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라고, 이 미친 계집아.
밉다고, 원망스럽다고 생각한 지 몇 시간이나 지났다고, 이런 거 하나에 또 눈 녹듯이 흐물흐물해지면 어쩔 건데.
미친년, 미친년!
입안의 살을 꾹 깨물며 이예주는 자신에게 욕을 퍼부었다.
그러나 아무리 미쳤다고, 주책바가지라고 욕을 퍼부어도 진정이 되기보다는 더욱더 얼굴에 피가 쏠리는 것 같았다.
그녀는 울고만 싶었다.
람에게 자신한테 왜 이러냐고 묻고 싶었다.
왜 자꾸만 당과를 사 주고, 우는 것을 달래 주고, 반찬도 챙겨 주고, 이제 하다못해 악몽 꾸는 것까지 신경 쓰냐고.
이렇게 다정하게 대해 주면 자꾸 기대하게 되지 않느냐고.
입을 열면 자신도 모르게 제 입이 멋대로 주절주절 큰일 날 말들을 쏟아 낼 것만 같아서 그녀는 필사적으로 어금니를 꽉 깨물고 입을 다물었다.
사실 자신도 제 마음을 정확히 모르겠다. 이게 정말 싫은 건지, 아니면 저도 모르는 사이 좋아하고 있는 것인지…….
이예주가 머릿속으로 폭풍과도 같은 내적 갈등을 겪는 동안, 방 안에는 서늘한 적막이 내려앉았다.
두 사람의 숨소리조차 희미하게 들릴 정도로 고요한 방, 그녀가 입을 다문 지 한참이 지났건만 람은 그녀의 눈 위에 올려 둔 손을 거두지 않았다.
눈앞이 빛 한 점 없이 캄캄하다.
암경에 대한 충격으로 인해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이면 괜스레 불안감이 치솟던 그녀였지만, 어쩐지 지금만큼은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어쩌면 심각한 심장 타격을 받아 불안감에 대해 생각할 짬이 없는 건지도.
이예주는 한참 동안 마른침만 꼴깍 삼키다가 조금 진정이 되었을 무렵,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있잖아요.”
“…….”
“고마워요.”
남자에게서 대답은 들리지 않았다.
꼭 대답을 바라고 한 말은 아니었기에 그녀는 개의치 않았다.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요. 당신은 내 목숨도 구해 주고 위험할 때마다 나름의 방식대로 지켜도 주고, 물론 내 맘에는 안 드는 방식이었지만.”
“…….”
“그리고 과거로 가는 방법도 찾아 준다고 했고. 아! 아까 그레이 씨 부인도 막아 줘서 고마워요.”
“과거로 가는 방법을 찾아 준다고 한 적은 없다. 과거의 흔적을 찾아 준다고 하였지.”
드디어 남자가 차갑기 그지없는 어투로나마 대꾸해 주었다.
이예주는 자신의 말을 정확하게 정정해 주는 남자의 말에 콧잔등을 잔뜩 찡그렸다.
“어쨌든요! 과거로 갈 수 있는 흔적만 찾으면 뭐 어떻게든 되겠죠.”
“넌 정말 과거로 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네? 제가 과거에서 온 사람이라고 믿어 준다면서요! 나름 당신을 믿고 양심 고백한 건데! 일어나게 잠깐 이거 놔 봐요!”
이예주는 자리에서 일어나기 위해 버둥거렸다.
그러나 눈두덩을 가볍게 짓누르고 있는 남자 때문에 힘이 잔뜩 들어간 목만 뻐근하게 아파 올 뿐, 절대로 원하는 바를 실현시킬 순 없었다.
그사이 여전히 그녀를 제압하고 있는 남자가 말을 이었다.
“믿는다, 믿지 않는다, 그런 것을 따지자는 말이 아니다. 미래로 가는 것도 단시간에 수많은 힘을 쏟아부어 태양의 주변을 미친 듯이 달려야 가능한데, 과거로 돌아간다고? 그건 검은 안개가 있더라도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든 말든 그건 네놈에게만 해당되는 사항이겠지.
