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쥐랑 얘기하느라 한참 바쁠 인간이 대체 왜 여기 있는 거야?
이예주는 멍한 얼굴로 그의 동공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그녀가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리는 사이, 남자의 시뻘건 눈동자가 스윽 움직여 난간 너머로 향했다.
인간만 보면 바뀌는 완연한 단색의 눈동자에 살기가 스멀스멀 돌기 시작했다.
람이 눈동자만큼 빠알간 입술을 벌려 무뚝뚝하게 지껄였다.
“이건 내 거다.”
개선장군처럼 당당하기 짝이 없는 남자의 발언에 이예주는 소름이 다 끼쳤다.
그 ‘이것’이 바로 그녀를 말하는 듯, 남자가 틀어쥔 후드를 두어 번 휙휙 성의 없이 흔들었다.
그 때문에 그녀의 몸도 양옆으로 성의 없이 두어 번 흔들렸다.
살기 어린 시뻘건 눈동자를 온전히 받은 제드가 뒷걸음질을 몇 번 치더니 기어이 넘어져 엉덩방아를 찧었다.
새파랗게 질린 애송이 위로 남자의 오만한 명령이 떨어졌다.
“그러니까 꺼져.”
뒤로 넘어진 제드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아무래도 람의 시뻘건 눈동자를 보고 당황한 것 같았다. 그가 안쓰러우면서도 공감됐다.
그럼, 그럼. 놀랄 만하지. 자신도 처음에 미친놈의 시뻘건 눈을 보고 얼마나 기절초풍했던가.
게다가 그 안에서 뿜어져 나오는 살기란.
으으, 정말 웬만한 강심장이 아니고서야 감당하기 힘들 것이다.
“꺼지라는 말 안 들리나.”
“흐…… 흐, 흐히익!”
틈도 주지 않고 재촉하는 람의 말에 말더듬이 제드는 괴상한 소리를 내며 발발 떨더니, 이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줄행랑을 놓기 시작했다.
후다닥 달려 멀어지는가 싶었는데, 또 다시 거리 한복판에 대자로 자빠지는 것을 보고 이예주도 덩달아 움찔했다.
아플 만도 하건만 ‘으윽!’ 하고 신음 소리를 내며 잠시 엎어져 있던 그는 오뚝이처럼 벌떡 일어나 곧바로 도망을 가 버렸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려가는 그 품새에 이예주는 할 말을 잃었다.
뭐 저딴 놈이 다 있어? 방금 전까지 시시덕거리며 잘만 떠들더니. 꺼지라 했다고 어떻게 한마디도 못하고 저렇게 허겁지겁 꺼질 수가 있나?
제드의 뒷모습을 보며 어이없어할 즈음, 그녀의 몸이 자의 아닌 타의로 휙 뒤돌려졌다.
제드가 기겁을 하고 도망을 치게 한 시뻘건 두 동공이 코앞에서 형형히 빛을 내며 이예주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제야 그녀는 자신이 입은 포대의 후드가 위로 번쩍 들려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쳐들린 후드 덕에 덩달아 훌쩍 올라온 옷깃이 목을 갑갑하게 압박했다.
그녀의 얼굴이 와락 찌푸려졌다.
“모, 목! 숨 막히니까 놔요! 사람 놀라게 갑자기 왜 후드를 잡아채고 그래요!”
이예주가 갑갑한 목 주변의 옷깃을 잡아당기며 항의했다.
어찌나 힘 좋게 끌어 올렸는지, 원치 않아도 발뒤꿈치가 절로 들렸다.
“너.”
그 순간, 남자가 잡은 후드를 훅 앞으로 당겼다.
그녀는 끽 소리도 못한 채 그의 코앞까지 훅 끌려갔다.
급격하게 줌인 되는 남자의 얼굴에, 이예주는 눈알이 빠질 것처럼 눈을 크게 뜬 채 얼어붙어 버렸다.
너무, 너무 가깝잖아.
남자의 새빨간 입술이 그녀의 시야에 가득 찼다.
숨 한번 잘못 내쉬면 닿을 것 같아서 이예주는 내쉬던 숨도 헙, 하고 멈췄다.
“왜, 왜, 왜요?”
“…….”
“저, 저 아무 잘못도 안 했는데요? 얘, 얘기만 했어요! 진짜 얘기만……!”
불현듯 이예주의 후드를 잡고 있지 않은 남자의 다른 손이 그녀의 얼굴을 향해 쑤욱 다가왔다.
맞는 건가!
그녀가 파리하게 안색을 굳히며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불쑥 다가온 그의 손은 얼굴 대신 그녀의 귀에 꽂힌 뤼미에르 꽃송이를 거칠게 낚아챘다.
