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드 앤 매드 (115)화 (116/319)

“에? 에? 코코코코여?”

“코코코코가 아니라……! 아, 됐어. 코코든 코코아든 어쨌든, 네가 그거 사러 가지만 않았어도 그 망할 중딩놈들 만나서 이렇게 발목 붙잡힐 일은 없었을 거 아니야! 설마 늦게 온 주제에 못 사 온 건 아니겠지? 응?”

“아니에여! 사, 사 왔어여! 정말여!”

“그럼 어디 있는데.”

황조롱이가 허옇게 질린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골목에서 빠져나와 옥신각신하며 걸어온 지 꽤 됐다고 생각했는데, 하필이면 이예주의 발치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길바닥에 익숙한 종이컵들이 나동그라져 있었다. 

인간 여자가 못된 인간들한테 괴롭힘을 당하는 줄로만 알고 앞뒤 잴 것 없이 집어 던졌던 그 종이컵이 확실했다.

그땐 몰랐지. 

이 악마 같은 인간이 마냥 괴롭힘당하고만 있을 리가 없다는 것을, 멍청하게도 그땐 몰랐지.

조롱이는 이예주에게 설탕 국물을 집어 던졌다고 사실대로 말해야 할지, 아니면 그냥 지금이라도 사 오지 못했다고 거짓말을 해야 할지 짧은 시간 동안 수십 번을 더 번뇌했다.

그러나 문득 고개를 들어 인간 여자의 번뜩이는 두 눈을 보자 그 번뇌가 쓸모없는 것임을 깨달았다. 

어떤 대답을 해도 그녀가 ‘그래. 그래도 사 오느라 수고했구나, 조롱아.’ 하고 웃으며 넘기지 않을 거란 짐승의 강한 직감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래도 구해 주느라 그런 건데……. 

아무리 악마 같은 인간이라도 조금은 이해해 주지 않을까?

침을 한 번 꼴깍 삼킨 조롱이가 마지막으로 이예주의 인간성에 희망을 걸며 조심스럽게 그녀의 발 옆을 가리켰다.

“조기 있는데여…….”

“어디…….”

그녀가 그의 손길을 따라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눈에 익은 종이컵들이 끈적끈적한 갈색 액체 위에서 처참하게 굴러다녔다. 

지나가면서 누군가 밟기라도 했는지 포장이 되어 있지 않은 흙바닥 위로 죄 쏟아진 끈끈한 액체가 모래와 어우러져 변 덩어리처럼 변해 있었다.

이예주가 웃었다.

“하하. 저걸 나보고 먹으라고? 재밌다.”

“아니, 먹으란 건 아니구…… 아악!”

인적이 드문 동쪽 대륙 마을의 어느 길거리, 얼마 안 가 그곳에서 ‘뻑!’ 하는 나무 쪼개지는 소리와 함께 “아구구구! 나 죽네! 아구구구, 황조롱이 죽네!” 하는 훌쩍임이 연달아 울려 퍼졌다.

*       *       *

경극 배우보다 더욱 허옇게 들뜬 얼굴의 남자가 미친 듯이 거리 한가운데를 달렸다. 

그가 달리는 곳은 방금 전 있었던 추레한 골목 거리가 아닌, 아름다운 해안을 옆에 낀 채 시멘트와 벽돌로 걷기 좋게 포장된 값비싼 도로였다.

걸을 때 흔한 돌멩이 하나 채이지 않는 이런 길바닥은 동쪽 대륙에서도 딱 한 곳밖에 없었다. 

마을 입구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고 가장 최남단에 위치해 있는, 마을 안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의 부와 명예를 가진 지주들이 사는 곳.

“헉, 헉……!”

혀를 길게 빼물고 달리던 남자가 앞에 다가오는 한 무리의 인간들을 미처 피하지 못한 채 퍽, 거칠게 어깨를 부딪쳤다.

“으헉억!”

괴상한 소리를 내며 남자가 꼴사납게 넘어졌다. 

거대한 체구의 남자가 흉악스러울 정도로 불룩 튀어나온 배를 쓰다듬으며 그의 앞을 기세등등하게 막아섰다.

“뭐야! 어떤 빌어먹을 자식이 감히……!”

거대한 남자가 물먹은 종이처럼 힘없이 나동그라진 남자에게 험상궂은 얼굴로 욕설을 내뱉었다.

“미, 미, 미안합니다…….”

