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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 앤 매드 (110)화 (111/319)

사실 지금 조롱이가 사는 세상의 인간은 앞서가는 종족이 아니었다. 

1000년 후의 인간은 오히려 과거보다 훨씬 퇴보했다. 

소를 이용해서 농사를 짓는다는 것도 모두 옛날이야기다. 

21세기는 바야흐로 기계가 모든 인력을 대신해 생산하던 시대였다.

비록 람이 무언가 저주 같은 것을 내려 인간들이 농사를 짓지 못하게 되었다 해도, 기계만 있으면 굳이 신인류와 결탁하여 밭일을 하지 않아도 될 텐데. 

기계만 있으면 말이지.

하지만 혼란스러운 그녀의 얼굴을 미처 보지 못한 조롱이는 자신만의 회한에 빠져 잠시 말을 멈췄다가 시무룩한 표정으로 덧붙였다.

“그래두…… 그래두 너무 많이 바뀌어 버려서 슬퍼여. 조금쯤은 옛날 모습이 남아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마을 입구에서도 마치 이곳을 잘 안다는 듯이 말했던 조롱이가 또 그와 비슷한 말을 했다. 

이예주는 그의 혼잣말에 눈을 크게 뜨다가 이내 조심스럽게 물었다.

“여기서…… 살았었어?”

조롱이는 대답 없이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덕분에 사슬이 다시금 팽팽해져 이예주 또한 본의 아니게 걷게 되었다. 

어쩜 이렇게 세세한 것까지 지 주인을 똑 닮았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성질을 내기도 전에 조롱이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예전에여. 이렇게 일찍 돌아올 생각은 없었는데…….”

“이게 무슨 일찍이야. 몇십 년 만이면 찾아올 만한 거지. 좋게 생각해.”

“좋게 생각하긴여! 이게 다 누나 때문이잖아여! 힝.”

조롱이가 매섭게 이예주를 노려보며 소리쳤다. 

제가 ‘문’을 넘어 동쪽 대륙에 온 것은 사실이었기에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침묵했다.

정말로 마을에 돌아오기 싫었던 것인지 조롱이에게서 침울한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어울리지 않게 축 가라앉은 조롱이의 어깨를 보자 이예주는 왠지 가슴이 찡해졌다.

자신 또한 집을 떠나서 이렇게 오랜 기간 개고생을 하고 있으니까. 

어찌 보면 아주 오랜만에 고향을 찾은 조롱이나 저나 동병상련인 처지다. 

그녀가 조롱이의 어깨를 툭 치며 괜히 활발하게 말했다.

“네가 살던 때에 마을은 어땠는데? 좋았어?”

“너무 오래돼서 기억은 잘 안 나여.”

“에이, 그래도 뭐 특별한 기억은 있을 거 아니야?”

“여기선 태어나서 자란 기억보다 인간들의 노예로 산 기억이 훨씬 더 많아여.”

“……응?”

이예주는 조롱이의 말을 잘못 들은 건가 싶어 멍한 얼굴로 되물었다. 

허튼소리가 아니었다는 듯, 그가 느릿하게 걸음을 옮기며 또박또박 말했다.

“하루가 시작되어 눈을 뜨면 언제나 쇠창살이 박힌 감옥 천장이었구, 다리에는 항상 무거운 납덩이가 매달린 사슬에 묶여 있었어여. 그 상태로 하루 종일 바닷가를 돌면서 물고기를 잡던가 아니면 밭일을 했구여.”

조롱이가 이어 말했다.

“인간들이 먹다 남긴 음식을 먹다가도, 일터로 돌아가는 것에 조금이라도 늦장 부렸다간 쏟아질 인간들의 채찍이 무서워서 동료들을 막 밀치고 달렸던 기억도 있구여. 악몽을 많이 꿔서 계속 기억을 안 하려고 하다 보니까 정말 기억이 안 나서…… 누나?”

황조롱이는 쩔컥하고 자신의 손을 잡아당기며 팽팽하게 늘어지는 사슬 때문에 놀라 말을 멈추었다. 

그가 뒤를 돌아보자, 어느덧 이예주가 우뚝 멈춰 선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누나, 왜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그래서.”

기도가, 숨구멍이 턱 막히는 기분에 그녀가 말을 멈추고 크흠, 목청을 가다듬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서 도망…… 도망친 거야?”

도망쳤냐는 소리에 조롱이가 팔짝 뛰며 부정했다.

“에, 에, 도망치긴여! 도망 안 쳤어여!”

