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드 앤 매드 (108)화 (109/319)

“생각해 봐여. 우리 신인류가 주인님께 힘을 받아서 이렇게 인간의 모습으로 잠깐 변신하는 것이 가능해졌는데, 더 큰 힘을 부여받으면 어떻게 될까여? 아예 본질을 잃고 완전한 인간으로 변해 버리겠져.”

“인간으로 변한다고?”

“예. 그러면 주인님은 본질을 잃고 완전한 인간으로 변해 버린 그 신인류를 데려다가 중앙 대륙에 버리고 오시는 거예여.”

이예주는 폭풍처럼 몰아닥치는 ‘형벌’에 관한 조롱이의 말에 머릿속이 혼잡해졌다. 

그러니까 람이 매우 큰 힘을 부여하면 신인류는 동물이었던 본질을 잃고 인간이 된다. 

그런데 그것에 그치지 않고 인간이 된 신인류를 중앙 대륙에 갖다 버린다?

중앙 대륙이 어디였더라. 

그녀가 아는 한 이 세계의 중앙은 딱 한 곳이다. 

따가운 뙤약볕이 온종일 내리쬐고, 사방을 아무리 둘러보아도 텁텁하고 까슬까슬한 모래만이 가득 차 있는.

“설마…….”

“맞아여. 히카톤이 있는 사막에 버리는 거예여. 인간이 히카톤에게 잡아먹히면 어떻게 되는지, 누나도 저번에 봤져? 다른 생명체라면 히카톤에게 잡아먹히고 그걸로 끝이지만, 인간은 죽지도, 살지도 못한 채 똑같은 괴물이 되는 거예여.”

조롱이가 길고 긴 말을 끝마치고 헥헥 숨을 몰아쉬었다. 

이예주는 여전히 머릿속이 정리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소름이 쫙 끼쳤다.

인간이 된 동물을 최종적으로 괴물로 만든다고? 

머리, 팔, 다리가 수천, 수만 개씩 달린 그 거대하고 끔찍한 괴물로? 

사막에서 보았던 그 역겨운 것을 떠올리자 반사적으로 그녀의 낯빛이 허옇게 질렸다.

이예주는 이젠 정말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신인류에 관해서는 무한히 관대할 줄만 알았던 남자인데, 그가 돌아섰을 때 그 이중성이 어디까지인지. 

마냥 신인류들을 봐주기만 하는 것은 아니었구나.

한기가 드는 것 같은 기분에 그녀는 널브러진 침대 시트를 끌어 올려 덮었다. 

새삼 조롱이를 처음 만났을 때, 주인님이 분노했다며 난리를 치던 것이 생각났다. 

그의 분노는 생각보다 더욱 무섭고 잔인했다.

“……정말 가장 잔인한 형벌이 맞네.”

이예주가 멍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조롱이는 그녀의 말에 맞장구치지 않았다. 

어쩌면 그는 람의 곁에 있으면서 이러한 형벌을 여러 번 봐 왔기에 별 감흥이 없는 걸지도 모른다.

계약을 위반한 들쥐 같은 신인류에게도 이렇게 무섭게 굴진대, 과연 책에 나왔던 대로 검은 안개인지 뭔지를 빼앗은 인간들에 대한 그의 분노는 얼마나 클까.

어제와는 또 다른 람의 모습에 이예주는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       *       *

깨어난 후로 이예주는 계속해서 침대에 누워만 있었다. 

사실 사슬이 침대 기둥에 묶여 있어서 침대가 아닌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녀는 말똥말똥한 눈을 깜박이며 천장을 바라보았다. 

정말로 하루 종일 이렇게 누워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겠지? 

설마. 

잠이라도 다시 청하려고 했지만, 심지어 잠도 완전히 깨서 눈조차 감기지 않았다.

이예주는 서서히 심심해졌다. 

그사이 황조롱이는 그녀를 약 올리듯 침대에 누웠다가, 밖에 나갔다 들어왔다가, 탁자 옆에 앉아 무슨 얇은 책 같은 것을 들여다보는 등, 하여간에 그녀에겐 눈길조차 주지 않고 자기 할 일만 딱딱 해 대었다.

자신은 하도 누워 있어서 등이 배겨 아플 지경인데, 앞에서 조롱이가 깔짝대는 것을 보고 있자니 기분이 무척 좋지 않았다. 