쓰러진 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고개를 조아렸다. 

저와 부딪친 하룻강아지가 누군지 확인한 거대한 남자는 그를 보고 험상궂었던 얼굴을 더욱 일그러뜨렸다.

사람이 넘어졌는데 그에 대한 사과 한마디 없었다. 

뚱뚱한 남자는 똥 씹은 얼굴로 넘어진 이에게 아는 체를 했다.

“아니! 제드 도련님이 아니십니까?”

“아, 아, 안녕하세요, 데, 데이비슨 아저씨.”

제드가 허옇게 질린 얼굴로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답했다.

데이비슨의 뚱뚱한 체구와 어울리지 않는 결 좋은 머리칼이 햇빛을 받아 붉게 타올랐다. 

그는 아버지의 오른팔이나 다름없는 욕심 많은 사내였다. 

아까 자신을 때린 빨간 머리의 아버지이기도 했다.

“대체 어딜 갔다 오시는 겁니까? 족장님이 많이 찾으셨습니다.”

“조, 조, 족장님이요? 우, 우리 하, 할아버지요?”

제드의 되물음에 뭐 이런 병신 같은 놈이 다 있냐는 듯이 뚱뚱한 남자가 와작 얼굴을 구겼다.

“도련님, 벌써 잊으셨습니까? 선대 족장님은 어제 별세하셨지 않습니까. 아무리 머리가 모자라시더라도 그렇죠. 당장 오늘 밤 도련님의 아버지이신 차기 족장님의 취임식 때문에 지금 마을 지주들은 모두 비상이 걸린 상태인데요. 도련님은 대체 뭘 하고 다니느라 족장님의 화를 저렇게 돋워 놓으셨는지 모르겠습니다. 도련님의 멍청한 행동 때문에 관계도 없는 제 아들까지 붙잡혀 있지 않습니까.”

“…….”

“손이 발톱으로 변한 신인류 괴물은 또 무슨 머저리 같은 소리입니까? 족장 일가에 저주를 내린 괴물이라뇨? 아직도 그런 헛소문을 믿으시는 겁니까?”

깍듯한 경어체로 자신을 깔아뭉개는 뚱뚱한 남자의 앞에서 움찔움찔 떨기만 할 뿐 제대로 된 말 한마디 못하던 제드는, ‘족장 일가에 저주를 내린 괴물’이라는 말에 바르르 몸을 떨었다. 

자신이 멍청하게도 괴물을 보고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던 사이, 자신을 괴롭혔던 지주 놈의 아들들이 저택으로 가서 모든 것을 말해 버린 것이다.

앞에 서 있는 이 남자는 모른다. 

할아버지와 아버지 그리고 자신, 이 셋을 제외하곤 아무도 모른다.

아니, 알고는 있겠지. 

수십 년 전 족장을 찾아온 신인류가 족장에게 어떠한 저주를 내렸다는 것은 마을 전체가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말더듬이인 아버지와 저 따위가 아니었다. 

그 저주가 선대 족장이었던 제드의 할아버지에게 어떤 식으로 영향을 미쳤는지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 문제였다. 

헛소문이라니. 그건 절대 헛소문이 아니야.

허옇게 질린 얼굴로 벌벌 떨기만 할 뿐 아무 대답 없는 제드는 불현듯 멱살을 와락 잡아당기는 강한 힘에 헉, 소리를 삼키며 질질 끌려갔다. 

두툼한 코가 제드의 볼 살에 곧장 박힐 만큼 남자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왔다.

“무슨 헛소리를 지껄이고 다니는지는 모르겠지만, 개수작은 작작 부리는 게 좋을 거야. 안 그래도 요즘 네 아비의 뒤치다꺼리를 하고 다니느라 아주 골치 아프단 말이야. 말더듬이 병신 둘이 족장이 된다는 것이 어디 가당키나 한 일인가?”

“…….”

“기껏 족장 자리에 앉혀 주겠다고 양보했으면, 입 다물고 시키는 일이나 잘 할 것이지. 주제도 모르고 헛소리를 떠듬대는 건 아비나 아들이나 똑같구나. 하지만 기억해 두렴. 네 아비가 주겠다고 약속한 돈이 없었으면 이런 소꿉놀이도 끝이라는 것을.”

그 말을 끝으로 뚱뚱한 남자는 제드의 멱살을 거칠게 놓고는 더러운 것을 만졌다는 양 재빨리 손을 털었다. 