“꽃, 좋아하나.”
“……예, 예? 어어! 내 꽃!”
방울처럼 둥글둥글한 모양을 자랑하며 희게 빛나던 꽃이 남자의 억센 손아귀에 와작 구겨졌다.
그와 동시에 꽃 안에서 웅크리고 있던 빛 덩이도 그의 손안에서 사라져 버렸다. 막을 새도 없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방금 전까지 옆에 꽂혀 있던 것이 빠진 탓인지 귓가가 휑한 느낌이 들었다.
이예주는 갑작스러운 남자의 기행에 입을 떡 벌리고 꽃과 남자의 얼굴을 번갈아 보다가 기가 막혀 헛웃음을 내뱉었다.
“허, 왜……. 아니, 왜 꽃을 그렇게 꾸기고 그래요?”
“이깟 꽃이 좋으냐고 물었다.”
그러나 남자는 그녀의 물음에 답을 하기는커녕 오히려 미간을 한껏 찌푸리며 동문서답했다.
그러면서 하는 짓거리가, 와작 힘줘 구겼던 손을 쫙 펴 빛이 사라진 채 완벽하게 꾸깃꾸깃해진 꽃송이를 보여 주는 것이다.
옴팡지게도 힘을 줬는지, 꽃송이가 보기 싫은 흰 덩어리로 변해 줄기 끝에 위태롭게 달려 있었다.
그 미친놈 같은 태도에, 이예주는 방금 전 겁을 먹었던 것은 모조리 잊고 반감이 치솟았다.
꽃이 좋으냐고?
“그, 그럼! 꽃 싫어하는 사람도 있어요?! 좋아해요! 완전!”
‘완전’에 힘을 팍팍 주며 이예주가 남자의 손아귀에서 뭉개진, 꽃이라 부르기도 민망한 것을 낚아채어 요리조리 살펴봤다.
그러나 아무리 살피고 또 살펴도 처참하게 구겨진 꽃은 다시 빛나지 않았다.
빛이 다 뭐냐. 완전히 재기 불능 상태였다.
아이고, 아까워.
아직 품에 제드가 준 꽃이 몇 송이 남아 있었지만, 이런 보기 드문 신기한 꽃이 눈 깜짝할 새에 쓰레기가 되어 버린 것이 너무나도 아까워서 원통할 지경이었다.
“당신 때문에 이제 빛이 안 나잖아요! 제드가 비싼 거랬는데! 레어템이구만.”
이예주가 울상을 하고 진심을 다해 소리쳤다.
누가 꽃은 예쁜 쓰레기라고 했던가!
제드가 준 이 뤼미에르만은 달랐다.
이것은 예쁜 쓰레기가 아니라 레어템이야, 레어템!
그러나 그런 그녀의 심정에 공감할 리 없는 남자는 계속해서 답답한 소리만을 늘어놓았다.
“레어템이 뭐지?”
“희귀하다고요, 희귀!”
“그딴 거 하나도 안 희귀하다.”
“안 희귀하긴! 이런 거, 저 사는 데에 갖다 팔면 진짜 불티나게 팔린다고요.”
“……후.”
이예주의 대답에 남자가 짧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 모습에 그녀의 눈에서 불똥이 튀는 것은 당연했다.
아니, 이 자식이! 지금 누가 한숨 쉬고 싶은 심정인데!
귀신처럼 소리 소문 없이 다가와서 남의 후드를 막막 잡아채고, 귀에 잘 꽂고 있던 꽃도 잡아 빼서 처참하게 구긴 게 어디의 누구 씨더라?
이예주가 부글부글 끓는 심정으로 남자를 노려보며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참아 낼 때쯤, 남자가 우악스럽게 쥐고 있던 후드를 예고도 없이 놓아 버렸다.
그 탓에 본의 아니게 붕 떠 있던 그녀의 몸이 털썩 바닥으로 떨어졌다.
“으헉!”
예기치 못하게 바닥에 떨어진 충격으로 그녀가 잠시 해롱거릴 때, 남자는 정신을 차릴 새도 주지 않은 채 손목에 연결된 사슬을 잡고 등을 돌렸다.
그러고는 말 한마디 없이 그대로 잡아끌고 가는 것이 아닌가.
“어, 어!”
람이 사슬을 잡은 채 마구잡이로 걷자, 한쪽 손이 수갑에 묶인 이예주는 그저 아슬아슬하게 중심을 잡고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
짤캉, 짤캉. 걸음 폭이 달라서인지 금세 남자와의 거리가 벌어지며 사슬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아오, 저 싸가지가!
