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드 앤 매드 (102)화 (103/319)

이예주는 왜 자리를 박차고 나왔을까 후회가 되었다. 

자신이 있을 땐 끔찍하고 진절머리 나는 말들만 지껄이다가 왜 자신이 자리를 뜨자마자 저렇게 알 만하고 호기심 이는 이야기를 주고받는 건지 분통이 다 날 지경이었다. 

조롱이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 수 있는 기회인데. 

그러나 최대한 느리게 걸었는데도 그녀의 몸은 이미 계단 앞에 서 있었고, 더 이상 지체했다가는 그들의 말을 엿듣고 있는 사실을 들킬 위험이 컸다. 

그녀가 떼어지지 않는 발바닥을 억지로 떼어 계단 위로 턱 올렸다. 

어느덧 말소리를 줄인 건지 들쥐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 

계단에서도 최대한 시간을 끌어 볼 요량이었던 이예주는 성질이 났다. 

결국 그녀는 조롱이에 대한 비밀을 조금이라도 엿들어 보려는 마음을 깔끔히 포기하고 쿵쾅거리며 마구 계단을 밟고 위층으로 올라갔다. 

그녀가 완전히 사라진 뒤로 들쥐의 야비한 목소리가 주점 안에 공허하게 울려 퍼졌다.

“하지만 인간들 사이에서는 네가 이미 전설이 되고도 남았는걸, 찍찍! 넌 주인님을 쫓아다니느라 몰랐겠지만, 네 덕에 혀를 잃은 마을 족장은 평생을 저택에 숨어 살았다. 그놈은 그때 뒈져 버린 쪽이 차라리 나았을 거야! 마을 인간들은 족장 놈이 자신들을 대신해서 일을 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고 알았지만, 사실 그놈은 벙어리가 된 제 모습이 창피해서 밖으로 나올 생각은 쥐똥만큼도 안 했으니까 말이야.”

“…….”

“만약 꼴사납게 전쟁에서 포로로 잡은 신인류, 찍! 그것도 막 각성한 애송이에게 혀가 뽑혔다는 소문이 돌면 얼마나 비웃음을 샀을까. 아! 비밀이 하나 또 있었지, 참! 넌 마을 족장의 처남이나 마찬가지 아닌가? 찍찍, 누이의 복수를 위해 대대손손 저주를 내리는 신인류라니! 이 얼마나 무서운 일이란 말인가! 너 제법이야, 엘로!”

들쥐의 빈정거림에 엘로는 답하지 않았다. 

들쥐는 황조롱이를 다시 한 번 치켜세우며 낄낄 웃어 댔다. 

*       *       *

2층은 예상했던 것처럼 복도를 가운데에 두고 일정한 간격으로 양쪽에 방문이 늘어서 있는 객실 층이었다. 

마담 페니의 가게처럼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깔끔한 카펫과 먼지 하나 없는 복도의 모습이 그레이 씨 부부의 성실한 성격을 알려 주는 것 같았다. 

복도를 타고 쭉 시선을 돌리니, 그 끝에 휴게실로 추정되는 발코니가 보였다. 

어느새 해가 질 무렵인지, 발코니 난간 너머의 하늘이 불그죽죽한 노을로 물들어 있었다. 

밖으로 뻥 뚫려 있는 그곳에서부터 이예주가 있는 정반대의 끝까지 바람이 솔솔 불어와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해안 주변의 마을이라 그런지, 바람 냄새에 은근한 짠 내가 섞여 났다. 

올라가자마자 제일 첫 번째 방에 있으라고 했지? 

계단에서 가장 가까운 방문을 발견한 이예주는 잠시 방문과 발코니를 번갈아 보다가, 이내 길게 고민하지 않고 복도를 가로질러 발코니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짤그랑짤그랑. 

그녀의 손목에 매달린 주인 잃은 사슬이 바닥을 질질 쓸며 작은 소리를 내었다. 

발코니로 완전히 나오니, 답답했던 시야가 확 트이는 것 같았다. 

“……그냥 거리네.”

내심 바다 정경이 보이지 않을까 기대했던 이예주는 그저 2층보다 낮은 건물들과 마을 거리밖에 보이는 것이 없자, 실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바다까지 보기 위해서는 더 위로 올라가야 하는 것인가. 