가슴 속으로 슬슬 열불이 붙기 시작했다. 

어느덧 푸르스름한 빛이 사라진 쪽창에서 밝은 아침 햇살이 방 안으로 쏟아졌다. 

그것만 보더라도 바깥이 얼마나 화창한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런 화창한 날에 방구석에 처박혀서, 그것도 사슬에 묶인 채로 누워 있어야 한다니! 

이건 시간 낭비가 분명하다. 

게다가 지금이 아니면 또 언제 멀쩡한 인간들이 모여 사는 곳을 볼 수 있을지 모르는데. 

조롱이의 주인인 그 미친놈이 들쥐를 금방 잡아 오면 바깥 구경은 고사하고 분명 개처럼 또 질질 끌려갈 것이 분명했다.

그 생각에 미치자, 이예주는 왠지 조바심이 일었다. 

가만히 있으려니 좀이 쑤시고 막 호흡이 곤란해지는 것도 같았다. 

때마침 보던 책을 덮는 조롱이를 보고 그녀는 이때다 싶어 말을 붙였다.

“조롱아.”

“왜여?”

“나 절대! 절대 도망 안 갈 테니까, 우리 바깥 구경 좀 하면 안 돼?”

“네, 안 돼여.”

그러나 눈치를 보며 살며시 찔러 본 이예주의 시도는 처참히 무산되었다. 

새 주제에 제 주인을 닮아 어찌나 단호한지, 단호박으로 착각할 정도였다.

녀석은 단칼에 그녀의 말을 거절한 후, 덮었던 책을 다시 펼쳤다. 

부리부리한 시선을 애써 피하기 위한 황조롱이 나름의 선택이었다.

이예주는 눈길도 주지 않는 조롱이의 모습에 ‘으으’ 하고 주먹을 꽉 쥐었다. 

침착해. 저 새 놈의 행태는 우선 설득하고 난 후에 따지고 들어도 늦지 않아, 예주야.

자신을 다독이며 그녀는 어색하게 미소를 짓고는 다시 부탁조, 아니 애원조로 황조롱이를 졸랐다.

“조롱아아~ 나 살 것도 있는데. 그냥 요 앞에만 같이 갔다 오면 되잖아. 응? 어디 멀리 간다는 것도 아니고.”

“살 게 뭐 있어여? 누나 돈도 없잖아여.”

아악! 저것이! 

다른 때는 멍청한 얼굴로 눈만 뒤룩뒤룩 굴리면서 이럴 땐 눈치가 아주 귀신같단 말이야! 

이예주는 치솟는 분을 참지 못하고 흉흉하게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버럭 소리쳤다.

“그럼 나 화장실이나 갈 테니까 풀어 줘!”

조금만 잡아당겨도 사슬이 팽팽해질 만큼 이동할 수 있는 거리가 짧았다. 

그래도 제 주인은 이렇게 짧게 묶진 않았는데, 하여간에 저놈의 새는 융통성이 없어!

화장실은 미처 생각지 못했는지 조롱이가 당황한 얼굴로 눈알을 뒤룩뒤룩 굴렸다. 

“화, 화장실이여?”

“그래! 화장실! 묶어 놨어도 오줌은 싸야 할 것 아니야. 일어났으니 밥도 좀 주고!”

“에, 에…….”

이예주의 원초적인 발언에 조롱이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그, 그런! 수, 숙녀가 그런 말을 막 하면 안 되여! 오, 오줌이라니!”

“오줌을 오줌이라 하지 그럼 뭐라 해. 됐고, 나 오줌 싸러 가야 하니까 이것 좀 풀어 봐!”

쩔컥쩔컥, 그녀가 드러누운 상태로 오른쪽 손을 거칠게 흔들었다. 

여전히 망설이는 황조롱이의 태도에 이예주가 신경질적으로 “그럼 침대에다 싼다? 싼다?” 하며 엄청난 소리를 지껄였다. 

그제야 조롱이는 들고 있던 책까지 집어 던지고 쏜살같이 침대 쪽으로 달려왔다.

“수갑은 저도 못 풀어 줘여. 주인님만 풀 수 있는 거예여.”

“뭐야? 그럼 화장실은!”

