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드 앤 매드 (103)화 (104/319)

그래도 고대인의 언어라니. 

뭐랄까, 기가 막혀서 말문이 다 막히는 기분이다. 

“왜, 왜, 왜 웃으세요?”

남자가 이예주의 웃음에 화들짝 놀라 물었다. 

그 탓에 환하게 빛나는 꽃들이 그의 품에서 어지러이 흔들렸다. 

그녀는 웃음기 어린 얼굴을 애써 지우며 답했다.

“아니요. 그냥, 이름도 예쁜 것 같아서요.”

“그, 그, 그렇죠? 마, 마을에는 기름이 부족해서 뤼미에르를 드, 드, 등불 대신 쓰기도 해요. 드, 등불은 부, 불이 날 수도 있어서 저. 저택에서는 자, 잘 안 사용하거든요.”

저택에서는 등불을 잘 안 사용한다고? 

저택이라는 말에 이예주는 왠지 기시감이 들었다. 

남자의 말에 건너편 가게의 차광막에 달려 있는 등불을 슬쩍 흘겨보며 잠시 갸우뚱하던 그녀는 이내 조잘대는 남자의 말에 기시감을 금방 잊어버렸다.

“비, 비, 비싸서 구하기 힘들지만, 조, 좋은 꽃이에요.”

“그러게요. 양초 대신 쓰이는 것도 편리하고요. 냄새만 좀 더 좋았으면 완벽했을 텐데.”

“내, 내, 냄새는 좀 지독하죠? 헤, 헤헤.”

남자가 그녀를 따라 고개를 끄덕이며 순박하게 웃었다. 

처음 만난 남자이지만, 대화가 잘 통하고 순진한 듯했다. 

이예주는 거부감이 사라지고 점차 그와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는 데에 더 깊이 몰입했다. 

“뤼, 뤼, 뤼미에르에는 고, 고대에서부터 내려오는 저, 전설도 하나 있어요.”

“전설이요?”

“네, 네! 세, 세기말 용암 폭발 전의 고대요! 그, 그때는 이, 이런 마을이 아니라, 커, 커, 커다란 대륙과 그 위를 통치하는 와, 왕국이 있었대요.”

“세기말 용암 폭발 전에 왕국이 있었다고요?”

이예주는 잠시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을 지었다. 

왕국은 무슨, 1000년 전에는 미래인 지금보다 더 발달된 문명과 그로 인해 극도로 치열한 삶을 살아가는 현대인들밖에 없었다. 

그녀는 남자에게 그런 건 다 거짓말이라고 말해 주고 싶었지만, 꿈을 꾸는 듯한 눈동자로 꽃을 내려다보고 있는 남자애의 환상을 깨고 싶진 않았기에 도로 입을 다물었다.

“그, 그, 왕국에는 하나뿐인 고, 공주가 살고 있었어요. 그, 그렇지만 아름다운 공주는 나, 나쁜 검은 파편에 의해 저주에 걸려 버렸어요. 빛을 보면 오, 온몸이 타 들어가는 무, 무시무시한 병이 생기는 저주요! 레, 레이디도 아시죠? 그, 그, 괴물 같은 거, 검은 파편 이야기요……!”

괴물 소리에 이예주는 얼굴을 찌푸렸다. 그러나 그런 그녀의 표정을 잘못 해석한 건지, 말더듬이 남자는 계속해서 전설 나부랭이를 이어 말했다.

“비, 비, 빛을 보지 못한 공주는 시름시름 앓으며 주, 죽어 가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그, 그런 공주를 사랑했던 하, 한 기사가 있었어요. 그 기사는 주, 죽어 가는 공주에게 다, 다시 햇빛을 보여 주려고 마, 마음먹었지요. 고, 공주를 살리기 위해서는 저, 저주를 내린 검은 파편을 죽이거나, 아, 아니면 거, 검은 파편이 가지고 있는 세, 세상에서 하나뿐인 비, 빛을 담는 꽃에 빛을 담아 고, 공주에게 바쳐야 했어요. 기, 기사는 거, 검은 파편을 죽이러 머, 먼 길을 떠났지요.”

“빛을 담는 꽃?”

