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으로 일어선 그녀와 조롱이가 흉흉한 기세로 들쥐를 내려다보자, 들쥐의 흰자 없이 까맣기만 한 눈동자가 당황으로 물들었다.
“찍찍! 그, 그럼 인간 노예가 아니면 대체 무엇이냐!”
“예주 누나는 우리 여행 동료예여!”
“맞아! 난 얘랑 이 남자 여행 동료야!”
조롱이가 먼저 답했고, 이예주가 양옆을 손가락질하며 그에 동조했다.
덕분에 짤그락하고 람의 손에 들려 있는 사슬이 움찔거리며 쇳소리를 냈다.
맞로라, 맞로라! 나비까지 맞장구를 치자, 들쥐의 눈이 한층 더 어두워졌다.
죄인 쥐새끼에게 제가 우위인 것을 똑똑하게 알려 주자 이예주는 더러웠던 기분이 조금 나아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놈은 좀체 인정하기가 싫은지 또 한 번 얄미운 소리를 중얼댔다.
“찍찍! 이, 인간 여자 주제에 가, 감히 주인님을…… 주인님, 이 인간 노예는 대체……!”
“그만. 곧 소멸될 너 따위가 알 필요 없을 텐데.”
“찍찍. 그건…….”
언제나 들쥐 놈의 얍삽한 입을 다물게 하는 것은 람의 권한이었다.
또 한 번 짜증이 치솟아 들쥐에게 욕지거리를 하려던 이예주는 그만 앉으라는 듯 사슬을 짤짤짤 흔들어 대는 남자 탓에 분을 삭이면서 자리에 착석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를 따라 조롱이 또한 자리에 앉았다.
람이 입을 열자 마을의 끔찍한 비밀이 다시 재조명됐다.
“검은 안개를 사고파는 인간들 이야기나 마저 하지. 그래서 마을 인간들이 검은 안개를 되팔아 이익을 챙기고 있다, 이건가?”
“찍찍! 예, 예, 주인님! 모든 이익은 다 마을 족장의 아들놈이 챙기고 있습니다! 어찌 됐건 검은 안개를 사들일 자금은 손쉽게 해결되었습니다.”
“이상하군. 내가 아는 눈족 놈들은 그 많은 검은 안개를 쉽게 내주는 놈들이 아닌데.”
“찍찍! 맞습니다! 사실 수요야 넘쳐 나서 탈이지요! 언제나 문제가 되는 것은 공급입니다, 찍찍. 하지만 주인님께서도 눈족에게서 검은 안개를 짜내기 위해선 돈을 갖다 바치는 걸로는 안 되는 것을 잘 아시지 않습니까? 또 함부로 죽일 수도 없지요! 눈족을 자칫 잘못 죽이면 히카톤이란 끔찍한 괴물이 탄생할 수도 있으니까요. 주인님도 쉽게 없앨 수 없는 무시무시한 괴물 말입니다! 위험합니다. 암, 위험하고말고요. 찍찍.”
들쥐가 정말로 위험하다는 듯 ‘위험’을 여러 번 반복하여 말했다.
이예주는 히카톤이란 익숙한 단어에 사막에서 두 번이나 마주쳤던 역겨운 괴물을 떠올렸다.
눈족을 잘못 죽이면 그러한 괴물이 탄생한다고?
이 사람 많은 마을에 그런 예비 괴물이 검은 안개인지 뭔지를 공급하기 위해 나다닌다는 사실이 소름 끼쳤다.
“엄청난 돈을 갖다 바쳐도 검은 안개를 쉽게 내주지 않는 눈족을 달래려면 그들이 원하는 요구 사항을 들어줘야 하지요. 꽤 까다롭고 복잡한 일이지만, 돈을 긁어모으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는 족장 아들은 들어줄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습니다. 에…… 주인님께서 가장 잘 아시겠지만, 시간족이 원하는 건 주인님의 힘이잖습니까? 그놈들은 멍청하고 무식하기 짝이 없어서 주인님의 힘이 담긴 것이라고는 뭐든 탐하고 보는 족속들이고……. 사실 놈들이 동쪽 대륙까지 와서 검은 안개를 흩뿌리고 다니는 이유도 다 그것에 있지요. 그건…….”
