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드 앤 매드 (109)화 (110/319)

“그, 그러니까 밖에 잠깐 나갔다 오자고 했잖아! 그럼 이렇게 개고생할 일도 없었을 텐데, 씨잉…….”

“그니까 지, 지금 누나 탈출하는 거예여어억?!”

황금색 눈동자에 경악과 충격이 혼잡하게 서렸다. 

그가 외친 말에 민망해진 이예주의 두 뺨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녀의 오른쪽 손목에 매달린 사슬이 허공에서 의미를 잃고 허망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뭐…… 그냥 잠깐 외출이라고 해 두면 안 돼?”

머쓱하게 한쪽 어깨를 으쓱거리며 대답하는 이예주 때문에 황조롱이는 뒷골이 뻑적지근하게 아파 왔다.

자신에게 이 사고뭉치 인간을 맡기고 간 주인이 이 장면을 본다면 과연 무슨 표정을 지을지 궁금해졌다. 

저렇게 창문에 꽉 낀 상태에서 벼락 맞고 죽지나 않으면 다행이리라.

황조롱이가 잠시 상상을 초월하는 인간 여자의 행태에 할 말을 잃고 멍청한 얼굴로 서 있을 때, 이예주는 조금 더 힘겹게 창문에 몸을 구겨 넣으며 환장할 소리를 지껄여 대었다.

“안 돼! 나 나갈 거야! 네 주인이 그 요망한 것한테 당과를 사 주는지, 안 사 주는지 내 눈으로 봐야겠다고!”

그렇다. 

뒤끝이 긴 이예주는 잊은 척했지만, 절대 잊지 않았던 것이다.

나가면 제일 먼저 그 당과 가게로 달려갈 것이다. 

그래서 같이 붙어 있는지 아닌지, 제 눈으로 직접 확인해 봐야 했다.

“주인님이랑 붉은 개는 각자 따로 행동할 거라구여!”

“어쨌든 난 이쪽 창문으로 나가 볼게. 넌 문으로 나오든지.”

“위험하니까 당장 내려와여!”

“2층밖에 안 돼서 별로 안 위험해.”

화장실 쪽은 건물 반대편으로, 아래에는 엊저녁 테라스에서 보았던 한산한 골목거리와는 달리 사람 손을 별로 타지 않아 보이는 무성한 풀들이 잔뜩 깔려 있었다.

이 정도면 완벽해. 

고소공포증이 있는 자신도 별로 다치는 일 없이 뛰어내릴 만했다. 

그러고 보니 높은 곳은 무조건 질색할 줄만 알던 자신이 이런 간 큰 생각도 다 하다니. 

지금껏 참 거칠게 굴려지긴 굴려졌구나, 예주야.

“정말 뛰어내릴 만한데?”

정말로 뛰어내릴 준비가 되었다는 듯 이예주가 흘끗 창문 너머를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그 말을 들은 황조롱이는 곧바로 그녀를 향해 몸을 날렸다.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재빠른 움직임이었다.

휘익! 

거의 날듯이 몸을 날린 황조롱이가 바닥에 이리저리 몸을 박으며 무언가를 낚아챘다. 

쩔그럭, 어느새 노란 닭발에서 인간의 손으로 변한 그의 두 손에 가득 쥐어진 것은 다름 아닌 허공에서 달랑거리던 이예주의 사슬이었다.

황조롱이가 사슬을 잡아당기는 바람에 느슨했던 오른쪽 손목이 순식간에 팽팽해졌다.

“뭐야! 놔!”

이예주가 깜짝 놀라 소리쳤다. 

황조롱이가 허옇게 들뜬 낯빛으로 필사적으로 고개를 휘저었다.

“절대 못 놔여! 누나 도망간 거 주인님이 알면 저 죽어여! 죽는다구여!”

“누가 도망간대? 나도 네 주인 무서워서 도망갈 생각 없어! 방구석에만 있기 답답하다구! 그냥 당과 가게 주위만 한번 산책하고 온다니까? 얘가 왜 이래!”

“누나야말로 정말 왜 이래여!”

황조롱이는 진심으로 울고 싶어졌다. 

이 인간 여자는 하루라도 조용히 있지 않으면 두드러기라도 돋는 병이 있는 걸까? 

주인님은 왜 이런 감당하기 벅찬 인간을 자신에게 맡기신 걸까. 

왜, 왜.

울상을 한 황조롱이는 끝내 사슬을 놓지 않았다. 

