에게 당과를 사 준단 말인가! 

자신의 당과는 그 요망한 것이 자신을 헤치려고 했던 것을 눈감아 주는 대가로 받아 낸 것이건만!

한가득 당과를 선물받고 요망하게 꼬리를 치는 그 여시에게 다정한 검은색 눈깔로 ‘묻히지 말고 먹어라.’ 따위의 말을 할지도 모를 남자의 모습이 또 한 번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녀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절대로 안 돼!”

“뭐가 안 돼는데여?”

“그 당과! 붉은 개 말이야!”

“엥? 붉은 개여? 주인님이 붉은 개에게 당과를 사 주는 거여?”

“뭐든! 여하튼 그 요망한 것과 람이 같이 있으면 안 된단 말이야! 그니까 빨리 가자! 얼른, 얼른!”

속이 타들어 가는 이예주가 조롱이의 손목을 우악스럽게 잡아끌고 전투적으로 걷기 시작했다.

빨리 되돌아가서 떼를 쓰든, 졸라 대든 요망한 것을 그에게서 잡아떼어 놓아야 했다. 

그 생각이 온 머리를 지배해 그녀의 발길이 빠른 걸음에서 점점 뜀박질로 바뀌어 갔다.

“에엑! 누나! 예주 누나! 갑자기 왜 이래여! 그리고 이쪽 방향 아니란 말이에여!”

“뭐? 그럼 어딘데! 빨리 가야 되니까 앞장 서!”

사슬을 반대편으로 잡아당기며 걸음을 멈추길 종용하는 조롱이에게 다급히 외치며 그녀가 발걸음을 돌렸다. 

조롱이가 잔뜩 미간을 찌푸린 채 불만스럽게 떽떽댔다.

“주인님이랑 붉은 개가 벌써 돌아왔는지 어떻게 알아여!”

“일단 가서 어디 있는지 찾아내 가지고 떼어 내야지!”

“왜여?”

“그 요망한 것이 람에게 무슨 꼬리를 치고 있을지도 모르니까! 네 주인이 거기에 홀랑 넘어가면 어떡……!”

“그니까 왜여? 붉은 개가 주인님께 꼬리를 치든, 주인님이 붉은 개에게 당과를 사 주든 누나가 왜 둘을 떼어 놓냐구여. 지금까진 돌아가잔 소리 하나 안 하다가 갑자기…….”

이예주의 기행에 대해 이해가 가지 않는 점을 조롱이가 투덜투덜 토로했다. 

물론 빛나는 꽃을 버린 것을 들키지 않기 위해 시간을 끄는 것은 절대 아니었다, 절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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