이예주가 뤼미에르를 내려다보며 멍하니 중얼거렸다. 

말더듬이 남자가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네! 비, 빛을 담는 꽃이요! 그, 그치만 거, 검은 파편은 죽이기엔 너무 가, 강했어요. 아, 안타깝게도 기사는 거, 검은 파편을 죽이지는 못했어요. 하지만 치, 치열한 전투 끝에 거, 검은 파편에게서 비, 빛을 담는 꽃을 빼, 빼앗을 수 있었어요. 기, 기, 기사는 다친 몸을 이끌고 다, 다시 왕국으로 돌아왔어요. 기, 기사가 공주의 성에 도착했을 때는 해, 해가 없는 밤이었지요. 자, 자신을 마중 나온 고, 공주의 앞까지 도착한 기사는 피, 피를 너무 많이 흘려서 하, 한쪽 무릎을 꿇은 채 주, 주저앉았어요. 기, 기사는 넘어지지 않게 부, 부러진 칼을 바, 바닥에 꽂고 모, 몸을 지탱했지요. 그, 그런데 고, 공주에게 비, 빛을 담은 꽃을 바치려고 보니 너, 너무 한밤중이라 빛이라곤 다, 달빛밖에 없었어요! 고, 공주는 절망했어요. 그, 그래서 다시 성안으로 들어가려고 했죠.”

“…….”

“기, 기사는 소중히 품에 담아 왔던 꽃을 꺼내 공주에게 주려고 했지만, 너, 너무 지친 나머지 몸을 일으킬 수 없었어요. 드, 등을 돌리고 멀어지는 공주를 잡으려고 기, 기사는 계속 일어나려고 했지만 계, 계속, 계속 넘어졌고 겨, 결국 다시는 일어날 수 없게 되었어요. 기, 기사의 몸이, 따, 땅에 박혀 있던 칼을 쓰러뜨리며 넘어졌어요. 그, 그런데 땅에 떨어진 카, 칼에 반사된 달빛이 쓰, 쓰러진 기사의 손에 있던 꽃에 닿았어요. 비, 빛을 담는 꽃이 화, 환하게 빛이 났고, 뒤, 뒤늦게 그것을 발견한 공주는 벼, 병이 나아 해,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그래서 그 빛을 담아 공주를 살린 꽃이 이 뤼미에르라고? 

이예주는 남자의 품에서 환하게 빛나고 있는 꽃과 그것을 바라보며 바보같이 웃고 있는 남자를 내려다보곤 다시금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이런 전설은 누가 짓는 건지, 참. 어린애들이 빠져들기 딱 좋은 이야기였다. 

왕국도, 공주도, 기사도 없는 세기말 용암 폭발 이전 시대에서 살던 자신한테는 어처구니없는 전설이었지만, 그녀는 말더듬이 남자의 이야기가 그다지 기분 나쁘지 않았다. 

어느새 완전히 그늘이 사라진 편안한 얼굴을 한 이예주가 남자의 이야기에 대한 감상을 내렸다.

“완전 비극적인데요?”

“예, 예? 비, 비, 비극이요?”

“기사는 결국 죽었잖아요? 공주한테 꽃만 바치고요. 바보네, 바보.”

“그, 그건 그렇지만…….”

혼자만의 로맨스에 푹 젖어 있던 말더듬이가 이예주의 신랄한 비판에 시무룩한 얼굴을 했다. 

“고, 공주님은 벼, 병이 낫고 해, 행복하게 살았으니까요.”

“어쨌든 전설 들려줘서 고마워요. 우울했는데 그쪽 덕분에 좀 나아진 것 같아요. 꽃도 예쁘고요.”

이예주가 진심을 담아 남자에게 고맙다는 소리를 건넸다. 

그러자 오히려 남자가 되레 펄쩍 뛰며 허공을 향해 두 손을 마구 휘저어 댔다.

“아, 아니에요! 이, 이렇게 제, 제 얘기를 들어 주셔서 오히려 제가 더 고, 고마워요, 레이디! 사, 사실은 저는 마, 말더듬이 병신이라서 아, 아무도 저와 말하려고 들지 않거든요. 노, 노, 놀리기만 하고…….”

말더듬이 병신이라니. 