이예주는 씩씩거리며 몸을 창문 밖으로 더욱 밀어 넣었다.

“놔! 아니면 나 뛰어내린다? 응?!”

“아악! 내려와여!”

“뛰어내려! 확 마! 뛰어내려!”

다시 순순히 방으로 되돌아가 침대에 사슬에 묶여 있으라고? 

그럴 바엔 차라리 그냥 창문에서 뛰어내려서 자유를 만끽하련다! 

그녀가 강한 포부를 밝히며 마치 자살 퍼포먼스라도 부리는 사람처럼 패기 넘치게 황조롱이를 협박했다.

“놔! 놔! 뛰어내릴 거야! 안 놓으면 뛰어내릴 거야!”

“10분!”

황조롱이가 절박한 목소리로 타협안을 제시했다.

“뭐?”

“그럼 딱 10분만 밖에 나가여!”

이예주가 다칠 것을 걱정했는지, 아니면 뛰어내려서 그대로 도망칠까 봐 두려운 건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협박이 먹혀들었다.

그녀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잠시 고민했다. 

10분? 

10분은 개뿔. 

고작 10분 나가려고 내가 이 짓까지 했을쏘냐?

“……1시간.”

이예주가 조건을 새로 달았다. 

1시간이란 소리에 황조롱이가 사색을 하고 떽떽거렸다.

“무슨 1시간이에여! 주인님이 언제 오실 줄 알고! 절대 안 돼여! 15분!”

“그럼 40분.”

“20분!”

“야! 여기서 내려가서 화장실 바닥까지 닿는 데 10분 걸리겠다! 30분! 그 이하로는 협상 결렬이야! 난 창문으로 나가든 걸어서 방문으로 나가든 상관없는 사람이니까, 놔! 창문으로 나가게!”

그녀는 턱을 바짝 치켜들고 거세게 사슬에 잡힌 손목을 뒤흔들었다. 

이미 대세는 기울어 버린 듯, 사슬 끝을 쥐고 있는 황조롱이가 이예주 쪽으로 조금 끌려갔다.

“으이익!”

황조롱이는 분을 참지 못하고 온몸을 부들부들 떨다가, 이내 몸을 축 늘어뜨리고 두 손을 놓았다. 

쩔그럭! 

팽팽하게 당겨졌던 사슬이 반동으로 인해 변기 근처 벽에 거세게 부딪치며 시끄러운 소리를 내고는 다시 느슨해졌다.

“딱, 진짜 딱 30분만이에여. 진짜여!”

결국 황조롱이가 울먹거리며 패배를 인정했다. 

언제나 이예주와의 싸움에 져 주는 그였으나, 오늘은 어쩐지 더욱 처참하고 기운이 빠지는 패배였다.

하기야 대관절 그 누가 화장실 쪽창으로 탈출을 감행할 것이라 예상이나 했을까. 

이건 아마 위대한 제 주인님조차 예상치 못한 일임이 분명했다. 

언제나 예상을 뛰어넘어 경악스러운 짓을 저지르는 인간이었다.

창문에 억지로 몸 반쪽을 쑤셔 넣고 아슬아슬하게 걸터앉은 자세가 불편하지도 않은지, 그녀는 드디어 방 밖을 벗어 날 수 있다는 기쁨에 충만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창밖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햇빛을 뒤로한 채 자신을 바라보며 환하게 웃고 있는 그 얼굴에, 세상에서 가장 악독한 악마가 따로 없다고 황조롱이는 생각했다.

악마, 악마 같은 인간.

그리하여 두 사람은 결국 사이좋게 사슬을 맞잡고 그레이의 주점에서 나와 바깥나들이를 하게 되었다.

“와, 조롱아! 오늘 날씨 진짜 좋다. 그치?”

이예주가 구름 한 점 없이 청명하고 새파란 하늘을 바라보며 ‘크흐흡’ 하고 시원한 바깥 공기를 들이마시더니 황조롱이에게 말을 걸었다. 

황조롱이는 커다란 황금색 눈알만 스르륵 굴려 그녀를 흘겨보고는 불퉁하게 대꾸했다.

“당과 가게 근처, 30분만이에여.”

“그 소리 벌써 네 번째야. 작작 해라, 응?!”

이예주가 이를 악물고 웃으면서 돌아보자, 황조롱이는 황급히 눈을 다른 곳으로 돌리며 악마 같은 인간의 시선을 회피했다.