남자가 말한 것보다 훨씬 더 쉬운 방법으로 미래를 넘나들던 이예주는 속으로 빈정거렸다.
그나저나 어떤 방법을 쓰든 간에 남자 또한 미래로 갈 수 있다는 사실에 이예주는 새삼 놀라웠다.
이 남자와 공통점이라 말할 수 있는 것이 하나 생겼다.
물론 남자에게 자신이 죽기 직전 미래를 넘어 도망갈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절대 밝힐 생각이 없지만.
“그래서 과거로 가는 게 불가능하다는 소리예요?”
“그래, 불가능하지. 과거로 가는 방법이 있을 리가.”
남자가 불가능이란 소리까지 언급하며 단정 지었다.
불가능하다고 할 것까지야.
이예주가 아랫입술을 쭉 내밀며 불퉁한 목소리로 툭 내뱉었다.
“나중에 나 과거로 돌아가고 후회하지 마요.”
그럼, 그럼. 뒤늦게 땅을 치고 후회해 보았자 자신은 이미 룰루랄라 떠나고 없을 테니까.
그러나 들려오는 남자의 목소리는 전혀 모르겠다는 듯 멀뚱멀뚱함을 담고 있었다.
“내가 후회를 왜 하지?”
“왜 뒤늦게 못해 준 게 미안해진다든지, 막 갑자기 불쑥 떠올라서 보고 싶어진다든지, 그런 거 있잖아요!”
“그런 거 없다.”
남자가 이예주가 사라진 후를 생각하는 듯 잠시 시간차를 두고 덧붙였다.
“귀찮게 하는 것이 사라져서 한시름 덜겠군.”
허! 그녀는 오늘 하루 기가 막히고 코가 막혀 말문이 막히는 일을 참 많이도 겪는다고 생각했다. 한참을 부들부들 떨던 이예주는, 이내 잔뜩 꼬인 말투로 삐죽거렸다.
“……예, 어련하시겠어요. 하루 빨리 과거로 가는 문을 찾아서 귀찮은 저란 년은 없어져 드립지요. 예예!”
“이제 그만 떠들고 잠이나 자지.”
“안 그래도 자려고 했거든요!”
나 정말 삐졌소, 하는 티를 팍팍 내며 격하게 외친 그녀는 몸을 휙 돌려 누우려 했다.
하지만 그마저도 남자에게 머리가 잡힌 탓에 할 수 없게 되자 ‘씨잉!’ 하고 주먹으로 몇 번 침대를 쾅쾅 내리친 후에서야 잠잠해졌다.
그럼에도 열 받는 것은, 온몸으로 반항심을 표출하는 그녀의 행태에도 남자는 그저 짓누르고만 있을 뿐 끝까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마치 말 안 듣는 애가 진정할 때까지 말없이 기다리는 학부모처럼!
나름 고심해서 고맙다는 인사 한번 하려고 했던 게 어쩌다가 이렇게 분노하게 되었을까.
이예주는 여전히 남자의 손에 가로막힌 깜깜한 눈앞을 노려보며 고맙다는 인사를 건네기 위해 고심하던 과거의 자신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이렇게 된 이상, 과거로 돌아가기 전에 무조건 복수다.
그녀는 그동안 정신없던 상황 때문에 잠시 접어 뒀던 복수 계획들을 꺼내 들며 어떻게 하면 ‘사이다’ 소리를 들을까, 머리를 팽팽 돌렸다.
분명 그렇게, 남자가 잠든 틈을 타 ‘모기다!’ 하고 양 뺨을 후려치는 상상을 하며 만족해했던 것 같은데…….
남자의 손에 강제로 눈이 감긴 탓이었을까.
어느 순간 그녀의 정신은 깜빡이던 전등불이 나가듯 팍 꺼져 버렸다.