이예주는 문득 아래층에 있는 들쥐가 죽은 족장의 아들을 신랄하게 욕하던 것이 떠올라 눈살을 찌푸렸다. 

죽은 족장이 신인류의 저주에 걸려 대대손손 말을 더듬는다고 했나? 

가만, 그러고 보니 이 남자도 말을 더듬고 있잖아. 

게다가 족장의 장례 때 사람들이 입고 있던 검은 상복도 입었고. 

그녀는 새삼스러운 눈초리로 말더듬이 남자를 훑어보았다. 

남자는 순진한 눈동자로 2층에 있는 이예주를 고개가 빠져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녀가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어서 그렇지, 남자가 있는 지상에서 그를 보았다면 흉하고 멍청해 보이는 모습일 것이 분명했다. 

혹시나 족장의 아들과 관련이 있는 사람인가 가늠하던 이예주는 곧바로 깔끔하게 그 생각을 접었다. 

들쥐의 말을 토대로 들어 보면, 죽은 족장의 아들은 신인류들을 매춘과 식용으로 쓰길 원하는 눈족의 요구를 별생각 없이 들어줄 정도로 역겹고 끔찍한 인간이었다. 

팔족 족장만큼, 어쩌면 그보다 더 혐오스러울지도 모른다. 

그런 정신 나간 놈이 이런 순박하기 짝이 없는 청년일 리 없을 것이다. 

이예주는 아직도 시무룩한 남자의 표정에 제가 다 미안해지는 심정이었다. 

“말 좀 더듬으면 어때요! 못하는 것도 아닌데. 힘내요!” 

“예, 예?”

“힘내라고요. 놀리는 놈들이 나쁜 놈들인 거예요.”

그럼! 놀리는 놈들이 나쁜 놈들이지! 

무당 딸이니, 신들린 년이니, 학창 시절 내내 수도 없이 욕을 들어 왔던 이예주는 괜히 울컥하여 남자에게 파이팅 넘치게 소리 질렀다. 

잠시 어벙하게 서 있던 남자의 얼굴이, 그녀의 말을 알아들은 듯 천천히 감격으로 젖어 들어갔다. 

붉게 달아오른 그의 눈시울이 그것을 증명해 주었다. 

감격스러움에 잠시 말을 잇지 못하던 남자가 별안간 품에 안고 있던 뤼미에르들을 이예주를 향해 와락 들어 보였다.

“이, 이거! 이거 레, 레이디 드, 드, 드릴게요!”

“에? 꽃을 준다고요?”

“네, 네!”

남자의 뜬금없는 행동에 당황한 이예주가 얼떨결에 난간 아래까지 올라온 꽃다발을 손을 뻗어 받았다. 

아롱아롱 빛을 뿜는 뤼미에르 꽃들이 그녀의 품에 한 아름 안겼다. 

비록 코를 찌르는 지독한 풀 냄새를 풍기는 것들이었지만, 그녀는 예상치 못한 꽃다발 선물에 기분이 좋아졌다. 

꽃 선물을 받아 본 적이 언제였던가. 

엄마가 죽기 몇 달 전에 치렀던 중학교 졸업식이었던가. 

뤼미에르 덕분에 그녀의 주위는 순식간에 환해졌다. 

자체적으로 빛나는 기이한 꽃을 받아서 기쁘긴 한데, 이 남자는 어째서 이런 비싸고 귀한 것을 자신한테 덥석 넘기는 걸까.

“이거 저한테 줘도 돼요? 비싼 거라면서요? 굳이 줄 것까지는…….”

“레, 레이디 귀에 꽂으면 예, 예, 예쁠 것 같아요!”

이예주가 우려의 말을 채 꺼내기도 전에 말더듬이 남자가 적극적으로 자신의 의견을 관철시켰다. 

귀에 꽂으라고? 

꽃을 준 것보다 더 황당한 제안이었다. 

그러나 오랜만에 꽃 선물을, 그것도 나름 남자한테서 받아서 그런 것일까. 

이예주는 생각보다 많이 들뜬 상태였다. 

그래서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을 일을 하며 남자의 장단에 어울려 주었다. 