“그럼…… 그럼 마을은 왜 떠났는데?”

“주인님이 자기랑 같이 다니다 보면 줄 수 없던 대가를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하셔서……. 근데 누나, 왜 그런 표정을 지어여?”

조롱이는 이예주를 보며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녀는 그제야 제가 괴상할 만큼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왜 그렇게 그런 걸 담담하게 말해? 

아무 일도 아니었다는 것처럼, 정말 별일 아니라는 것처럼 왜 그렇게 말해? 

금방이라도 쏟아져 나올 듯 턱 밑까지 차오른 말들을 꾹 눌러 참느라 목구멍이 따가웠다.

같은 마을을 보며 조롱이와 자신은 판이한 생각을 했다. 

자신이 고작 집으로 돌아갈 걱정을 하고 있는 사이에, 조롱이는 자신 때문에 매 순간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까맣게 잊고 있었다. 

사막에서도 얘기해 주었는데. 몇십 년간 사슬이 왼쪽 발에 묶여 있어서 발이 잘 자라지 않은 데다 흉까지 남았다고. 

그런데 자신은 그렇게 몇십 년간 사슬을 묶고 산 조롱이 앞에서 몇 시간 묶이는 것도 참지 못하고 조르고 떼를 써서 밖으로 나왔다.

모두 내 탓이다. 

자신이 동쪽 대륙으로 와서, 자신이 괜히 나오자고 떼를 써서 조롱이의 기억하기 싫은 상처를 후벼 파고 있는 것이다.

코끝이 아릴 정도로 시큰하고 맵다. 

너무 매워서 이렇게 만든 조롱이가 밉기까지 한 심정이었다. 

어느새 붉어진 눈가로 이예주가 조롱이를 노려보았다.

“그래서…… 그 대단한 대가란 건 아직도 못 받은 거고?”

“에, 아직 주인님이 때가 안 된 것 같다구…….”

“너, 너 똥 멍충이야? 왜 아직도 대가도 못 받고 무상으로 일을 하고 있어! 진짜 내가 저번에 사막에서도 빨리 받아 내라고 했어, 안 했어?”

“에엑! 내가 왜 똥 멍충이! ……누나, 울어여?”

제가 왜 멍청이냐고 따지려 들던 황조롱이가 황급히 말을 멈추고 이예주에게로 빠르게 다가왔다. 

그녀는 어느새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황조롱이는 그녀의 얼굴을 보려고 아래로 불쑥 고개를 들이밀었다.

이예주는 그가 보지 못하도록 재빠르게 소매로 벅벅 눈을 비빈 후 고개를 쳐들었다. 

움찔, 황조롱이가 물러나는 것과 동시에 그녀는 버럭 화를 내었다.

“……씨, 울긴 누가! 네가 하도 멍청하게 구니까 내가 다 화가 나잖아!”

“누나, 눈이 빨개여.”

“화나서 빨개진 거야! 너 때문에 화나고 짜증 나서! 아, 진짜 짜증 나니까……!”

벌게진 얼굴로 씩씩대던 이예주의 시선이 순간 황조롱이의 맑은 황금색 눈동자와 마주쳤다. 

티 하나 없이 멀끔한 동공 안에 못난 얼굴로 삐죽거리고 있는 제 모습이 비춰졌다.

일순 그녀는 온몸에 잔뜩 줬던 힘이 탁 풀리는 것을 느꼈다. 

그냥, 그냥 한마디면 하면 되는 건데. 

한마디면.

“……미안해.”

이예주의 두 눈에서 결국 닭똥 같은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그 모습을 마주한 조롱이의 눈동자가 또르르 굴러 나올 만큼 화등잔만 해진 것은 당연했다.

“예, 예? 가, 갑자기 뭐가…….”

“내가 동쪽 대륙에 와서 네가 하기 싫은 기억을 자꾸 하게 된 것도 미안하고, 사슬 풀어 달라고 떼쓴 것도 미안하고, 그냥 다 미안해. 미안해, 조롱아.”

“누나, 울지 마여. 안 미안해두 돼여, 누나.”

이예주의 울음기 가득한 목소리에 조롱이가 어쩔 줄 몰라 하며 손을 쑥 뻗어 그녀의 볼에서 떨어지는 것들을 닦아 주었다. 

그래도 눈물이 그치지 않자 그가 더욱더 당황한 얼굴로 고개를 마구 저었다.