그녀는 그에게서 시선을 떼고 곧장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조롱이 말마따나 30분밖에 되지 않는 휴식인데, 그 귀한 시간을 이렇게 뭉그적거리며 보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불현듯 이예주가 움직이자 황조롱이가 깜짝 놀라 서둘러 뒤를 따랐다.

“어, 어디 가는데여? 당과 가게는 그쪽 아니에여!”

“당과 가게는 꽤 오래 걸어야 하잖아. 30분밖에 안 되는데, 그냥 산책 겸 이 근처만 조금 돌아보고 다시 되돌아가자.”

“헤엑?”

순순히 돌아간다는 이예주의 말에 황조롱이는 방금 전보다 더욱 놀라워했다. 

네가 어쩐 일이냐는 그 적나라한 표정에 그녀는 왠지 기분이 나빠졌다.

물론 당장이라도 그 요망한 것과 람이 붙어 있는 꼴을 확인하고 싶어 난리를 치고 나온 거지만, 가만히 방구석에 박혀서 박복한 처지를 우울해하고 있기만은 싫은 이유도 있었다.

그러기엔 날씨가 너무 좋았다. 하늘도 맑고 바람도 선선하고. 모처럼 한적하게 거리를 배회하며 자신과는 다른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구경하고 싶었다.

“왜, 싫어? 싫으면 당과 가게까지 갈까?”

“무슨!”

조롱이가 도리질을 치며 사슬을 두 번이나 손에 감고 단단히 쥐었다. 

쩔컥하고 사슬 길이가 금세 짧아졌다. 

자신에게 가까이 붙어 결연한 의지를 비치는 그의 얼굴을 보자니 절로 한숨이 터져 나왔다.

정말 그 주인에 그 애완동물이다. 

어떻게 하는 짓까지 이렇게 똑 닮아 밉살맞을 수 있을까? 

엊저녁, 제가 누워 있는 침대까지 올라와 밀착 감시를 해 대던 시뻘건 미친놈을 떠올리며 이예주는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그녀는 걸음을 재촉했다. 

그런 그녀의 뒤를 황조롱이가 바짝 붙어 따라갔다.

마을 사람들이 아직도 족장의 죽음을 추모하는지 골목골목은 여전히 어제처럼 한산했다. 

생활을 위해 상점들은 대부분 문을 열었으나, 사람이 없어서인지 어딜 보든 텅 빈 상태였다.

이예주는 천천히 걸음을 늦추며 건물들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동쪽 대륙의 건물들은 모두 일정한 간격으로 늘어서 있었으나 외곽의 모양은 하나같이 제각각이었다.

그냥 나무로 지은 목조건물도 있고, 대리석 같은 반질반질한 돌로 지어진 건물도 있었다. 

또 외양만 보자면 이예주가 살던 현대의 주택가에서나 볼 법한 빌라 같은 반가운 양식의 건물이 있는 반면, 생전 처음 보는 희한한 원통 모양의 건물도 있었다.

그리고 그 안으로 보이는 사람들 또한 백인, 흑인, 황인 가릴 것 없이 다양한 인종이었다. 

대부분이 서양인의 외형을 한 서쪽 대륙의 팔족 인간들과는 확연히 비교되는 마을이다.

건물 하나하나, 사람 한 명 한 명이 다르다. 

그것을 이상하게 여기는 것도 잠시, 그녀는 곧 그 이유를 알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두들 각자의 방식대로 살아남은 거야. 

세기말 용암 폭발 이후, 모든 문명이 사라지고 간신히 살아남은 사람들은 제각기 기억에 남은 문화와 전통을 제 자식에게, 자식의 자식에게, 또 그 자식에게 전달했으리라. 

그 기억에 의존하여 마을을 이룬 것이 바로 동쪽 대륙인 것이다.

그 다양성이 건물 양식을 통해 나타난 것을 보며 이예주는 왠지 모르게 마음이 천천히 가라앉았다. 

착잡하고 막막했다. 

여기 마을 사람들은 그녀와 같은 인간이지만 정말 자신이 알던, 자신과 같이 살아가던 그 인간들은 아니었다.

누구 하나 알기는 할까? 1000년 전의 현대가 어땠는지. 

얼마나 발달되었고, 또 얼마나 융성한 문화를 구축했었는지.

자신이 아무리 1000년 전의 세상에서 왔다고 말해도 믿어 주는 이 하나 없을 이곳에서 어떻게 과거로 돌아간단 말이지?

이제야 숲에서 말이 통하는 사람들만 만나면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고 굳게 믿었던 스스로가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깨달았다.