얼마 후, 어둠 사이로 고로롱고로롱 어린 인간 계집이 옅게 코 고는 소리만이 방 안에 가득 찼다.
인간 여자가 완전히 깊은 수마 속으로 빠져든 것을 알아채고도 한참이나 더 그녀의 눈을 가리고 있던 람이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 밑으로 내려섰다.
이미 시간은 한밤중이었다.
인간 여자의 눈을 꾹 가리고 있던 손을 스르륵 떼자 곱게 눈이 감긴 얼굴이 달빛에 반사되어 희미하게 드러났다.
피곤했는지 곁에 있던 사람이 떠나도 미동 하나 없었다.
람은 그녀를 무뚝뚝한 표정으로 내려다보았다.
여자의 하얀 피부에 닿은 시뻘건 안광이 어둠 속에서 이글이글 불타올랐다.
“과거로 가는 ‘문’이라…….”
조용히 인간 여자를 내려다보던 남자가 음산한 목소리로 읊조렸다.
여자가 ‘문’을 말했다. 벌써 두 번째로 하는 ‘문’에 대한 언급이었다.
처음은 도망칠 수 있는 ‘문’, 그리고 두 번째는 바로 과거로 가는 ‘문’…….
이 어리석은 인간 여자는 제가 그런 말을 내뱉었다는 것도 기억하지 못할 테지.
“발칙한 것.”
인간 여자의 깜찍한 행태에 람은 점점 상황이 재밌어진다는 것을 느끼며 입꼬리를 말아 올리고는 느릿하게 웃었다.
잠든 인간 여자의 얼굴에 못 박혀 있던 람의 시뻘건 눈동자가 가슴 앞에 얌전히 모인 그녀의 손목으로 스윽 움직였다.
인간 여자의 한쪽 손목에 검은색 수갑이 당당히 자리하고 있었다.
이젠 꽤 적응한 건지 불편하다는 티조차 안 내고 잘도 잔다.
풀어 달라고 떽떽거리던 인간 계집의 목소리를 떠올리던 람은 불현듯 손을 뻗어 여자의 손목에 감긴 수갑을 살며시 건드렸다.
그러자 쩔컥하는 소리와 함께 거짓말처럼 무거운 수갑이 풀어져 침대 옆으로 나뒹굴었다.
잠시 수갑과 인간 여자의 잠든 얼굴을 바라보던 람은 이내 몸을 돌려 침대에서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탁자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방 내부가 어둠에 잠긴 탓인지, 물을 머금은 뤼미에르 꽃송이들이 눈이 부실 정도로 방 안을 환히 빛내고 있었다.
꽃 앞에 커다란 장신이 우뚝 멈춰 섰다. 어느새 변해 버린 남자의 검은 눈동자가 올곧게 뤼미에르를 바라보는가 싶더니, 그의 고운 미간이 와락 찌푸려졌다.
“너.”
람이 꽃에게 말을 던졌다.
“거슬려.”
그는 손을 들어 제 턱을 매만지며 뚜벅뚜벅 뤼미에르가 놓인 탁자를 한 바퀴 휘익 돌았다.
꽃은 여전히 밝게 빛났다.
그 빛이 마치 인간 여자가 사라질 때 종종 보이던 그 빛 같아서, 람은 심기가 더욱 불편해졌다.
“아무리 봐도 거슬린단 말이지.”
당과를 잔뜩 안겨 줘도 멍청한 표정을 지으며 자신을 올려다보던 계집이, 고작 이깟 들꽃을 받고 그 애송이에게 그토록 환하게 웃어 주었단 말이지.
환하게 빛나는 꽃을 든 채 꽃보다 더욱 해사하게 웃던 인간 여자의 얼굴이 눈앞에서 쉬이 가시지 않았다.
이깟 것이 뭐라고.
이따위 들꽃이.
“요망한 것.”
람이 씹듯이 중얼거렸다.
그와 동시에 검은 눈에서 번쩍 이채가 돌았다.
