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손길을 따라 시선을 옮겨 꽃을 확인한 황조롱이는 제가 방에서 꽃을 본 적이 있었나, 곰곰이 고민했다.
그러나 방 안의 테이블 위에는 꽃은커녕 화병도 존재하지 않았다.
여상한 목소리로 ‘아니여, 못 봤는데여?’ 하고 대답하려던 그는 순간 떠오른 기억에 ‘헉!’ 하고 날카롭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러고 보니, 어제 주인님께서 내미신 화병에 바싹 타서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던 식물, 아니 꽃이 꽂혀 있었던 것 같기도…….
주인님이 차갑게 웃는 얼굴로 제게 그것을 건네며 뭐라고 하셨던가.
―갖다 버려라.
황조롱이는 주인님의 말을 충실히 지켜 그것을 들고 골목 한편에 있는 쓰레기장으로 향했다.
바싹 탄 꽃은 화병에서 뽑으려고 잡자마자 순식간에 재가 되어 손 안에서 바스러졌다.
화병은 그대로 쓰레기장 한구석에 놓았었는데, 잠시 한눈을 파는 사이 거적때기를 걸친 어떤 거지가 잽싸게 다가와 훔쳐 갔다.
어차피 버리려던 것이었다.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황조롱이는 주인님의 임무를 완수했다.
한마디로, 완벽하게 갖다 버린 것이다.
“왜 그래? 봤어?”
그러나 맹세코 이 악마 같은 인간의 물건인 것을 알았다면, 제아무리 주인님께서 내리신 지엄한 명령이라 해도 손조차 대지 않았을 것이다.
기이한 소리를 내며 얼굴에서 핏기가 가신 황조롱이가 이상한지 이예주가 그의 얼굴에 제 얼굴을 바짝 들이대며 물었다.
그러자 황조롱이가 기겁을 하고 뒤로 후닥닥 물러났다.
“히익! 아, 아, 아니여! 아무것도 못 봤는데여?!”
“그래? 아까 방에서 나올 때 정신이 없어서 꽃 생각을 못했네.”
“그, 그, 그거 주, 중요한 거예여?”
“응, 중요하지! 나 집에 돌아갈 때 꼭 가지고 가려던 건데.”
정말 중요한지 재차 고개까지 끄덕이며 강하게 긍정하는 그녀의 모습에, 황조롱이는 2차로 숨이 컥 막히는 것을 느꼈다.
주인님께서 바싹 태운 그 꽃이, 인간 여자에게 중요한 것이다.
중요한 것.
그 말이 무거운 납덩이처럼 황조롱이의 납작한 새가슴에 쿵 내려앉았다.
이예주를 담은 그의 커다란 황금안에 두려움이 물씬 차올랐다.
주인님이 그것을 태웠고, 다 타 버려 죽은 꽃을 제가 가져다 버렸다는 것을 알면 이 인간이 또 어떤 악마로 변할까.
아무리 주인님이 시킨 일이라고 우겨 봤자 인간 여자의 손에 죽어나는 것은 저뿐일 것이다.
그것은 꽤 오랜 시간 이 인간과 여행 동료로 지내며 황조롱이가 몸소 체험하여 배운 눈물겨운 깨달음이었다.
“비싼 꽃이라 그런지 밤에는 빛도 나더라. 너도 빛나는 꽃 알아?”
“…….”
“뭐 알아서 방에 잘 있겠지. 꽃에 발이 달려서 도망갈 것도 아니고 말이야. 그치, 조롱아.”
황조롱이는 대답 대신 창백한 얼굴로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얼굴은 겁에 질려 이제 시푸르뎅뎅하게 변색되고 있었다.
다행히도 미처 그 얼굴을 살피지 못한 이예주는 자리에서 일어나 엉덩이를 툭툭 털었다.
“그럼 이제 그만 다시 돌아가자.”
“누나!”
그 순간 황조롱이가 거의 상체를 던지다시피 날려 이예주의 팔목을 붙잡았다.
왜, 왜 이래?
당황한 이예주가 그의 손을 떨치기도 전에, 황조롱이가 필사적으로 그녀를 잡아당겨 다시 제 옆에 앉혔다.
다급하게 말하는 그의 얼굴에는 마치 똥마려운 강아지처럼 애처로움과 절박함이 가득했다.
“우리 좀만 더 있다가 가여!”
“왜? 네 주인 오기 전까지 돌아가야 한다며.”