서서히 꿈에서 깨어나는 기분이다. 

뿌옇게 성에가 꼈던 눈앞이 서서히 맑아지는 느낌.

마을 골목을 샅샅이 훑어보는 그녀의 눈이 복잡하기 그지없었다. 

난 정말 다른 세상으로 넘어온 것이구나. 

지금까진 그저 ‘문’ 너머의 미래, 숫자로만 여겨졌던 ‘1000년’이 이제는 너무나도 크고 벅차게만 다가왔다.

이곳은 같은 세상이 아니다. 

완전히, 자신이 살던 곳과 완전히 다른.

“……완전히 달라졌어여.”

“……어?”

문득 옆에서 자신의 생각과 같은 소리가 들렸다. 

이예주가 퍼뜩 고개를 돌렸다. 

황조롱이가 방금 전의 그녀처럼 주변을 휘적휘적 둘러보다 이내 그녀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입을 열었다.

“마을이여. 몇십 년 전만 해도 원래 이렇게 건물이 빽빽하게 세워져 있지 않았는데. 여긴 다 허허벌판이었거든여.”

깊은 상념 속에 빠져 있던 탓에 조롱이의 말뜻을 알아차리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한참 후에서야 그가 마을 이야기를 한다는 것을 이해한 이예주가 느릿하게 입을 열어 대답했다.

“……몇십 년이면 바뀔 만하지.”

“우리한텐 얼마 안 돼여. 에…… 주인님 따라서 잠깐 다른 대륙 둘러보다가 돌아온 기간인데여.”

황조롱이의 말에 그가 70살이 넘은 늙은이라는 것을 깨닫고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하긴 그만큼 오래 살았으면 몇십 년은 긴 세월도 아닐 테지. 

새삼 시간이라는 것이 참으로 상대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황조롱이는 아련한 눈빛으로 건물이 잔뜩 세워진 어느 한곳을 바라보며 다시 말을 이었다.

“드문드문 과거의 마을 모습이 기억나여. 여기는 밀이 심긴 들이어서 쥐들이 참 많이 살았었는데. 마을 어른들이 농사를 지어 본다고 이것저것 심어 볼 때였거든여. 씨를 심느라 이곳저곳 파헤친 땅 위를 모르고 지나가다가 구덩이에 빠져 버린 생쥐를 잡아먹는 재미가 쏠쏠했져.”

“생쥐를 잡아먹어…….”

“네, 얼마나 맛있었는데여! 누나도 먹어 봤어여?”

이예주의 창백한 얼굴을 잘못 해석한 건지 황조롱이가 신나게 나불댔다. 

쥐 따위, 잡아먹어 봤을 리가. 그러고 보면 과거의 자신은 설치류를 싫어했던 것도 같다. 물론 설치류만 싫어한 것은 아니다. 개도 바퀴벌레도 싫어했다.

그때, 한 무리의 사람들이 그녀와 조롱이를 바삐 스쳐 지나갔다. 

아니, 그들 모두 사람들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신인류로 추정되는 사슬에 묶인 이도 있었기 때문이다.

무리 안의 사람들은 어제 마을 초입에서 보았던 이들과 비슷한 모습이었다. 

자신과 조롱이의 반대편으로 바삐 걷는 것을 봐서는 마을 외곽으로 밭일을 하러 가는 것 같았다.

조롱이가 잠시 멈춰 서서 그들을 바라보며 힘없이 속삭였다. 

덕분에 사슬에 걸린 이예주 또한 자리에서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인간은 적응과 변화에 굉장히 빠른 종족인 것 같아여. 물론 나쁜 뜻은 아니에여. 고작 몇십 년 만에 이렇게 많은 건물을 세우고, 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살아간다는 것은 정말 대단한 일이에여.”

“그에 맞춰 신인류도 변했잖아?”

“우리는 변한 것이 아니라 살기 위해 인간들이 정한 규칙을 따르기 급급한 거예여. 실제로 인간들이 신인류 마을을 침략했을 때, 신인류들은 간신히 농사짓는 방법을 터득해서 먹이사슬에 변화를 줬을 뿐인걸여. 그사이 인간들은 무시무시한 무기와 사냥하기에 편리한 도구들을 만들었구여. 어쨌거나 인간들이 그 누구보다 앞서가는 종족인 것은 확실해여.”

이예주는 조롱이의 말에 뭔가 하고 싶은 말이 불쑥 치밀었지만, 자신이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잘 알지 못해 입을 다무는 것을 선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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