그 시선에 닿은 뤼미에르의 하얀 꽃 잎사귀 끝에서 빨간 작은 불똥이 일었다.
그 불똥은 조금씩 꽃잎을 갉아먹기 시작하더니, 이내 주먹만 한 화마가 되어 뤼미에르를 집어삼켰다.
끼이이약—!
람의 귓가에 작은 생명이 비명을 지르는 것이 들려왔다.
뜨거워, 뜨거워! 살려 주세요. 살려 주세요, 주인님!
고작 한 줌도 되지 않는 것들이 살겠다고 발악을 하며 애걸복걸했다.
그러나 그의 눈동자는 더욱 형형히 빛날 뿐, 그 애원을 들어주지 않았다.
화르륵, 꽃을 장작 삼아 화병 위에서 활활 춤을 추던 불꽃이 태울 수 있는 것을 모조리 태워 버리고 나서야 서서히 잦아들었다.
환하게 발광하던 아름다운 꽃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채 숯덩이처럼 거뭇하고 버석하게 메마른 줄기들만이 화병에 남겨졌다.
꽃이 불에 타 완전히 죽어 버린 것을 확인한 람은 그제야 속이 다 시원해지는 것 같아 희미하게 웃었다.
이렇게 될 바에야 차라리 아까 방 밖에 버리고 오라고 했을 때 말 좀 들어 먹었으면 좋았을 것을.
람이 잠시 좀체 말을 듣지 않는 주체를 돌아보며 탄식했다.
그러나 이미 꽃은 죽었고, 그것을 죽게 만든 장본인은 세상모르게 잠이나 자고 있었다.
남은 것은 미약한 탄내와 숯덩이뿐.
그는 낚아채듯 손에 화병을 통째로 들고 전보다 훨씬 더 가벼워진 걸음으로 문 쪽을 향했다.
저벅저벅, 그가 걷는 발걸음 뒤로 타 버린 뤼미에르 재가 솔솔 뿌려졌다.
마치 헨젤과 그레텔의 빵 조각처럼 람의 뒤를 따라 하늘하늘 떨어지던 잿가루가 마룻바닥에 닿기도 전에 공중으로 흩어졌다.
이윽고 꽃이 완전히 바스러져 흔적도 없이 사라졌을 무렵, 방문 앞에 도착한 람이 벌컥 문을 열었다.
“주인님!”
문 앞에 쭈그려 앉아 대기하던 작은 인영이 벌떡 일어나 람을 맞이했다.
황조롱이였다.
“들쥐는.”
“아래층에 묶어 놨어여. 고양이가 감시한대여, 주인님. 예주 누나는 자여?”
황조롱이의 질문에 람은 대답 없이 고개를 까딱였다.
제 주인을 올려다보며 잠시 황금색 눈동자를 뒤룩뒤룩 굴리던 황조롱이가 그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제 저는 예주 누나 감시하면 돼여?”
“수갑 풀어 놓았다. 깨어날 징조가 보이면 바로 다시 채우도록.”
“옙옙! 절대 도망 못 가게여!”
황조롱이가 충성스럽게 대답했다. 그런 그에게 람이 불쑥 들고 있던 것을 내밀었다.
“그리고 이것.”
“에? 에? 이게 뭐예여? 불탄 꽃인가? 어디 불 났어여, 주인님?”
주인이 내민 것은 잘못 건들면 금방이라도 바스러져 사라질 것처럼 바싹 불에 탄 식물이었다.
화병에 꽂힌 것을 보면 꽃이었던 것은 확실한데, 불쌍하게도 앙상한 줄기만 남아 무슨 꽃이었는지도 확인할 수 없었다.
람에게서 화병을 받아 든 황조롱이가 눈을 끔뻑이며 제 주인을 올려다보았다.
어떻게 처치할까요, 하는 의미가 담긴 시선이었다.
“갖다 버려라.”
람이 명령했다.
이예주가 들었다면 눈을 까뒤집고 노발대발할 만한 명령이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한 치의 망설임도 존재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