들고 있는 꽃다발 중에서 뤼미에르 줄기 하나를 쑤욱 빼낸 그녀가 한 손으로 그것을 귀 뒤에 꽂으며 남자에게 물었다.

“이, 이렇게요? 괜찮아요?”

꽃에서 나온 빛이 너무 환해서 눈이 따가웠다. 

눈을 찡그리는 못난 얼굴을 하고 있음이 분명한데도, 남자는 그녀의 행동에 황홀한 표정을 지으며 환호했다.

“너, 너, 너무 예뻐요. 비, 빛의 여신 같아요! 계, 계속 그렇게 꽂고 다니면 조, 조, 좋겠어요.”

“예쁘다니 빈말이라도 고맙네요.”

자식, 예쁜 건 알아 가지고. 

빛의 여신이라는 말에 내심 기분이 좋아진 이예주는 빈말이라고 남자를 흘기면서도 입꼬리를 들고 실실 웃었다. 

그런 그녀의 행동에 용기를 낸 남자가 말을 더듬으며 더욱 대담한 질문을 걸었다.

“저, 저기 레이디는 여, 여기 계속 묵으시는 거예요?”

“당분간은 여기 묵을 것 같은데. 잘 모르겠어요.”

“그, 그, 그럼 어, 언제 떠나시는 거예요? 아, 아 참! 시, 실례지만 레, 레이디의 이름을 여쭤 봐도 될까요? 제, 제 이름은 제드예요.”

“아, 제드.”

남자와 어울리는 이름이라고 생각하며 이예주가 그의 이름을 의미 없이 한 번 따라 불러 보았다. 

그러고선 어깨를 한 번 으쓱하는 걸로 그의 물음에 대답했다. 

안타깝게도 그녀는 언제까지 동쪽 대륙에 계속 체류할지, 또 언제 동쪽 대륙을 떠날지, 자신의 일정에 대해 아는 바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람이 멈추자면 멈추는 것이고, 가자면 가는 것이 일정의 전부였다. 

돌이켜 보자니 정말 미친 강행군이 따로 없었다.

“글쎄요. 언제 떠날지도 잘 모르겠네요. 사실 여기 마을은 오고 싶어서 온 게 아니라 어떤 미친놈이 끌고 와서 오게 된 것이거든요.”

이예주가 금세 배배 꼬인 심정으로 무거운 쇳덩이를 단 오른쪽 손목을 제드에게 흔들어 보였다. 

짤랑짤랑, 수갑에 연결된 사슬이 공중에서 춤을 추며 소리를 내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제드가 ‘히익’ 하고 날카로운 숨을 집어삼켰다. 

솔직히 한 번 보고 말 사이라 생각했기에 개인적인 질문에도 대충대충 대답을 했던 그녀는, 진짜 사슬까지 보여 주면 제드가 자신을 노예로 여기고 그만 제 갈 길을 갈 것이라 예상했다. 

하지만 제드는 사슬을 보여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가지 않고 서 있더니, 이어서 끈질기게 그녀의 일정에 대해 물었다. 

예상외의 행동이었다.

“그, 그, 그러면 레, 레이디를 또 어, 언제 뵐 수 있을…… 참, 이, 이름을 아직 안 알려 주셨는데…….”

우물쭈물하며 제드가 두 번째로 이예주의 이름을 물었다. 

꽃 선물도 받았으니 이름쯤이야 가르쳐 줘도 되지 않을까. 

어차피 이 마을을 뜨면 다신 안 볼 사람인데. 

그렇게 생각한 그녀가 별생각 없이 제 이름을 가르쳐 주기 위해 입을 떼었다.

“제 이름은 이예…… 어억!” 

그러나 제드에게 이름을 모두 가르쳐 주지는 못했다. 

누군가 그녀의 후드를 거칠게 위로 잡아끌어 목이 턱 막혔기 때문이다. 

괴상한 소리를 내던 그녀는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어떤 미친놈이야!’ 하고 역정을 내기도 전에, 피처럼 빨간색이 그녀의 온 시야에 점철되었다.

“올라가자마자 제일 첫 번째 방에 얌전히 처박혀 있으라고 분명 말했을 텐데.”

남자의 시뻘건 두 눈이 코앞에서 형형하게 빛을 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