“새, 생각해 보니까여! 그냥 주인님 오실 때까지 기다렸다가 같이 들어가는 것두 좋을 것 같아여!”
이예주가 눈살을 찌푸렸다.
“너 좀 이상하다? 방금 전까지 10분 남았다고 닦달할 땐 언제고…….”
“이, 이, 이상하긴 뭐가여? 그런 거 없는데여?”
“말도 더듬는데?”
“하하. 더, 더듬는다니여! 저 그런 거 없어여! 그냥 들어가면 누나 답답할까 봐 그런 거져!”
황조롱이가 등 뒤로 흥건하게 흐르는 식은땀을 무시하며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얘가 왜 이러나.
지 주인이라면 신 모시듯 떠받들던 놈이, 뜬금없이 저를 위한답시고 밖에 있는 시간을 늘이다니.
“너…….”
수상한 기운이 폴폴 나는 그 모습에 이예주가 눈을 가느다랗게 뜨며 황조롱이를 위아래로 흘겼다.
호, 혹시 눈치챈 건가?
황조롱이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꼴깍 삼키며 속으로 달달달 떨고 있을 때쯤. 별안간 그녀가 조롱이의 어깨에 제 어깨를 퍽, 부딪쳐 왔다.
“너도 사실 방 안에만 있기 심심했던 거지?”
“아…….”
“자식, 진작 말하지! 그럼 괜히 힘 안 빼고 사이좋게 나왔을 거 아냐! 하여간에 누가 그 인간의 부하 아니랄까 봐.”
갑작스런 어깨 공격에 마른 가지가 흔들리듯 맥도 못 추리고 휘청이던 황조롱이는, 이예주의 입에서 전혀 다른 소리가 나오자 어안이 벙벙하여 멍하니 그녀를 올려다보기만 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불리한 상황을 귀신같이 알아차리던 인간 여자는 아직 꽃의 부재를 눈치채지 못한 듯 호탕한 웃음을 띠고 있었다.
황조롱이는 주인님이 오실 때쯤 그와 같이 들어가 인간 여자의 무지막지한 꿀밤으로부터 벗어나려던 계획이 먹혔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당장은 넘겼다곤 하지만, 그다음은?
나중에 완전히 바싹 탄 꽃을 제가 가져다 버린 것을 알게 되어도 이 인간이 과연 고이 넘어가 줄까?
산 넘어 산이렷다.
하얗게 타 버린 꽃처럼 바싹바싹 타들어 가는 그의 속도 모르고, 인간 여자는 옳다구나 하고는 완전히 자리를 잡고 바닥에 편하게 앉아 버렸다.
그 모습에 황조롱이는 울상을 지었다.
“전 부하 아니에여. 신인류라고 했잖아여. 주인님과 계약을 맺은 신인류…….”
“뭐 어쨌든! 아무튼 방구석에 박혀 있지만 말고 여기 앉아서 네 주인이나 기다리자구.”
황조롱이는 뱃속 깊은 곳에서 터져 나오려는 한숨을 가까스로 참았다.
갈증으로 목이 메는 것만 같아, 그는 방금 전의 이예주처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엉덩이를 툭툭 털었다.
“그, 그럼 저는 누나가 좋아하는 코코코코 설탕 국물 하나 더 사 올게여.”
“코코코코 아니라니까. 근데 오늘따라 이상하다? 네가 나서서 자꾸 뭐 해 주려고 하고. 너 혹시…….”
“호, 혹시는 뭐여! 저, 저도 마시고 싶어서 그런 거예여!”
“그래? 빨리 갔다 와.”
아님 말지, 아까부터 왜 저렇게 제드처럼 말은 떠듬거리고 그래?
괜히 언성을 높이는 황조롱이의 목소리에 이예주가 입을 삐죽거렸다.
상황을 모면하려 잽싸게 뛰어가던 황조롱이는 몇 걸음 안 가 걸음을 멈추고 이예주를 슬쩍 돌아보며 당부했다.
“어디 가면 안 돼여! 여기 가만히 있어야 해여, 누나!”
“알았어.”
저를 위해 코코아를 다시 사다 준다는 조롱이가 고마워, 그녀는 조롱이를 만난 이래 가장 온순한 얼굴로 고분고분 대답했다.