들쥐가 잠시 말을 멈추며 숨을 골랐다.
사실 숨을 고른다기보다는 무언가 말하기를 꺼리는 듯했다.
실제로 그는 나비 아저씨에게 기대 서 있는 그레이 씨를 흘끗 바라보며 말하기를 주저했다.
계속해서 입을 열었다가 닫는 들쥐를 재촉해서 그것이 무엇인지 토하게 만든 것은 황조롱이였다.
“뜸들이지 말구 빨리 말해여! 그래서 검은 안개 공급을 위해 눈족이 요구한 건 뭔데여?”
“음…… 찍찍. 그건 신인류들과의 성관계랄까요. 그것도 무조건 어린것들과요. 나이가 든 것들은 주인님의 힘이 약해졌을 게 뻔하고, 그나마 어린것들과 관계를 하고 그것을 잡아먹으면 주인님의 힘을 온전히 흡수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
“한마디로 신인류들을 매춘 대상과 음식으로 원한 것이지요, 찍찍.”
들쥐가 과열되었던 탁자 위에 찬물을 끼얹었다.
이예주는 크게 숨을 들이마시며 멈췄다.
그것은 나비 또한 마찬가지였다.
“아, 아…….”
그레이 씨가 비틀거리며 바닥에 쓰러졌다.
허옇게 질린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이예주는 이번에는 그의 심정을 조금쯤은 이해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아니, 사실 이해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실종된 자식들이 매춘, 그도 모자라 식용으로 이용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안 그의 심정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끔찍해.
같은 인간이 저지르고 있는 행위라고 보기에 너무너무 끔찍하고 무서웠다.
제 배를 채우기 위해서 무슨 짓들을 하고 있는 것인지.
인간이, 사람의 탈을 쓰고 어떻게, 어떻게.
마을 족장 놈들이 저지른 일들은 현대에서도 중범죄에 속했다.
그것이 마약이나 인신매매와 다를 바가 뭐가 있는가.
“세상에…….”
조롱이가 한숨처럼 중얼거렸다.
이예주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지금까지 제가 당해 왔던 억울하고 분한 일들이 파노라마처럼 눈앞에 스쳐 지나갔다.
숲에서 조롱이가 제게, 인간들은 갓 태어난 신인류들을 잡아먹고 뜯어 먹는 나쁜 것들이라고 있는 힘을 다해 소리쳤다.
사막에서 포니를 만지려던 손을 차갑게 내친 람도, 동쪽 대륙으로 오자마자 이유도 모른 채 붉은 개의 적의를 받았을 때도, 그레이 부인의 살기 어린 시선을 받았던 방금 전까지만 해도, 사실 억울하고 짜증 나기만 했다.
이해가 가지 않았고, 이해하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자신은 그저 1000년을 건너 온 죄밖에 없었고, 1000년 후의 인간들이나 신인류들이 어떤지에 대해 별로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들에겐 아니었다.
1000년간, 이들에게 인간은 하나의 공통된 적으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그들의 머릿속과 마음속에는 인간을 향한 뿌리 깊은 불신과 반감이 똘똘 뭉쳐 하나의 문화처럼 자리 잡혀 있었다.
이예주는 앞으로도 람을 따라 과거로 돌아가는 방법을 찾는 한 계속 이러한 적의를 받아야 한다는 사실이 두려워졌다.
그러나 더 두려운 것은 목이 터져라 자신과는 무관하다고 외쳐도 그녀를 적으로 인식할 신인류들이었다.
“마을 족장은 다시는 신인류를 먹지도, 괴롭히지도 않는 조건으로 주인님과 계약을 한 것이잖아여!”
조롱이가 벌겋게 물든 눈으로 들쥐를 거세게 몰아붙였다.