남자의 아들도 곧잘 하던 행동이었다. 그들은 마음 내킬 때마다 제드를 때리고 짓밟으면서도 말 더듬는 병이 옮기라도 할까 봐 허겁지겁 손을 닦아 내는 겁쟁이들이었다.

그래, 겁쟁이들. 말을 더듬는 것은 옮지 않는 것인데. 

그러나 제드는 그 생각을 굳이 입 밖으로 내는 멍청한 짓은 하지 않았다.

“그러니 그 헛소리는 대충 집어치우고 내 아들 녀석을 빨리 집으로 보내 주시겠습니까, 도련님? 족장님의 연회에 아들놈을 데려가려면 속히 씻겨야 하거든요. 녀석이 원체 활발하다 보니 더러운 병 같은 것을 옷에 묻히고 돌아다닐지도 모르니까요. 부탁 좀 드립니다, 도련님.”

멱살이 놓인 반동으로 휘청거리는 제드를 거대한 거구로 기어이 밀쳐 넘어뜨린 남자는, 외형과는 다르게 빠른 발걸음으로 쌩하고 사라졌다.

딱딱한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은 채 멍하니 앉아 있던 제드는 이내 새파란 얼굴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달리기 시작했다.

데이비슨의 아들이 저택에 있다면 아버지가 벌써 저주를 내린 괴물의 존재를 알게 되었을 것이다. 

그는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자꾸만 풀리는 다리에 힘을 주었다.

저주를 내리는 괴물을 만났다. 

그토록 찾아 헤맸던, 저주를 풀 수 있는 근원을.

“아, 아, 아부지! 아부지!”

쾅! 제드가 부서져라 문을 열어젖히며 어제까지 할아버지의 집무실이었던 방 안으로 들어섰다. 

예상대로 방 안엔 이미 지주의 아들놈들과 낯익은 사람들이 가득 차 있었다.

“이렇게요. 발가락은 이렇게 구부러져서 네 개 달려 있었고 끝에는 이만한 발톱들이 달려 있는데…….”

데이비슨의 아들, 빨간 머리가 손가락을 구부려 발톱 모양을 만들어 보이면서 마을 족장에게 무언가를 열심히 설명하고 있었다.

다른 아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제각각 옆에 붙어 앉은 화가에게 아까 전에 본 것을 열심히 설명하고 있었다. 

굳이 묻지 않아도 그것이 뭘 설명하고 있는지 알 만했다.

늦었다. 제드는 헐레벌떡 뛰어 들어온 자신을 흘긋 곁눈질하는 아이들을 보고 입안의 살을 악물었다. 

그들의 눈에는 평소 제드를 깔보던 것과는 다르게 어딘가 기묘하고 석연치 않은 기색이 잔뜩 서려 있었다.

빨간 머리 옆에 붙어서 그 애가 무슨 말을 하든 미친 듯이 고개를 꺼떡이던 아버지가 그제야 들어온 제드를 눈치채고 득달같이 달려왔다. 

그 기세가 무시무시하고 흉포했다.

“대, 대체 어디 있다가 이, 이제 온 거야! 이, 이 멍청하고 벼, 병신 같은 놈!”

빨간 머리의 아버지인 데이비슨만큼은 아니지만, 족장의 외아들로서 기름진 것들만 족하게 먹고 지내 온 아버지는 그 짧은 거리를 달리듯 빠르게 걸어온 것이 힘들었는지 금세 얼굴이 시뻘게졌다.

제드는 저보다 키가 작은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아버지는 객관적으로나 주관적으로나 뚱뚱했다. 

데이비슨처럼 커다란 체구가 더해져 위협적인 인상을 주는 것이 아니었다. 

아버지는 그저 키가 작고 뚱뚱하고 다소 신경질적이었다.

못 먹고 자란 마을 외곽의 아이들처럼 삐쩍 마른 제드와는 많이 달랐다. 

키가 제법 큰 제드는 안타깝게도 소심한 성격 탓에 항상 구부정하게 허리를 굽히고 다녀, 그의 키가 꽤 크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드물었다.

노발대발하는 아버지에게 제드는 파리한 얼굴로 우물쭈물 변명을 늘어놓았다.

“그, 그게요, 아부지. 그, 그게 조금 이, 일이 생겨서…….”