그러나 그런 그녀의 노력이 가상하지도 않은지, 조롱이 녀석은 다시 코코아 가게를 향해 뛰어가다가 또 한 번 멈춰 서서 1초 전과 같은 말을 반복했다.
“절대루여! 절대루 어디 가면 안 돼여! 어디 가면은, 진짜 저…….”
“알았다니까!”
몇 번이나 말해! 조롱이의 신신당부는 결국 이예주의 입에서 짜증 섞인 큰 소리가 튀어나온 후에야 멈췄다.
말문이 막힌 조롱이는 금세 멀어졌다.
인간 여자가 혹시 도망갈지 몰라 빠르게 설탕 국물 가게에 다녀오려던 그는 골목길을 정신없이 빠져나오다가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의 기우와는 다르게 이예주는 도망갈 생각 따윈 완전히 없는지 손목에 매달린 사슬을 바닥에 늘어뜨리곤 팔자 좋게 쭈그려 앉아 있었다.
황조롱이는 왠지 부아가 치밀어 설탕 국물 따위 괜히 사다 준다고 했다며 후회했지만, 곧 고개를 흔들었다.
괜히 옆에 있다가 말 잘못해서 인간 여자의 물건을 버렸다는 것을 들키는 것보다는 나은 일이다.
암, 암! 훨씬 나은 일이지.
숲에서 사막으로 넘어가는 동안, 이무기의 여의주를 냇가에 집어 던진 일을 주인님께 일렀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인간 여자에게 당했던 일들을 생각하면 아직도 치가 떨리고 등골이 서늘한 그였다.
으으!
몸을 한번 부르르 떤 황조롱이는 발걸음을 재촉하며 오늘도 제 박복한 신세를 한탄했다.
히잉, 완전 하인이 따로 없어.
* * *
“얘는 대체 코코아를 심어서 키워 오나. 왜 이렇게 안 오는 거야.”
못해도 30분은 훌쩍 지난 것 같은데, 아직까지 조롱이는 코빼기도 비치지 않았다.
이예주는 인상을 벅벅 쓰며 거리로 나가는 골목 입구 쪽을 바라보았다.
아까 전엔 나름 신선했던 거리와 건물도 계속 보니 이제 질릴 지경이었다.
여전히 쭈그려 앉은 상태로 그녀는 하늘을 향해 고개를 쳐들었다.
이제 서서히 아침이 가려는지 선선했던 조금 전과는 다르게 기온이 퍽 따뜻해졌다.
그늘졌던 골목골목까지 햇볕이 침투하는 것을 보자, 이예주는 슬금슬금 움직여 그늘 쪽으로 더욱 몸을 웅크렸다.
징글맞고 끔찍하기만 했던 사막을 건넜던 탓인지, 뙤약볕 아래 앉아 있는 것은 정말 팔족 족장의 저택에 있는 것만큼이나 싫었다.
여기 동쪽 대륙은 해안 근처라 다행스럽게도 바람이 세게 불었지만, 그렇다고 바람이 이 빌어먹을 검은색 포대 안까지 뚫고 들어올 리는 없으니 태양 아래 더위는 모두 그녀 혼자만이 감수해야 하는 것이다.
저에겐 이런 쪄 죽을 만한 옷을 입히고, 그놈은 야시시한 옷을 입은 붉은 개와 함께 잘도 마을 안을 돌아다니겠지.
두껍기 짝이 없는 저주받을 옷자락을 만지작거리다가 그런 생각이 이어지자, 이예주의 머릿속에선 아까 이른 아침에 연상되었던 영화가 자동으로 재생되었다.
그러고 보니 완전 외간 여자가 막 들이대는데 그 남잔 왜 철벽도 안 치는 거야?
나한테는 매일같이 멍청하니, 어리니 그리도 철벽을 쳐 대더니!
“아오, 아오, 아오! 역시 그 당과 가게 근처로 갔어야 하는 건데!”
그 둘이 찰떡처럼 붙어 알콩달콩 당과를 사 먹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자, 있는 짜증 없는 짜증이 다 솟았다.
그녀는 허공을 향해 주먹질을 해 대었다.
그러자 손에 달린 주인 잃은 사슬이 허공에 쩔컹쩔컹 소리를 내며 뱀처럼 춤을 췄다.
두어 번 더 주먹질을 반복하던 이예주는 무거운 수갑을 찬 오른쪽 팔뚝이 아릿하게 당겨 오자 곧바로 그 짓을 관두었다.