그러나 들쥐는 제 잘못이 전혀 아니란 것처럼 어깨를 과장되게 으쓱이며 답했다.
“찍찍. 그러게 시간족, 그중에서도 검은 안개를 가지고 있는 눈족이라고 했잖느냐. 마을 인간들은 신인류를 잡아먹지 않는다, 찍찍. 하지만 또 모르지. 시간족들이 그것을 탐할 때 옆에 껴 있었을 수도, 찍.”
“넌 그걸 도운 거고?”
“누가 도왔다고! 난 그저 중간에서 인간들에게 약간의 조력을…….”
“너 정말 쓰레기구나.”
이예주가 음울한 목소리로 묻고 답했다.
그제야 제게 질문을 한 인물이 인간임을 깨달은 들쥐가 단박에 얼굴을 찌푸렸다.
그녀를 양껏 노려보는 반질반질한 검은 눈동자가 제법 사나웠다.
“뭐, 뭐냐! 찍찍! 인간 계집 따위가 이 위대하신 들쥐님께 감히! 인간 계집 주제에!”
“죽은 족장의 아들이 자금을 긁어모으는 이유는 뭐지.”
람이 이예주를 향해 패악을 부리며 꽥꽥대는 들쥐의 말을 자르고 물었다.
“그, 그것은…….”
들쥐가 람의 물음에 이예주를 노려보던 시선을 거두지 않으며 공손한 태도로 대답했다.
“찍찍, 이, 인간 계집이 있는 한 마,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이것까지 발설한 것을 알면 인간들이 저를 정말 주, 죽일 겁니다, 주인님!”
“그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넌 어차피 인간들에게 죽기 전에 소멸될 테니.”
“으으…… 찍. 그, 그래도! 인간 계집 따위에게 이런 비밀을 발설하면 안 되지요, 주인님! 아무렴, 그렇고말고요! 찍찍!”
이예주는 들쥐의 태도에 이제는 구역질이 다 나올 만큼 혐오감이 들었다.
머리가 아프다.
들쥐가 이야기를 꺼낸 후로부터, 주점 내부의 공기가 질척질척 더러워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문득 볼을 찌르는 시선에 고개를 돌렸다.
람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그의 눈이 가장자리부터 뻘겋게 물들어 가기 시작했다.
눈을 한 번 깜빡이자, 어느새 완벽하게 시뻘겋게 변한 그의 눈동자가 온전히 이예주를 담고 있었다.
들쥐의 말을 들었으니 자리를 피하라는 의중을 담은 걸까?
빤히 자신을 바라보는 람의 두 눈에 그녀는 조금 우울해졌다.
날 못 믿어요? 그에게 물어보고 싶은 말이 턱밑까지 그득 차올랐다.
그녀가 그 말을 참을 수 있었던 것은 이제야 조금이나마 그의 분노를 납득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죄를 지어 소멸하기 직전인 쥐새끼라도 어찌 됐든 본질은 신인류였고 자신은 그 쥐새끼가 말한, 믿기 힘든 이야기 속의 인간들과 같은 존재였다.
그래도 조금은 서로를 알았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이곳에서 아는 인간이 누가 있다고.
이예주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차르릉, 그녀의 움직임을 따라 사슬이 소리를 내었다.
“어딜 가려고. 앉아.”
람이 일어서는 그녀를 바라보며 설핏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나 이예주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머리 아파서 그러는데, 그냥 먼저 방에 올라가 있으면 안 돼요?”
진심이냐는 듯 람의 한쪽 눈썹이 삐죽 위로 올라갔다.
이예주는 그 모습을 보며 애써 웃어 보였다.
“먼저 올라가 있을 테니까 편하게 얘기 나눠요.”
“……2층으로 올라가자마자 가장 첫 번째 방에 들어가 있도록. 딴 길로 샐 생각 따윈 안 하는 게 좋을 것 같군.”