“누나 잘못 아니에여! 이미 한참 지난 일이구, 또 이제 기억도 잘 안 나는걸여. 그니까 울지 마여, 누나.”

“흐어엉, 조롱아!”

황조롱이의 어색한 위로에 이예주는 되레 아이처럼 울음을 터뜨렸다. 

황조롱이가 덩달아 울상을 지으며 그녀의 얼굴을 연달아 닦아 내었다.

“아니, 울지 말라니깐여! 우, 우니까 더 못생겼잖아여, 히잉.”

“흐, 흐흑…… 뭐? 죽고 싶냐?”

마지막 말은 나름 들리지 않게 재빠르게 속삭였다고 생각했는데, 그걸 또 귀신같이 듣고 인간 여자가 눈을 부라렸다.

“아, 아니, 아니. 추, 추워서 말이 헛나왔어여.”

황조롱이는 재빨리 변명하며 고개를 휘휘 저었다. 

잠시 미심쩍은 눈초리로 그를 째려보던 이예주가 다시금 훌쩍훌쩍 대었다.

울면서도 자신을 노려보던 방금 전의 살벌한 눈빛에 황조롱이는 내심 가슴을 쓸어내렸다. 

하여간 못난 얼굴로 노려보니 더 악마 같단 말이야. 정말 무서운 얼굴이었어.

달달 떨리는 오금을 애써 진정시키며 황조롱이는 조심스러운 손길로 이예주의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방울들을 계속해서 닦아 주었다.

“이제 좀 가라앉았어여?”

조롱이의 물음에, 어느 회색 건물 앞에 쭈그려 앉아 있던 이예주가 ‘크헝!’ 하고 커다랗게 코를 들이마시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이거 요 앞에서 사 온 설탕 국물이에여. 마셔여.”

길거리 한가운데에서 엉엉 울음을 터뜨린 이예주 때문에 마을 사람들의 이목이 쏠리자, 조롱이가 허겁지겁 그녀를 끌고 온 곳은 인적이 드문 골목길이었다.

훌쩍이는 이예주를 놔두고 서둘러 다시 거리로 나갔다가 돌아온 조롱이는 작은 컵을 내밀었다. 

그녀는 두 손으로 그것을 받았다. 

한바탕 질질 짜서 그런지 손끝에 닿는 종이컵의 온기가 저릿저릿할 정도로 뜨거웠다.

“뜨거우니까 조심하구여.”

“코코아잖아?”

종이컵 안에 담긴 꺼먼 물을 바라보다가 이어 킁킁 냄새를 맡은 이예주가 반색을 하고 후루룩 들이켰다.

조롱이의 말처럼 혀가 데일 만큼 뜨거운 것도 잠시, 곧 달짝지근한 향이 입안 곳곳에 진득하게 퍼져 나갔다. 

우유도 넣은 건가? 

걸쭉하고 달큼한 맛이 목구멍을 넘어가자, 밑도 끝도 없이 땅을 파던 기분이 순식간에 나아지는 것 같았다.

몇 번 더 후룩후룩 숭늉을 들이켜듯 마시니 작은 종이컵에 담긴 코코아는 금방 동이 났다. 

끝에 쬐끔 남은 방울까지 탈탈 털어 마시고는 이예주가 입맛을 쩝쩝 다시며 아쉬움을 표했다.

“맛있다. 코코아 엄청 오랜만에 먹는 것 같아.”

“에? 에? 코, 코코요?”

생소한 단어인 듯 조롱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코코코코, 하고 발음했다. 

그 모습에 이예주가 비식 웃음을 터뜨리며 빈 종이컵을 흔들었다.

“아니, 코코아. 이거 이름이 코코아잖아.”

“이거 이름은 설탕 국물이에여. 인간들이 주로 먹는 설탕 나무 열매를 끓여서 만든 건데여? 코코코코가 아니라여.”

“코코코코가 아니라 코코아……! 됐어, 그만해. 코코아든, 설탕 국물이든.”

‘이건 코코코코 따위가 아니야!’ 하고 조롱이의 말을 정정해 주려던 이예주는 어차피 그에게 설명하긴 글렀다는 생각에 무의미한 실랑이는 그만두기로 결정했다. 

1000년 후의 시간대를 살고 있는 녀석에게 아무리 설명해 봤자 입만 아플 뿐이다.

분명 그만 싸우자고 하는 말인데 묘하게 자신을 무시하는 것 같은 어투라, 조롱이는 ‘씨잉!’ 하고 퍼덕거리다가 이내 그녀의 옆에 철퍽 주저앉았다.

