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이른 아침이었다.
아래층에서 우당탕, 쾅쾅 시끌벅적한 소리에 이예주는 스르륵 선잠에서 깨어났다.
“어디! 어디 갔로라!”
“잡아라! 잡아!”
쾅쾅, 우당탕.
뭔가 완전히 뒤집어지는 소리에 이예주는 인상을 벅벅 쓰며 베개에 얼굴을 파묻었다.
“으으…….”
마른 땅처럼 쫙쫙 갈라진 신음 소리가 튀어나왔다.
정말 깨기 싫은데.
몸이 축축 늘어지는 것이, 조금 더 꿀잠 속에 빠져 있고 싶은데.
아래층에서 다시 한 번 뭔가가 ‘쨍그랑!’ 하고 깨지는 소리가 울렸다.
의식이 점점 물에서 강제로 끌어 올려지는 기분이다.
아래층 여자가 또 제 남자 친구를 데리고 와서 싸우고 난리 치는 거 아니야?
확 주인아저씨한테 일러? 집주인 번호를 어디다 적어 놨더라.
꿈과 현실의 경계에서 주인아저씨의 휴대폰 번호를 생각해 내려던 이예주는 또 한 번 ‘쾅!’ 하고 들려오는 커다란 굉음에 짜증을 참지 않고 쏟아 내었다.
“아으, 진짜…….”
그런데 그 순간, 오른쪽 손목에 뭔가 차갑고 딱딱한 것이 묵직하게 감겼다.
다시 잠에 빠져들락 말락 하던 그녀가 완전히 깨어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뭐야.”
눈곱이 잔뜩 낀 눈을 억지로 부스스 뜨자니 눈꺼풀이 뻐근하게 아파 왔다.
이예주는 뻑뻑하기 그지없는 고개를 힘겹게 옆으로 돌려 제 오른손을 내려다보았다.
검은색의 수갑이 채워져 있었다.
사슬이 달린 검은색 수갑.
수갑? 웬 수갑이 내 손목에……?
멍하니 생각하는 것도 잠시 짤그락짤그락, 철컥 소리가 그녀의 멍한 의식을 가르고 파고들었다.
수갑에 길게 늘여진 사슬이 일순 팽팽해졌다.
이예주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거칠게 오른손을 흔들었다.
쩔컥쩔컥!
“뭐야!”
“에, 사슬을 묶은 건데여?”
익숙한 목소리가 왼쪽에서 들려왔다.
이예주가 다시 휙 왼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침대 헤드보드 옆 기둥에 단단히 묶인 사슬을 들고 어색하게 서 있는 조롱이가 보였다.
그녀는 오만상을 찌푸렸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마주친 것이 제 사슬을 묶는 새대가리라니.
온갖 짜증과 분노가 스멀스멀 차올라 이예주의 콧구멍이 흉악하게 벌렁거렸다.
“야! 왜 묶어?!”
“예? 누나가 일어나면 다시 수갑을 채워서 사슬을 묶어 놓으랬는데여?”
“누가!”
“주인님이엽.”
아. 네 하나뿐인 사랑, 주인님.
대체 누가 그딴 망발을 지껄인 거냐고 거칠게 따지려던 이예주는 황금색 눈알을 굴리며 당당하게 주인님을 언급하는 황조롱이 때문에 턱 밑까지 차올랐던 짜증이 푸시시 꺼지는 것을 느꼈다.
그렇지. 여긴 ‘문’을 넘고 1000년 후로 온 세상이지.
게다가 자신은 빌어먹을 조롱이의 주인이라는 놈을 피해 또 ‘문’을 넘어 동쪽 바다로 도망쳤다가 잡힌 신세였고.
잠결이나마 자신이 현대에 있다고 굳게 믿었던 그녀는 왠지 모를 허탈함에 쓴웃음을 지었다.
집 떠나 남들은 꿈에서조차 보지 않을 이런 미친 곳을 전전하고 있는 것도 서러운데, 심지어 사슬에 묶여서 가고 싶은 곳을 마음껏 갈 수 있는 자유조차 박탈당했다. 불쌍한 내 신세여.