철썩― 

그 순간 오른쪽 볼을 강타하는 묵직한 타격에 제드가 뺨을 움켜쥐고 아버지를 내려다보았다. 

물론 더 이상 말을 이을 수도 없었다.

“그, 그렇게 더, 더듬으며 마, 말하지 말라고 했지 않느냐! 버, 버, 버벅거리지 말고 또, 똑바로 말해! 그리고 다, 다른 사람 앞에선 조, 족장님이라 부르라고 누, 누누이 말했지 않아!”

“죄, 죄, 죄송…….”

“또, 또, 또!”

제드가 저보다 작은 아버지에게 고개를 조아리며 조심스럽게 사과의 말을 내뱉었지만, 아버지의 화는 쉽게 풀리지 않았다.

엄하게 지적하려던 그조차 말을 더듬어서 ‘또’를 세 번이나 소리쳤다. 

다른 사람이 보기엔 꼭 희극의 한 장면처럼 우습기 짝이 없는 광경이었다.

“저, 족장님. 실례지만…….”

보다 못한 족장의 전용 화백이 그를 말렸다. 

아버지가 다른 이의 부름에 눈에 줬던 힘을 풀고 어색하게 웃었다.

“그, 그래, 화백. 무, 무슨 일인 겐가?”

“대충 몽타주에 대한 설명은 끝난 것 같습니다. 도련님들이 적극적으로 협조해 주신 덕에 쉽게 그릴 수 있었지요.”

“그, 그, 그런가? 모, 몽타주를 다 그렸단 말이야?”

족장이 반색을 하고 화백이 내미는 종이를 바라보았다. 

제드도 그 종이에 뭐가 그려져 있는지 궁금했지만 아버지의 커다란 머리에 가려 그림의 자태는 좀체 보이지 않았다.

“이, 이놈만 잡으면 되, 되는 거겠지? 뭐, 뭐 또 다른 다, 단서나 혹은 이, 일행은 없었느냐?”

그사이 기분이 좋아진 건지 족장이 헤벌쭉한 얼굴로 빨간 머리에게 물었다. 

빨간 머리는 잠시 미묘한 눈으로 제드를 바라보며 무언가 말하기를 주저했다. 

그러자 옆에 앉아 있던 다른 지주의 아들이 냉큼 대답했다.

“노예가 있었어요!”

노예 따위에게 어이없이 당한 것이 분했는지, 아이들이 앞다퉈 정보를 쏟아 냈다.

“맞아요! 여자 노예요. 그 미친 아줌마가 주먹으로 게르를 한 방에 쓰러뜨렸어요!”

“맞아!”

“여, 여자 노예? 그, 그건 또 무엇이야! 어, 어, 어떻게 생긴 계집인데? 어, 어떤 힘을 가진 계집인 거냐! 호, 혹시 그 노예도 신인류인 것이냐!”

족장이 급격하게 낯빛을 바꾸며 허겁지겁 아이들에게 물었다.

아이들은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이내 힘없이 답했다. 

미친 아줌마라고 당당하게 욕지거리를 내뱉을 때보다 조금 더 힘이 없는 목소리였다.

“사슬에 묶여 있었는데…….”

“사, 사슬? 어, 어떤 사슬이었느냐? 오, 옷차림은 어땠고!”

“그냥 포대 같은 커다랗고 검은 로브를 뒤집어쓰고 있었어요…….”

“새, 새! 새, 생김새는!”

급하게 물어보는 탓에 흥분한 족장은 평소보다 더 심하게 말을 더듬었다.

족장의 질문에 아이들은 서로 눈치를 보며 우물쭈물했다. 

사실 커다랗고 펑퍼짐한 옷을 걸친 채 후드를 깊게 눌러쓰고 있었기에 그 여자 노예의 얼굴이 정확하게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런 커다란 로브야 대륙 이쪽저쪽을 여행하는 방랑객들이라면 누구든지 입는 것이다. 

지금도 돈이 없는 마을의 하층민은 대충 검은 천을 잘라 내어 몸에 두르고 다니기 때문에 ‘검은색 로브’를 걸치고 있다는 것은 큰 특징이 되지 못했다.

족장이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퍽퍽 내리치며 아이들을 재촉했다.

“왜, 왜 말이 없는 게야? 그, 그 계집도 신인류였던 것이냐? 으, 응?”

“히, 힘이 무식하게 셌어요.”

“목소리도 엄청 컸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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