이곳에 오자마자 그렇게 짠 바닷물을 집어 먹고도 바다가 보고 싶은 생각이 들다니. 

저도 참 답 없는 인간이라고 되뇌며 그녀는 난간에 몸을 기대었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어느덧 길거리가 어둑어둑해져 있었다. 

거리 위로 사람들이 종종걸음을 하며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보였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집에 가는 거겠지. 

이런 거 보면 그냥 어디 한적한 시골 동네 같은데. 

붉은 노을 아래 바삐 걸어가는 사람들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니, 이곳으로 ‘문’을 타고 건너오기 전에 정처 없이 번화가를 걸었던 것이 생각났다. 

현대에도 미래에도 자신은 아무것도 변한 것이 없었다. 

다들 정확한 목적을 가지고 어딘가로 향해 걸어가는 가운데, 자신만 갈 곳도, 가고 싶은 곳도 없이 헤매는 기분이란. 

“하…….”

이예주는 우울한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어쩌다가 인생이 이 모양이 됐을까? 

그래도 나름 죽기 직전에 위험에서 탈출하는 능력도 있건만. 

용암에 타 죽을 뻔했던 자신은 지금 1000년 후로 건너와 죽지도 않고 잘 살아 있는데 왜 이렇게 기쁘고 행복하지가 않지. 

‘문’을 건너 숲에 떨어진 후로 지금까지 이예주는 자신이 폭풍 속을 헤치고 있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시간족이니 뭐니, 이상한 인간들. 신인류라는 이름하에 인간의 모습으로 변신하는 동물들. 

그리고 오래전에 인간들에게 검은 안개를 빼앗기고 잠들었다가 인간을 박멸시키기 위해 깨어났다는 시뻘건 미친놈.

“……람.”

이예주가 속삭이듯 중얼거렸다. 

인간들만 보면 눈이 시뻘겋게 변해서 살기등등해지는 남자. 

신인류를 안타깝게 여기고 인간을 증오하는 남자. 

처음 만났을 때부터 자신을 죽이려 들었던 남자이지만, 어쩌면 자신이 지금껏 살아 있을 수 있는 것은 다 그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와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의 흥미를 끌어 계약을 하지 않았더라면. 

그래서 그를 쫓아 여기까지 오지 않았더라면 자신이 이런 곳에서 견딜 수나 있었을까? 

그녀가 귀찮더라도 버리지 않고 여기까지 데리고 와 주었고-비록 계약 사항이지만- 굶어 죽지 않게 먹을 것도 가끔 던져 주었고, 또 당과도 사 주었고, 아까 그레이 씨의 부인 앞에서는 자신을 지켜 주기도 했다. 

하나하나 따지고 보면 고마운 사람이다. 정말 고마운 사람인데. 

……왜 이렇게 밉지? 

왜 자꾸 이렇게 원망스러운 마음이 드는 걸까. 

그레이 씨 부부가 자신에게 부당한 대우를 해도 그는 화내지 않았다. 

들쥐가 인간 계집 따위라고 무시하여 결국 자신이 자리에서 일어날 때도 딱히 잡지 않았다. 

붉은 개가 자신에게 했던 망할 짓거리 얘기를 들어도 그 요망한 것이 인간에게 크게 상처를 받아 그런 것일 뿐이라고 달래기만 할 뿐, 다른 태도를 취하지는 않았다. 

그는 그럴 수밖에 없는 거라고 애써 웃어넘기려고 했다. 

자신은 인간이고 그들은 신인류니까. 

안 지 이제 몇 달 된 인간보다는 직접 힘을 부여한 신인류들에게 더 정이 갈 테니까. 

이예주 자신은 보기만 해도 눈깔이 시뻘게지는 인간이니까. 

맞아, 그는 검은 파편인지 뭔지니까. 

근데 붉은 노을을 보면서 시뻘건 눈의 남자를 떠올리자니 왜 자꾸, 왜 자꾸…….

“……미워.”