“누나, 이제 10분도 채 안 남았어여.”

“알았어! 알았다고! 누가 30분 넘긴데? 초 치지 마!”

“알려 주는 건데 왜 화를 내구 그래여? 씽, 방금은 엉엉 울다가 또 순식간에 화내구! 완전 성격 파탄자야.”

“뭐? 이게!”

한마디도 지지 않고 떽떽대는 조롱이에게 이예주가 주먹을 들어 보이다가 ‘아오’ 하며 금방 화내기를 관뒀다. 

사실 그의 말이 조금은 맞는 것도 같았기 때문이다.

한바탕 울고 나니 이제 만사가 다 귀찮다. 

그런데 그만 그레이의 주점으로 돌아가긴 또 싫단 말이야. 이것도 싫고, 저것도 싫고. 이럴 땐 그냥 집에 가서 이불 뒤집어쓰고 누워 있는 게 상책인데.

하늘은 여전히 구름 한 점 없이 맑았고, 서늘한 바람이 이예주와 황조롱이 사이를 스산하게 스쳐 지나갔다. 

가을 날씨처럼 날도 딱 좋고, 골목엔 인적도 드물어 구경하기 또한 딱 좋은 환경인데. 

그런데 그걸 바라보는 심정은 좋지 않고 이상하기만 했다.

낯선 곳이라서 그런가. 사람 사는 곳 다 똑같다고 엄마가 그랬는데. 

그렇지만 여긴 똑같다고 보기엔 건물 양식조차 하나하나 너무 심각하게 다르단 말이야.

멍하니 주변 골목 풍경을 바라보던 이예주는 문득 건물들의 입구마다 무언가가 매달려 있는 것을 발견했다. 

어떤 건물에는 그녀도 잘 아는 하얀 꽃이 꽂혀 있었다.

당연히 알 수밖에 없었다. 

바로 어제 말더듬이 제드에게서 받았던 뤼미에르 꽃송이였으니.

비싼 꽃이라는 거짓은 아닌지, 한눈에 봐도 화려하고 커다란 건물 입구에만 뤼미에르 꽃이 한 송이나 두 송이씩 꽂혀 있었다.

반면에 그보다 조금 더 남루하고 허름한 건물 입구에는 꽃을 대신하듯 하얀색 천이 둥그런 뤼미에르 꽃 몽우리처럼 꽁꽁 뭉쳐져서 건물 입구에 매달려 있었다.

비싼 꽃을 다발로 가지고 있었으니 그 제드란 남자는 부잣집 도련님인가? 

심각하게 말을 버벅거리며 눈도 잘 못 마주치던 제드가 생각났다. 

생긴 것과 어울리지 않게 금수저를 물었네.

어찌 됐건 람이 그렇게 내쫓을 때 뒤도 돌아보지 않고 줄행랑을 쳤으니, 앞으로 이 마을에 있는 동안 다시 마주칠 일은 없을 테지만. 

이왕이면 꽃이나 좀 더 뜯어낼 걸 그랬다며 이예주는 실없이 생각했다.

그사이 시원한 바다 내음이 섞인 바람이 휘익 불어와 그녀의 들끓는 머릿속을 잠재웠다. 

꽃과 꽃을 닮은, 뭉쳐진 천들이 살랑살랑 움직였다. 

어쨌든 이 마을에서 조문할 때 쓰는 꽃은 백합이나 국화가 아니라 은방울꽃과 비슷한 뤼미에르인 것 같다는 결론이 났다. 

상여에도 한가득 실려 있었던 뤼미에르를 떠올리며 이예주가 코끝을 긁적일 때였다. 

그녀의 머릿속을 번뜩 스쳐 지나 것이 하나 있었으니―

“참! 그러고 보니 내 꽃!”

그녀는 까맣게 잊고 있던 진귀한 존재가 생각나 손뼉을 짝 마주 치며 몸을 들썩였다. 

저 비싼 꽃, 나한테도 있었는데!

“에, 예?”

“야, 조롱아. 혹시 너 숙소 방 안에, 그 테이블 위 화병에 꽂아 뒀던 꽃 못 봤어?”

“꽃이여?!”

“그래, 꽃. 뤼미에르라고 알아? 저기 있네, 저기에 꽂혀 있는 거랑 같은 거.”

이예주가 멀리 떨어지지 않은 건물 입구에 꽂혀 있는 둥글둥글하고 하얀 꽃봉오리가 달린 식물을 위풍당당하게 가리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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