그럴 거면 애초에 묶어 놓질 말던가! 

이예주가 치솟는 화를 감당 못하고 불길을 토해 내기 직전에, 조롱이가 다급하게 덧붙였다.

“대, 대신! 묶어 놓은 사슬만 풀어 줄 테니까 눈 꼭 감구 있어여.”

“왜?”

“예?”

“왜 눈을 꼭 감고 있어야 하는데? 눈 감은 사이에 무슨 짓 하려고 그러지.”

그녀가 의심의 눈초리로 조롱이를 쏘아보자 조롱이가 잠시 당황하더니 고개를 저으며 그 이유를 설명했다.

“주인님이 사슬 묶어 놓은 자물쇠를 푸는 방법은 비밀로 하라구 하셨는데여…….”

그놈의 주인님, 주인님! 이 주인님밖에 모르는 바보야! 

목구멍까지 외침이 차올랐지만 이예주는 꾹 참았다. 

괜히 없는 데서 욕을 했다가 이 주인바라기가 제 주인에게 일러바치기라도 하면 곤란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빨리 눈 감아여, 누나! 빨리여!”

“하, 알았어. 감는다.”

황조롱이의 종용에 이예주가 하는 수 없이 두 눈을 감았다. 

이어서 쩔그럭쩔그럭하고 침대 기둥에 둘둘 묶어 놓은 사슬을 푸는 소리가 들렸다.

“눈 뜨면 안 돼여! 실눈 뜨지도 말구여!”

“안 봐, 안 봐!”

사실 실눈을 뜨고 보려고 했던 이예주는 철통같은 조롱이의 감시에 결국 포기하고 아예 이불까지 뒤집어썼다.

짤그랑! 

이윽고 침대 기둥에서 풀어낸 사슬이 바닥에 떨어져 둔탁한 소음을 내었다.

“이제 눈 떠도 돼?”

“예, 옙.”

그녀가 뒤집어쓰고 있던 이불을 걷고 사슬을 바라보자 정말로 움직이는 것도 힘들었던 오른쪽 손목이 느슨해져 있었다. 

침대 기둥에서 끌러져 바닥에 축 늘어진 사슬을 바라보는 이예주의 눈에서 순간, 반짝 빛이 났다. 

그 기이한 눈빛에 불안해진 조롱이는 후닥닥 달려서 양팔을 벌려 방문 앞을 막아서고는 외쳤다. 

“화장실만 가는 거예여, 정말! 갔다 와서 다시 묶여야 돼여! 알겠져?!”

“알았다니까.”

혹시 도망갈까 무서워 방문 앞을 막아선 그의 행태에, 이예주는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터뜨리며 침대에서 내려왔다.

“으아!”

하도 오랫동안 누워 있어서 그런지 어깨랑 등허리가 온통 뻐근했다. 

두 손을 잡아 팔을 위로 올린 채 한 번 크게 스트레칭을 한 그녀는 방의 왼쪽에 위치한 화장실 쪽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방문 출구를 막아선 조롱이가 그녀를 뱁새눈을 하고 지켜보았다. 

이윽고 인간 여자가 벌컥 화장실 문을 열고 그 안으로 사라졌다.

“하…….”

그제야 조롱이의 입에서 절로 안도의 한숨이 터져 나왔다. 

하여튼, 참 진 빠지게 만드는 인간 여자야. 

어디로 튈지 모르는 사고뭉치니 한순간도 긴장의 끈을 놓칠 수 없었다.

인간 여자가 다시 나오면 틈도 주지 않고 재빨리 사슬을 묶어 놓아야지. 

황조롱이는 그렇게 한시름 놓으며 몸에 바짝 줬던 힘을 풀었다. 

하지만 인간 여자에 대해 잠시 방심했던 자신을 원망하게 된 것은, 그녀가 화장실에 들어간 후 정말로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누나, 아직 멀었어여? 뭐 잘못된 거예여?”

황조롱이는 벌써 세 번째 화장실 문을 쿵쿵 두드리며 물었다.

“……아, 아니! 잘못되긴! 그런 거 없어!”

그러나 세 번째로 같은 대답이 돌아왔다. 

그것도 두 번째로 들었던 대답보다 훨씬 더 급박하고 당황스러운 목소리로. 