다시 곱게 팔을 내려 무릎을 끌어안은 그녀는 잔뜩 불만이 서린 얼굴로 중얼거렸다.
“이게 뭐야. 노예도 아니고 개처럼 묶여서…….”
이제 풀어 줄 때도 된 것 같은데, 왜 아직도 이렇게 갑갑하게 묶어 놓고 지는 좋을 대로 나다니는지 모르겠다.
진짜 개는 자신이 아니라 바로 그 요망한 붉은 개이건만!
“치, 나 과거로 돌아가고 후회나 하지 마라.”
아니, 땅을 치고 후회하라지.
울며불며 제발 돌아오라고 외쳐도 절대로 두 번 다시 이 미친 곳에 안 올 테니까.
그렇게 제 옆에 존재하지도 않는 남자를 향해 이예주가 차마 앞에선 절대로 못할 악담을 퍼붓는 사이, 그늘진 곳과 양지의 경계가 점점 높이 뜨는 태양으로 인해 조금 더 그녀 쪽으로 다가왔다.
운동화 코에 아슬아슬하게 경계선이 걸리자 이예주는 슬금슬금 엉덩이를 움직여 뒤로 조금 더 물러났다.
하지만 이것도 얼마 못 갈 것을 그녀 또한 잘 알았다.
이제 곧 제 머리 위로 뙤약볕이 쏟아질 테지.
그러면 코코아를 사러 간 조롱이가 올 때까지 저 혼자 더위와 싸워야만 할 테고. 망할, 흑.
해가 중천에 뜬 하늘과 경계가 선명한 땅을 번갈아 바라보며 이예주는 좋지 않은 말들을 끊임없이 중얼댔다.
다가올 더위가 두려운 나머지 자신이 입은 포대가 시한폭탄 같다는, 영양가 없는 상상조차 다 떠오를 지경이었다.
“그나저나 여기 골목은 으스스하게 왜 사람도 하나 안 다닌다냐.”
아직도 털끝 하나 보이지 않는 조롱이를 기다리며 두 번째로 골목 어귀를 살피던 그녀는 혼잣말을 했다.
입 밖으로 내뱉고 보니, 정말 훤한 대낮인데도 불구하고 그녀가 있는 골목은 사람 하나 나다니지 않은 채 침묵 속에 잠겨 있었다.
조금만 걸어 나가면 중앙 거리인 것이 믿기지 않을 만큼 고요한 공간이었다.
이런 데는 삥 뜯기기 딱 좋은데.
학창 시절에도 혹여나 무서운 친구들을 만날까 뒷골목은 멀찍이 돌아 피해 다니던 과거를 용케 생각해 낸 이예주는, 혹시 이 마을에도 불량 청소년들이 있을까 휘휘 주위를 둘러보며 경계했다.
그러나 불량 청소년들은 개뿔, 골목 안은 그녀를 제외하곤 사람 그림자 하나 보이지도 않았다.
설령 누가 삥 뜯으러 온다고 해도 뜯길 돈 한 푼 없었지만.
“……맞아. 나 진짜 아무것도 없지.”
람이 선물해 준 포대에 거북이처럼 꾸물꾸물 몸을 구겨 넣던 이예주는 골목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곤 민망함에 머리를 긁적였다.
어쨌거나 아무도 없는 데서 오래 있으니 오만 가지 생각이 다 든다.
조롱이가 오면 빨리 다시 그레이의 주점으로 돌아가거나 아니면 사람 많은 데로 나가든가 해야지.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반대편 어귀에서 등장한 한 무리의 불량배를 보고 이예주는 제가 내뱉은 말이 씨가 됐음을 통렬하게 깨우칠 수 있었다.
“이, 이, 이거 놓아라! 노, 놓으래도!”
대여섯 명의 남자아이들이 한 남자의 멱살을 우악스럽게 잡아끌고 와 그를 골목 구석에다 패대기를 쳤다.
쿵 하는 묵직한 소리와 함께 짧은 비명이 들려왔다.
그러나 남자아이들의 낄낄대는 웃음소리에 비명은 금방 파묻혀 버렸다.
뭐야? 설마 삥 뜯는 거야?
이예주는 더럭 겁을 먹고 제가 기대고 있는 건물 외벽 쪽으로 바짝 몸을 붙였다.
무리는 그들보다 골목 안쪽에 앉아 있는 그녀를 아직 발견하지 못한 듯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