넘어질 듯 말 듯 위태롭게 남자에게 끌려가며, 이예주는 죽 끓듯이 변덕스러운 그의 태도에 터져 나오는 분통을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아악, 진짜! 말 좀 하고 가라니까요! 넘어질 뻔했잖아요!”
“늦었다.”
“늦긴 뭐가!”
가까스로 뤼미에르 꽃들을 떨어뜨리지 않고 챙기며 빠른 걸음으로 뒤따르다 보니 계단 바로 옆, 첫 번째 방문 앞에 도착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그레이가 미리 준비를 해 놓은 것인지, 남자가 열쇠로 따지도 않고 벌컥 문을 열었다.
그러다 문득 이예주를 돌아보았다.
오른쪽 손목은 남자가 잡아당기는 사슬에 앞으로 쭉 뻗은 상태였고, 제드가 선물해 준 꽃들은 그녀의 왼쪽 팔과 겨드랑이 사이에 힘겹게 끼여 있었다.
자꾸만 흘러내리는 꽃들을 열심히 추어올리며 고개를 들었을 때, 그의 시뻘건 눈동자는 살벌한 기세를 내뿜으며 꽃에 못 박혀 있었다.
“그거.”
“…….”
“갖다 버리고 와.”
뤼미에르 꽃들을 향해 턱짓하며 람이 미간을 좁히고 말했다.
이예주는 이젠 황당함을 넘어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대체 이 인간은 갑자기 올라와서 왜 이러는 걸까? 아까 브로콜리 먹은 게 잘못되기라도 했나.
그녀는 신경질적으로 반문했다.
“……싫어요. 아니, 내가 선물받은 꽃을 왜 버려야 하는데요?”
“버려.”
“싫어요.”
“후, 냄새 때문에 머리 아프다. 버리고 와.”
남자가 정말로 머리가 아프다는 듯 사슬을 잡지 않은 손으로 미간 한가운데를 문질렀다.
좀체 말이 통하지 않은 남자로 인해 머리가 아픈 것은 오히려 자신이었다, 자신!
이예주는 입을 삐죽 내밀며 살랑살랑 흔들리는 품속의 뤼미에르를 바라보았다.
밝은 실내로 들어와서 그런지, 밖에서는 눈이 부실 정도로 환하게 빛나던 것이 조금 시들해져 있었다.
이렇게 예쁘고 신기한 꽃을 버리라니. 정말 이 미친 남자는 보는 눈도, 감성도 죽어 버린 것이 틀림없다.
“싫다니까요!”
이예주는 남은 꽃들을 지키겠다는 듯 꼭 끌어안으며 조금 더 강력하게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다.
시큼털털하고 풋풋한 식물 특유의 냄새가 훅 들이닥치며 코를 찔렀다.
냄새 때문에 머리 아프다는 건 그녀 또한 동감이었다.
그냥 밖에다가 꽂아 둔다고만 할까.
그러나 곧바로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을 깔보는 남자의 말에, 그녀는 잠시 약해지려던 마음을 다잡았다.
“후회할 텐데.”
“후회는 무슨! 후회의 ‘히읗’도 안 꺼낼 테니까 걱정 마요.”
후회라는 말에 사실 조금 겁이 났지만 이예주는 있는 힘껏 턱을 쳐들고 남자를 노려보려고 노력했다.
천만다행히도 남자에게 센 척이 조금 먹힌 건지, 그는 말없이 등을 돌리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사슬을 따라 방 안으로 들어가며 이예주는 내심 남자가 무슨 짓을 할까 싶어 잔뜩 긴장했다.
하지만 남자는 방 한가운데에 이예주가 완벽히 들어설 때까지 그녀가 후회를 외치며 통곡할 만한 끔찍한 짓은 하지 않았다.
그녀는 긴장을 풀고 방 안을 스윽 훑었다.
그레이 씨가 나름 신경을 쓴 것인지, 방 안은 넓고 쾌적했다.
호텔처럼 호화롭진 않아도 전체적으로 깔끔한 내부가 마음에 쏙 들었다.
이렇게 사람다운 방에서 묵어 본 지가 언제였더라.
호화롭기 그지없었으나, 몸도 마음도 편치 못했던 끔찍한 팔족 족장의 저주받은 저택에 비하면 이곳은 호텔, 그것도 스위트룸이나 마찬가지였다!
방으로 들어선 그녀를 보고 안심한 건지, 람이 쩔컹하고 집어 던지듯 들고 있던 사슬 끝을 바닥에 내려놨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남자의 속박에서 풀려나자마자 이예주는 방 한가운데에 놓인 탁자로 후다닥 달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