문 저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담긴 떨림을 단박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황조롱이는 그 미묘한 떨림에서 강한 기시감을 느꼈다. 

그것은 꽤 특별한 경우의 인간 여자를 보았을 때와 비슷했다. 

예를 들면 도망치다가 주인님께 걸렸을 때라든지, 사고뭉치처럼 무슨 일을 저질렀을 때라든지…….

하나 그는 대체 이 기시감이 어디서부터 비롯된 건지 계속 이어 생각할 수 없었다. 

우탕탕탕―! 콰당! 

문 건너편에서 들려오는 커다란 소음 때문이었다.

“으윽! 웁!”

인간 여자가 비명을 지르다가 황급히 입을 틀어막는 것과 비슷한 소리를 냈다. 

이상하다. 정말로 이상하다. 

화장실 좀 쓰는 사람이 이렇게 소란스러울 수가.

황조롱이가 쿵쿵 거칠게 문을 두드리며 크게 소리쳤다.

“누나! 대체 무슨 일이에여! 문 열어 봐여! 저 그냥 문 열고 들어가여!”

“안 돼! 아니야! 아무 일도 없어! 그냥 선반이 좀 쓰러져서! 바로 나갈 테니까 좀 기다려! 절대 들어오면 안……!”

으으, 낑겨 죽겠네. 

필사적으로 들어오면 안 된다고 외치던 인간 여자가 작은 목소리로 투덜대는 것을 황조롱이는 똑똑히 들었다. 

뭔가 잘못됐다. 지금이라도 문을 열어야 할까?

하지만 정말 별일 아니라면. 그래도 인간 여자는 암컷인데. 

암컷의 사생활을 마구 훔쳐보면 안 된다고 누이에게 배웠는데. 그렇지만 자꾸 이상함이 들긴 하고.

화장실 문고리를 움켜잡았다 떼었다 도로 잡는 것을 반복하는 황조롱이의 커다란 황금안이 지진이 일듯 흔들렸다. 

그렇게 그가 문을 열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을 때.

콰르르르! 쾅! 

안에서 천장이 무너지는 소리와 함께 인간 여자의 비명 소리가 들렸다.

“어억!”

황조롱이는 급하게 한 손을 허공에 휙 휘둘렀다. 

그와 동시에 손이 이예주가 예전에 칭했던, 노랗고 탐스러운 바나나 색의 닭발로 순식간에 변신했다.

날카로운 검은 발톱이 삐죽삐죽 달려 있는 손으로 황조롱이는 단박에 문고리를 잡아 뜯었다. 

얄팍한 합금으로 이뤄진 문고리가 힘없이 우두둑 뽑혀 나갔다. 

그다음, 황조롱이의 몸통이 화장실 문을 부술 기세로 치받고 안으로 들어간 순간, 그는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험악한 기세로 몸을 날린 것도 잊고 입을 떡 벌린 채 우뚝 굳었다.

“뭐, 뭐야! 들어오지 말라니까!”

이 두 평도 되지 않은 좁은 화장실에서 그 짧은 사이 무슨 짓거리를 했던 것일까?

선반이 쓰러졌다는 인간 여자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정말로 화장실 벽에 걸려 있던 선반이란 선반은 모두 다 쓰러져 있었고, 그 위에 놓여 있던 내용물들이 타일 위를 어지럽게 뒹굴고 있었으니.

인간 여자는 생각보다 높은 곳에 위치해 있었다. 

변기 위, 거의 천장 가까이 나 있는 네모난 창문 밖으로 몸을 반이나 쑤셔 넣은 모습으로, 마지막 남은 선반에 발을 지탱한 채 힘겹게 버티고 있는 상황이었다.

대체 어떻게 천장까지 올라간 거지? 공중 부양이라도 한 건가? 

인간 여자의 기행 때문에 놀라는 것도 잠시, 황조롱이는 난장판이 된 화장실 바닥을 보곤 곧바로 답을 찾았다. 

저기까지 선반을 지지대 삼아 밟고 올라가느라 이렇게 멀쩡한 선반들이 떨어지고 쓰러지고 부서졌나 보다.

“대체…… 지, 지금 뭐 하는 거예여?”

황조롱이는 정말로 황당해서 말이 나오지 않은 상황이 바로 이런 것이구나, 라는 것을 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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