이예주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그녀는 눈이 자꾸만 시큰시큰하고 가슴 한쪽이 따끔따끔 아파 오는 것을 무시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짤그랑, 조금의 움직임으로도 시끄러운 소리를 자아내는 사슬에 의해 그 노력은 완전히 허물어졌다. 

그저 그늘이 드리워져 있기만 하던 얼굴이 울컥 일그러졌다. 

“아오, 짜증 나!”

당과도, 반찬도, 다정도 다 필요 없다. 

이렇게 개처럼 사슬에 꽁꽁 묶어 놓는 놈 따위, 좋게 생각해서 뭐 해? 

진짜 개인 붉은 개도 이렇게 개처럼 묶어 놓지 않더만! 

이예주는 순식간에 분노가 치솟아서 오른쪽 손목을 감싼 수갑을 난간 위로 두어 번 캉캉 내리쳤다. 

그렇다고 단단한 쇠 수갑이 덜컥 벗겨지거나 부서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순전히 분풀이였다. 

결국 제 손목만 시큰하게 아려 오자 그녀는 소득 없는 행위는 그만두고 다시 힘없이 난간에 몸을 기댔다. 

어느덧 노을도 지고 주위에 어둑어둑한 땅거미가 내려앉았다. 

그때, 이예주가 있는 건물 바로 앞 가게에서 주인이 나와 차광막 양쪽에 등불을 걸었다. 

그러고 보니 이곳은 팔족 땅과는 다르게 전기를 쓰지 않았다. 

미래가 전기를 안 쓰는 세상으로 퇴보되었다니. 

2017년의 현대인들은 상상도 못할 일임이 분명했다. 

바람에 흔들거리는 두 개의 등불을 바라보자니, 자신이 지금 완전히 다른 세상으로 왔다는 괴리감이 더욱더 피부에 와 닿는 것 같았다. 

이예주의 얼굴이 다시금 우울함으로 뒤덮였다. 

가로등이 없어서 그런지 거리를 지나가는 사람이 이제는 거의 없었다. 

그녀는 다시 한 번 땅이 꺼져라 한숨을 푹 내쉬며 머리를 싸매고 고뇌했다. 

이제 어쩌니, 예주야. 

답은 과거로 돌아가는 방법뿐인데. 

그 해답을 알 만한 자식은 밑에서 제 볼일만 보고 있는데. 

이젠 어쩔까.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딱히 좋은 생각은 나지 않고 속이 타는 답답함만 늘어나던 찰나였다. 

멀리 떨어진 곳에서 하얀 전등 같은 것을 무더기로 들고 거리를 총총 걷고 있는 남자가 눈에 들어온 것은. 

주위가 꽤 어두워진 상태였기에 홀로 빛나는 물건을 가득 들고 있는 남자는 거리에서 단연 돋보였다. 

남자는 아까 당과 가게 앞에서 보았던 사람들처럼 검은색 상복을 입고 있었다. 

그레이의 건물까지 점점 가까워지는 남자가 들고 있는 빛나는 물건을 확인한 이예주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헐, 꽃에서 빛이 나잖아?”

남자가 들고 있는 것은 하얀 전등처럼 스스로 발광하고 있는 꽃다발이었다. 

그녀는 제가 잘못 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어 눈을 비비고 다시 한 번 그것을 바라보았다. 

백열전구처럼 동그란 모양의 꽃봉오리들이 하얗게 빛나며 남자의 품에서 살랑살랑 머리를 흔들었다. 

그 모습이 어디서 많이 본 것 같더라니 아까 상여에 쌓여 있던, 풀 냄새는 지독하지만 외형은 귀엽고 발랄한 꽃이었다. 

그때도 전구같이 생겼다고 생각했었는데, 진짜 전구처럼 빛이 나자 그녀는 자신이 무슨 별나라에 온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느새 꽃을 든 남자가 그녀의 바로 아래를 지나가고 있었다. 

그 덕에 그녀는 조금 더 가까이에서 보기 위해 난간 밖으로 상체를 쭉 빼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은방울꽃보다 크기가 훨씬 더 큰 꽃들이 남자의 품에서 어두운 거리를 환하게 빛냈다. 

아무리 보아도 요상하고 기이한 꽃임이 틀림없었다. 

반딧불이도 아니고, 자체적으로 빛을 낼 수 있는 꽃이 있었나? 