처량한 제 상황을 한탄하던 이예주는 불쑥 눈에 들어오는 검은색 사슬에 다시금 분통이 터졌다.
아니, 내가 뭘 잘못했다고……!
아니, 잘못은 했지. 그래, 그건 인정.
그래도 도망 한번 쳤기로서니 어떻게 사람 대접을 이렇게!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이렇게 일어나자마자 수갑을 채워?! 그럼 넌 나 일어나는 거 감시하느라 날밤도 깠겠다?”
입술을 잔뜩 내밀고 이예주가 조롱이를 비꼬았다.
그러나 빈정대며 조롱이를 골려 주려던 그녀는 당사자가 ‘에, 에…….’ 하고 우물쭈물하자 되레 말문이 막혔다.
뭐야. 얘, 진짜 나 감시하느라 밤샌 거야?
설마, 그 남자가 둥가둥가 아끼던 충성스러운 애완동물을 그렇게까지 부려 먹을 리가!
그럼! 신인류라면 얼마나 애지중지하고 보는 남잔데!
물론 그 쥐새끼 빼고.
잠시 어제 저녁에 보았던 얄미운 쥐새끼 생각에 그녀가 눈살을 찌푸리자, 조롱이가 나름 변명을 한답시고 입을 열어 쫑알거렸다.
“그래두 주인님이 밤새 수갑 풀어 줬잖아여. 덕분에 편하게 잤으면서, 힝.”
한결같은 황조롱이의 주인 찬양에 약간의 반발심이 치솟는 것도 잠시, 이예주는 금방 그의 말에 수긍했다.
분명 무슨 생각에 골몰하다가 어느 순간 졸도하듯 잠들어서 풀어 주는 것을 못 보긴 했지만, 그래도 자는 동안 수갑을 풀어 준다는 말이 거짓은 아니었나 보다.
치졸하지만 그래도 약속은 지켜 주었으니, 뭐.
만약에 잠잘 동안에도 이 갑갑한 수갑에서 풀어 주지 않았다면, 지금 당장 이로 사슬을 끊어서라도 이 망할 수갑에서 벗어났을 것이다.
이예주는 그렇게 생각하며 적당히 람과 타협을 보았다. 물론 혼자만의 타협을.
“그런데 네 주인은 어디 갔어? 그리고 아침부터 뭐가 이렇게 시끄러워? 아직 해도 다 안 떴구만.”
그녀는 보이지 않아도 강하게 존재감을 과시하는 남자의 부재에 방 안을 두리번거리며 심드렁하게 물었다.
침대 위에 있는 작은 창 너머에는 아직도 새벽을 알리는 푸르스름한 여명이 깔려 있었다.
아직 더 자도 될 시간인데. 꼭두새벽부터 잠기운이 싹 가셨다는 아쉬움에 이예주는 입맛을 쩝쩝 다시며 조롱이를 돌아보았다.
쩔컹쩔컹, 그녀를 붙잡아 둘 사슬이 침대 기둥에 단단히 묶였는지 확인하던 조롱이가 심상한 목소리로 답했다.
“들쥐가 도망갔어여.”
“뭐? 도망?”
“네. 고양이가 잠시 졸고 있는 틈을 타서 묶인 채로 달아났어여. 그것도 회색 토끼가 장사를 시작한다고 나오지 않았다면 고대로 놓쳤을지도 몰라여.”
이예주는 황당함에 입을 쩍 벌렸다. 곧 람에게 죽을 쥐새끼가 도망이라니.
어제 람의 앞에서 가감 없이 야비하고 얍삽하기 짝이 없는 본모습을 보일 때부터 패기가 대단하다고 생각은 했지만, 묶인 채로 도망까지 친 들쥐가 이제는 존경스러울 지경이었다.
그러니까, 인간 생활로 따지자면 사형수가 사형 직전에 도망간 거잖아?
그것도 살기등등한 간수를 옆에 두고.
나비 아저씨가 꼬리와 수염을 뽑는다고 윽박지를 때마다 한눈에 보일 정도로 심하게 움찔거리던 들쥐가 떠올랐다.
자신의 신체 일부를 몽땅 뽑아 버리겠다는 그 근육질 아저씨를 앞에 두고 도망칠 궁리를 하긴 쉽지 않을 텐데.