이딴 식으로 사슬 달린 수갑을 채워 놓았으면서 딴 길로 새긴 어디로 새, 이 자식아!
사슬을 질질 끌면서 도망갈 배포까진 없는 자신을 아직도 모르는 남자가 답답했다.
이예주는 천천히 탁자를 벗어났다.
그녀의 움직임에 따라 람이 가볍게 쥐고 있던 쇠사슬이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그의 손아귀에서 쑤욱 빠졌다.
그녀는 바닥에 떨어진 사슬을 질질 끌고 2층으로 향하는 계단 쪽으로 걸었다.
“곧 올라가지.”
자신에게 하는 말로 추정되는 람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지만, 그녀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절대 들쥐 새끼의 말을 듣고 자리를 피하는 것이 아닌데, 왜인지 모르게 자꾸 기분이 나쁘고 힘이 빠졌다.
이예주가 아랫입술을 삐쭉 내밀고 걸음을 옮기던 그때였다.
마치 인간이 자리에서 사라지길 오매불망 바랐던 것처럼 그녀가 등을 돌리자마자 쥐새끼가 기다렸다는 듯 말문을 열었다.
아직 자신이 완전히 사라진 상태도 아니건만.
이예주는 어쩐지 짜증이 치솟는 느낌에 안 그래도 느릿느릿하던 걸음의 폭을 반이나 줄여 버렸다.
“……찍찍. 그 말더듬이 병신 놈은 몇십 년 전, 신인류와의 전쟁에서 한 신인류가 내린 저주로 인해 제가 말더듬이가 된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지요. 제 아비는 말 못하는 벙어리가 되었고, 저는 말더듬이에, 제 아들조차 저를 똑 닮아 말을 더듬는 지진아로 태어났으니 저주라고 굳게 믿을 수밖에요! 그래서 그놈이 아무래도 신인류들에게 무슨 짓거리를 하기 위해 다리족들에게서 막대한 돈을 주고 무언가를 구매하고 있는 것 같긴 한데. 대체 뭘 구매하고 있는지까지는 저도 도저히 알아낼 수가 없었단 말이죠…….”
들쥐의 목소리는 속삭이는 것처럼 꽤 작았다.
때문에 이예주는 드문드문 몇 가지 단어밖에 듣지 못했다.
말더듬이, 저주, 다리족.
그러나 문장을 모두 다 들어도 좀체 이해하기 어려울 지경인데, 대충 아는 단어로 들쥐가 갖고 있는 커다란 비밀을 추측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그녀의 해석이 채 따라가기도 전에 들쥐가 속사포처럼 말들을 쏟아 내었다.
“하여간에 저주를 내린 신인류와 관련 있는 것만은 확실합니다, 찍찍. 안 그래도 제게 그 신인류를 찾아 달라고 매번 떼를 쓰는 바람에 골이 아팠었지요. 에…… 몇십 년 전에 마을 족장의 혀를 뽑고 저주를 내린 것이 마지막으로 남은 어린 황조롱이였나? 기억이 잘…….”
“저주는 무슨 저주! 난 그런 이상한 저주 따위 내린 적 없어여! 그럴 힘도 없구여! 그리고 그게 무슨 저주야!”
조롱이가 펄쩍 뛰며 들쥐의 말을 부인하는 것이 들려왔다.
이예주는 조롱이의 저주 소리에 불현듯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거리 한복판을 지나가는 상여를 발견했을 때였다.
검은 상복을 입은 인간들이 그녀의 앞을 지나가며 나눴던 대화가.
―무서운 신인류의 저주 때문에 족장님은 말더듬이 병신을 아들로 두게 되었잖아요. 게다가 그 아들마저 매일같이 술과 검은 안개나 빨아 대는 망나니인데, 신인류와의 전쟁 이후로 평생을 저택에 갇혀서 일만 하다 죽은 우리 족장님이 얼마나 불쌍해요?
그럼 그들이 말했던 ‘무서운 신인류’라는 것이 황조롱이를 두고 한 이야기란 말인가?