동물에 관해서는 조금 자신이 있었지만, 식물에 관해선 완전히 문외한인 이예주는 반짝반짝 빛나는 꽃에서 쉬이 눈을 떼지 못하고 중얼거렸다.

“무슨 꽃에서 빛이 다 나? 신기하네. 예쁘다.”

그때, 그녀의 밑에서 걸어가던 남자가 머리맡에서 들려온 중얼거림에 갑작스럽게 고개를 훅 쳐들었다. 

남자의 두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댕그래졌다.

“저, 저, 저 말씀인가요?”

남자가 과하게 말을 더듬으며 이예주에게 물었다. 

고작해야 간신히 사춘기를 넘은 고등학생처럼 앳되어 보이는 남자애였다. 

주근깨가 점점이 박힌 얼굴, 왜소한 몸보다 훨씬 큰 검은색의 상복이 꼭 맞지 않은 아빠 양복을 주워 입은 것처럼 어색했다. 

생각 없이 중얼거린 말에 당사자가 과도하게 반응하니 이예주는 약간 민망해졌다. 

그녀는 멋쩍게 웃으며 손가락으로 꽃을 가리켰다.

“아…… 아니, 그쪽이 들고 있는 꽃이요.”

“이, 이, 이거요?”

남자가 들고 있던 꽃을 그녀 쪽으로 높이 쳐들었다. 

훅 하고 시큼한 풀 냄새가 밀려오자 와락 인상을 찌푸린 이예주는, 곧 눈앞이 환하게 빛나는 오밀조밀한 꽃으로 가득 차자 저도 모르게 표정을 풀고 웃었다. 

둥그렇게 오므려져 끝 부분만 조금 트인 채 아래를 향해 고개를 떨어뜨리고 있는 꽃송이 안에 빛 덩이 한 줌이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가까이에서 보니 약간 노란색을 띠는 빛이었으나, 꽃 외겹이 하얘 멀리서 볼 땐 백열전구가 빛이 나는 것처럼 보였다. 

특이한 꽃을 흥미진진한 눈으로 바라보며 이예주가 조금 늦게 답했다.

“네. 빛나는 꽃은 처음 봐요. 진짜 신기하네.”

“레, 레이디는 외, 외지에서 오신 분인가요?”

“뭐…… 그렇다고 볼 수 있겠네요.”

정확히는 외지가 아니라 1000년 전 과거에서 온 것이지만. 

외지가 틀린 말은 아니었으나 미래의 인간을 앞에 두고 이야기를 나누자니 왠지 기분이 묘해졌다. 

그러고 보면 1000년 후로 넘어와서 정상적으로 대화가 가능한 인간을 만난 건 일리야 이후로 처음이었다. 

“이 꽃은 이름이 뭐예요?”

이예주의 입에서 자연스럽게 다음 대화를 잇는 질문이 튀어나왔다. 

말은 좀 더듬지만 이런 멀쩡한 인간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구나! 

지금까지 하나같이 끔찍스럽기 짝이 없는 인간들만 만나 왔던 탓에 그녀는 오랜만에 해 보는 사람다운 대화에 감정이 고양되는 것을 느꼈다. 

이예주가 보이는 관심에 남자 또한 신이 났는지 버벅거리는 말로 꽃에 대해 설명해 주기 시작했다.

“이, 이, 이건 뤼미에르예요. 아, 아직 개화 전이라서 뤼미에르라고 불러요. 뤼, 뤼미에르는 개화하기 전에 바, 밤에만 빛나는 꽃이에요. 개, 개, 개화하면 빛이 나지 않기 때문에 비, 빛 무리 꽃이라고 따로 이름이 있거든요.”

“뤼미에르?”

“네, 네! 고, 고, 고대인들의 언어로 빛이라는 뜻이래요!”

뤼미에르, 빛. 종종 RPG게임이나 판타지 영화 같은 데서 보고 들은 듯한 단어였다. 아무리 들어도 프랑스어 같은데. 

고대인이란 남자의 말에 이예주는 푸흡 하고 웃음이 터져 나왔다. 

하긴 3000년대에서 2017년을 판단하자면 까마득한 고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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