하여간에 난 놈은 난 놈이다. 아니, 난 놈이 아니라 난 들쥐!
“그놈의 들쥐 참 대단하네. 그래서 어떻게 됐어?”
“다들 잡으러 갔어여. 그래서 주점에는 누나랑 저만 남았구여. 고양이는 혹시 몰라 들쥐가 자주 가는 곳을 찾아 보기루 했구, 붉은 개는 들쥐의 냄새를 뒤쫓아 갔어여. 주인님이랑 같이여.”
“뭐?! 붉은 개가 왔어? 언제? 아니, 그보다 네 주인이 걔랑 같이 나갔단 말이야?!”
붉은 개가 들쥐를 쫓아갔다는 얘기에도 가만히 있던 이예주는, 그 뒤 람까지 붉은 개와 함께 갔다는 소리에 눈빛을 달리했다.
그녀의 머릿속에서 풍만한 가슴을 람에게 밀착한 붉은 개가 ‘주인님~’ 하고 교태를 부리는 것이 자동으로 재생되었다.
‘주인님~ 저도 당과요. 당과가 먹고 싶어요, 주인니임~’
그러면 람은…….
‘동쪽 대륙에 있는 동안 물려서 못 먹을 만큼 사 주마. 아니, 아예 당과 가게를 통째로 사다 주지.’
“아악! 안 돼! 절대 안 돼!”
이예주가 창백해진 얼굴로 괴성을 지르며 머리를 거세게 뒤흔들었다.
발작하며 갑자기 소리를 지르는 인간 여자의 행동에 당황한 황조롱이가 “에? 에? 뭐가여?” 하고 되물었다.
하지만 인간 여자는 무엇이 안 되는지 대답해 주기는커녕 득달같이 달려들어 조롱이로선 영문 모를 질문을 퍼부었다.
“왜! 왜 붉은 개랑 같이 간 거야! 대체 왜!”
“내, 냄새를 추적하고 뒤쫓는데 붉은 개가 가장 뛰어나니까여. 주인님은 들쥐에게 가장 잔인한 형벌을 내리시기 위해 뒤따라가셨구…….”
이러다가 또 언제 악마처럼 변해 자신을 괴롭힐지 몰라 황급히 그녀의 질문에 대답해 주던 황조롱이가 흘끗흘끗 눈치를 보았다.
다행히 그의 대답에 반박할 말이 없어진 건지 이예주가 금방 시무룩한 얼굴로 고개를 푹 숙였다.
“예주 누나, 괜찮아여? 갑자기 왜 그래여?”
“……그래서 자기는 쥐새끼 죽이러 가야 하니까 난 이렇게 묶어 두래?”
그녀가 눈만 위로 치켜뜨고 황조롱이를 바라보며 음울한 목소리로 물었다.
조롱이가 ‘에, 에.’ 하고 황금색 눈동자를 뒤룩뒤룩 굴리며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이내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이어 말했다.
“주인님이 올 때까지 방에서 꼼짝도 못하게 하라고는 하셨어여.”
그의 말에 이예주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며 다시 힘없이 자리에 드러누웠다.
그녀의 움직임에 따라 쩔그럭하고 사슬 소리가 뒤따랐다.
그 듣기 싫은 쇳소리는 이제 하도 들어서 노이로제에 걸릴 지경이다.
지은 죄가 있으니 사슬을 풀어 달라고 더 따지지는 못하겠고…… 대체 어떻게 해야 그 미친놈의 꽁한 마음이 풀어질까.
멍하니 손목에 매달린 무거운 수갑을 바라보던 이예주는 남자가 뒤끝이 길다고 생각했다.
뒤끝이 긴 것도 모자라 유치하고 치사하고 졸렬하다.
말발로도 좀체 당해 낼 수가 없다.
하…….
그녀가 다시 한 번 깊은 한숨을 내쉬는 사이, 조롱이가 주춤주춤 다가와 그녀가 드러누운 침대 옆에 조심스레 걸터앉았다.
몸으로 전해지는 스프링의 움직임에 곁눈질하던 이예주는 불현듯 아까 황조롱이가 이야기했던 말 중에서 생소한 것이 떠올라 불쑥 입을 열었다.
“근데 가장 잔인한 형벌은 또 뭐야?”
“예? 가장 잔인한 형벌요?”
“응. 소멸한다며. 뭐 번개 내리쳐서 소멸하고 그러는 거 아니야?”
황조롱이는 이예주의 질문에 한동안 침묵했다.
그녀가 기다리다 지쳐 다시 그를 향해 고개를 돌릴 때쯤에서야 그의 목소리가 어렵사리 들려왔다.
“……누나도 이제 알겠지만, 우리 신인류들은 원래는 그냥 동물인데 계약으로 주인님의 힘을 받아 인간의 형상으로 변신할 수 있어여. 확실히 인간의 모습을 하면 여러모로 편리한 점이 많아여. 손가락도 생기구, 크기도 커지니까여. 게다가 이렇게 동쪽 대륙같이 안전한 인간들 사이에 섞여 있으면 잡아먹힐 일도 드물구여. 주인님께 더 큰 힘을 받으면 일반 동물일 때보다 더 똑똑해지고 강해지기두 해여. 인간이 아닌, 실제 먹이사슬의 상위에 있는 천적에게 잡아먹히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여. 그래두 신인류들은 서로 잡아먹는 것을 최대한 자제하는 편이에여.”
“…….”
“그런데 인간의 모습이 편리하고 또 여러모로 좋은 점도 많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간이 되고 싶은 것은 아니에여. 인간을 딱히 부러워하는 것두 아니구여. 인간을 닮고 싶은 적두 없어여.”
인간이 되고 싶지 않고, 인간을 닮고 싶은 적도 없다고?
이예주는 조롱이의 직접적인 발언에 깜짝 놀랐다.
그녀는 휘둥그레진 눈으로 조롱이를 돌아보았다.
갈색 머리, 황금색 눈동자를 가진 어린 소년이 자신의 머리맡에 걸터앉아 있었다.
눈동자와 머리색이 특이하다는 것 빼곤 그냥 똑같은 사람 같다.
조롱이가 너무 익숙한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어서 그런 걸까.
인간이 아니라는 조롱이의 말이 잘 실감나지 않았다.
“……왜?”
이예주는 조롱이를 멍하니 바라보며 다시 질문했다.
그에 황조롱이가 당연한 걸 왜 묻느냐는 듯한 얼굴로 대답했다.
“저는 황조롱이로 태어났으니까여.”
“…….”
“그리고 황조롱이로 태어난 것에 만족하구여. 누나는 인간이 아닌 다른 동물이나 식물로 태어나길 원해 본 적 있어여?”
이번에는 조롱이가 이예주에게 반문했다.
뜻밖의 질문에 그녀는 눈을 크게 뜨고 다시 그 질문을 되뇌었다.
인간이 아닌 다른 동물이나 식물로 태어나길 원해 본 적 있냐고?
어렸을 때, 가끔 팔자 좋게 늘어져 주는 밥을 받아먹는 봉구를 부러워해 본 적은 있었다.
아마 시험 기간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외에 딱히 다른 것으로 태어나길 갈망한 적은 없었다.
아니, 아예 ‘인간이 아닌 다른 것으로 태어났으면 어땠을까?’라는 생각 자체를 해 본 적이 없었을지도.
대답을 기다리는 황조롱이의 말간 눈빛 아래, 이예주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조롱이가 그것 보란 표정을 지으며 다시 말을 이었다.
“그건 들쥐도 마찬가지일 거예여. 어쩌다가 인간들이랑 어울려서 재물을 탐하는 추악한 것이 돼 버렸지만, 마음속 깊은 본심까지 인간이 되고 싶은 생각은 없었을 거란 말이져. 그렇지만 들쥐는 너무 큰 죄를 지어 버렸구, 심지어 신인류로서 죽음을 맞게 해 주겠다는 주인님의 배려도 걷어차고 도망간 거예여. 주인님은 분노하셨을 테구, 그러면 들쥐에게 더욱 큰 힘을 부여하시겠져.”
“그럼 어떻게 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